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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萬川明月主人翁

작성자雅田( 창덕 토요1)|작성시간13.03.31|조회수242 목록 댓글 0

 

 

존덕정을 보다 유명하게 만든 것은,

정조가 스스로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호를 삼으며

이 정자에

萬川明月主人翁(THE OLD MASTER OF BRIGHT MOONS IN ALL WATERS) 

自序(PROFILE서설,머릿글)라는 글귀를 현판(PLAQUE)으로 건 것이다.

 

홍재전서에 기록된 자서에 의하면,

 

 萬川明月主人翁

 

 달은 하나뿐이고 물의 종류는 일만 개나 되지만,

 물이 달빛을 받을 경우 앞 시내에도 달이요,

 뒷 시내에도 달이어서 달과 시내의 수가 같게 되므로

 시냇물이 일만 개면 달 역시 일만 개가 된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달은 물론 하나뿐인 것이다.

 

연거(燕居) 처소에

萬川明月主人翁 이라고 써서

자호(自號)로 삼기로 한 것이다.

 

무오년(1798, 정조22) 12월 3일,

만 개의 개울에 만 개의 달이 비치지만

달은 오직 하늘에 떠 있는 달, 바로 정조 자신뿐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결국 모든 백성을 골고루 사랑하는 초월적인 군주의 자부심이 담겨 있다.

 

정조 재위 22년인 1798년에 쓴 ‘만천명월주인옹자서’는 재위 20년을 지나

강한 왕권을 확립한 정조가 백성에게 왕의 덕을 고루 베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것이었다.

정조의 이러한 모습을 서양의 계몽군주에 비교하는 견해도 있다.
 

 

 

 

 

 

 

 

한 사람을 향한 299통의 비밀 편지”
수신자 심환지는 누구인가?

 

                                            삼청동(三淸洞)이라는 주소와 단규개탁(端揆開坼)이 들어간 편지


편지 겉봉에 쓰인 ‘단규개탁(端揆開坼)’. 이는 ‘우의정은 열어보라’는 뜻이다.

또 삼청동(三淸洞)이라는 수신처도 보인다.

정조 당시 삼청동에 살았던 정승은 우의정 심환지(沈煥之).

그는 사도세자의 죽음에 찬성하고 개혁에 반대한 노론 벽파(僻派)의 영수였다.

심환지는 정조의 최대 정적(政敵)이었다.


“정적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다”
편지로 밝혀지는 정조의 정보 정치


수신자 심환지의 영정

1799년 3월, 정조는 자신의 즉위에 반대했던 화완옹주를 석방하려 한다. 그러나 신하들의 반대는 완강했다. 우의정 심환지는 관을 벗고 대전 밖으로 나가며 강력히 항의했고, 정조는 그를 파직시킨다.

반열에서 나와서 강력히 아뢰고
즉시 뜰로 내려가 관을 벗고 견책을 청하라.
- 1799년 3월 6일 저녁 편지 중에서 -

그러나 이 사건은 정조의 각본에 따른 연출임을 밝히고 있다. 이외에도 정조는 국정의 여러 일들을 편지를 통해 심환지와 치밀히 조율하는데.....

 

 


“임금과 신하는 물고기와 물의 관계”
만천명월주인옹과 정조가 꿈꿨던 대통합의 정치

                                                                               창덕궁 부용지의 물고기 부조


정조는 임금과 신하를 ‘물고기와 물처럼 서로 믿고 의지하는 관계’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장 강력한 반대 세력인 노론 벽파(僻派)의 심환지까지 포용하는 대통합의 정치를 추구했다.

“단점은 버리고 장점만 취하며, 선한 점은 드러내고 나쁜 점은 숨겨주고,
잘한 것은 안착시키고 잘못한 것은 뒷전으로 하며........”
- 만천명월주인옹자서(萬川明月主人翁自序) 중에서 -


정조는 자신의 이상을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란 호로 표현하며,

만 개의 시내를 비추는 달이 되고자 했다.

 

                                                         창덕궁 존덕정의 만천명월주인옹 자서(萬川明月主人翁 自序) 현판

 

 


 

“심환지는 정조를 죽였나?”
정조 독살설의 진실

정조가 죽기 13일 전에 보낸 마지막 편지. 그는 심환지에게 자신의 고통을 상세게 밝히고 있다.


