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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6:1~27 복음이 남긴 사람들

작성자예수님만|작성시간26.06.12|조회수37 목록 댓글 0

제목: 복음이 남긴 사람들

본문 말씀: 로마서 16:1~27 

 

인생의 크레딧 Roll, 그곳에 새겨진 당신의 이름

여러분, 혹시 극장에서 영화가 다 끝나고 불이 켜지기 직전,

화면에 검은 바탕에 하얀 글씨로 수많은 이름이 위로 쭉 올라가는 것을 보신 적이 있으시지요?

그걸 우리는 '엔딩 크레딧(Ending Credit)'이라고 부릅니다.

감독, 주연 배우뿐만 아니라 조명 스태프, 운전기사,

심지어 밥차 이모님의 이름까지 수백 명의 이름이 빼곡히 지나갑니다.

보통 관객들은 그때 자리에서 일어나 나갑니다. "아휴, 볼 거 다 봤다" 하면서 말이지요.

 

그런데 마블(Marvel) 영화 같은 것을 보면 사람들이 안 나가고 끝까지 기다립니다.

왜 기다릴까요? 맞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짧은 영상, 이른바 '쿠키 영상'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그 짧은 영상 하나에 앞으로 펼쳐질 거대한 세계관의 비밀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로마서 16장이 바로 그렇습니다.

로마서는 사도 바울이 기록한 성경의 가장 위대한 신학 서신입니다.

1장부터 15장까지 죄가 무엇인지, 믿음과 칭의가 무엇인지,

성화와 하나님의 신비로운 선택이 무엇인지를 아주 깊이 있게 설명했습니다.

 

숨이 막힐 정도로 웅장한 교리가 끝난 뒤, 마지막 16장에 오면 갑자기 수십 명의 낯선 이름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뵈뵈, 브리스가, 아굴라, 에배네도, 안드로니고... 읽기도 힘든 이름들이 줄을 잇습니다.

우리는 흔히 이 부분을 "아, 이제 편지 끝날 때 되었으니 인사말이구나" 하고 대충 넘어가기 쉽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 16장은 성령 하나님께서 로마서라는 위대한 복음의 대서사시 끝에 남겨두신 가장 감동적인 '하나님 나라의 쿠키 영상'입니다.

바울은 이 명단을 통해 우리에게 온몸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보십시오! 내가 전한 이 위대한 복음이 관념이나 이론으로 끝나지 않고,

마침내 로마라는 거대한 제국 한복판에 이런 '사람들'을 남겼습니다!"

복음은 단지 딱딱한 교리 책을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복음은 살아 움직여 사람을 만듭니다.

복음은 깨어진 세상을 치유하는 공동체를 만듭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마지막 장을 통해, 복음이 우리 삶에 남기는 세 가지 거룩한 흔적을 함께 마주하고자 합니다.

 

 

1. 복음은 조건 없이 서로를 섬기는 하늘 가족을 만든다 - 로마서 16:1~ 16

 

본문에서 바울이 가장 먼저 사랑을 담아 추천하는 인물은 '뵈뵈'라는 여성입니다.

1절에 바울은 그녀를 "겐그레아 교회의 일꾼"이라고 소개합니다.

여기서 '일꾼'으로 번역된 헬라어 원어는 '디아코노스(διά코νος)'입니다.

이 단어는 단순히 직분을 뜻하는 말이 아니라,

"먼지를 뒤집어쓰며 식탁에서 시중드는 사람", 즉 '겸손하게 섬기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꾼: διά코νος (디아코노스) - 신분과 체면을 내려놓고 먼지를 무릅쓰며 낮아져 섬기는 봉사자.

당시 로마 제국은 철저한 신분제 사회였습니다.

황제와 귀족이 있었고, 자유인이 있었고,

그 밑에는 물건처럼 취급받던 수많은 노예가 있었습니다.

남성과 여성의 차별은 당연한 상식이었지요.

그런데 이 로마서 16장의 명단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기적이 숨어 있습니다.

