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이씨 유래
▸ 한산이씨가 관향(貫鄕)을 한산으로 삼게 된 것은, 고려 때 원(元)나라 제과(制科) 전시(殿試)등에 네 번이나 급제하신 성리학(性理學)의 대종(大宗) 문효공(文孝公)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선생과, 그의 아들로서 문과에 장원급제하시고 다음해 원(元)의 전시에 합격하시어 두 나라의 온갖 중요 요직을 거쳐 정당문학(政堂文學), 대사성(大司成), 대제학(大提學),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오르신 문정공(文靖公) 목은(牧隱) 이색(李穡 : 1328~1396)선생이 한산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진 데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한산은 한산이씨 시조이신 호장공(戶長公)계의 이윤경(李允卿) 호장의 자손들이 정착하여 8백년 동안 쌓아 놓은 고고한 삶의 흔적이 살아 숨 쉬는 한산이씨의 터전이다.
▸ 가정 이곡 선생은 한국 가전체(假傳體) 문학의 시초인「죽부인전(竹夫人傳)」외 수많은 작품을 남긴 대문호이며, 또 원(元)에서 문명을 떨친 정치, 외교가로서 당시 고려의 딸들을 원나라에 강제로 데려가는 고통스러운 제도(貢女制度)를 원의 순제에게 간하여 폐지케 한 불멸의 고려 공신이다. 목은 이색선생은 고려의 관리로서 전제개혁(田制改革)등 당시의 정치, 사회의 폐단을 과감히 개혁한 정치가이며, 성균관을 창건하여 수년간 대사성을 맡아 성리학의 전파와 생활화에 크게 공헌한 우리나라 성리학의 유종(儒宗)이자 교육가이며, 뛰어난 문장과 6천수 이상의 주옥같은 시를 남긴 동방의 대문호이다. 특히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는 때에, 마지막까지 고려를 지키고자 했던 선생의 굳은 절조(不事二君)는 단순한 정치적 태도를 넘어 유교전래의 가지관(春秋大義)의 실천이었는바, 선생을 지금까지 삼은(三隱)중의 한분으로 존숭(尊崇)하고 있다.
▸ 한산이씨는 가정과 목은 선생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 가정 이곡 선생은 한국 가전체(假傳體) 문학의 시초인「죽부인전(竹夫人傳)」외 수많은 작품을 남긴 대문호이며, 또 원(元)에서 문명을 떨친 정치, 외교가로서 당시 고려의 딸들을 원나라에 강제로 데려가는 고통스러운 제도(貢女制度)를 원의 순제에게 간하여 폐지케 한 불멸의 고려 공신이다. 목은 이색선생은 고려의 관리로서 전제개혁(田制改革)등 당시의 정치, 사회의 폐단을 과감히 개혁한 정치가이며, 성균관을 창건하여 수년간 대사성을 맡아 성리학의 전파와 생활화에 크게 공헌한 우리나라 성리학의 유종(儒宗)이자 교육가이며, 뛰어난 문장과 6천수 이상의 주옥같은 시를 남긴 동방의 대문호이다. 특히 고려가 조선으로 바뀌는 때에, 마지막까지 고려를 지키고자 했던 선생의 굳은 절조(不事二君)는 단순한 정치적 태도를 넘어 유교전래의 가지관(春秋大義)의 실천이었는바, 선생을 지금까지 삼은(三隱)중의 한분으로 존숭(尊崇)하고 있다.
▸ 한산이씨는 가정과 목은 선생을 중시조로 받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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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남도 서천군 한산면(韓山面) 은
본래 한산군의 땅으로서 한산읍내의 북쪽이 되어 북부면이라 하여 고촌, 죽동, 신동, 종지, 호암, 산성, 외상, 외하, 동자, 유산, 내하, 산음, 교촌, 서외, 서내, 내상의 16개 동리를 관할.
일제 대인 1914년 행정 구역 폐합에 따라 동상면의 원산, 야인, 신곡, 여사, 사곡, 나교, 동지, 토산, 송림, 축산, 송상, 송중, 송하, 오곡, 단상, 단중, 단하, 단서, 갈마, 녹양의 20개 동리와 동하면의 상동, 하동, 하서, 온동, 신후, 화산, 용두, 신성의 8개 동리와 임천군 홍상면의 포촌리, 교항리, 고읍리의 각 일부를 병합하여 한산면이라 해서 서천군에 편입 하여 죽촌, 종지, 호암, 성외, 동산, 지현, 원산, 여사, 나교, 동지, 송림, 축동, 송산, 송곡, 단상, 단하, 마양, 연봉, 온동, 용산, 신성의 21개리로 개편 관할.
1973년 7월 1일 대통령령 제6542호에 의하여 송림리를 떼어 마산면에 넘겨주고, 화양면의 구동리를 병합해서 현재 21개리를 관할하게 됨.
