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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동궐도 읽기-동창이에서 가져옴

작성자雅田( 창덕 토요1)|작성시간13.07.09|조회수463 목록 댓글 0

 

 

동궐도 읽기

 

동궐도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궁궐도이다.

현재 남아있는 궁궐도 중에서 규모,내용, 작품 수준등 모든 면에서 가장 뛰어나다

현재 고려대학교 박물관과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원본이 소장되어있으며 두본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있다.

동궐도는 오늘의 창덕궁과 창경궁의 모습을 부감법과 투시법으로 완벽하게 그려낸

하나의 조감도이자 회화작품으로 크기도 대작이며 기법도 당대 최고수준이다.

 

그러나 기록을 중요시했던 조선왕조의 기록 어디에서도 동궐도에 관한 기록은 찾아볼수 없다.

넓고 깊은 구중궁궐의 모든 것을 상세히 묘사하고있는 동궐도는 왕조의 안위와 관계되는 "정밀지도"이기 때문에 왕조실록을 포함한 어떤 기록에서도 언급되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동궐도는

단순히 하나의 큰 그림이 아니라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것으로

그 속에는 당시의 사상과 문화와 생활이 담겨져있다

 

 

동궐도의 중요성은 크게 두가지 측면에서 살펴볼수있다.

 

첫째는 회화식지도의 독특함과 아름다움을 잘 보여주고있다.

또한 당대 최고 화가들의 공동작업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에

조선 후기의 화풍연구에 있어 중요한 사료가된다

 

둘째는 역사,문화적인 가치이다

동궐도는 조선시대의 건축,조경,궁궐의 생활양식, 시설물등을 총체적이고 포괄적으로 살펴볼수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없어진 건물이나 시설물들을 19세기 당시의 원형 그대로 복원할 때

중요한 근거자료가 된다.

 

동궐도는

세본이상 제작되었을것으로 추측하고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본의 각 폭에는 동궐도인이라는 표기가 있으며

고서화 관례상 천,지,인 세본이 만들어졌을것이니

동아대 소장본 외에 한본이 더 있을것으로 추정하나

그 한본은 어떻게 되었는지 현재는 알려지지않고 있다.

 

동궐도는

비단에 먹과 색을 써서 그린 작품으로 궁궐을 둘러싸고있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더불어

두 궁궐의 수 많은 전각,누정을 비롯한 연못,화계등의 시설들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으며,

크기는 16첩 모두를 펼쳐서 이어놓으면 273cm x 584cm 이다

 

 

제작연대

 

동궐도는 가장 중요한 궁궐도임에도 제작연대와 작가의 이름이 정확히 밝혀져있지않다.

추정컨대

순조26년(1826)에 지어져 30년(1830)에 불타버린 환경전이 그려져있고

순조31(1831) 착공되어 순조 34(1834)에 중건된 통명전과 경복전은 건물은 없고 터만 그려져있다는 점을 고려하여 동궐도가 1826년부터 1830년사이에 제작되었을것으로 추정한다 (이창교 )

 

또다른 의견은

경복전이 불탄 순조 24년(1824)부터 의두합이 이안재가 자리에 들어선 순조 27(1827)사이의 3년으로 잡고있다.즉 경복전은 터만보이고 이안재가 그대로 그려져있는점을 고려하면 제작연대를 1824년에서 1827년 사이로 본것인데 (주남철), 이 주장이 더 타당하다고 보는것이다

 

 

누가 제작?

 

어진의 제작을 포함하여 궁중의 그림 그리는 일에는 여러 화원이 함께 참여하는 것이 관례였던점을 고려하면 규모가 큰 이 그림도 여러 화가의 합작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동궐도가 그림이면서도 동시에 지도의 성격이 강한 것을 고려하면 화가들 이외에도 지관이나 산사같은 인물들도 참여하였을 가능성이 높다.

크기와 작업량으로 보면 한 사람의 작품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화풍으로보면 전체는 물론 세부묘사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일관성을 유지하고있어 여러사람의 합작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계화(건축물 그리는)를 담당한 화원, 산수화를 전문으로 했던화원, 채색을 담당했던 화원등이 분담하여 합작했을 가능성이 크다고한다.

