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역사]
조선시대 궁궐의 궐내각사
나각순
두레 문화기행 연구 위원, 한국사
조선시대의 궁궐은 크게 법궁(法宮, 정궁)과 이궁(離宮)의 양궐체제(兩闕體制)로 운영되었다.
1394년 한양으로 천도한 조선왕조는 경복궁을 짓고 법궁을 삼았다.
이어 제1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다시 개경으로 돌아갔으며, 태종 5년 창덕궁을 새로 짓고 다시 한양에 도읍을 정하니, 기존의 경복궁은 다시 법궁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였다.
아울러 창덕궁은 태종이 실질적으로 머무르며 정치를 행하였지만 이궁의 지위에 머물렀다.
태종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세종은 경복궁에서 즉위하였고,
창덕궁을 자연스럽게 왕래하면서 정무를 보았다.
이로써 경복궁은 법궁으로서의 지위를 회복하였고,
창덕궁은 왕이 통치행위를 하는 실질적인 왕궁으로서 이궁이 되어
양궐체제의 전형된 모습을 갖추었다.
한편 창경궁은 성종 13년(1482)에 당시의 세 대비
즉 성종의 조모인 세조비 정희왕후(貞熹王后) 윤씨,
생모인 덕종비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
숙모인 예종비 안순왕후(安順王后) 한씨를
여유롭게 모시기 위하여 특별히 마련되었다.
물론 창경궁터에는 세종이 즉위하면서
상왕이 된 태종을 위해 마련된 수강궁(壽康宮)이 있어 이를 수리하고 보강하면서 마련되었다.
따라서 창경궁은 창덕궁과 이어진 공간으로 크게는 창덕궁의 공간확대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즉 법궁과 이궁의 체제에는 변화가 없는 것이다.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창덕궁·창경궁이 불에 타고 한성탈환으로 다시 궁궐이 중건되면서
창덕궁과 창경궁이 복원되고, 별도로 왕기설(王氣說)이 있던 인왕산 아래에 경희궁을 마련하였다.
그러나 경희궁은 일종의 피궁(避宮, 정궁의 내부에 전염병 등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 왕이 일시 피하여 머무는 궁궐)으로 마련된 것으로 복원된 창덕궁이 법궁의 지위를 차지하고,
경희궁이 이궁의 지위에 이르렀다.
그러나 1863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경복궁과 창덕궁의 양궐체제로 변하였다.
이때 경북궁은 북궐, 창덕·창경궁은 동궐, 경희궁은 서궐이라 부르게 되었다. 1897년 대한제국의 황제궁인 경운궁의 등장은 제한된 상황으로 국한한다.
이와 같이 양궐체제를 지속한 조선왕조의 궁궐은 기본적으로 외전·내전·후원의 공간으로 구성되었으며,
다시 외조(外朝)·치조(治朝)·연조(燕朝)·후원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외전은 정치행위와 그를 보호·유지하는 기능을 겸한 공간이며,
내전은 왕과 왕실의 휴식공간과 침전공간을 말한다.
후원은 금원(禁苑)·북원(北苑)이라고도 하며, 왕이 거닐며 사색하고 오락하고 풍류를 즐기는 곳이었다.
한편 외조와 치조의 구분은 왕의 정무공간을 치조라 하고, 신하들이 왕의 명령을 전달하고 교서를 작성하며, 왕을 호위하고, 왕성 내부를 수위하는 기능을 가진 관아가 있는 공간을 외조라 하였다.
이러한 외전과 외조에 위치하여 왕명을 전달하고 왕실관련 업무와 시위를 관장하는 관아를
궐내각사(闕內各司)라 한다.
이러한 궐내각사를 성격상 크게 셋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왕의 통치행위를 측근에서 전달하고, 필요 문건을 만들며 왕의 자문을 행하는 문반 관아가 있다.
대표적으로 승정원·홍문관·예문관·춘추관 등이 이에 속한다.
둘째 왕과 왕실을 호위하며, 궁궐의 수비를 담당하는 무반 관아가 있다.
대표적으로 오위도총부·내병조·선전관청·호위청·내금위 등이 이에 속한다.
셋째 궁궐내의 의·식·주생활과 왕실의 건강 등을 유지하기 위한 관아가 있다.
대표적으로 상의원(尙衣院)·내의원(內醫院)·전설사(典設司) 등이 이에 속한다.
