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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9:1~23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 사명의 자리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

작성자예수님만|작성시간26.06.07|조회수29 목록 댓글 0

제목 :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  - 사명의 자리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손길 

본문: 창세기 39:1~23

 

여러분, 요즘 살아가시는 게 어떠신가요?

2026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삶의 자리가 참 만만치 않습니다.

치솟는 물가에,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미래는 불투명하고,

일상의 삶속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아 외로울 때가 많지요.

 

예수님을 잘 믿으면 모든 일이 탄탄대로로 풀릴 것 같은데, 현실은 정반대일 때가 참 많습니다.

남들보다 정직하게 살려고 애썼는데 오히려 손해를 보고,

간절히 기도했는데도 상황은 더 꼬여만 가는 그런 순간들 말입니다.

 

그럴 때 우리 마음에 슬며시 어떤 질문이 찾아옵니까?

"하나님, 정말 나와 함께 계시는 게 맞습니까?

계신다면 왜 내 삶은 이 모양입니까?"라는 원망 섞인 질문이 터져 나옵니다.

 

저도 목사지만, 삶의 계획이 어긋나고 억울한 일을 만날 때면 마음이 덜컥 내려앉고 하나님이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이게 솔직한 우리의 모습이지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요셉이라는 청년이 딱 그런 기로에 서 있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께 거창한 꿈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현실은 어떻습니까?

형들에게 배신당해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 왔습니다.

채색옷을 입던 귀한 아들이 하루아침에 낯선 이국땅에서 말도 통하지 않는 노예가 된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성경은 우리의 상식과 전혀 다른 선언을 던지며 시작합니다.

 

1.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노예의 자리도 사명의 자리가 됩니다

성경 본문: 창세기 39장 2절 ~ 3절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성경은 요셉이 이집트 친위대장 보디발의 집에서 노예로 있을 때, 그가 ‘형통한 자’가 되었다고 말합니다.

참 이상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생각하는 형통은 노예 신분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로또에 당첨되듯 대박이 나는 것인데 성경은 신분은 여전히 노예인데 형통하대요.

 

여기서 ‘형통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찰라흐(צָלַח)'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내 뜻대로 일이 술술 풀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이 꺾이지 않고 마침내 성취되도록 전진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환경의 주도권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다는 고백입니다.

 

요셉은 비록 신분은 노예였지만, 자기를 이집트로 보내신 분이 하나님이심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주인이 맡긴 작은 가사 노동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하심을 드러낸 것이지요.

얼마나 성실하고 신실하게 살았으면,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 주인 보디발이 요셉을 보고

"아, 네가 믿는 하나님이 진짜 살아계시는구나" 하고 감탄을 했겠습니까.

 

쉽게 비유를 들어볼까요?

요즘으로 치면, 내가 가고 싶던 대기업에는 다 떨어지고 이름 없는 작은 사무실의 말단 계약직으로 들어간 상황입니다.

혹은 매일 반복되는 가사 노동과 육아에 지쳐 내 인생은 왜 이렇게 초라할까 낙심하는 순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초라해 보이는 자리,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그 자리에서 우리가 '찰라흐'의 형통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자꾸 "이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는 증거다"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틀렸습니다.

그건 자기중심적인 생각입니다.

늘 우리가 인정해야 할 사실은, 문제가 해결되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지금 내 곁에 계시기 때문에 내가 이 힘든 하루를 버텨내고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서 있는 그 일터, 그 가정의 고단한 자리에서 딱 한 사람에게만 주님의 사랑으로 친절을 베풀어 보십시오.

그 자리가 바로 하나님의 목적이 이루어지는 형통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한 줄 요약: 형통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어떤 처지에서든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심을 믿고 그분의 뜻을 걸어가는 임재의 성공입니다.

 

 

2.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유혹보다 하나님을 더 크게 보게 됩니다

성경 본문: 창세기 39장 7절 ~ 9절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요셉이 거절하며...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인생이 좀 풀리는가 싶더니, 요셉에게 더 큰 위기가 찾아옵니다.

주인의 아내가 날마다 유혹을 해옵니다.

성경 원문을 보면 이 유혹은 단 한 번으로 끝난 게 아니라, 매일 반복되는 집요한 덫이었습니다.

요셉은 젊고 외로운 처지였습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는 은밀한 방이었습니다.

만약 그 유혹을 받아들였다면 노예 신분에서 더 편하게 권력을 누릴 수도 있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요셉은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거절의 이유가 기가 막힙니다.

"주인에게 걸리면 나 죽습니다"라거나 "내 신용이 떨어집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요셉의 눈에는 유혹하는 여인보다,

지금 자신을 불꽃 같은 눈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이 훨씬 더 크게 보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죄를 짓다'는 히브리어 원어로 '하타(חָטָא)'입니다.

이 말의 원래 뜻은 '과녁에서 빗나가다'입니다.

죄는 단순히 윤리적인 규칙을 어기는 수준이 아닙니다.

내 삶의 방향이 하나님이라는 과녁을 등지고, 내가 주인이 되어 내 욕심대로 살아가는 상태 전체를 말합니다.

요셉은 하나님의 시선 앞에서 사는 코람데오(Coram Deo)의 신앙이 있었기에 삶의 방향을 잃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어떻습니까?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스마트폰 속 음란한 문화가 우리를 유혹합니다.