 

   *산사- 지금의 수학자라고 할수있으며, 산학은 지금의 수학이라고 할수있다

 

동궐도 들여다보기

 

동궐도는 창덕궁과 창경궁을 배치하고 산과 나무등 자연을 에둘러 완성한 그림이다.

세필과 아름다운 채색을 써서 매우 정교하고 정확하게 표현한점도 주목할만하며 버드나무의 순이 돋아나고 봄꽃이 한창 피어나고 있는 점으로보아 봄 경치를 표현하고 있음을 알수 있다.

또한 모든 건물과 시설물들에 이름을 써 넣어 확인을 용이하게 하였다

동궐도에는

동서남북으로 산과 성벽이 감싸 안은 넓은 지역에 자리잡고있는 수많은 전각,누정,궁장을 비롯한 각종 크고 작은 건축물과 시설물,수목등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있다.

또한 궁궐의 질서정연한 배치. 건물 하나 하나의 치밀한 꾸밈새, 주변경관의 자연스러움등이 어울려 궁궐의 위용과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어 마치 사진을 대하는 것 처럼 정확하고 사실적인 느낌을 자아내는데 이는 고려시대 이후로 줄기차게 이어져 온 실경산수화와 지도 제작의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동서고금을 통틀어 가장 대표적이고 훌륭한 궁궐그림으로서 동궐도는 단순한 그림의 차원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 속에는 우리 문화유산을 이해할 수 있는 수많은 단서들이 숨어있는 타임캡슐과 같다.

미술사는 물론 건축사에서부터 생활양식에 이르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여다 볼 수 있는 것이다.

 

위의 내용을 다시 요약한다면

첫째. 동궐도는 동서고금을 통털어 가장 대표적이고 훌륭한 궁궐그림이다

둘째. 본래 천,지.인 세본이 만들어졌을 가능성이 높으나 현재는 고려대(동궐도인)와 동아대 박물

      관에 각각 한본씩 두본이 전해지고있으며 나머지 다른 한본은 행방이 밝혀져있지않다.

셋째, 동궐도는 본래 16개의 세로로 접는 화첩으로 이루어져있었음이 분명 그 크기는 화책을 완전

      히 펼쳐서 이었을때 273x584cm

넷째, 제작자는 조선왕실이나 조정이었을것이 분명하나 제작의 실무를 맡았 던 화원이나 기타 인

      물들의 이름은 밝혀져있지않으며 그림은 한사람 의 작품이기보다는 화격을 아는 감독아래

      화원,지관,산사,등이 참여 했을 가능성이 높다

다섯째,제작에 착수한 연대는 1824년부터 1827년 사이일것이 확실시되지만실제로 완성된 시기는

      보다 뒷일 가능성도 있다 제작부터 완성까지는 여러해가 걸렸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여섯째,비단에 먹과 채색을 구사하여 산수를 배경으로 창덕궁과 창경궁의 수많은 전각,재실,누정,

      낭방,당청,궁장등의 건축물과 지당.조원등

      그 밖의 여러 시설물들의 설치 상태등을 총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일곱째,그림은 평행사선구도와 부감법을 구사하여 그려져있는데 봄 경치를 배경으로 하였으며 세

       필과 아름다운 채색을 써서 지극히 정교하고정확하게 사실적으로 묘사되어있어 이는 궁궐

       사, 건축사,회화사 조경사,과학사등 여러 분야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되는 종합적 성격의

       귀중한 자료이다.

여덟째, 동궐전체를 정확하게 그리는 중대한 국가적 사업이 실록이나 의궤 등의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것은 동궐도는 그림이면서도 일종의 지도로서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일종의 비밀스

        러운 일로 추진되어 기록으로 남기는 것을 기피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1. 궁궐의 첫 번째 마당: 외부의 침입에 대비한 완충공간

 

 

1) 돈화문- 태종12(1412)년에 지어졌다 임란때 불타 광해군 원년1608 재건   

 

2) 수문장청- 돈화문 좌우에 있으며 궁궐을 지켰는데 지금은 돌담으로 남음

 

