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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성씨

온양방씨 유래

작성자연꽃|작성시간10.01.03|조회수471 목록 댓글 0
  • 온양방씨 유래
    방(方)씨의 비조(鼻祖)는 방뇌(方雷)이시다. 고대 중국의 유망황제께서 장자 뇌 공(雷 公)을 하남성 방산땅에 방산군(方山君)으로 봉하게 됨으로서 방(方)씨로 득성 천하의 방씨 비조가 되시었다(기원전 2357년) 우리나라에서의 방(方)씨의 시조(始祖)는 휘(諱)는 지(智)요 자(字)는 천경 호(天慶 號)는 월봉(月峯) 또는 화천(花川)이시다. 선생은 신라 문무왕9년(서기669년) 당나라 한림학사의 신분으로 신라 조정의 초빙에 의하여 황명을 받아 문화사절로 오셔서 육체구경(六體九經)을 완석 저술 훈도하신 문조(文祖)이시며 선생께서는 오성위(五聖位) 18현과 같은 반열에 올라야 마땅한 어른이시다 조정의 권유로 장(張)씨로 배필로 맞아 상주 지방을 봉작받고 관향을 상주로 삼으시고 세거 하셨다. 중시조(中始祖)는 온수군(溫水君) 방운(方雲)공이시다 공은 고려 건국공신으로서 고려 광종 14년 (서기903년) 상서좌업사(尙書左僕射) 정2품에 오르시고 성종 14년에 정1품의 특별관작인 온수군의 봉작과 아울러 온양 아산 신창 삼읍을 사패지로 받아 과안산에 복거하시니 그산이 배방산으로 명명되었으며 그 후손이 온양일대에 살게되어 본관을 온양으로 삼았다. 공이 온양방씨의 1세이시다. 온양 방씨는 온양에서만 육군(六君)(온수 온양 온창 온천 온성 온안)의 봉작을 받은 후 예로서 상주와 온양은 방(方)씨의 성지이다 후손중 12세 휘 우선 하남후작 문정공(于宣 河南侯爵 文定公) 께서는 4형제를 두셨고 넷째 아들 태상경공의 휘 방유공이시다. 공께서는 고려 충렬왕때 큰 군공으로 군위(軍威)을 사패지로 받음으로 온양에서 분관되어 그 후손들이 군위를 본관으로 삼았다. 14세 휘 언휘공(彦暉公)께서는 고려 충목왕의 국구가 되어 온천 부원군의 봉작을 받고 공민왕께서 복부성을 축성케하여 배방산성으로 명명하셨다 태종 숙종 영조께서는 방성(方姓)을 황민(皇民)으로 예우하라는 교지를 내리신 바도 있다 방씨는 신라 고려 조선에 걸쳐 11군 16재상을 배출하였고 15세 문의공(文毅共) 휘(諱) 순 공(恂 公)을 위시 모든 세록지신들이 조선조 초기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연유로 사패지를 몰수당하고 선영을 파괴 당하는 등 수모를 겪었다 18세 방효유정학(方孝孺正學)선생은 동양 팔대장부중 학문과 절개의 일인이며 만세의 충신되었고 청현신11명 공신 45명 명현신 86명 효자 54명 효열부13명 등 훌륭한 조상님을 모시고 있는 자랑스러운 가문이다. 근세에 이르러 방씨 가문의 큰별이 되신 소파 방정환(方定煥) 선생은 어린이들의 영원한 벗이요 겨레의 스승이며 선각자로 우리나라 역사에 길이 빛날 분이다. 우리 방씨는 13세때에 7개파로 나누어 졌고 현재 30세손으로부터 42세손에 이르기까지 번창하고 있으며 숭조(崇祖) 충효(忠孝) 화친(和親)을 종훈(宗訓)으로 삼아 훌륭하신 조상님을 모시고 산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화합하고 단결하여 인류 문화 창달에 동참하고 있다 이에 전국종친들의 정성어린 뜻을 모아 뿌리공원에 이 유래비를 세우노라.

