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궁궐이란 무엇인가?
왕조 국가에서 궁궐이란, 국가의 주권자이며 통치자인 국왕의 모든 공적∙사적 활동이 이루어지는 업무 및 생활의 공간을 말한다. 궁궐은 국왕의 존엄성을 드높이고 정령을 내는 곳으로, 이곳에서 국가의 정치적 결단과 종교적 지침이 내려진다.
궁궐(宮闕)의 문자적 해석을 보면, 궁궐은 궁전(宮殿)의 궁(宮)자와 궐대(闕臺)의 궐(闕)자를 합쳐서 이루어진 말인데, 조선의 궁궐 중에 궐대(망루)를 지니고 있는 궁은 경복궁(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있었으나 서십자각은 일제 때 헐려 없어졌다) 하나뿐이다. 따라서 경복궁을 제외한 나머지 궁궐은 원칙적으로 궁이라 불러야 맞는 말이지만 통상 모두를 궁궐이라 호칭한다.
궁궐의 종류에는 법궁(法宮)과 이궁(離宮)이 있는데, ①법궁은 국왕이 사용하는 궁궐들 가운데서 가장 으뜸이 되는 궁궐을 뜻하고, ②이궁은 국왕이 자의적으로 옮겨가며 거처할 궁궐을 말하는 것으로 규모와 크기는 법궁과 비슷하다.
조선의 5대 궁궐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덕수궁, 경희궁 등이 있다.
그 외에 궁으로 불리는 집은 ①별궁(왕이 살던 잠저), ②행궁(왕이 궁궐 밖에 행차 시 머무는 곳), ③궁방(궁궐 밖 왕의 부, 왕자, 공주가 사는 집), ④칠궁(고종 후궁 엄귀인∙영조 생모 숙빈 최씨 등 왕의 생모로서 왕비를 못한 7인의 사당) 등이 있다.
(2)궁궐의 양궐 체제란?
조선 궁궐은 원칙적으로 양궐(兩闕) 체제를 유지하였는데, 내란과 전란 등의 잦은 재해로 인해 목조건물인 전각에 쉽게 화재가 발생하였으므로, 이에 대비하기 위해 법궁(法宮)과 이궁(離宮)을 두어 양궐 체제로 운영이 되었다.
역대 임금의 양궐 운영 실태는 ①1대 태조에서 14대 선조까지는 법궁은 경복궁, 이궁은 창덕궁과 창경궁이었고, ②14대 선조 때부터 26대 고종 때까지는 법궁은 창덕궁, 이궁은 창경궁과 경희궁이었으며, ③고종 중기에는 법궁은 경복궁, 이궁은 창덕궁과 창경궁이었고, ④고종 말기에는 법궁은 경운궁(덕수궁), ⑤27대 순종 때에는 법궁은 창덕궁이었고 이궁은 허용되지 않았다. 특히 14대 선조 때에는 임진왜란으로 인해 모든 궁궐이 전소되어 임시로 경운궁에서 기거했다.
모든 궁궐에는 대부분 3개의 중심 전각이 있는데, ①임금의 절대적 권위를 극대화하기 위해 각종 의례가 행해지는 성스러운 장소인 정전(正殿)이 있고, ②임금이 일상적인 정치활동을 펼치며 공식적이고 공개적인 정무 협의가 이루어지는 장소인 편전(便殿)이 있으며, ③임금이 한 인간으로서 휴식 등 사생활을 펼치는 장소인 침전(寢殿)이 있다.
(3)조선궁궐의 사상(思想)
궁궐 전각의 형태는 유교 사상이 추구하는 “하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천인합일(天人合一) 정신”에 입각하여, 건물 바닥과 내부는 지상(사람)을 표현하고 건물의 지붕은 하늘을 표현하여, 바닥은 네모의 형태를 갖추고 지붕은 원형의 형태를 갖추도록 설계하였다.
임금은 하늘의 뜻을 땅에 펼치는, 하늘과 땅의 중간 메신저라고 우러렀는데, 이 사상이 전각 건축의 기본을 이루고 있다.