한편 시대에 따라 각 궁궐에 설치된 궐내각사가 달랐다.
대체적으로 북궐·동궐·서궐에 공통적으로 설치된 관아는
승정원(왕명출납), 홍문관(서적·문서작성 보관과 왕의 자문), 예문관(국왕의 교서작성),
상의원(국왕의 의복·궁궐의 재물과 보물 관리), 전설사(궁중에서 사용하는 장막·차일 관장),
사복시(내사복, 말과 가마 등 탈 것 관리), 내의원(국왕의 의약 담당), 오위도총부(오위의 군사업무 관장) 등이 있다.
다음 북궐과 동궐에 공통적으로 설치된 관아는
춘추관(역사기록물의 작성과 보관), 상서원(옥새·인장·부절 등의 관리), 보루각(궁궐내의 물시계 등 관리) 등이 있다.
그리고 동궐과 서궐에 공통적으로 설치된 관아는
규장각(내각, 국왕의 친필·초상화와 각종 서적 관리), 빈청(의정부 의정과 비국당상들의 모임처),
내병조(궁궐 안의 호위·의장), 세자시강원(세자 교육), 세자익위사(세자의 호위),
선전관청(왕의 행차시 시위와 왕명 전달), 호위청(왕실 호위) 등이 있다.
한편 북궐의 궐내각사로만 보이는 관아로
내반원(내시부), 관상감(천문·지리·측후), 사도시(궁궐내 쌀과 간장 공급),
사옹원(궁중의 음식·식료품·그릇 관장), 교서관(서적의 인쇄), 승문원(외교문서 관장), 전연사(궁궐 수리) 등이 있다.
이는 대개 조선 초기에 궁궐 안에 있다가 점차 궐 밖으로 옮겨간 것으로 보이는데,
일부는 동궐이나 서궐에도 있었으나 ≪한경지략(漢京識略)≫에 누락된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 동궐에만 보이는 내삼청(내금위·겸사복·우림위)·충장위·위장청 등은
모두 궁궐 내 시위를 담당한 군사조직으로 성격상 왕궁을 호위하는 무반 관아에 포함시킬 수 있다.
궐외각사는
국가의 기간 관서들로서 궁궐 정문 앞 궁궐과 인접한 곳에 설치된 관서들을 말한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육조, 사헌부, 한성부등 관료기구의 중추를 이루는 관서 건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늘어서 있었다. 흔히 '육조(六曹)거리'로 불렀다. 이곳에 배치된 관서들은 궁궐, 특히 경복궁과 친밀한 관계를 갖고 정치와 행정의 중추적 기능을 담당하였다. 이런 점에서 볼 때 궁궐의 정치 행정적 기능과 비중은 비단 궐내각사의 구성만 가지고 이해할 것이 아니라 육조거리의 궐외각사를 함께 고려하여 생각해야한다.
궐외각사는
경복궁 광화문 앞 육조거리에 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크고 작은 관서들이 서울 전역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나 이런 관서들을 모두 궐외각사로 주목할 것은 아니다. 조선후기에 육조거리에 있던 것들 외에 궐외각사로서 주목할 것은 비변사였다. 비변사는 처음에는 국방 업무를 잘 아는 고위 관료들의 회의체였으나 점차 재정을 비롯한 국정 전반으로 그 업무처리 범위가 확장되어 오늘날의국무회의와 비슷한 성격을 갖는 기구가 되었다. 비변사는 실무를 담당하는 기구가 아니라 국정 전반에 대해서 논의하고 감독하는 기능을 갖는 기구로서 거기에 참여하는 위원들을 비변사 당상이라고 한다.
동궐-창덕궁과 창경궁이 법궁, 경희궁이 이궁으로 쓰이던 조선 후기에 비변사의 청사는 창덕궁 돈화문 바로 앞에 하나, 경희궁 흥화문 바로 앞에 하나가 있었다. 의정부육조 등의 관서들은 경복궁 앞 육조거리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비변사는 국왕이 이어하는데 따라 청사를 번갈아 썼던 것이다. 비변사는 그만큼 현실적으로 의정부를 대신해서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궐외각사의 대표라는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지금은 그 청사는 없어지고 돈화문 길 건너 파출소 앞에 표석 하나만 이 세워져 있다.
출처 - 『우리 궁궐 이야기-홍순민 저』54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