귀의 뿌리(耳根)와 이빨(齒?)의 씨앗이 번갈아 통증을 일으키니,
그 고통을 어찌 형언하겠는가?
- 1800년(庚申) 4월 17일 편지 중에서 -

                                                     정조 독살설을 제기한 정약용의 <여유당전서>와 독약에 대한 내용


정조의 병세를 누구보다 잘 알았던 심환지. 훗날,

그는 정조 죽음의 배후로 지목되는데.과연 심환지는 정조를 독살했는가?

 


 

개혁의 상징 정조와 萬川明月主人翁

 

정조가 자신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억울함을 벗기고 그 명예를 회복하고자 

자신의 정적인 심환지에게 편지를 보내 사도세자를 따라 세상을 떠난  신하의 벼슬을 높이고

그 의기를 기리자는 건의를 하도록 합니다.

이에 심환지는 정조의 의견을 받들어 대전에서 여러 신하들 앞에서 앞의  발언을 하고 동의를 이끌어 냅니다. 그 후 정조는 자신의 호를 바꿉니다.

 

만천명월주인옹.    

일만개의 물에 비치는 달의 주인인 늙은이.

 

개천이건, 호수건, 강이건 일만개의 물에 하나의 달이 비치면 그 달은  일만개가 된다는 뜻이고 자신은 그 달의 주인인 늙은이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얻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평, 충심, 그리고 중용 혹은 중도

 

그의 탕평책, 집현전을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사상, 비전 그것들을 바탕으로 정조를 이해하면

정조는 참으로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그 외로움과 고독을 이겨내고 정적을 끌어 안는 독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100여 년째 지속되는 당파싸움을 종식시키고자 탕평책을 실시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군신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끊임없는 싸움을 해야만 했던 외롭고, 고독한 임금.

그럼에도 자신의 최대의 정적이자 어릴 때부터 자신을 제거하고자 했다고 믿어지는 

심환지조차 끌어 안는 그 심계...

 

정적들의 한계를 이해하고, 또 그것을 인정하고 인정을 넘어 포용하려 했던  

조선 500년의 역사 중 가장 비운했지만 가장 개혁적인 임금.

 

적과 아군의 한계를 이해하고 이용하는 것. 가능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들을, 그들의 주장을 이해하며, 인정하는 것이 그리고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이용하는 것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충심과 반대를 싹 쓸어버리고 싶은 사심을 넘어, 모든 이를 포용하고 이를 활용하는 마음. 그 마음은 얼마나 큰 마음일까요?

 

 

정조의 호 弘毅 

 

정조의 호는 "홍제, 탕탕평평실, 만천명월주인옹, 홍우일인재등 여러가지 입니다.

침실이나 서실에 붙인 헌호입니다.

정조는 세손시절 동궁의 연침( 상급침대)에  " 홍제" 라는 헌호를 붙였는데

"홍제"는 논어의 홍의(弘毅)에서 따온 말로 태백편에서 증자가 한 말입니다.

 

 논어에

 

   士不可以不弘毅 

   리더의 위치에 있는 사람은

   넓은 견식과 강한 의지력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曾子曰 

   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이니라

   仁以爲己任이니  不亦重乎

   死而後已니   不亦遠乎아.
   선비는 너그럽고 뜻이 굳세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임무가 무겁고 갈길이 멀기 때문이다.

   인을 자기의 임무로 맏았으니 또한 무겁지 아니한가?

   죽은 뒤에야  그만 둘 것이니 또한 멀지 아니한가?"

사(士):도에 뜻을 둔 사람.

불가이불(不可以不):하지 않으면 안 됨.

홍의(弘毅):홍(弘)은 관대함, 의(毅)는 강인함. 넓은 포용력과 강한 의지를 말함.

인이위기임(仁以爲己任): 이인위기임(以仁爲己任)의 도치형, 인을 자기의 임무로 삼는것.


 

정조는

자신이 군자다운 도 세가지를 갖추고 있다며 자부심을 토로 했습니다.

세가지란 '논어'헌문편에서 말한 '지(知)' '인(仁)' '용(勇)'을 가리킵니다.

지자불혹(知者不惑),    지혜로운 사람은 헷갈리지 않으며,

인자불우(仁者不憂),     어진 사람은 걱정하지 않으며,

용자불구(勇者不懼).     용기있는 사람은 두려워하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은 사리를 밝게 비춰봄으로 의혹(疑惑)이 없고,

어진 사람은 항상 천도(天道)를 즐기므로 걱정이 없으며,

용기(勇氣)있는 사람은 기력(氣力)이 의리(義理)와 부합하므로 두려움이 없다는 말입니다.

 

 

 

 

정조대왕 1752~1800  (영조 28~정조24).  