    온양방씨 중앙 종친회
  •  *온양방씨(溫陽方氏)*

    #온양방씨 득성록및 사략*


    우리方氏 得姓遡源錄에 의하면 그 根源이 深遠하여 중국고대의 帝王이었던 "炎帝神農(염제신농)씨"의 11세손인 楡罔皇帝(유망황제)의 長子이신 諱雷(휘뢰)라는 분을 중국 河南땅 '方山(방산)'에 封爵(봉작)하고 그 산명에 따라 "方(방)"씨라 사성한 것이라.즉 이어른이 천하 우리 방씨성의 元始組가 되신 것이라.

    그후 연면한 생을 향유하여 오다가 "雷(뢰)"의 133세손인 君講(군강)께서 아드님 두분을 두셨으니 장자의 諱(휘)는 '讚'이요. 차자의 휘는 "智"이시다."지"께서는 당대의 名文才士로서 字는 千慶이요 號는 月峰이시다.월봉선생께서는 道學文章이 탁월 하시고 6禮9經에도 능통 하신지라 .당나라 翰林學士(한림학사)로 계시다가 신라의 초빙에 의하여 皇命을 받고 우리나라로 오신것이다 그연대는 당나라 고종 總章2년 己巳이며 즉 신라 문무왕9년 서기 669년이다

    그당시 우리나라는 新羅 百濟 高句麗 삼국 병립시대 였다 월봉선생께서 신라조에 도착하신 이래 삼국간에는 유례없던 反目과 相互 侵略으로 전쟁이 尤甚(우심)하고 국내 정세는 불안정 한지라 선생께서는 신라조의 권유에 따라 잠정적으로 尙州에 卜居(복거)하셧다가 그담해에 朝廷大臣들의 建議로 上元正舍(상원정사)에 賓客府(빈객부)를 설치하여 선생을모시고 國是文正이라는 강의를 받기로 하였으나 그당시 신라조에서는 중국문장에 대한 語義를 소통할 人才가 稀少 하고 單 外信侍中인 薛聰(설총)만이 약간 통함으로 軒屛俱任(헌병구임)에 두고 文法 文藝 文正 禮俗 등 여러 분야의 서적을 저술하시고 6禮9經을 밝히시며 朝野人士에게 널리 訓導하시었다.

    월봉선생께서는 당초에 新羅朝野를 통하여 文化宣傳의 목적을 달성하신 후에 본국 황제에게 復命하시고 河南으로 귀향하셔서 靜養隱居(정양은거) 하시고저 하였으나 신라와 고구려간에는 전쟁이 날로 심하여 신라조는 부득기 국내사정을 당나라에 호소하였던바 唐朝의 후원은 물론이여 월봉선생은 伐麗戰(벌려전)에 참여하시여 신라조를 도우라는 본국황제의 훈령이 있어 협력하시던중 신라조에서는 선생의娶妻(취처)를 권유하여 良家의 張氏 閨秀를 부인으로 맞이하시고 東邦에 永住하시게 된 것이다.

    즉 이 어른이 新羅 古都인 慶州에 모신 시조월봉 方智선생이시다 그후 신라조에서는 선생의 아드님 諱軒柱(휘헌주)를 尙州縣縣主로 封爵하고 芬達(분달) 化寧(화영) 中牟(중모) 山陽 平山 등지에서 累代로 封建케한 관계로 尙州가 우리방씨의 舊貫鄕(구관향)인 것이다.

    그후 신라는 武烈王年間에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를 멸망시킨후 백제의 왕족 귀족 등 餘派의 動態를 監視하기 위하여 월봉선생의 後孫이신 諱軒奎를 戒邊事司(계변사사)로 두셨던바 신라 제31대 신문왕 2년에 백제 무왕의姪子인 福信이 일본에 인질로 장기간 체류중인 義慈王의 次子인 豊을 영입하여 백제왕위를 계승케 하고 復國運動을 하다가 衆寡不足으로 패망당하는지라 이를 聽取(청취)한 王豊은 福信의 전략을 憎惡(증오)하여 誅殺한後 자신이 직접 兵權을 장악하고 大擧沆戰하였으나 역시 패망하고 왕풍은 熊津부근에 隱身潛伏(은신잠복)한 것을 諱軒奎先祖께서 探問逮捕(탐문체포)하여 신라조로 송치하니 豊은 대역 죄인으로 참살당하게 되니 백제유족들의 원한은 더욱 骨髓에 사무쳤던 것이다

