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부하려 하는 자들 -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여러 가지 시험
디모데전서 6:6-10 (참고: 고린도후서 8:9)
디모데전서 6:6-10"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므로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으면 족한 줄로 알 것이라. 그러나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흔들리는 지갑, 흔들리는 마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즘 살아가는 게 참 쉽지 않습니다.
마트에 가서 몇 개 담지도 않았는데 계산대에서 금액을 보고 한 번 더 확인하게 됩니다.
"이게 이만큼이나 나왔다고요?"
뉴스를 켜면 금리, 부동산, 주식, 코인 이야기가 끊이지 않고,
옆자리 사람과 잠깐 이야기를 나눠도 결국 돈 얘기로 흘러갑니다.
어느 순간 우리는 돈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하루를 마치기 어려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마음속에서 이런 생각이 슬쩍 올라옵니다.
"돈만 조금 더 있으면 괜찮을 텐데."
"돈 걱정만 없으면 행복할 텐데."
우리는 모두 이 재정적 불안이라는 파도 위에 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단순히 "돈을 조심하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본문은 훨씬 더 깊은 곳을 찌릅니다.
바로 우리의 마음이 지금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탐욕은 돈의 문제가 아니라, 내 마음이 무엇을 의지하고 있는가의 문제입니다.
1. 추락은 "부자"가 아니라 "부하려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디모데전서 6:9"그러나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원어로 보기
οἱ βουλόμενοι πλουτεῖν (호이 불로메노이 플루테인) — "부하려고 하는 자들"
여기서 중요한 것은 βουλόμενοι(불로메노이)라는 동사입니다.
단순히 "돈을 버는 사람"이 아니라, "의지적으로, 목적을 가지고 부를 향해 가는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즉 바울이 문제 삼는 것은 통장에 돈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이 어디를 향해 있느냐입니다.
바울은 부자 자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아브라함도 부자였습니다. 욥도 부자였습니다. 아리마대 요셉도 부자였습니다.
성경은 한 번도 "돈이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돈이 아닙니다.
문제는 돈이 하나님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어서 두 개의 단어를 씁니다.
πειρασμός(페이라스모스, "시험")와 παγίς(파기스, "올무")입니다.
— παγίς (파기스)
이 단어는 사냥꾼이 짐승을 잡기 위해 숨겨놓은 덫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짐승은 덫을 보지 못합니다. 먹이만 봅니다.
그리고 먹이를 향해 다가가는 그 순간, 잡히고 맙니다.
탐욕도 똑같습니다. 돈은 "내가 너를 잡아먹겠다"고 다가오지 않습니다.
오히려 "내가 너에게 행복을 주겠다", "내가 너에게 안정을 주겠다", "내가 너의 노후를 책임지겠다"고 다가옵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덫처럼 보이는 덫에는 아무도 걸리지 않습니다. 먹이처럼 보이는 덫에 걸리는 것입니다.
2. 욕심에는 바닥이 없고, 결국 자기 손으로 자기를 찌릅니다
디모데전서 6:9b-10"...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 ἐπιθυμία (에피튜미아)
"욕심"으로 번역된 이 단어는 통제되지 않는 갈망을 의미합니다.
처음에는 작습니다. "조금만 더 벌고 싶다", "조금만 더 갖고 싶다", "조금만 더 인정받고 싶다."
그런데 이 욕심은 절대로 "이제 충분하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늘 같은 말을 반복합니다 —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그래서 탐욕에는 바닥이 없습니다.
채워질수록 더 커지는 것, 그것이 욕심의 본질입니다.
그런데 9절 끝에 보면 이 욕심의 결과를 βυθίζω(뷔티조)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본문에는 βυθίζουσιν(뷔티주신)이라는 형태로 쓰였는데, 이건 "가라앉히다", "배를 침몰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이야기 있습니다.
17세기 스웨덴의 군함 바사(Vasa)호 이야기입니다.
이 배는 당시 최고의 군함이 되라는 목표 아래, 화려한 장식과 많은 대포를 잔뜩 실었습니다.
그런데 결국 출항한 지 채 30분도 되지 않아,
항구를 빠져나가기도 전에 바람을 맞고 그대로 기울어 가라앉아 버렸습니다.
너무 많은 것을 위에 실어서, 배 자체가 무게 균형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다르지 않습니다.
세상의 욕심을 너무 많이 실으면, 결국 영혼이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이게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서서히 일어납니다.
기도 시간이 조금씩 줄어듭니다.
예배에 마음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말씀이 멀어집니다.
가족과의 대화가 줄어듭니다.
그런데 통장은 늘어납니다.
돈은 많아졌는데, 영혼은 가난해지는 것 — 이것이 탐욕의 비극입니다.
그런데 본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갑니다.
10절을 보면, 돈을 사랑하는 자들이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다"고 말합니다.
원어로는 περιέπειραν ὀδύναις πολλαῖς(페리에페이란 오뒤네스 폴레스)인데,
περιπείρω(페리페이로)는 "꿰찌르다", "관통시키다"라는 뜻입니다.
이건 단지 "덫에 걸렸다"는 수동적인 표현이 아닙니다.
자기 손에 든 칼로, 자기 자신을 찌르는 모습입니다.