조선 제22대왕. 재위 1776 ~1800.

이름 산. 자 형운(亨運), 호 홍재(弘齋).

 

 

▥ 조선왕조 제22대 정조 ▥

 

 

 '세도'의 유래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줄곧 그를 경호하던 홍국영을 동부승지로 전격 기용 했다가 다시 도승지로 승격시켰으며 날랜 병사들을 뽑아 숙위소를 창설하여 왕궁을 호위하게 하고 홍국영으로 하여금 숙위대장을 겸직 하도록 했다. 그러나 정조의 신임을 한몸에 받은 홍국영은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삼사의 소계, 팔도의 장첩, 묘염, 전랑직의 인사권 등을 모두 총괄 하였고 이에 따라 백관들은 물론 8도감사나 수령들까지도 그에게 머리를 숙이게 되었다. 그리고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이 되게 함으로써 정권을 한손에 쥐게 되었다. 모든 관리들은 그의 명령에 따라 움직였 으므로 이른바 '세도'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홍국영의 몰락과 정조의 계책


그가 정조의 후궁으로 바친 누이동생 원빈은 입궁 한지 얼마 되지않아 죽었고 정조 또한 그에게 권력이 지나치게 집중되는 것을 경계하고 있음에 그가 스스로 조정에서 물러 날것을 권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홍국영은 오히려 정권을 독점하기 위해 왕비 효의왕후를 독살 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가 이것이 발각되어 1780년 집권 4년만에 가산을 몰수 당하고 전리로 방출 되었다. 정조는 홍국영의 4년 세도정치 기간동안 충실히 규장각을 확대하고 인재를 끌어 모았다. 즉 모든 신하들의 눈을 홍국영에게 집중시킨 다음 자신은 앞으로 펼칠 문화정치를 위해 치밀한 준비를 했던 것이다. 그가 고의로 홍국영 의 세도 정치를 부추기 거나 방치 했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다. 
 

 

규장각의 발전


1776년 설치된 이래 규장각은 급속도로 규모가 확대  되었으며 기능도 다양해졌다.

창설 초기에는 사무청사인 이문원 등을 내각으로 하여 활자를 새로 만들거나

편서, 간서 등의 업무를 주관하고 주로 출판의 일을 맡아보던 교서관을 외각으로 하였다.

 

 이러한 내, 외각의 기능이 정착되자 3년 뒤인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그곳에 박제가 등의 서얼 출신 학자들을 배치하여 새로운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

개국 이래로 능력과 학식에 상관없이 입신의 길이 막혀있던 서얼들에게 조정으로 진출수 있는 새로운 길을 터줌으로써 사회의 분위기 를 집안과 당파 위주가 아닌 능력과 학식 중심으로 끌고갈수 있었다.

 

또한 1781년 규장각 청사는 모든청사 중에서 가장 넓은 도총부청사로 옮겨 졌으며 강화사고 별고를 신축하여 외규장각 으로 삼았다.

또한 내규장각의 부설 장서각으로 조선본을 보관하는 서고와 중국본을 보관하는 열고관을 세워 내외 도서를 정리하여 보관 하도록 했다.

 

한편 규장각에 속한 각 학자들은 승직 이상의 대우를 받으며 아침저녁으로 왕을 문안 하였고 신하와 왕의 대화시에는 사관으로서 왕의 언동을 기록 하기도 했다.

이로써 정조는 규장각을 홍문관을 대신하는 학문의 상징적 존재로 부각시켜

홍문관, 승정원, 춘추관, 종부시 등의 기능을 점진적으로 부여 하면서

정권의 핵심적 기구로 키워나갔다.

 

이른바 '우문지치(학문 중심의 정치)'와 '작성지화(만들어내는 것을 통해 발전을 꾀함)'라는 규장각의 2대 명문을 앞세우고 본격적인 문화 정치를 추진하고 인재를 양성 하고자 한것이다. 
 