직장에서는 "남들도 다 다르게 사는데 왜 너만 유난을 떠냐"라며 타협을 요구합니다.

돈에 대한 탐욕,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싶은 욕망,

내 뜻대로 안 되면 튀어나오는 분노와 미움이 매일 우리를 흔들어 놓습니다.

 

저도 때로는 사람들의 시선을 하나님 시선보다 더 두려워해서 적당히 타협하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참 이 유혹을 이기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유혹을 이기는 것은 내 의지나 결단이 아닙니다.

내 눈을 들어 하나님을 유혹보다 더 크게 바라보는 것입니다.

"이 정도 작은 타협은 괜찮겠지" 하는 생각은 착각입니다.

유혹은 한순간의 달콤함으로 다가오지만, 죄가 남긴 상처는 인생 전체를 송두리째 무너뜨릴 만큼 깊고 오래갑니다.

한 줄 요약: 죄는 하나님이라는 과녁을 빗나가는 것이며,

유혹을 이기는 유일한 힘은 내 눈앞의 유혹보다 살피시는 하나님을 더 크게 의식하는 것입니다.

 

 

3.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억울함 속에서도 버려지지 않습니다

성경 본문: 창세기 39장 20절 ~ 21절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말씀대로 거룩하게 살려고 몸부림쳤던 요셉의 결과가 무엇입니까?

안타깝게도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히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대책 없는 절망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했는데 복은커녕 지하 감옥에 갇혔으니,

요셉의 마음이 얼마나 억울하고 무너졌겠습니까?

 

당시 이집트 문화에서 노예가 주인의 아내를 겁탈하려 했다는 것은 즉형, 즉 사형에 처해지는 죄였습니다.

그런데 보디발은 요셉을 죽이지 않고 '왕의 죄수들을 가두는 감옥'에 보냅니다.

왜 그랬을까요?

보디발도 자기 아내의 행실을 어렴풋이 알았을 것이고, 요셉의 진실함을 알았기에 차마 죽이지 못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모든 과정 배후에는 요셉을 향한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섭리가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보호하시기 위해 그 감옥마저도 안전장치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요셉이 감옥에 갇혔을 때, 다시 한번 이 놀라운 단어를 사용합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여기서 '인자'는 그 유명한 히브리어 '헤세드(חֶסֶד)'입니다.

헤세드는 조건 없는 사랑, 계약을 끝까지 책임지는 '변함없는 언약적 사랑'을 뜻합니다.

세상은 요셉을 쓸모없다고 감옥에 처박아 버렸지만,

하나님은 그 감옥 바닥까지 요셉을 따라 내려가셔서 그 손을 붙잡고 계셨습니다.

 

이 요셉의 모습에서 여러분은 누구의 얼굴이 보이십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셨지만,

우리를 위해 온갖 거짓 증언과 억울한 누명을 다 쓰셨습니다.

조롱을 당하시고 십자가라는 가장 처참한 감옥에 갇혀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이 실패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십자가의 무덤 속에 예수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사흘 만에 부활시키셔서 온 인류를 구원하는 만왕의 왕으로 높이셨습니다.

요셉의 고난은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을 미리 보여주는 거울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살다 보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터널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런 질병이, 이런 경제적 위기가,

이런 관계의 깨어짐이 찾아왔나" 싶어 눈물 흘리는 감옥의 시간이 있지요.

그러나 꼭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갇힌 그 눈물의 감옥 속에도 하나님의 '헤세드', 그 변하지 않는 사랑은 이미 함께 갇혀 계십니다.

한 줄 요약: 억울한 고난과 감옥의 현장이라 할지라도,

성도를 향한 하나님의 헤세드(언약적 사랑)는 결코 멈추지 않고 구원의 길을 향해 전진합니다.

 

 

결론: 복음의 핵심과 결단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창세기 39장의 말씀은 단순히

"요셉처럼 도덕적으로 깨끗하게 살면 나중에 총리 가 된다"는 성공 스토리가 아닙니다.

성경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요셉이 대단했다"가 아니라

"하나님이 요셉을 끝까지 붙들고 계셨다"는 복음의 선포입니다.

 

구약의 요셉은 감옥 속에서 희미하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했지만,

신약을 사는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요셉보다 훨씬 더 크고 확실한 은혜가 주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순간, 성령 하나님께서 아예 우리 마음에 성전을 삼고 들어오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이 나와 함께해 달라고 구걸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어떤 실패를 하든, 어떤 처참한 자리에 있든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떠나지 않고 영원히 동행하십니다.

이것이 '오직 은혜'로 구원받은 자녀들의 특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삶의 자리가 노예의 방이든, 억울한 감옥 속이든 낙심하지 마십시오.

성도의 인생은 결코 세상의 조건으로 실패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하게 해도,

우리 안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붙들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 문제를 먼저 보며 한숨 쉬지 마시고 내 안에 계신 주님의 임재를 먼저 바라보십시오.

비록 오늘 또 넘어지고 유혹에 흔들렸을지라도 괜찮습니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끊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신실한 손을 의지하여 오늘 다시 믿음의 발걸음을 내딛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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