3) 금호문- 이문을 중심으로 서쪽 행랑에는 의식에 쓰이는 물건이나 병장기를 보관하는 의장고,

내순찰을 담당하는 무비사,군사를지휘하여 궁내를 순시하거나 조정에서 연회나 경축행사가 있을때 그 주 위에 정렬하는 오위장이 숙직하는 위장소와 남소, 훈련도감의 군사들이 숙직하는 훈국군파수직소등 주로 궁궐의 호위업무를 맡은 장수와 군사가 머무르던곳.  외부의 침입에 대비하는 완충공간이기때문

 

*금천교-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자동차가 드나들며 문턱이 없어지고 어도가 철거되면서 지금의 금천교는 동궐도상 보다는 북쪽으로 조금 옮겨 진듯하다

 

 

 

2. 두 번째 마당: 절제된 전이의 공간

 

 

4)진선문- 1991년 이후에 복원된것. 이곳을 들어서면 인정전 외행랑뜰이다

 

5)호위청- 궁중의 호위를 맡아보던 군영으로 인조반정을 주도한 공신세력이

          설치. 대장은 임금의 장인이나 정승으로 하고 겸직하게함

 

6)상서원- 임금의 옥쇄와 절월,임금이 군대를 동원할때의 발병부등 관장

 

7)배설방- 전설사에 소속된 관청으로 궐내에서 임금이 주관하는 행사때

          차일과 휘장을 치는 일을 담당

 

8)결속색- 병조에 속한 관아로 임금이 행차할 때 사람들이 떠드는것을 금하는 일을 맡아보던곳

 

9)정색- 정빗이라고도 하는데 본래 무비사를 말하며 궁궐 군인들의 장비를 관장하던 곳이다

 

10)전설사- 궁궐에서 잔치등 크고 작은 일들이 있을때 치는 차일을 공급하던 관아

 

11)내병조- 병조의 부속 관아로 임금을 모시고 호위하는일과 의식에 쓰이는

          무기와 도구등을 관리하는 일을 맡았으며, 모반,대역죄,유교의 기본질서 인 삼강오륜

          을 어긴 강상죄등 중대 범죄를 저지른 죄인을 신문하는 장소 로 자주 이용되었다.

          또 개화행사를 주관했다

 

12) 정청- 이조의 당상관및 병조판서등 문무관을 선발하는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궁중에서 사무를 보던곳이다

 

13)숙장문- 태종 임금은 진선,인정,숙장문이 이 공간이 반듯하지 않고 사다

           리꼴 형태를 한것을 두고 설계자였던 박자청을 옥에 하옥시켰던 일

 

14) 인정문- 왕위 계승의 공간

 

 

 

 

세 번째 마당: 궁궐의 으뜸공간

 

 

15)인정전-  태종5(1405) 창덕궁 창건시 세워졌으나 임란때 불탄것을 광해군이(1609) 복원.               순조년(1803)에 다시 화재 그 다음해에 재건하였다

           철종8(1857)에 고쳐졌으며 순종1(1908)에 이르러 내부를 서양식으로 고쳤다

           앞마당 곧 조정이 과거 장소로 이용되었다는 기록이 <실록>에 나타남

           오얏꽃문양은 1907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할 때 인정전을 보수하면서

           문양을 넣었던 것으로 알려짐

 

16) 향실- 궁중제사에 쓰이는 향과 축문을 담당하던곳.

          향실이 서쪽 행랑에 있는것은

          인정전 서쪽에 제례공간인 선원전이 있기 때문

 

17) 내삼청- 금군삼청이라고도하며 임금을 호위하고 궁궐을 수비하던

            내금위,겸사복,우림위 삼청을 가리킨다. 이들은 좋은 집안의 자제들로

            임금을 가까이서 호위하기 때문에 특별한 대우를 받았다

 

18)악기고-  악기도감에 속한 곳간으로 악기를 보관하던곳.

            악기도감은 세종때 음악을 맡아보던  임시관아로 후에 관습도감에 소속된 다음

            세조12(1467) 관제개혁에 따라 장악서,  

            성종 즉위전후 장악원으로 개칭 통합되었다

 

19)서방색- 서방빗이라고하는데 임금이 쓰는 붓과 벼루를 공급하고 대궐의열쇠를 보관하며

           대궐뜰의 설비등의 일을 맡아보던 액정서의 한 분장이다

 

20)품계석- 정조실록에 의하면 "인정전 뜰에 품계석을 세웠다.