뵈뵈라는 여성의 이름 뒤로, 브리스가와 아굴라 같은 부유한 천막 제조업자 부부가 나옵니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등장하는 '암블리아', '우르바노' 같은 이름들은 당시 로마에서 흔하디흔한 '노예들의 이름'이었습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당시 로마의 성도들은 거대한 빌딩에 모여 예배드린 것이 아닙니다.

몇몇 성도들의 집, 즉 가정교회에 모였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오. 낮에는 주인의 발을 씻기던 노예 암블리아가 저녁에 가정교회에 오면,

로마의 상류층 귀족들과 한 식탁에 앉아 빵을 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노예가 형제라 부르며 건네는 잔을 귀족이 눈물을 흘리며 받습니다.

세상의 법으로는 절대 섞일 수 없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보혈 안에서 서로 "거룩하게 입맞춤"(16절)으로 문안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계급과 담벼락을 복음이 완전히 무너뜨린 것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이름을 한 명 한 명 지목하며 "주 안에서 수고했다",

"나의 목숨을 위해 자기 목숨도 내놓았다"라며 고마워합니다.

세상은 언제나 1등만 기억합니다.

성공한 사람, 권력을 가진 사람의 이름만 역사에 남깁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은 다릅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곳에서 눈물로 교회의 의자를 닦고,

이름 없이 성도들을 위해 따뜻한 밥 한 끼를 대접했던 그 무명의 섬김이들의 이름을

하나님 나라의 생명책에 또박또박 기록해 두십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결코 '무명(Anonymous)의 성도'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는 종종 착각하곤 합니다.

"내가 목사로서 설교를 크게 잘해야, 혹은 대단한 장로가 되거나 큰 물질을 드려야 하나님이 기뻐하시겠지?"

아닙니다, 여러분. 저도 목회를 하면서 때때로 눈에 보이는 성과나 숫자에 마음이 빼앗겨 넘어질 때가 참 많습니다.

"내 목회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일까?" 하는 부끄러운 자기중심성에 갇히기도 합니다.

이게 참 쉽게 고쳐지지 않는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교회 안에서도 세상 방식을 좇아 '스타'가 되려고 합니다.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으면 섭섭하고, 남들보다 더 높은 자리에 앉아 대접받고 싶어 합니다.

"내가 이 교회에 바친 세월이 얼마인데 나를 이렇게 대접해?" 하는 마음이 고개를 듭니다.

우리는 참 지독하게도 자기중심적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기에, 친히 이 땅에 가장 낮은 '디아코노스',

섬기는 종으로 오셔서 당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셨습니다.

우리가 그 과분한 은혜를 먼저 받았기에, 이제는 대접받는 자리가 아니라 섬기는 자리로 내려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이 한 가지만 작게 실천해 보면 좋겠습니다.

늘 당연하게 여겼던 교회의 숨은 봉사자들, 추위와 더위를 견디는 분들,

보이지 않는 곳에서 땀 흘리는 분들에게 오늘 따뜻한 감사 문자 한 통을 먼저 보내 보십시오.

"집사님의 섬김 덕분에 제가 오늘 예수님의 사랑을 느낍니다" 하고 말이지요.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내려놓고, 오늘 단 한 사람에게만 주님의 사랑으로 낮아져 보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은 세상의 신분과 계급을 넘어,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조건 없이 섬기는 하늘 가족을 만듭니다.

 

 

2. 복음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자기 자랑을 분별하게 한다 - 로마서 16:17~20

 

아름다운 문안 인사를 이어가던 바울이 갑자기 17절에 오면서 어조를 엄격하게 바꿉니다.

분위기가 아주 엄숙해집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롬 16:17)

여기서 거침돌이 되는 자들을 '살피고'라는 단어의 헬라어 원어는 '스코페오(σκοπέω)'입니다.

이 단어는 망원경이나 현미경을 가지고 '표적을 뚫어지게 주시하다', '주의 깊게 관찰하고 경계하다'라는 뜻입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무서운 경고를 날리고 있을까요?