(4)궁궐 전각의 부분별 용어
경복궁 근정전을 기준으로 전각의 부분별 용어를 사진으로 제시하였는데, 이중 지붕의 장식인 취두(독수리 꽁지), 용두(용머리), 토수(물고기 머리)는 건물의 화재를 방어하는 주술적 의미가 있고, 잡상은 부정한 기운을 방어하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전각의 크기를 표시하는 단위는 기둥과 기둥 사이를 1 간으로 하여, 근정전인 경우 앞면이 5 간, 옆면이 5 간으로 넓이는 25칸이 된다.
(5)궁궐의 건물 짓기
궁궐 전각을 볼 때는 내가 건물을 짓는다고 생각하면서 보는 것이 요령이다. 터를 고르고, 기초를 다진 후, 기단을 쌓고, 주춧돌(초석)을 놓는다.
주춧돌 위에 기둥을 세우고, 기둥과 기둥들을 가로(방)목과 세로(보)목으로 연결하여 고정시킨다. 기둥을 연결한 방과 보 위에 [︿]자 모양의 지붕을 올린다.
지붕의 선에 곡선을 주기 위해 서까래를 받치는 보 위에 가로로 도리를 댄다. 지붕을 덮고, 벽체를 만들며, 문과 창을 내고, 온돌이나 마루를 깔며, 천장을 만들고, 장판과 도배를 하면 건물이 완성된다.
(6)공포(栱包)와 단청(丹靑)
공포(사진 참조)란 주두, 소로, 첨차, 재공, 살미 등으로 구성되는 부재로 상부(처마)의 무게를 기둥에 전달하여 힘을 받혀주는 역학적 의미가 있고, 장식적 측면에서 건물의 양식을 결정지어 주는 중요한 부재군이다
공포가 있고 없음에 따라 공포건물과 민도리집 건물로 나뉘어지고, 공포양식은 다시 주심포양식, 다포양식, 익공양식, 하앙식으로 나눈다. 우리 옛 건물들은 규모와 용도에 따라 양식을 갖추어 건물의 상하 위계, 즉 건물의 계급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단청은 다분히 고려 때의 불교 문화에서 전수되어 불화의 미를 표현하고 있다.
(7)전각의 지붕 형태
궁궐 전각의 지붕은 그 건물의 주인에 따라 여러 형태 나누어지는데,
①팔작지붕은 조선의 대표적 건물지붕 형태로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모두 갖춰 장식성이 강하고 화려하며 가장 품위 있는 지붕으로, 궁궐의 중요 전각은 대부분 팔작지붕이다.
②우진각지붕은 용마루와 내림마루만 있고 추녀마루가 없는 지붕 형태로 궁궐의 정문은 모두 우진각지붕이다.
③맞배지붕은 경사진 지붕을 앞뒤로 맞놓은 [Λ]자형의 지붕으로 아주 간단한 형태의 지붕이다. 이 지붕 형태로는 종묘의 정전이 대표적이다.
④모임지붕은 용마루와 내림마루 없이 지붕 위 꼭짓점을 절병통으로 마감한 지붕 형태를 말하는 것으로 추녀마루의 수효에 따라 사모지붕, 육모지붕, 팔모지붕으로 나뉜다.
(8)지붕 위의 잡상(雜像)
잡상은 건물의 화재나 액을 막기 위해 지붕 위에 설치하였는데, 잡상의 주인공들은 삼장법사-손오공-저팔계-사오정-이귀박-이구룡-마화상-삼살보살-천산갑-나토두 등이다. 지붕을 장엄하게 장식하는 뜻도 있으며 경회루가 11개로 가장 많고 숭례문이 9개, 근정전이 7개 등이며 대개는 5개를 장식했다.
(9)경복궁(景福宮)의 창건(創建)
경복궁 창건의 기본구도는 중국 공예기술서인 주례 [고공기]의 좌묘우사(左廟右社), 면조후시(面朝後市), 전조후침(前朝後寢)이라는 궁궐배치 원리를 따랐다. 궁궐을 중심으로 동에는 종묘, 서에는 사직단을 두고, 궁궐 앞에는 업무공간, 궁궐 뒤에는 왕족의 생활공간을 두었다.