 

신해박해와 벽파의 기세


전라도 진신의 윤지충은 양반으로서 천주교를 신봉하던 인물 이었는데 모친상을 당하자 천주교 의식에 따라 상을 치렀다. 이일로 그는 맹렬한 비난을 받았지만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인척이자 같은 천주교인이던 권상연이 그를 비호하고 나서면서 이문제는 정치 쟁점화되어 조정은 서구문화 수입을 공격하던 공서파(벽파)와 천주교를 신봉 하거나 묵인하던 신서파로 갈라져 정면 충돌 하였다. 이에 정조는 사태의 심각함을 인식하고 권상연과 윤지충을 국문케 하여 사형 시켰다. 이 때문에 조정의 대세는 벽파 쪽으로 기울기 시작 하였다. 그리고 4년뒤인 1795년 중국인 신부 주문모의 밀입국 사건으로 벽파는 또 한번 기세를 떨치게 된다. 이때 남인의 실학자로서 차기 정권의 주자로 인식되고 있던 정약용이 정치적으로 수세에 몰려 외직으로 나가게 되고 채제공 등의 중신들도 입지가 크게 약화 되었다. 1799년 채제공이 죽자 남인 세력은 완전히 위축 되었고 이듬해 정조가 죽음 으로써 남인은 거의 축출당한다. 그나마 친위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시파들 역시 일부 노론 출신의 외척 세력만 남고 대부분 정계에서 밀려나게 된다.
 

정조의 업적


규장각을 중심으로 임진자, 정유자, 한구자, 생생자, 정리자, 춘추관자 등의 새로운 활자들이 만들어 졌고 영조 때부터 지속적으로 추진 되어오던 문물제도 정비작업이 완료 되었다. 그 결과물 들이 이때 편찬된 '속오례의', '증보동국문헌비고', '국조보감', '대전통편', '문원보불', '동문휘고', '규장전운', '오륜행실' 등의 책들이었다. 한편 그의 문화 정치는 중인 이하의 평민 들에게도 영향을 미쳐 위항 문학을 낳기도 했다. 인왕산의 경아전을 중심 으로 형성된 중인 이하의 위항인들이 귀족 문학으로만 인식되던 한문학의 시단에 대거 참여하여 '옥계시사'라는 그 들 독자의 시사를 결성하고 그들만의 공동 시집인 '풍요속선'을 발간하는 등 대단한 문화적 발전을 도모했던 것이다.

정조 시대는 이처럼 양반, 중인, 서얼, 평민층 모두가 문화에 대한 관심을 집약시킨 문예 부흥기 였다. 그러한 문예부흥을 가능하게 했던 근본적인 동력은 병자호란 이후 청을 오랑캐로 인식하던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 사상이 사라지고 민족주의가 고개를 들어 독자적인 문화를 이룩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된 자긍심 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18세기 문화의 전반에서 뚜렷하게 나타 나는데 이를테면 그림에서는 '진경산수'라는 국화풍, 글씨에서는 '동국진체'라는국서풍이 유행했다. 이는 조선 성리학의 고유화에 따른 조선문화의 독자성의 발로이며 이러한 축적 위에서 정조의 학자적 소양에서 기인하는 문화정책의 추진과 선진문화인 건륭문화의 수입이 자극이 되어 조선후기는 문화적 황금시대를 이룰수 있었다.
 

혜빈 홍씨


영의정 홍봉한의 딸이며 정조의 어머니이다. 1744년 세자빈에 책봉되어 사도세자와 가례를 올렸으며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은뒤 혜빈에 추서 되었다. 1776년 아들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궁호가 혜경으로 올랐고 17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됨에 따라 경의왕후에 추존 되었다. 아버지 홍봉한과 숙부 홍인한은 외척 이면서도 세자의 살해를 지지하는 입장에 있었던 까닭에 그녀는 세자의 참담한 운명을 그냥 지켜볼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1795년 남편의 참사를 중심으로 자신의 한많은 일생을 자서전 적인 사소설체로 적은 '한중록'을 남겼다. 이는 궁중 문학의 효시가 되고 있다.


효의왕후 김씨


좌참찬 김시묵의 딸이다. 1762년 10세 때 세손비로 책봉되어 정조와 어의동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776년 정조가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진봉 되었다. 그녀는 효성이 지극하여 시어머니 혜빈 홍씨를 지성으로 모셨기에 궁중에서 감탄 하지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우애가 극진하여 고모인 화완옹주가 그녀를 몹시 괴롭혔지만 조금도 개의치 않았고 왕가의 자녀들을 돌보는데 정성을 아끼지 않았다. 성품이 고결하고 사적인 감정에 치우치지 않아 사가에 내리는 은택을 매우 신중하게 처리하였다. 그래서 수진궁과 어의궁에 쓰고 남는 재물이 있어도 궁중의 물품은 공물이라 하여 일체 사가에 보내지 않았다 한다. 그러나 자녀를 생산하지 못한채 1821년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일생을 검소하게 보냈으며 생전에 여러차례 존호가 올려 졌으나 모두 거절 하였다. 능은 경기도 화성의 건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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