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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流觴曲水宴

작성자雅田( 창덕 토요1)|작성시간12.04.25|조회수454 목록 댓글 0

流觴曲水宴

 

수로를 굴곡지게 하여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 시를 읊는 놀이로, 그런 목적으로 만든 도랑을 ‘곡수거’라 합니다.

 

이 놀이의 유래는 천년 전 중국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남아있는 유적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포석정은 유서 깊은 신라< 新羅 >의 이궁터< 離宮址 >로 헌강왕< 憲康王 > 때 어무상심< 御舞詳審 >의 신라 춤이 생겨난 곳이다. 젊은 화랑< 花郞 >들이 맑은 물과 바람을 즐기고 남자다운 기상을 배우던 장소이기도 하다.

지금 남아 있는 돌로 된 물길은 유상곡수연< 流觴曲水宴 > 바로 그 곳이다.

 

유상곡수연이란

옛 중국의 명필< 名筆 > 왕희지< 王羲之 >가 절강성< 浙江省 > 회계산< 會稽山 > 북쪽 난정< 蘭亭 >에서 벗들과 함께 모여 흐르는 물 위에 술잔을 띄워 술잔이 자기 앞에 오는 동안 시를 지어 읊었으며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 3잔을 마시는 한 고사를 말하는데, 이 놀이를 본따서 돌로 전복처럼 수로를 만들어 풍류를 즐기던 곳이 바로 포석정이다.

현재 수로는 22m 이며 높낮이의 차가 5.9 cm 이다. 좌우로 꺽이거나 굽이치게 한 구조에서 비롯되는 물길의 오묘한 흐름은 뱅뱅 돌기도 하여 물의 양, 띄우는 잔의 형태, 잔속에 담은 술의 양 등에 따라 많은 변수를 가지고있어 유체공학적 계산상 잔이 흐르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다.

근래에 실험적으로 물을 흐르게 한 뒤 크고 작은 두개의 잔에 3분의 2정도 술을 담아 띄위 본 결과 작은 잔은 수로를 흐르는데 10분 30초, 큰잔은 8분이 걸리었다.

 

포석정의 경우 규모가 작으므로 물이 그대로 흘러가면 2~3분만에 다 빠져 나가므로 그 짧은 시간에 4언이나 5언의 시를 짓는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볼 수 있다. 시작(詩作)을 제대로 하려면 최소한 7~10분 정도는 주어야 한다.

포석정은 바로 이런 문제점을 유체역학으로 말끔히 해결했다.

술잔이 곡수를 돌때 맴돌기도 하고 멈추는 것이다.

포석정은 유체학적으로 술잔이 사람 앞에서 맴돌도록 설계되었다는 점이다.

유상곡수에 잔을 띄웠을 때 잔이 흘러가다가 어느 자리에서 맴돌 수 있었던 것은

유체학적으로 와류현상 (회돌이: 주 흐름의 반하는 회전 현상을 말하며 쉽게 말해 소용돌이현상) 현상이 생기도록 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보존상태는 건물은 없어지고 전복모양의 석조 구조만이 남아있다 포석정의 돌홈엔 굽이굽이 흘러가는 우리 겨레의 멋진 가락이 있다.

 

수 십만년 씻겨 내린 돌처럼 부드럽게 다듬은 그 조각 솜씨도 훌륭하거니와 놀이에 있어서도 그 풍류(風流)는 멋에 넘치는 것이니 포석정은 우리들의 자랑스러운 유적인 것이다

포석정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확실한 기록이 없다.

49대 헌강왕(憲康王 876-886)이 포석정에 행차하셨을 때에 남산의 신(神)이 임금님 앞에 나타나서 춤을 추었는데 여러 신하들의 눈에는 신(神)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으므로 임금 자신이 신의 추는 춤을 흉내내어 보였다.

 

그 후부터 그춤이 유행되었는데 남산신의 이름을 따서 상심무(祥審舞)라 하였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 이 기록에 의하면 포석정은 9세기 중엽 이후에는 이미 만들어져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곡선미는 안압지(雁鴨池) 해안선에서도 볼 수 있는데 포석정에서는 안압지에서처럼 강한 기백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묘하게 흘러가는 가락의 아름다움과 돌을 뜻대로 다루는 정교한 솜씨를 볼 수 있으니, 신라 예술이 가장 왕성하던 때를 지나 조각 기술이 무르익어 가던 9세기초에 만든 것이라 믿어진다.

원래는 큰 돌거북을 만들어 놓고 저수지에서 물을 끌어다가

그 돌거북의 입으로 물이 쏟아져서 돌 홈으로 흘러가게 한 것이다.

그 돌거북은 조선 말엽에 어느 부윤(府尹)이 옮겨다가 자기집 정원에 놓아두었다 하기도 하고 자기 조상 비석 대석으로 사용 했다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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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로를 굴곡지게 하여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 시를 읊는 놀이로

그런 목적으로 만든 도랑을 ‘곡수거’라 합니다.


이 놀이의 유래는 천 년 전 중국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중국에도 남아있는 유적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포석정

주에 있는 포석정(鮑石亭)을 모르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포석정을 적어도 한 번은 직접 가보았거나, 아니면 그것에 대한 이야기라도 들었을 것입니다.

