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외는 언약의 핵심이다
성경 : 신명기 10장 12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그를 사랑하며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섬기고”
왜 다시 '경외'인가?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을 오래 하다 보면 우리는 심각한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친밀함'이라는 핑계로 '가벼움'으로 변질시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마치 내 소원을 들어주는 분이나, 내 기분 따라 대할 수 있는 친구처럼 여기지는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배경인 신명기 10장은 이스라엘이 금송아지 사건으로 하나님과 맺은 첫 번째 언약이 산산조각 난 직후입니다.
죽어야 마땅한 그들에게 하나님은 다시 두 번째 돌판을 주시며 언약을 갱신하십니다.
이 엄중한 '두 번째 기회' 앞에서 모세는 뼈를 깎는 심정으로 외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그 첫 번째 대답이자, 모든 요구의 핵심은 바로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왜 경외(Fear)가 하나님과 맺은 언약(Covenant)의 심장인지, 왜 거룩한 떨림 없이는 참된 신앙이 불가능한지 깨닫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본론: 경외, 모든 신앙의 뿌리
1) 언약의 기초: 경외(יָרֵא, 야레)의 참된 의미
오늘 본문에서 ‘경외’로 번역된 히브리어 ‘야레(יָרֵא)’는 단순히 무서워서 도망치고 싶은 공포(Terror)가 아닙니다.
이것은 위대하고 압도적인 존재 앞에 섰을 때 느끼는 '거룩한 두려움'이자 '전율(Awe)'입니다.
고대 근동의 언약 관계에서, 위대한 왕 앞에 선 백성의 마땅한 태도가 바로 이 '야레'였습니다.
왕의 위엄을 인정하고, 그 권위 앞에 납작 엎드리는 자세가 없으면 언약 자체가 성립될 수 없습니다.
12절을 자세히 보십시오. 순서는 매우 중요합니다.
① 여호와를 경외하여 → ② 그의 모든 도를 행하고 → ③ 그를 사랑하며 → ④ 그를 섬기고 이 순서가 말해주는 진리는 명확합니다.
경외가 없으면 순종도, 사랑도, 섬김도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경외는 모든 신앙 행위의 수원지(水源地)입니다.
물이 말라버리면 강이 흐를 수 없듯, 하나님을 향한 경외가 메마르면 우리의 순종은 위선이 되고, 우리의 사랑은 감상주의로 전락합니다.
2) 경외를 상실한 가벼운 예배자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위기는 프로그램의 부재가 아니라 '경외의 상실'에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너무 쉽게 생각합니다.
예배 시간에 늦으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없고, 죄를 지으면서도 "하나님은 사랑이시니까 다 용서해 줄 거야"라며 값싼 은혜로 도망칩니다.
만약 여러분이 대통령이나 대기업 회장을 만난다면 복장과 태도가 어떠하겠습니까?
하물며 온 우주를 창조하신 만군의 여호와 앞에서 우리는 어떤 태도로 서 있습니까?
잠언 기자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고 두려운 분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드리는 예배, 봉사, 헌신은 언약의 본질에서 벗어난 자기 만족일 뿐입니다.
경외가 빠진 신앙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아서 세상의 작은 바람에도 쉽게 넘어집니다.
3) 하나님의 마음: 떨림이 있어야 진짜 사랑입니다
어떤 분들은 묻습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사랑이신데 왜 두려워해야 합니까?"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거룩한 두려움을 포함합니다.
부모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녀는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 봐 두려워합니다.
남편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아내는 그 관계가 깨질까 봐 조심합니다. 이것이 바로 '언약적 경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벌 받을까 봐 무서워 떠는 노예가 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과 거룩하심을 알기에, 감히 그분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중하는 마음이 가득한 떨림'을 원하십니다.
이 떨림이 바로 언약을 지탱하는 힘입니다.
4) 십자가, 경외와 사랑의 절정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잃어버린 경외심을 회복할 수 있을까요?
우리의 노력으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무서운지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죄에 대해 독생자조차 아끼지 않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볼 때 우리는 '경외(야레)'하게 됩니다.
동시에 십자가는 우리를 살리기 위해 아들을 버리신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보여주는 장소입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공의의 사랑의 이중성을 가진 장소입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는 죄에 대한 두려움과 구원에 대한 감격을 동시에 느낍니다.
이 '감격적인 전율'이 바로 성도가 가져야 할 참된 경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이 참된 경외를 회복시켜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경외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언약의 핵심(Core)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자는 하나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자입니다.
나의 편의를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려 했던 태도, 말씀 앞에서 떨림 없이 습관적으로 앉아 있었던 교만을 회개합시다.
"주님, 제가 주님을 너무 작게 보았습니다. 주님의 크고 위대하심을 다시 보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합시다.
경외는 교회 안에서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골방에서, 유혹이 넘치는 직장에서, 정직하지 못한 이익을 취할 수 있는 순간에 "하나님이 지금 나를 보고 계신다"라는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십시오. 그 두려움이 저와 여러분을 죄에서 지키고, 언약의 길로 인도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의 가슴에 다시 한번 하나님을 향한 거룩한 떨림이 회복되기를 바랍니다.
그 떨림이 있을 때, 우리의 순종은 진짜가 되고, 우리의 사랑은 깊어지며,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의 언약 안에 머무는 복된 백성이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언약의 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