생각해보면 정말 그렇지 않습니까.
돈 때문에 잠을 못 자고, 돈 때문에 가족과 다투고, 돈 때문에 신앙의 자리를 떠나는 사람들 — 그 고통을 누가 준 것입니까.
누군가 강제로 찌른 게 아닙니다.
자기가 좇아간 그 욕심이, 결국 자기 자신을 찌르는 칼이 되는 것입니다.
3. 그래도 하나님은 — 가난해지신 분이 가라앉는 배에 올라타셨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문을 읽으면, 마음이 무겁습니다.
"나도 저렇게 가라앉고 있는 게 아닐까." 그런데 복음은 바로 여기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건질 수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가라앉는 배에 직접 올라타셨습니다.
고린도후서 8: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
— 같은 단어, 정반대의 방향
디모데전서 6:9의 πλουτεῖν(플루테인, "부해지려 함")과,
고린도후서 8:9의 πλουτήσητε(플루테세테, "너희가 부해지도록")는 같은 어근 πλουτ-에서 나온 단어입니다.
그런데 그 방향이 정반대입니다.
디모데전서 6:9의 사람은 자기가 부해지려고 욕심을 부리다가 가라앉습니다.
그런데 고린도후서 8:9의 그리스도는 πλούσιος ὢν(플루시오스 온, "부요하신 분으로서") ἐπτώχευσεν(에프토큐센, "가난해지셨다") — 그래서 우리가 πλουτήσητε(부요해지도록) 하셨습니다.
이게 무슨 말입니까.
우리는 부자가 되려고 움켜쥐다가 침몰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가장 부요하신 분이셨음에도, 스스로 가난해지셔서, 가라앉는 우리를 건지셨습니다.
탐욕은 움켜쥐는 것이고, 십자가는 내어주는 것입니다.
탐욕은 자기를 위해 사는 것이고, 십자가는 죄인을 위해 자기를 내어주신 사랑입니다.
그리고 본문 6절로 돌아가 보면, 바울은 이 모든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이미 답을 던져놓았습니다.
디모데전서 6:6"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 αὐτάρκεια (아우타르케이아)
"자족"으로 번역된 αὐτάρκεια는 당시 헬라 사회에서도 쓰이던 단어로, 일반적으로는 "외부 환경에 흔들리지 않는 자기충족"을 의미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단어를 εὐσέβεια(경건,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바로 다음에 붙여 씁니다.
즉 바울에게 자족은 "내 안에 답이 있다"가 아니라, "하나님 안에 답이 있다"는 뜻입니다.
자족은 포기가 아닙니다.
자족은 "어쩔 수 없으니 그냥 살자"는 체념이 아닙니다.
자족은 "예수님이면 충분합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가라앉던 배에 그리스도께서 올라타셨고, 그분이 지금 그 배의 키를 잡고 계십니다.
그래도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 놓지 않으십니다.
적용 — 오늘, 내 손의 주먹을 펴십시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거창한 결심이 아니라, 오늘 당장 할 수 있는 작은 것부터 시작하면 됩니다.
하나, 오늘 솔직하게 인정하십시오
"하나님, 저는 솔직히 하나님보다 돈을 더 바라봅니다."
이렇게 한 문장, 마음속으로든 입으로든 정직하게 고백하는 것에서 시작하십시오.
둘, 오늘 손에 쥔 것 하나를 펴십시오
거창한 헌신이 아닙니다.
커피 한 잔 값, 식사 한 끼, 작은 헌금, 작은 섬김.
오늘 손에 쥔 것 중 하나를 의도적으로 내려놓아 보십시오.
그것이 바로 "주먹을 펴는" 연습입니다.
셋, 오늘 하루, "공급자는 하나님"이라고 말해보십시오
출근길에, 혹은 잠들기 전에 한 번만 입으로 말해보십시오. "돈은 도구이고, 하나님은 주인이십니다. 돈은 수단이고, 하나님은 공급자이십니다." 말이 마음을 만듭니다.
이 세 가지, 사실 다 작은 일입니다.
그런데 이 작은 일들이 쌓여서, 우리 인생의 배가 어디를 향해 있는지를 바꿔놓습니다.
결론 — 당신의 배를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바울은 우리에게 무서운 경고를 주었습니다.
돈을 따라가는 길은 달콤해 보입니다.
그러나 그 길의 끝에는 영혼의 침몰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침몰은, 누군가 우리를 밀어서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좇아간 욕심이 우리 자신을 찌르는 결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서 우리를 그냥 보고만 계시지 않았습니다.
가장 부요하신 분이 가장 가난한 자가 되셔서, 가라앉는 우리 배에 직접 올라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그 배의 키를 붙들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질문은 이것입니다.
지금 당신의 인생이라는 배를 붙들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돈입니까, 재산입니까, 성공입니까 —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입니까?
세상의 보화는 끝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영원하십니다.
세상의 부요함은 언젠가 바닥을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은혜는 결코 바닥나지 않습니다.
오늘도 그리스도를 가장 큰 보화로 붙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부를 좇는 길은 달콤하지만, 그 끝은 자기 손으로 자기 영혼을 찌르는 자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