무학대사와 정도전이 도선비기(도선이 지은 국토풍수서)를 참조하여 북악산 아래에 터를 잡았고, 심덕부가 이끄는 신도궁궐조성도감이라는 관청이 설치되어 궁궐공사가 시작되었다.
경복궁의 전각공사는 1394년 12월 4일, 심덕부 지휘하에 전국의 스님과 목공, 석공 등 기술자들과, 경기도에서 9천5백여 명, 충청도에서 5천5백여 명의 공역 인원을 동원하여 급속도로 공사를 진행하였다.
공사착수 10개월만인 1395년 9월말에 전각 390여 칸, 일반 건물 365칸 등 총 755칸 그리고 후원(청와대 자리)이 완공되어, 조선의 새 왕궁이 그 위용을 드러냈다.
(10)경복궁의 최초 설계자
경복궁의 전각을 최초로 설계하고 시공한 사람은 환관의 신분인 김사행이다. 물론 최초의 경복궁은 소실되어 없어졌지만, 복원공사가 원래의 설계도에 의해 건축되었기 때문에 현재의 근정전,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은 환관 김사행의 솜씨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신분이 환관이었기 때문에 천재 건축가 김사행의 이름은 사라지고, 정도전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사행은 원래 원나라 황실의 환관이었는데, 고려 공민왕 때 노국공주와 함께 들어와 고려 왕실의 내시부사가 되었다. 그는 원나라에 있을 때부터 대규모 토목공사에 대해 비범한 솜씨를 보였었다.
조선 개국 초, 왕실 내시부의 제도를 정비한 장본인이기도 하였는데, 환관 김사행은 조선 궁궐 건축의 기본골격을 처음 세워놓은 숨겨진 인물이다.
환관 김사행은 세자로 책봉된 방석을 수발하는 내시로 일하다가, 1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에게 방석과 함께 살해되었고, 이때부터 경복궁 설계 및 건축감독의 주인공인 김사행의 이름은 완전히 사라졌다.
(11)경복궁 전각별 명칭
궁궐 건물은 건물 주인의 신분에 따라 건물 이름의 끝 글자가 달랐는데, 서열로 보면 대체로 [전(殿)∙당(堂)∙합(閤)∙각(閣)∙재(齋)∙헌(軒)∙루(樓)∙정(亭)]이 된다.
예로 전(殿)은 근정전∙인정전, 당(堂)은 자선당∙희정당, 합(閤)은 의두합, 각(閣)은 흠경각∙서향각, 재(齋)는 집옥재∙낙선재, 헌(軒)은 석복헌, 루(樓)는 경회루∙주합루, 정(亭)은 향원정∙부용정 등이 있다.
경복궁 명칭과 전각 이름은 태조의 명으로 정도전이 지어 임금에게 바쳤으며, 그 후 부분적인 개명을 제외하고는 현재까지 그때의 이름이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
경복궁 낙성 후, 시경의 주아편에 나오는 [군자만년(君子萬年) 개이경복(介爾景福)],즉 [국왕의 만년을 빛내도록 복을 빈다]라는 글귀에서 [경복(景福)]을 따서 궁궐 이름을 [경복궁(景福宮)]이라 했다.
(12)경복궁 전각 배치도(별도)

(13)경복궁과 중국 자금성의 비교
중국의 자금성은 경복궁보다 12년 늦은 1407년에 명나라 황제 영락제가 지었다. 벌판에 버티어 서 있는 자금성은 탄성이 나올 만큼 거창하고 엄격하며 단호한 대칭의 직선은 숨이 막힐 정도로 삼엄하다.
경복궁은 중국 궁제를 참고했으나 답습하지는 않아 독자적인 모습을 지니고 있다.