동쪽은 부여군, 양화면, 남쪽은 화양면과 금강 건너 전라북동 옥구군, 나포면, 서쪽은 기산면, 북쪽은 마산면에 닿음.한사모시로 유명한 고장이다
■서천군연혁
*선사 ∼ 마한시대
서천군 내에는 비인면, 종천면 등지에 고인돌이 분포해 있어
청동기시대 부터 이 지역에 주민들이 살았음을 알 수 있다.
마한시대에는 54개국중 소국으로,
※서천지역 → 兒林國 (아림국)
※한산지역 → 致利鞠國 (치리지국 - 천관우설)
※비인지역 → 卑彌國 (비미국)
이러한 소국(小國)은 마한의 연맹체의 일원으로 결속관계를 성립하면서
3세기 이후까지 개별적으로 성장해 오다가 백제에 부속되었다.
*백제시대
백제가 마한을 정복한 후 서천지역은 1군2현으로 나뉘어 졌다.
※서천지역 → 舌林郡 (설림군)
※한산지역 → 馬山縣 (마산현)
※비인지역 → 比衆縣 (비중현)
특히, 백제시대에 크게 발전한 곳은 한산으로 이곳의 乾芝山城 (건지산성 - 주류성(周留城))은 백제의 서쪽을 지키는 군사적요충지였으며, 백제멸망뒤에도 그 유민들이 이 지역을 중심으로 3년간 부흥운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
이 지역에서 백제부흥운동도 실패로 돌아가고 신라는 경덕왕 15년(756년)행정 구역 개편으로
※舌林郡(설림군)-(서천지역) → 西林郡 (서림군)
※馬山縣 (마산현)-(한산지역) → 馬山縣 (마산현 → 가림군의 영현이 됨)
※比衆縣(비중현)-(비인지역) → 庇仁縣 (비인현 → 서림군의 영현이 됨)
*고려시대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의 통일이후 왕권이 안정되고 제도문물이 정비되었으나 지방통치는 여전히 지방호족이 장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통치속에서 서천지방의 행정조직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림군 (西 林 郡)현종 9년(1018년) 嘉林郡(가림군)에 속하였는데, 그후 監務(감무)가 배치되었고, 충숙왕 원년(1314년)에는 이고을 사람 李彦忠(이언충)이 공이 있어 知西州事(지서주사)로 승격되어 西州(서주)라 불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서천읍, 장항읍, 마서면, 문산면, 시초면 지역이 해당된다.
※한산현 (韓 山 縣)고려초에는 韓山縣(한산현)으로가림군에 속하였는데 明宗(명종) 5년(1165년) 감무를 두고 鴻山縣(홍산현)을 겸임하였으며 그후 知韓州事(지한주사)로 승격하고 韓州(한주)라 불렀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한산면, 화양면, 기산면, 마산면에 해당된다.
※비인현 (庇 仁 縣)현종 9년(1018년)에 가림군의 영현이 되었다가 그후 감무가 파견되었다. 관할구역은 현재의 비인면, 종천면, 판교면, 서면지역에 해당된다.
*조선시대
행정구역을 개편하고,
※서림군(西 林 郡) ⇒ 서천군(舒 川 郡)으로
※한산현(韓 山 縣) ⇒ 한산군(韓 山 郡)으로
※비인현(庇 仁 縣) ⇒ 비인현(庇 仁 縣) ⇒비인군(庇 仁 郡)-고종 32년(1895년 5월 28일)으로 개칭하고 洪州府(홍주부)의 관할에 두었다.
*조선시대 이후 현재
※1895.5. 28 :칙령 제98호(1895.5. 26공포)로 서천군, 한산군, 비인현으로 독립되었던 군, 현이 군으로 일원화
※1914.3. 1 ; 총독부령 제111호(1913. 12. 29공포)로 서천, 한산, 비인 3군을 통합하여 서천군으로 개칭하였고, 관내도서중 개야도,죽도, 십이동파도, 연도를 전북 옥구군에 편입
※1914.3. 16 ;충청남도령 제2호로 군 통합에 따른 면 명칭 개정 및 구역 조정
※1914.5. 28 ;충청남도고시 제36호로 면 명칭개정 및 구역조정에 따른 동,리 명칭개정, 구역조정
※1938.10. 1 ;총독부령 제197호(1938. 9. 27공포)로 서남면과 마동면 일부를 폐합하여 마서면과 장항읍으로 승격 (1읍 12면)
※1942.10. 1 ;총독부령 제243호(1942.9. 30공포)로 동면을 판교면으로 개칭
※1973.7. 1 ;대통령령 제6542로(1973. 3. 12공포)로 마서면 남산리를 서천면에, 화양면 구동리를 한산면에, 기산면 이사리와 한산면 송림리를 마산면에,종천면 흥림리를 판교면에 편입
※1979.5. 1 ; 대통령령 제9409호(1979.4. 7공포)로 서천면이 읍으로 승격(2읍11면)
※1983. 2. 15 ;대통령령 제11027호(1983. 1. 10공포)로 문산면 등고리 금덕리를 판교면에 편입
※현 재;1979. 5. 1 서천면이 읍으로 승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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