      그로부터 50여년이 경과한후 신라제 51대 진성여왕 3년에 이르러 백제유족인 甄萱(권휜)이 신라조에 暗入出仕 하여 兵權을 장악하다가 機會를 이용하여 分兵 脫出한후 完山에서 후백제라 自稱하고 興國養兵하여 復讐(복수) 起兵하니때는 신라제55대 경애왕3년 서기924년이며 신라조는 이를 항전격퇴치 못하고 급기야 都城인 慶州는 함락되고 경애왕을 위시하여 왕후 왕족 귀족 등은 참살당하였으며 이때 전술한 바와같이 豊을 체포참살케한 원한으로 견훤의 군병들은 우리 方氏 全門을 包圍하여 남녀노유 불문하고 盡滅시킬때 天道가 無心하지 않아 唯一身이신 諱雲(휘운)께서 年甫10세의 어리신몸으로 單身脫出에 성공하셨던 것이다

      雲께서는 원체玉骨仙風에 瑞氣가 도는지라 견훤의 군졸들은 그비범하신 위풍에 감히 접근할 수 없어 전후사실을 견훤에게 알리자 大怒한 견훤은 追擊殺害할 것을 호령하였으나 雲께서는 이미 산속으로 피신하셨는지라 적의 군병들이 산하에 도착하여 탐샘할 찰나 돌연 風雲이 大作하고 뢰성이 천지를 진동하며 운무가 자욱한지라 적들은 지척을 분별할수 없어 과연 出天之人이라 감탄하면서 分散逃走 하였던 것이다 雲께서는 天恩으로 피난은 하셨으나 별안간에 無依無托한 몸이되시어 4방으로 流離漂泊하시고 허다한 고난과 역경속에서도 우리 方씨一門의 滅門之禍 오매불망하시면서 견훤에 대한 報復之心이 燎原(요원)의불길처럼 心火될적마다 立身양명하실 것을 굳게 다짐하시고 文武를 연마겸비하시여 고려건국에 참여入仕하신후 태조왕건이 후백제를 정벌할때 雲께서는 선봉으로 출전하시어 우리방씨일문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천재적인 기능을 발휘하시여 다대한 전공을 세우신바 있어 고려 제4대 光宗朝에 이르러 尙書 左僕射(상서 좌복사)에 오르시고 재차 惠山鎭요란에 출전하시어 혁혁한轉功이 유하시와 고려 제6대 성종조에 이르러 溫水君의 封爵을 받으시고 溫陽東쪽 八里許에建在한 過雁山(과안산)에 卜居하셨던바 朝廷에서는 隣近三邑을 食邑으로 賜牌(사패)하고 그 산이름까지도 拜方山이라 명명한 것이다

      즉, 溫水君 雲께서는 우리 方氏의 中始祖가 되셨으며 子子孫孫이 溫陽에 世居한 관계로 本貫을 溫陽으로 정한 것이다 온수군이후 우리 방씨는 고려조에世祿之臣이 되어 九政丞을 배출한 名文大家로계승하였으며 즉 온수군의 14세손인 諱彦暉(휘언휘)께서는 고려 제29대 忠穆王(충목왕)의 國舅(국구)로서 溫泉府院君이 되시었다 그후 고려제31대恭愍왕조에 이르러 선대왕의 曾營未遂사업을 계승코저 拜方山에 君의 邸宅(저택)을 보호하기 위하여 성첩을 축보 하였으며 城內部東北邊에는 온수군의 墓園이 薦封(천봉)된 重址였던 것이다