대지의 크기는 경복궁이 417,000㎡(약 127,000평)이고, 자금성은 720,000㎡(약 220,000평)으로 자금성이 경복궁보다 1.7배 정도 더크다. 궁궐 내 건물의 넓이는 경복궁이 7,225칸이고, 자금성이 8,889칸이며, 정전의 크기는 경복궁 근정전이 195평이고, 자금성 태화전이 600평이다.
경복궁이 자금성에 비해 현격히 작은데 대해, 조선 최초의 헌법인 [경국전]에 의하면 <궁원이 사치하면 백성을 수고롭게 할 뿐 아니라 재정을 손상시킬 것이며, 누추하면 조정의 위엄이 떨어지므로,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으며 화려하되 사치하지 않아야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14)경복궁 궁성(담장)의 축조
궁성은 궁을 지키는 담장과 망루 그리고 출입문을 묶어 말하는데, 경복궁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직사각형의 윤곽으로 둘러 쌓여 있다.
남쪽 양쪽 끝에는 망루인 동십자각과 서십자각이 있고, 정남쪽에 광화문, 정북쪽에 신무문, 동쪽에 건춘문, 서쪽에 영추문을 세웠다. 궁성의 총 길이는 1,933.4m에 이른다.
경복궁 전각이 세워진 2년 뒤인 겨울부터 왕궁을 보호하는 성벽 궁성을, 박위 지휘하에 스님, 석공, 군인 3천7백 명으로 축조하기 시작하였다.
궁성은 약 5m 높이에, 두께는 2m정도이고, 외적에 대한 방어보다는 궁궐의 위엄을 더하고 궁전을 호위할 목적으로 쌓았다.
일제 때 삼청동길 확장공사로 동쪽 궁성의 절반 정도가 궁역 안으로 5m쯤 밀려들어갔고, 이로 인해 동십자각은 도로의 중앙에 덩그러니 서있으며, 효자동에 전차길을 내면서 서쪽의 서십자각은 없어졌다.
(15)공궐이 된 경복궁
[1차 왕자의 난]으로 정종이 2대 임금으로 등극한다. 정종은 정치적 야망이 없고, 권력싸움이 싫어했으며, 한양보다 고향 같은 개성이 좋았다. 형제의 난으로 피비린내가 나고 정떨어지는 곳이어서 더욱 한양을 싫어했다.
정종은 어머니 신의왕후의 제릉(경기도 개평군) 참배 후 개성 수창궁(건국이전 이성계 처소)에 머물렀다. 이로 인해 경복궁은 빈궁이 되었고, 사기를 보관하는 사고와 군량미 비축창고로 전락하였다.
[2차왕자의 난] 후 즉위한 태종은 다시 한양으로 올라왔지만 경복궁이 싫어, 창덕궁을 새로 짓고 그곳에 머물렀고, 경복궁은 계속 빈궁으로 남아 있었다. 다만 명나라 사신 접대를 위해 경회루를 확장하였다
(16)세종 이후의 경복궁
경복궁이 안팎으로 법궁다워진 것은, 세종이 즉위 8년인 1426년부터 정무처와 거처를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겨 머물기 시작하면서였다.
곧이어 세종은 경복궁 여러 건물의 보수를 시작했는데, 동궁 창건∙사정전과 경회루 중수∙광화문 개축∙문소전 개축∙강녕전 개축∙신무문 신축∙보루각 설치∙흠경각 조성∙선원전 이축∙교태전 창건 등 면모를 크게 바꾸어 왕궁다운 궁궐로 바꾸었다.
그러나 세조 때 계유정란으로 파란을 일으켰던 장소인데다 인왕산 등지에서 궁궐 안이 들여다 보이고 분위기가 엄격하여, 대부분의 임금들이 경복궁에 거처하기를 기피하였고, 대신 지리적 조건이 자연스럽고 아기자기한 창덕궁을 더 선호하였다.