           경사스런 일이 있어 임금에게 축하의 의식을 행할 때 관리들의 위계질서가 문란해

           지는경우가 많아 품계를 새긴 돌을 세워 자리를 정하도록 명했다"라는 기록이있다.

           품계가 열여덟 단계로 구분되어 있으므로 열여덟개의 품계석을 세워야하나

           정삼품까지는 정과 종을 모두 세웠으나,

           정사품부터는 정과 종이 같이섰기에 정만 세워서 열두개가 동,서로 설치되어있다.

 

 

 

 

임금의 의상실

 

 

21)상의원- 임금의 의복과 궁중에서 소요되는 금은보화와 장식품등을 공급 하던 관청. 충청,전라 

           경상,강원도의 각 고을에서 뽑힌 기생들로 구성된침선비 20명이 의복과 폐물을

           바느질했다.

           (어필면각 맞은편 건물로동궐도상에 나타나지만 실제 건물의 크기등으로 보아 불   

            옆 건물 즉 사무실로 쓰이는 이곳으로 추정된다고함)

 

22)어필불면각 - 상의원 옆에 위치, 임금의 면복을 보관하는 중요한 건물

               (현재 지킴이방 위치이며 동궐도상에 나타나는 나무도 현재있음)

 

23) 교자고- 종일품 이상과 기로소의 당상관이 타는 평교자를 보관하던곳

 

 

 

궁궐안의 종합청사: 궐내각사

 

 

 임금을 가까이에서 보좌할 필요성 때문에 궁궐에 들어와있는 여러 관청

 

24)내각 - 규장각의 다른 명칭으로 직속 관청은 이문원으로 정조원년에 . 역대및 당대 임금의

          시문,친필의 서화,고명등을 보관할 집을 후원에 짓게하여 1층은 규장각,2층은 주합루

          라 했다. 정조 5년에 너무 후미진곳에있다하여 이곳으로 옮김. 정조6년에는 강화에 외

          규장각이 설치. 내,외규장각 체제가 완성

 

25)대유재,소유재 - 이문원옆에 남북으로 놓여있는 이곳은 부근에 있는 황단과 선원전에 임금이

              제사지낼때 그 전날 밤에 머무는 어재실이다

              소유재는 원재 정조때 검서관의 근무처가 협소하다하여 지었는데 정조가 여기서 하룻

              밤을 묵은후 어재실이 되어 그 이름을 소유재라했고 검서관이 지키게 하였다.

              순조26년 춘향때 효명세자가 임금을 모시고 소유재에서 재숙한 다음 시를 지어

              (독춘추,재숙, 소향)벽에 붙임

 

26)옥당 - 홍문관의 다른 이름으로 이곳은 궁중의 경서및 사적을 관리하여 문서로 처리하고 임금

          의 자문에 응하던 기관이다. 사헌부,사간원과 함께 삼사라 했다

 

27)약방 - 내의원의 다른 이름으로 옥당의 동쪽과 북쪽에 있으며 임금의 건강을 책임지는곳으로

          내국이라고도 했다.

         책임자인 도제조와 제조는 5일마다 의관을 인솔하고 임금께 문안하고 진찰하기를 청했다

 

28)예문관- 향실과 맞닿아 있으며 이곳에서는 임금이 짓는 글과 임금의 명령인 전교, 관직의 임명

          장인 사령서등을 작성했다. 이곳 관원중에는 임금의 측근에서 조정에서 일어나는 모

          든 사실을 기록하는 사관이 있어 역사적 사실을 후세에 전할수 있도록 했다.

 

내각,옥당,약방, 예문관이 있던 인정전 서쪽 궐내각사 지역은 모두 일제강점기에 없어졌다가

1991년 이후에 복원된것이다

 

 

 

역대 임금을 모시는곳 : 선원전

 

 

29)선원전- 역대 임금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지내는곳으로 진전이라고도했다

           효종7에 짓고 춘휘전,숙종21 선원전이라 이름을 고쳐짓고 숙종 어진 봉안

           그후 영,정,순조,익종,헌종의 어진을 보안하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임금이 친히 분향배례, 탄신일에는 다례를 행함

 

30)양지당- 임금이 선원전 제배할 때 전날 머무는 재실

 

 

없어진 대비전

 

31)경복전 터- 기단,초석,월대가 그려져있는것이 보임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대비전으로 정순왕

              후는 이곳에서 돌아가심

              순조 24년(1824) 불이났다.

