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은
경복궁과 달리 동-서-남-북의 외곽 문이 뚜렷하지 않다.
경복궁이 법궁으로서 평지에 자리하고, 그에 따라 문도 동-서-남-북에 맞추어 세워졌지만,
창덕궁은 경복궁의 이궁인데다 격식을 갖추지 않고 궁궐의 건물도 자유롭게 배치했기 때문에
그에 따라 외곽의 문도 격식에 맞게 세우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굳이 창덕궁 외곽의 4문을 꼽으라고 한다면
남문은 돈화문,
서문은 금호-경추-요금문,
북문은 후원의 맨 끝쪽 옥류천 부근에 자리하고
지금의 성균관대학교와 경계에 있는 건무문이 될 것이다.
동쪽 영역은 같은 동궐인 창경궁의 영역이므로 낙선재 방향으로 들어가는 단봉문을
사실상 창덕궁의 동문으로 봐도 무방할 것 같다
(적어도 창덕궁과 창경궁을 분리해 놓고 보면 그렇다)
지금까지 창덕궁의 여러 문을 창덕궁을 둘러 볼때 꼭 한번 유심있게 봐야할 문
바로 요금문겉 모습은 볼품없는 그저 평범한 문에 불과할 지 모르나, 예사로운 문
이 아니다. 나름대로 유서가 있는 문이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 보았다.
조선왕조 9대 성종 임금때 그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그때까지 창덕궁 주변에 문 이름이 갖추어지지 않을 것을 알게 되자
성종은 당대 최고의 문신인 서거정으로 하여금 할 문이 있다.
바로 요금문겉 모습은 볼품없는 그저 평범한 문에 불과할 지 모르나, 예사로운 문이 아니다.
나름대로 유서가 있는 문이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조선왕조실록을 찾아
문의 이름을 2개씩 지어 올리도록 명하였는데,
그때 문 이름 가운데 임금이 서장문, 즉 서쪽 담장의 문의 이름을 요금문(曜金門)으로 낙점했다는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처음 나오는 기록이다.
망각의 문 요금문 원서동 쪽 창덕궁 담장을 따라가다 보면 문이 세군데 있다.
그중 첫번째 이름없는 문이 하나 나오고 그다음에 요금문이 나온다.
요금문은 사관이나 관료들이 다니기 보다는 궁인들이 다녔던 문이며,
특히 궁에서는 왕이 아닌 다른사람이 즉을수 없어서
나이든 궁녀들이나 병든 궁녀들은 궁녀생활을 마감하고 이문으로 나왔다고 전한다.
요금문에서 더 올라가면 위치상으로 신선원전이 있는 곳에 문이 하나있다.
규모가 큰 문인데 이름이 없다.
현판이 떨어진 것인지, 없었던 것인지 궁금하다.


창덕궁의 남쪽 정문.
남아 있는 궁궐의 대문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실록에 따르면 1405(태종 5)년 창덕궁을 짓고 나서 몇 년 후인 1412(태종 12)년 5월에 세웠다.<원전 1>
1451(문종 즉위)년에 지금과 같은 규모로 중창(重創)했다.
임진왜란 때 불타 버린 것을 1608(광해군 즉위)년에 다시 세웠다.
돈화(敦化)는 ‘교화를 돈독하게 한다’는 뜻.
이 말은 『중용(中庸)』에서 처음 나왔다.
중용 30장
“만물이 함께 길러져 서로 해치지 않으며, 도가 함께 이루어져 서로 어그러지지 않는다. 작은 덕은 냇물의 흐름이요 큰 덕은 교화를 돈독하게 하니[敦化], 이는 천지가 위대해지는 것이다.”라고했다. <원전 2>
중국 후한 말기의 대표적 유학자인 정현(鄭玄, 127~200년) 1)은 이 대목을 풀이하면서
“작은 덕은 냇물의 흐름이어서 새싹들을 적셔 주니 제후에게 비유한 것이다.
큰 덕은 교화를 돈독하게[敦化] 하여 만물을 두텁게 자라게 하니 천자에게 비유한 것이다.”<원전 3>
당나라의 학자 공영달(孔穎達, 574~648년)은 소(疏)에서 좀 더 구체적으로
“공자께서 『춘추(春秋)』를 지으신 것은 제후의 작은 덕으로써 말하자면 냇물의 흐름이 새싹들을 적셔 주는 것과 같고, 천자의 큰 덕으로써 말하자면 인애(仁愛)가 두터워서 만물을 변화·생성시키는 것이다.”<원전 4>.
즉 ‘돈화’는 원래 『중용』에서 “공자의 덕을 크게는 임금의 덕에 비유할 수 있다”는 표현으로 쓰였고, 여기에서 의미가 확장해 ‘임금이 큰 덕을 베풀어 백성들을 돈독하게 교화한다’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창덕궁의 서쪽 궁장에 있는 문.
승정원(承政院)의 승지나 홍문관(弘文館)의 교서관(校書館) 등
궁중 관서 벼슬아치들이 다니던 문이다.
한성의 역사가 담긴 책 『한경지략(漢京識略)』
“서쪽이 금호문인데, 편액은 성임(成任, 1421~1484년) 4)이 썼다. 조정의 신료[朝臣]들은 모두 이 문으로 출입하는데, 사헌부의 대관(臺官) 5)은 정문인 돈화문으로 출입한다.