      그후고려는 국운이 점점쇠약하여 제33대 隅王 14년 서기1388년에 명나라의 무리한 요구조건이 있어 조정중신회의를 개최하고 요동정벌에 대한 의논을 하였으나 대다수가 불가능이라하므로 侍中職인 崔瑩 은 隅王과 단독으로 밀회한후 그해춘3월에 정병을 소집하고 전국에 징병령을 공포한후 최영 장군은 8도 도통사가 되고 동년4월에 우왕과 함께 평양에 출진하여 조민수이성계를 좌우군도 통사로 삼아 요동정벌에 출정토록 하였으나 2원수는 합심일체가 되어 위화도 회군을 단행한 후 시중인 최영을 고양으로 유배시키고 우왕을 위협하여강화도로 축출한후 조준의 탄핵으로 조미수는 파직되었으며 년치9세인 창왕원년12월에 이르러 조인옥 등은 최영의 요동공벌은 명나라 황제로부터 용서받을수없는 죄인이라고 탄핵하여 극형에 처하였으며 동방리학의 권위자인 포은 정몽주선생은 방원 조영규등 40여명의 흉계에 의하여 선죽교부근에서 격살당했던 것이다 그후 허위에 앉아있던 공양왕 원년 12월에 윤희종은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폐왕인 우와 창을 주살하라는 강압적인 상소로 왕은 이를 거절할 능력이 없어 전왕부자를 시살하는 참극까지 초래한 것이다

      그후 공양왕4년 임신 서기1392년 7월에 이르러 방원 조인옥조준 정도전 등 50여명은 이성계를 추대키로하고 서중인 배극렴은 정비 공민왕비에게 혼암무덕함을 고한후 폐위하여 원주로 축출시키니 이로서 고려왕실은 34왕4백75년 으로 종말을 고하고 수창궁 정전에서 이성계가 등극하여 국호를 조선이라하니 이분이 바로 이태조이다 고려조의 패망을 탄식한 우리 문중은 특히 온수군의 16세손인 태부경휘유정온천부원군의 장자인 문의공휘순소윤 휘희우부사 휘천록 내한 휘을경 다섯분 선조께서는 이조의 초빙에 불응하시고 충신은 불사2군이라는 충의로 항거불굴하시니 이태조의 억감은 절정에 달하여 太府卿以下 諸公의 官爵等分을 강등시키고 賜牌之地를 몰수하는한편 噫呼(휘호)라 온수군이하 世點幽宅(세점유택)을 전부 파괴하고 墓碣(묘갈) 및 諸石物을 철폐한후 拜方山은 方氏고유의 특권명사임을 더욱 憎惡하여 排方山이라 개칭하도록 명명한 것이다

      그후 2백80여년이지나 숙종왕이 溫泉에 幸行하는 機會를 이용하여 온수군의 26세손인 參議公 諱(휘최)一께서 전후억울한 사연을 열거하여 상소하였으나 先代王의 측정 사유는 반복불가라하고 方字위에 草頭를 加하여 排芳山으로 개칭하라는 批答에 不過하여 지금까지 排芳山이라 俗稱이되고 이에 따라 배방면이라는 地名까지 생긴 것이다 전술한 바와같이 우리 方氏는 후백제 견훤의 亂과 李朝 건국초기 等 兩次의 봉건적인 政變으로 인하여 피의 숙청을 당한후 우리의 先組들께서는 많은 참화와 시련속에서 連綿한 生을 享有하여 왔음은 오늘날 우리 一家들만이 알고 있는 뼈저리고 가슴아픈 史蹟들이다.

    (내용요약)
    온양(溫陽)은 충청남도(忠淸南道) 아산군(牙山郡)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본래 백제(百濟)의 탕정군(湯井郡)을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이 주(州)로 승격시켜 총관(摠管)을 두었다가 후에 군(郡)으로 삼았으며, 고려(高麗) 초에 온수군(溫水郡)으로 고치고 현종(顯宗) 때 천안부(天安府)에 속하게 하였다.
    1172년(명종 2) 현(顯)으로 강등되고 조선(朝鮮) 태종(太宗) 때 신창현(新昌縣)과 합하여 온창(溫昌)이라 하다가 다시 온수현(溫水縣)이라 하였으며, 세종(世宗) 때 온양군(溫陽郡)이 되었고, 1913년 아산군(牙山郡)에 속한 온양면(溫陽面)이 된 후 지금의 온양읍에 이르고 있다.
    방씨(方氏)는 중국(中國) 하남성(河南省) 낙양현(洛陽縣)에서 계출(系出)된 성씨(姓氏)이며, 주(周)나라 때 대부(大夫) 방 숙(方 叔)의 후예로 전한다.
    온양 방씨(溫陽方氏)는 중국 산동(山東) 사람인 방 지(方 智)가 당(唐)나라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서기 669년(당고종 총장 2, 신라 문무왕 9)에 나당동맹(羅唐同盟)의 문화사절(文化史節)로 동래(東來)하여 설총(薛聰)과 함께「구경(九經)」의 <회통(會統)>을 국역(國譯)하여 불교의 전성시대인 신라에서 유학(儒學)의 체계(體系)를 수립하였고, 장씨(張氏)와 혼인하여 가유현(嘉猷縣: 지금의 경상북도 상주)에 뿌리를 내렸다.