 

32)영모당-  숙종의 계비였던 인원왕후가 거처하던 곳으로 경복전과 더불어 이곳 주변이 대비들이

            거처하던 지역

 

33)수라간- 임금의 식사를 준비하던곳

 

   생과방- 식사외에 음료와 찬 음식을 마련

 

   소주방- 더운요리를 담당했는데

           이곳에는 잔치때 떡등을 담당하는 외소주방과 수라를 담당하는 내소주방으로 나뉘었다

 

   이곳 주변의 건물 역시 일제 강점기때 없어졌다

 

 

 

 

 

임금의 집무실

 

 

34)선정전-치조의 으뜸 전각인 인정전에 버금가는 편전으로 임금이 평상시에 정무를 본다.

          청기와에 쓰이는 푸른 안료는 회회청으로 아라비아산이다

          이곳은 정조 승하후 혼전으로 사용된후 순종,헌종,철종등 역대 임금의혼전으로 사용되

          면서 편전의 기능을 잃고 침전 권역에 있는 희정당이

          편전의 기능을 대신하게 되었다

 

35)선전관청- 선전관은 숙직을 하면서 임금을 측근에서 호위하고 임금이 긴급하게 군사 지휘관

             을 소집하거나 군사를 동원할 때 연락을 담당했으므로

             궐내의 여러기관중 임금의 집무실인 선정전과 가장 가까이에 있다.

 

36)승정원(은대)- 왕명의 출납을 관장하던 곳으로 지금의 대통령 비서실

                 승정원의 주서는 승정원일기를 기록

 

37)빈청- 비변사의 대신및 당상관들이 임금을 만나기전에 대기하거나 회의를 열었던곳으로

         원래 매월 3회씩 열렸으나 숙종24부터 월 6회씩 열렸다.

         빈청뒤에는 측간이라하여 작은 건물이 있는데 동궐도에는화장실이 여섯 개밖에 없는

         데 현실성이 없다. 측간이 상당수 생략된듯하다

 

38)공상청- 채소와 생선등을 관리하던 관아이다

 

39)주원- 사옹원의 다른이름으로 궁중의 음식및 그릇들의 공급을 주관

 

40)궁방- 활과 화살촉을 만드는일을 관장하던곳

 

41)사알방- 액정서에 소속되어 임금의 말씀을 전달하는 잡직관원이 거처

 

42)누상과 상고- 임금의 음식을 장만하던 수라간에 속한 곳간

 

43)등촉방- 궁중의 등불과 촛불을 관장하던곳

 

44)내반원- 내시부로 식사의 감독,명령의 전달,대궐문의 수직및 청소하는 5일을 전담하던 환관들

           의 관청이다.

 

 

궐내각사에 속한 각 기관들을 보면!

 

빈청(賓廳) - 고위관리들의 회의실 (정승, 판서)

정청(政廳) - 이조와 병조 등 인사 담당 기관의 업무 처리기관

대청(臺廳) - 사헌부, 사간원 관리들의 업무 공간

승정원(承政院) - 왕명 출납 기관으로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과 유사

홍문관(弘文館) - 국왕의 학문적 자문기관

예문관(藝文館) - 국가의 공식 문서 작성 기관

춘추관(春秋館) - 국가의 역사 기록 담당 기관내의원(內醫院) - 전문 의료 기관

내반원(內班院) - 내시들의 업무 공간

수문장청(守門將廳) - 궁궐 수비 및 호위를 담당하는 수문장의 업무공간

사복시(司僕侍) - 궁궐의 말, 가마 담당 기관

상의원(尙衣院) - 왕실의 의복 담당사옹원(司饔院) - 왕실의 음식 및 그릇 총괄

 

 

영조의 마음의 고향 : 보경당

 

45)보경당: 영조는 자신이 태어난 이곳과 어머니의 채취가 서려있는 이곳에

          <보경당 감회서 >를 지었다

 

46)태화당- 옆 건물인 재덕당과 함께 보경당 주변의 이 건물들은 후궁들의 처소로 판단

 

47)장독대- 수라간에서 사는 장을 저장

 

48)대청- 사헌부와 사간원들의 관리들이 임금에게 옯고 그름을 아뢸일이 있을때 모이던 곳으로

         숙종 이전에는 온돌방이었으나 대간들이 논쟁이 심하여 온돌을 마루로 고쳤다고 한다

 

 

 

 

임금과 왕비의 생활공간

 

 

49) 희정당: 익종이 순조로부터 대리청정의 명을 받들어 정사를 보다가 이 곳에서 승하한곳이다.