사탄은 교회가 복음 안에서 사랑으로 하나 되는 꼴을 절대 그냥 눈뜨고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틈을 타고 들어와 무너뜨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참 신기한 것은, 교회를 무너뜨리는 거짓된 세력들이 처음부터

"나는 예수 안 믿는다! 교회를 파괴하겠다!"라며 뿔을 달고 들어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아주 부드러운 말과 아첨하는 말로 다가옵니다(18절).

그리고 결정적으로 무엇을 합니까?

18절 하반절에 보니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긴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배'는 육체의 욕망, 즉 '자기 자신의 유익과 자존심, 자기 자랑'을 의미합니다

 

우리 교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외부의 거대한 박해는 오히려 교회를 단단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교회를 진짜 힘 빠지게 만들고 무너뜨리는 것은 언제나 내부의 작은 모래알,

즉 '내 공로, 내 헌신, 내 자존심'입니다.

"내가 이만큼 기도하는데 왜 내 뜻대로 안 되지?",

"내가 교회를 위해 얼마나 헌신했는데 나한테 이럴 수 있어?" 하는 마음이 드는 순간,

은혜의 종소리는 멈추고 분열의 소음이 시작됩니다.

 

로마서 전체가 줄기차게 외친 복음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오직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다! 이것이 복음 아닙니까?

그렇다면 우리에게는 자랑할 조각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교회가 건강해지려면 오직 예수님만 커지고, 우리는 철저히 작아져야 합니다.

 

우리는 남을 정죄하고 판단하는 일에는 참 빠르지만,

내 안에 자라나는 영적 교만과 자기자랑을 분별하는 데는 너무나 둔감합니다.

"나는 저 성도보다 예배를 잘 드리니까", "나는 저 사람보다 헌금을 많이 하니까 고결해"라며 은근히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를 아프게 하는 사람이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내 안의 교만입니다.

 

이 부끄러운 모습을 주님 앞에 정직하게 올려 드립시다.

내 의를 증명하려 몸부림치던 비참한 우리를 위해,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모든 의를 우리에게 거저 넘겨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래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실패보다 주님의 은혜가 훨씬 더 크기 때문입니다.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우리 발아래에서 상하게 하실 것입니다(20절).

 

오늘 누군가를 향해 판단의 말이 입 밖으로 나오려고 할 때,

혹은 "나를 왜 안 알아주지?" 하는 서운함이 고개를 들 때, 그 순간 생각을 멈추고 속으로 이렇게 선포해 보십시오.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은혜만 드러나기를 원합니다."

내 공로를 주장하고 싶어질 때, 침묵하며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오늘 우리가 행할 가장 안전한 복음적 분별입니다.

복음은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자기 자랑과 분열의 유혹을 분별하고,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 우리를 낮추게 합니다.

 

 

3. 복음은 영원한 신비를 뚫고 오직 그리스도만을 드러낸다 - 로마서 16:21~27

이제 로마서의 거대한 막이 내리며 장엄한 송가가 울려 퍼집니다.

바울은 25절에서 아주 가슴 벅찬 단어 하나를 꺼내 듭니다.

바로 '비밀'이라는 단어입니다. 헬라어 원어로는 '뮈스테리온(μυστήριον)'입니다.

이 '뮈스테리온'은 인간이 머리를 싸매고 추리해서 풀어내야 하는 수수께끼를 뜻하는 말이 아닙니다.

영원 전부터 하나님 속에 감추어져 있어서 인간의 지혜로는 도무지 알 수 없었으나,

때가 찬 후에 하나님께서 커튼을 열어 확연히 '드러내 보여주신 계시'를 의미합니다.

그 영원한 비밀, 영세 전부터 감추어졌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된 그 비밀의 실체가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구약의 수많은 선지자가 그토록 기다렸던 분,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던 든든한 씨앗,

다윗의 왕위를 영원히 이어갈 왕, 그리고 우리의 모든 죄를 짊어지시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

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거대한 구원의 비밀이 마침내 온 천하에 공개되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서라는 이 길고 웅장한 편지를 쓴 이유가 무엇입니까?