포석정과 관련된 이야기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잔치를 벌이다
후백제 견훤의 기습을 받아 목숨을 잃었다는 신라 55대 경애왕(재위기간: 924~927)에 대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에 대해 <삼국사기>는 "임금이 왕비 및 후궁과 친척들을 데리고 포석정에 가서 잔치하며 즐겁게 놀던 때라 적병이 닥침을 알지 못하였다.(王與妃嬪宗戚 遊鮑石亭宴娛 不覺賊兵至)"라고 기록하였습니다.

포석정과 관련된 또 다른 기록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삼국유사>에 "신라 49대 헌강왕(재위기간: 875~885)이 포석정에 가니 남산의 신(神)이 나타나 왕 앞에서 춤을 추었는데, 곁에 있던 신하들은 보지 못하고 왕에게만 보였다. 왕 자신이 춤을 추면서 그 형상을 보였다. 남산의 신 이름을 간혹 상심(詳審)이라고도 했으므로
이 춤을 사람들은 어무상심(御舞詳審) 또는 어무산신(御舞山神)이라 한다."라고 했습니다.
 
- 포석정


포석정은 중국의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에서 유래됐습니다.

유상곡수연은 굴곡진 수로 위로 물이 흐르게 하고, 그 위에 술잔을 띄운 후 술잔이 자기 앞에 올 때 시를 한 수 읊는 놀이를 말합니다. 이런 목적으로 만든 도랑을 곡수거
(曲水渠)라고 합니다. 이러한 유상곡수연은 지금은 중국에서조차 유적이 거의 없어 포석정이 매우 중요한 연구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 포석정


포석정에 남아 있는 것은 유상곡수연에 사용된 곡수거(曲水渠)입니다. 그 모양이 마치 전복을 포(鮑) 뜬 것과 같습니다.

이곳에
흘렀을 물이 언제부턴가 흐르지 않게 되어 옛날과 같은 유상곡수연의 모습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어렴풋이 그 모습을 상상해볼 수는 있습니다.
 
- 포석정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포석정의 형태가 지금까지 비교적 온전한 것은 그동안 나름대로 보수하며 관리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비록 일제강점기에 마음대로 보수해 수로곡석(水路曲石)의 일부가 파손되었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이곳에 물을 채워 흐르게 하면 옛날처럼 술잔이 천천히 한 바퀴 돌며 흘러갈 것만 같습니다
경주 남산 포석계곡 끝자락에 사적 제1호인 포석정의 터가 자리하고 있다. 이 포석정은 신라 1,000년의 역사 가운데 가장 아픈 사연을 간직한 유적으로 알려져 왔다. 포석정에 대한 기록은 삼국사기에 잘 남아있다.

신라 제55대 경애왕이 후백제 견훤에게 잡혀 자결하고 왕비를 비롯한 여러 궁녀들은 그들 침략자의 노리개가 됐다. 그리고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을 세움으로써 신라는 결국 패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기록으로 우리는 지금도 포석정이 패배의 치욕적인 역사현장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이 포석정이 정확하게 언제 어떤 연유로 마련되었으며 그 주된 용도는 무엇인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포석정 터에 남아있는 포석은 다듬은
화강석 돌을 사용하여 물이 흘러가도록 한 구조인데, 전체적인 형태가 마치 바다의 전복 껍질둘레와 같은 모습을 담고 있다고 조선 시대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전체가 구불구불하여 물이 흘러가면서 속도가 완만해지도록 돼 있다. 그 특이한 형태의 시설은 세계에서 그 예를 볼 수 없는 그야말로 신라인의 독창적인 작품이다.

현재까지의 연구 결과를 보면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하던 유적이라고 한 해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유상곡수연은

 

서기 353년 3월3일
중국의 절강성 회계산 북쪽에 란정(蘭亭)이란 정자에 당시 명필로 유명한 황희지 등 명사 41인이 모여 개울물에 목욕하고 모임의 뜻을 하늘에 알리는 의식을 한 후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잔이 자신의 앞에 올 때까지 시를 읊는 놀이를 하였다는 데서 유래한다.

 

당시 읊었던 시를 모아 묶으면서 서문을 왕희지가 썼는데 그것이 유명한 蘭亭會記(난정회기)의 蘭亭集序文(난정집머리말)으로 알려져 있다.

 


이후 중국에서는 왕궁에 포석정과 같은 시설을 만들었는데 이것을 유배거(流盃渠)라고 했다.

 

바꿔 말하면 중국의 유배거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신라특유의 독창적인 시설을 마련한 것이 포석정이라고 보아왔다. 그렇기 때문에 포석정은 결국 귀족층의 놀이시설로 마련된 것으로 보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하지만 과연 그렇게만 보아야 하는지 한 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지난 1998년 5월 포석정 지역에서 砲石(포석)이라고 새겨진 신라기와편이 출토되어 이를 화랑세기에 나타나는 포석사(鮑石詞) 즉 신주를 모시는 사당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발표되었다. 즉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고 귀족들의 혼례를 거행한 성스럽고도 경건한 장소였다는 해석이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처지에 군신들을 포석정에 군신들을 불러놓고 왕이 술 마시고 즐긴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나라의 안위를 위한 제사를 지내다 참변을 당했다는 해석이 오히려 설득력을 지닌다. 경애왕이 잔치를 베풀고 놀이에 빠져 결국 신라가 패망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은 재해석 되어야 하는 이유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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