 

  지금의 희정당은 동궐도에있는 본래의 희정당이 아니고 주변의 모습도 많이 변형되어있다

  동궐도의 희정당은 정면 5칸 측면4칸의 팔작지붕 누각으로

  희정당과 대조전 일곽은 순조 33(1833) 화재로 소실된후

  그 다음해인 순조34(1834) 복원된일이 있었다.

 

  현재의 희정당은 일제 강점기인 1917년 화재로 불탄후 1920년 재건.

  당시 이왕직에서 총독부와 협의하여 새건물은 조선식으로하되 서양식을 참조하기로하고

  경복궁의 교태전과 강녕전을 비롯한 여러 전각을 헐어다 지음.

  이로인해 본래의 희정당보다 훨씬 규모가 커진 정면 열한칸 측면 다섯칸으로 변형되었다

 

50).대조전- 1920년에 다시 재건된것을 1985년 희정당과 더불어 보물로지정

           익종이 태어났고 성종,인조,효종,헌종,철종,순종이 이곳에서 승하

 

51)징광루-경훈각 이층에 있던 것으로 이곳에 숙종의 어진을 봉안했다 선원전으로 옮겼다.

          1917년 대조전 일곽의 화재로 불에 타버려 대조전을 복원할 때 함께했으나 본래의 모

          습과는 달리 작은 누집이 되었다

 

 

 

왕실 어른의 집:수정전

 

52) 수정전 -경훈각의 서북쪽 터에는 수정전과 그 행각이 장방형으로 둘러싼 담장속에 자리잡고

            있는데 궁궐지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원래는 당이라하였는데 인조 원년 반정(이괄의 난)을 일으킨날 밤에         

            불타고 수정전만 남았다.

효종5년에 어머니를 위하여 고쳐 짓고 다음해에 전으로 고쳐 불렀다

즉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곧 효종의 어머니가 사용한 대비전이 되었다.

지금은 수정전이 있던 자리는 가정당이 들어서있다

일제강점기에 덕수궁에 있던 가정당을 뜯어 이곳으로 옮겨놓은 것으로 보임

 

 

 

궁궐의 동쪽 : 왕세자의 공간

 

53)성정각- 희정당의 동남쪽에 있으며 세자의 주연(서연)이 열리는 곳으로

           이 누의 남쪽은 보춘정이고

           북쪽 동루가 희우루이다

           성정각의 출입문은 영현문이다

 

54)관물헌- 사물을 관찰한다는 뜻을 가지고있다.

           정조는 관물헌에서 문신들에게 경서를 외우게하고 이곳에 거처하며 책을 읽기도 했다.

           실록과 궁궐지에는 관물헌으로 기록되어있고 현재는 집희라는 현판을 달고있다.

   창순루- 정조때 만든 것으로 관물헌 옆쪽에 위치한 식물원으로 초가지붕을 하고 있고   

           이곳에서는  화초를 재배하여 궁궐안에 필요한 꽃 등을 공급하였다고한다.

           앞마당에는 화분들이 늘어서있는것이 보인다

 

55) 중희당

성정각의 동쪽에 위치하고 

정조 6년에 지어진 것으로 당액은 정조의 어필이었다.

임금의 처소인 희정당보다 오히려 마당이 넓으며

이 마당에는

해시계,측우기.풍기대,소간의등이 있어 창덕궁에서 가장 많은 과학기기가 모여있던 공간이다.

이곳에서는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대리청정을 하였고

철종이 재위14년에 후사없이 세상을 떠자

흥선군의 둘째 명복을

새 임금으로 삼는다는 발표를 중희당에서 행해졌다

 

또 고종의 왕비를 고르는 삼간택이 중희당에서 행해져

후일 명성황후가 되는 민치록의 딸이 왕비로 정해졌다.