지식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율법학자들과 논쟁에서 이기려 한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죄를 깊이 파고든 것도, 믿음과 의롭다 하심을 목놓아 외친 것도,

성령 안에서 누리는 탄식과 영광을 노래한 것도, 결국은 단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 가슴에 새겨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마지막 27절에서 이렇게 외칩니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고백이 바로 개혁주의 신학의 정점인 '오직 하나님께 영광'입니다.

인간의 조건이나 행위는 0%도 섞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지혜와 신실하심으로만 완벽한 구원이 이루어졌기에,

오직 주님 홀로 영광을 받으셔야 마땅하다는 고백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일상의 작은 고난이나 문제만 만나도, 이 거대한 복음의 비밀을 까맣게 잊어버리곤 합니다.

당장 내 삶에 닥친 물질의 어려움, 자녀의 문제, 건강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게 맞나?

왜 내 인생은 이 모양일까?" 하며 쉽게 낙심하고 흔들립니다.

우주를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거대한 구속사적 드라마 속에서 내 인생을 바라보지 못하고,

당장 눈앞의 작은 화소 하나에 매여 절망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시선입니다.

 

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흔들릴 때에도, 심지어 우리가 하나님을 원망하며 돌아앉아 있을 때에도,

영세 전부터 우리를 택하신 하나님의 비밀스러운 계획은 단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습니다.

십자가에서 확증된 그 사랑이 지금도 우리 인생의 마지막 결론을 향해 신실하게 달려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밤 잠자리에 들기 전, 오늘 하루 동안 겪었던 좋았던 일과 힘들었던 일들을 가만히 떠올려 보십시오.

그리고 내 생각으로 결론을 내리지 말고, 마지막 기도의 문장을 이렇게 마쳐 보십시오.

"하나님, 내 이해를 뛰어넘는 주님의 선하심을 믿습니다.

오직 주님 홀로 영광을 받아 주옵소서."

내 삶의 주권을 온전히 주님께 올려드리는 이 작은 고백이, 내 삶에 그리스도의 비밀을 피워내는 시작이 될 것입니다.

복음은 만세 전부터 감추어졌던 구원의 비밀인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드러내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게 합니다.

 

 

신앙의 본질 정리 및 결론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로마서는 " 비참한 죄인이 어떻게 하나님 앞에 의롭게 될 수 있는가?"라는 아주 차갑고 무거운 질문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 위대한 복음이 통과해 나간 로마서의 마지막 종착역은 딱딱한 교리 조각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복음 때문에 변화되어 서로의 목숨을 내어주고,

노예와 귀족이 한 가족이 되어 눈물로 서로를 껴안는 '복음이 만든 사람들의 얼굴'이었습니다.

이것이 참된 복음의 능력입니다.

진짜 복음은 머릿속의 지식이나 입술의 웅변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반드시 우리의 거친 관계를 바꿉니다.

교만했던 마음을 깨뜨려 나보다 남을 낫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으로 바꿉니다.

교회를 바꾸고, 마침내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를 바꿉니다.

오늘 로마서의 대단원을 마치며, 성령께서 우리 각자의 심령에 던지시는 질문 앞에 우리 자신을 정직하게 비추어 보기를 원합니다.

"이 위대한 로마서의 복음을 통과하면서, 당신의 마음에 진정 무엇이 남았습니까?"

 

이 긴 설교의 내용이 다 기억나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로마서에 나오는 수많은 복잡한 신학 용어를 다 외우지 못해도 아무 상관없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우리의 가슴에 이 한 분의 이름만은 뚜렷하게 남아야 합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이번 한 주간 삶의 자리로 나아갈 때, 내 안에 예수 그리스도가 더 선명해졌다면,

그분을 이전보다 조금 더 사랑하게 되었다면, 그리고 내 공로가 아닌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을 더 의지하게 되었다면,

로마서의 그 위대한 복음은 문자 속에 갇힌 죽은 지식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의 삶을 빚어내고 있는 살아 숨 쉬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내가 조금 넘어지고 깨어져도 낙심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남은 평생이 오직 은혜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그리스도만을 바라보며,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복음의 아름다운 흔적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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