해가 저물어 문을 잠그면 당직 관리가 반드시 가서 확인한다.”<원전 5>.
금호(金虎)’는 ‘금 호랑이’라는 의미이다. ‘금(金)’은 오행 사상에서 서쪽을 가리키고, ‘호(虎)’ 또한 서방(西方) 백호(白虎)를 가리키므로 서문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회남자(淮南子)』가운데
하늘과 땅을 포함한 만물의 형성 과정을 신화적으로 설명한 「천문훈(天文訓)」 편에
“서방은 금(金)이다. 임금으로는 소호(少昊)이고 … 신으로는 태백(太白)이며, 짐승으로는 백호요,
음으로는 상(商), 날로는 경신(庚辛)일에 해당한다.”<원전 6>.
즉 백호는 서방을 상징하는 동물인 것이다.
단봉문丹鳳門
창덕궁의 동쪽에 있는 문으로 돈화문의 동편 궁장에 있다.
『한경지략』에, “남쪽의 오른편이 단봉문이다.
동쪽으로 건양문이 있고, 이 문 동쪽으로는 창경궁이다.”<원전 7>.
단봉문은 본래 종친부의 왕족및 친·외척과 상궁이 출입하던 문으로
무관인 선전관(宣傳官)이 개폐를 관리했다.
이 문은 함부로 여닫고 드나들 수 있는 문이 아니었다.
1476(성종 7)년 6월에 병조(兵曹)의 사령(使令) 정연부(鄭延夫)가 문이 잠긴 후에 제멋대로 열자, 이를 교대시(絞待時: 교수형)의 율로 다스린 일이 있다. 또 정조 때 홍국영(洪國榮, 1748~1781년) 7)
이 숙위소(宿衛所)를 창설하고 숙위대장이 된 다음 한밤중에 이 문을 드나들어 문제가 된 일이 있다.
‘단봉(丹鳳)’은
‘붉은 봉황새’란 의미이다.
단봉에는 여러 가지 뜻이있다.
글자 그대로는 머리와 날개 끝이 붉은 봉황새를 말하지만,
조서를 전달하는 사자(使者)를 가리키기도 하며,
도성과 조정을 일컫기도 한다.
이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지은 이름인 듯하다.
중국에도 ‘단봉’으로 이름 지은 건물이 많이 있다.


창덕궁의 서북쪽 담장에 난 문이다.
요금문은 궁중의 왕족을 제외한
내시, 상궁들이 병들어 죽었을 때 퇴궐시키던 문이다.
무관인 선전관이 개폐를 관리한다.
희빈(禧嬪) 장씨(張氏, ?~1701년)의 무고로
인현왕후(仁顯王后,1667~1701년) 8)가 쫓겨날 때
이 문을 지난 일이 있다.
요금(曜金)’은
‘금빛이 빛난다’는 의미이다.
‘요(曜)’는 빛난다는 뜻이고
‘금(金)’은 오행에서 서쪽과 가을을 상징하므로
西門의 이름으로 지은 것이다.
원래 현판의 글씨는 성종 때 판결사(判決事) 신자건(愼自健,1443~1527년) 9)이 썼다. <원전 8>
건무문 建武門
농산정의 북쪽 담장에 딸린 문이다.
이 문의 바깥으로 성균관대학교 운동장과 금잔디광장이 보인다.
‘건무(建武)’는 무(武)를 세운다는 의미이다.
‘무(武)’는 오행에서 북방의 현무(玄武)를 뜻하므로 북문의 이름으로 사용한 것이다.
편액이 문의 안쪽에 달려 있다.
필사자를 알 수 없고, 칠이 되어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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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현. 자는 강성(康成). 유가 경전연구에 힘써, 옛 문장들을 새롭고 쉽게 풀었다. 훈고학의 시조로 존경을 받았다.
2) 공영달은 당초기의 학자이다. 문장·천문·수학에 능통했다.
3) 변계량. 자는 거경(巨卿),호는 춘정(春亭). 고려 말·조선초의 문신이다. 문장이 뛰어나『태조실록』 편찬,『고려사』 개수작업에 참여했다.
4) 성임은 자는 중경(重卿), 호는 일재(逸齋), 안재(安齋), 시호는 문안(文安). 벼슬이 이조판서에까지 올랐다. 시문에 능했고 글씨로 이름이 높았다.
5) 사헌부 대관은 고려·조선 시대에 탄핵, 감찰 등을 담당한 관료다.
6) 『회남자』는 중국 전한(前漢)의 회남왕(淮南王) 유안(劉安)이 저술한 책으로 도가와 음양오행,유가, 법가 사상 등이 반영되어 있다.
7) 홍국영은 영조때 등용되어 벽파가 세손(정조)을 해하려는 음모를 막아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정조 즉위 후 실권을 잡자 반대파 못지 않은 세도를 휘둘렀다.
8) 인현왕후 민씨는 숙종의 계비이다.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을 세자로 책봉한 문제로 1689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이 일어났을 때 폐위되어
궁에서 쫓겨났다가 1694년 복위하였다.
9) 신자건의 자는 표직(杓直),호는 송재(松齋),본관은 거창(居昌)이다. 관직에서 물러나 서예에 전념했다. 왕희지(王羲之)의 필법을 깊이 터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