      그후 그의 6세손으로 전하는 방 운(方 雲)이 고려(高麗) 태조(太祖 : 왕건)를 도와 후백제(後百濟)를 정벌하는 데 무공(武功)을 떨쳤고, 고려 창업(倉業)에서부터 성종대(成宗代 : 981∼997)에 이르기가지 60여 년 간 6대의 왕(王)을 섬기면서 무훈을 세워 온수군(溫水君)에 봉해지고 온양(溫陽)·신창(新昌)·아산(牙山) 3읍을 식읍(食邑)으로 하사(下賜)받았으며, 그가 살고 있던 온양군 팔동리(八東里) 과안산(過雁山)은 <방씨(方氏)를 우러러 본다>는 뜻으로 배방산(拜方山)으로 일컬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누대(累代)로 사패지(賜牌地)인 온양지방에 살면서 방 지(方 智)를 시조(始祖)로 하고 운(雲)을 일세조(一世祖)로 하여 온양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계승하였다.
      방씨(方氏)의 본관(本貫)은 온양(溫陽)을 비롯하여 상주(尙州)·군위(軍威)·신창(新昌)·개성(開城)·강화(江華) 등 26본이 문헌에 전해지나, 모두가 동조동근(同祖同根)이며 근대에 와서는 온양으로 단일화(單一化)하고 있다.

      그후 온양 방씨는 12세에 이르러 문정공(文定公) 우선(于宣)과 그의 아우 우번(于蕃), 목사(牧師) 득세(得世)의 아들 대(代)에서 장암공(莊岩公) 서(曙)를 파조(派祖)로 하는 판서공파(判書公派)와 간의대부(諫議大夫) 현(玄)을 파조로 하는 간의공파(諫議公派), 안렴사(按廉使) 훤(喧)을 파조로 하는 안렴사공파(按廉使公派), 군위군(軍威君) 적(迪)을 파조로 하는 태상경공파(太常卿公派), 우번(于蕃)을 파조로 하는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 평장사(平章事) 신제(臣悌)를 파조로 하는 광록대부공파(光祿大夫公派),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 신우(臣佑)를 파조로 하는 상락부원군파(上洛府院君派)로 분파(分派) 되었으나, 안렴사공파 훤(喧)과 상락부원군파 신우(臣佑)는 절손되었고 현재는 다섯 파만 세계(世系)가 이어진다.

      방씨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고려 목종(穆宗) 때 도첨의 정승(都僉議政丞)을 지낸 중탁(仲鐸 : 운의 아들)과 현종(顯宗) 때 중랑장(中郞將)으로 강감찬(姜邯贊) 장군의 휘하에서 무공을 떨쳐 온양군(溫陽君)에 봉해진 휴(休 : 운의 손자, 중탁의 아들)가 유명했으며, 휴의 증손 유(裕)는 숙종(肅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추밀원 직학사(樞密院直學士)를 거쳐 문하시랑(門下侍郞)에 이르러, 대호군(大護軍)을 지낸 아들 재(宰), 대제학(大提學)에 오른 증손 희진(曦進) 등과 함께 가통(家統)을 이었다.

      조선조(朝鮮朝)의 인물로는 성종(成宗) 때 식년문과에 급제한 유영(有寧)이 중종조(中宗朝)에서 대사헌(大司憲)을 거쳐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참판(參判), 경상도 관찰사(慶尙道觀察使)를 지냈으며, 우고(祐固)와 옹(翁)은 의병장(義兵將)이 되어 여러 전투에서 무공을 떨쳤다.