이곳에서는 고종이 외교사절을 만나던 장소로 자주 이용되기도 하였다.

 

중희당은

고종28(1891)에 창덕궁에서 사라진다.

고종이 중희당을 옮겨 지으라고 지시하여

사라지게 되는데 어디로 갔는지 그 행방이 묘연하다고한다

 

세자의 침소인 연영합의 외행각 정문인 학금을 나서면

이곳 주변에는 지하에서 샘물이 많이 솟아나는 지역으로 화원이 있었다.

이곳에는

샘이 두곳 있고 초가로 된 파수군이 두곳 있었다.

이곳은 왕궁내에서 특별히 관리했던 화원으로 매실,살구, 복숭아나무들이 자라나는

궁궐내의 과수원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

 

57)금위군번소- 중희당 남행각 밖의 산자락에 자리잡고 있었는데

              이곳은 궁궐을 번갈아서  군사들이 주둔하며 궁궐을 지키던 곳이다

 

58) 패장직소- 패장들이 머무는곳으로 조선시대에는 순찰구역을 "패"라하여

             구분하였는데 (예- 남대문은 칠패) 각 패의 우두머리를 패장이라 하였다

              패장직소 동쪽으로는 전루와 문기수번소가 있었다.

 

전루는

세종때 만든 물시계인 자격루가 있는 누국의 시간을 야간에 군사들이 정해진 시각에 북을 쳐서 시간을 알리던곳이며,

문기수번소는

훈련도감에 딸려 문밖에서 각종 군기를 들기도 하고 궁궐에서 심부름도 하던 문기소들이 근무를 서던곳이다.

 

한편 이들 권역의 북쪽에는 건양문과 담장이 있어 동쪽의 창경궁과 경계를 지으면서 건양문으로 양쪽 궁궐을 넘나들었던 것이다

 

 

 

 

후원: 정조의 이상과 꿈

 

59)부용정- 숙종때 지어졌던 택수재를 정조때 부용정으로 고쳐지었다

           궁궐지에 이르기를 "춘당대에서 활을 쏘고 부용정의 앞 못과 주위의 못에서 낚시질

           하였는데 낚시줄이 빙 둘러 참으로 많기도 하였다"

 

60)사정기 비각- 세조때 종신들에게 명하여 터를 잡아 우물을 파게하였는데

               그 뒤에 여러차례 병화를 겪어 두 우물만 남아 숙종때 이를 보수하라 명하고 그

               곁에 비각을 세웠다. (네개의 우물-마니,파려,유리,옥정)

 

61)규장각- 주합루의 하루로 정조의 어필로 편액하였고.

           정조 즉위년에 세움내각으로도 불리었는데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서화,고명,유교,선보등을 관리하던 곳이다

           상루는 주합루로 제일 아랫단에는 어수문과 작은 협문,

           동,서로는 길게 취병을 세웠다.

 

62) 영화당- 순조실록에 왕세자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이곳 춘당대에서 어시를 보인 기록들이 있

            는 것으로 이곳은 어전시를 치루던 곳임을 알수있다

 

 

63) 의두합  - 동궐도에는 '이안재'와 '운림거' 두 건물이 북향을한 채 동서로 나란히 서 있다.

  순조27년 익종이 춘궁에 있을때 고쳐 지었다" (효명세자의 수신도량)

  이 건물들이 지금은 기오헌과 의두합으로 불리고 있다.

  누마루가 있는것이 이안재이고 운림거는 부속건물로 보인다

  고종2년에 의두합을 수리했다는 기록이(승정원일기)있는데

  이는 이안재와 운림거를 모두 수리한것을 주된 건물인 의두합만 언급,

  의두합이 기오헌으로 불리는것은 이 건물에 현재 기오헌이라는 현판만 걸려있기 때문

  기오헌은 마루만을 한정해서 가리키던 이름이었다

 

64) 애련정 -어수당 동쪽에 있으며 동쪽에 석문이 있는데 불로문이다

            연못가운데 을 쌓고 정자를 지었다. 불로문 밖에는 불로지가 있었다

 

65)어수당- 궁궐지에 "어수당은 영화당 북쪽에 있는데 임금의 별당으로  여기서 영,정조,순조

           는 신하들을 만나 정사를 논하기도하고 유생들을 시험하기도 하였다.

 

66)연경당- 궁궐지에는" 연경당은 손조 27년 효명세자가 진장각 옛터에 세웠다.

           이 집에서 효명세자가 순조에게 존호를 올리는 예식을 거행,

          "경사스러움을 행하는 집"이란 의미로 이름을 연경당이라 했다

 

 

 

67)폄우사-   동궐도에는 원래 ㄱ 자 모양이었으나

            동향을 한 부분이 없어지고

            남향을 한 ㅡ 자 모양의 집만 남아있다.

 

68)존덕정- 궁궐지에는" 인조 22년에 세웠으며

앞에는 못이 있어 반월지라 부른다.

처음에는 육면정이라 부르다가 뒤에 이름을 고쳤다

 

폄우사의 서쪽 산 너머의 골짜기에는 69)취규정, 그 서쪽에 70)취한정이 있고

그 골짜기 아래에는

옥류천이 흐르는곳에 71)태극정,72)소요정,73)청의정 그리고 74)농산정이 자리잡고있다

 

농산정-

앞에는 담장대신 취병을 둘렀고

이곳에서 정조가 황단에 제사 지낼때 재숙한 적이 있었으며,

순조는 음관들이 과거에 합격할 수 있도록 임시 과거를 이곳에서 보게했다.

또 사도세자의 묘인 화성 현륭원에 참배하러가기 전에 혜경궁 홍씨 가마를 메는 연습을하고 이곳에서 그들에게 음식을 하사한 적이 있었다

 

 

청의정-

초가지붕을 하고있으며

지금은 작은 논이 있지만 기록으로 볼때

이곳에는 못이 있었다

 

태극정-

태극정 개울에는 태극이 새겨져있다.

이는 만물의 근원인 태극을 물속에 살짝 숨겨놓았는데

이는 만물의 근원은 원래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지금은 사방이 터진 정자지만 동궐도상에는 사방에 문이 달린 정자였다.

 

 

74) 옥류천-

         궁궐지에 " 돌위에 세 글자를 새겼는데

         인조14년(1636) 가을에 돌을 뚫어 샘물을 끌어들여 바위 둘레를 돌아

         정자앞에 떨어트려 폭포 로 삼았다"

 

75)능허정- 숙종,정조,순조,익종이 지은 시들이 있는곳으로 풍광이 아름다워

           임금들이 자주 머물며 휴식을 취한곳임 (상림십경 중 능허모설)

 

76)열고관,개유와-

           규장각의 부설기관인 개유와,열고관에는 중국책을 보관하였는데

           열고관에는 우리나라 책을 보관하는 '서서'라고도 불리는 서고가 있었다.

           정조5년에 열고관,개유와 서고에 있는 책의 목록을 작성하라고 명령

 

77) 수직간- 후원의 경비를 담당하던 병사들이 머무는곳

 

78) 봉모당- 옛 임금이 지은 글과 친히 쓴 글씨 및 선원보첩을 봉안하고있다

 

 

 

 

황단과 그 주변

 

79) 황단(대보단)-  

후원의 서북쪽 담장 너머에 넓은 여러 단의 터를 닦아 그 위쪽 중심을 높은 단을 쌓고

단 주위로 담장을 두른 중앙에 정방형의  방단을 조성하였는데

황단(황제에게 제사지내는)

또는

대보단(큰 은혜에 보답하는)이라 한다. (사직단의 제도를 모방하여 지음)

 

궁궐지에는

숙종30(1704)은 청에 의해 명이 망한 60년이 되는해로

숙종은

"옛 은덕을 추모하여 보답하는것은 천리의 도리"라며

임란때 원군을 보낸 명의 신종을 제사지내기 위하여 이곳에 단을 설치하고

매년 3월에 제사를 지냈다.

 

영조 25년에는 명 태조와 의종을 함께 모셔 와서 제사를 지냄

지금은 이곳에 일제 강점기인 1921년에 조선 총독부가 지은 신선원전이라

불리는 새 선원전이 자리잡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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