      순조조(純祖朝)에서 홍경래(洪景來)가 난을 일으키자 서정군(西征軍)의 좌초관(左哨官)으로 정주성(定州城) 함락에 공을 세웠던 우정(禹鼎)이 홍경래의 난을 평정할 때 쓴「서정일기(西征日記)」는 역사적인 사료로 높이 평가되고 있으며, 기전(基典)은 한일합방(韓日合邦)이 되자 만주로 이주하여 유하현(柳河縣)에서 온양학교를 설립하고 애국청년 육성에 공헌했다.
    한편 소파(小波) 정환(定煥)은 일제 압정기에 민족사상 혁명의 선구자로서 짧은 일생을 나라를 위해 바쳤다. 특히 그는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신문」을 인쇄하여 빨래 광주리에 숨겨 돌리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었고, 일본(日本)으로 유학하여 아동문학에 전심, 「사랑의 선물」·「어린이」등의 잡지를 창간, 자라나는 어린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안겨주었으며 <색동회>를 조직하여 아동문학의 정수를 이루었다.
    그외 윤명(允明)과 천용(天鏞)·한익(漢翼)·건홍(建洪)·무길(戊吉) 등이 서화(書畵)로 명성을 떨쳐 문무(文武)의 전통(傳統)을 이은 온양 방씨(溫陽方氏)를 더욱 빛냈다.


    항렬과 항렬자란?

    항렬(行列)이란 같은 혈족사이의 世系(세계)의 위치를 분명히 하기 위한 문중율법이며, 항렬자(行列字)란 이름자 중에 한 글자를 공통적으로 사용하여 같은 혈족, 같은 세대임을 나타내는 글자로써 돌림자라고도 한다.

    선조들은 자손들의 항렬자와 배합법까지를 미리 정해놓아 후손들이 그것을 따르도록 만들어 놓았다.

    항렬은 家門(가문)과 派(파)마다 각기 다르나 대략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정한다.

    *五行相生法(오행상생법)으로 쓰는 경우 : 金·水·木·火·土(금.수.목.화.토)의 변을 사용하여 세대순으로 앞뒤 이름자에 번갈아 쓰는 경우인데 이를 가장 많이 사용한다.

    *十干(십간)순으로 쓰는 경우 : 甲·乙·丙……壬·癸(갑·을·병……임·계)를 순서적으로 쓴다.

    *十二支(십이지)순으로 쓰는 경우 : 子·丑·寅……戌·亥(자·축·인……술·해)를 순서적으로 쓴다.

    *숫자를 포함시키는 경우 : 일(一:丙·尤)·이(二:宗·重)·삼(三:泰)·사(四:寧)등으로 쓰는 경우 같은 시기의 항렬은 長孫(장손=종가의 후손)계통일수록 낮고 支孫(지손=지파의 후손)계통일수록 높아서, 자기보다 나이가 적어도 할아버지뻘이 되는 경우가 있어 존대어를 쓰는 경우가 허다하다.
    항렬표(行列表)

        항렬자(行列字)

    31세 호·순·처
    浩·淳·處 항렬자를 뒤에쓴다

    32세 경·재·진
    京·栽·鎭 항렬자를 앞에쓴다

    33세 문·용·원
    文·容·源 항렬자를 뒤에쓴다

    34세 찬·효·정
    瓚·孝·楨 항렬자를 앞에쓴다

    35세 혁·종·석
    赫·鍾·錫 항렬자를 뒤에쓴다

    36세 제·승·규
    濟·承·圭 항렬자를 앞에쓴다

    37세 식
    植 항렬자를 뒤에쓴다

    38세 병
    炳 항렬자를 앞에쓴다

    39세 배
    培 항렬자를 뒤에쓴다

    40세 호
    鎬 항렬자를 앞에쓴다

    41세 태
    泰 항렬자를 뒤에쓴다

    42세 병
    秉 항렬자를 앞에쓴다

    43세 렬
    烈 항렬자를 뒤에쓴다

    44세 기
    基 항렬자를 앞에쓴다

    45세 현
    鉉 항렬자를 뒤에쓴다

    46세 해
    海 항렬자를 앞에쓴다

    47세 래
    來 항렬자를 뒤에쓴다

    48세 희
    熙 항렬자를 앞에쓴다

    49세 주
    周 항렬자를 뒤에쓴다

    50세 용
    鎔 항렬자를 앞에쓴다
    *친척님들의 좋은 사연이나 도움이되는 글 기대 합니다 ...여수 방 대 정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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