(17)임진왜란과 경복궁
선조실록에 의하면, 중종반정 이후 선조 때까지는 경복궁이 임금의 거처로 사용되었으나, 임진왜란으로 선조가 도성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하자, 흥분한 백성들이 왜군이 한양에 입성하기 전에, 모든 궁궐을 불태워 터전만 남긴 채 소실되고 말았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종군승으로 한양에 입성한 제다쿠의 [조선일기]와 소서행장 휘하의 선발대 장수 오오제키의 [조선정벌기]에서 경복궁을 처음 본 소감을 기록하고 있어, 필시 왜군에 의한 방화로 보인다.
피난에서 돌아 온 선조는 궁여지책으로 월산군의 사가였던 정릉 행궁(나중에 경운궁 혹은 덕수궁)에서 거처하였다.
(18)방치된 경복궁 터
조선 전기의 명군은 세종을, 후기의 명군으로는 정조를 꼽는다. 세종은 경복궁을 중심으로 국정을 펼쳐나갔지만, 개혁군주 정조는 화성 축조에 전념하여 경복궁에는 관심이 없었다.
정조의 뒤를 이은 순조(영조 계비 정순왕후 수렴청정)부터 헌종∙철종까지는 외척인 몇몇 명문세족이 임금을 위해서가 아니라 왕비를 위해서 나라를 쥐고 흔들던 세도정치가 판을 치는 시대였다.
세도가문은 궁궐보다는 가문의 호화로운 개인저택에 더 관심을 쏟았는데, 이를 보고 심각하게 고민하던 흥선대원군은 가물거리는 왕실과 종친의 위상을 끌어 올려 왕권을 강화해야 하겠다는 결심을 한다
(19)흥선대원군의 꿈
후사없이 25대 철종이 승하하고, 왕실 최고 어른인 대왕대비 신정왕후는 흥선대원군의 여망에 따라 그의 12살 된 둘째 아들을 철종의 후임으로 결정하였는데, 그가 26대 고종이다.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을 맡은 흥선대원군은,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 나라의 체통을 바로잡기 위해 경복궁을 다시 지어야 한다고 대왕대비 신정왕후에게 주청하여 경복궁 중창을 결정하였다.
임진왜란으로 폐허가 된지 무려 273년 만에, 경복궁 중창을 위해 새 궁궐영건도감을 설치하고, 건설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왕실과 종친∙양반∙정부관리들이 우선적으로 솔선수범하여 재원을 출연하였다.
(20)경복궁의 중창
또한 일반 백성들에게도 원납전(기부금)∙결두전(부가세)∙문세(통행세) 등의 세금을 징수하고, 나중에는 모자라는 재원을 충당하기 위해 당백전(일종의 국채)의 발행을 무리하게 시행하였다.
1865년 4월 13일 새벽 공사를 시작하여 1868년 7월 2일, 13만평의 대지 위에 330여 동의 전각 7,225칸 반, 후원의 전각 232칸 반, 궁성 1.037칸 반, 후원의 둘레 698칸 반 규모의 경복궁 궁궐 완성하였다.
고종과 왕실 및 중신들은 1868년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기고, 1873년 8월에는 임금의 내탕금으로 궁성 안 북쪽에 건청궁을 지었다.
(21)일제강점기의 경복궁
흥선대원군에 의해 경복궁을 중창한지 40여 년, 일제는 일부 전각만 남기고 대부분의 건물들을 철거하여 조선의 상징적 요소를 없애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일제는 조선총독부 청사를 짓기 위해, 흥례문과 주위 행각∙영제교∙유화문 그리고 광화문과 흥례문 사이의 담장∙용성문∙협생문 등을 철거했다.
또한 조선 백성을 현혹하기 위한 총독부 행사(박람회)를 기화로 동궁 일원과 궐내각사 일대를 말끔히 헐었다. 결국 경복궁 전각은 본래의 10분의 1 정도인 36동만 남았다.(330동→36동)
(22)경복궁 옛모습 살리기
광복 후 50여 년 가까이 일제의 상처를 그대로 안고 오다가, 1990년부터 문화재청이 [경복궁 옛모습 되살리기] 작업에 들어가 우선 조선총독부 청사를 걷어냈다.
흥례문과 행각, 영제교를 복원하고, 임금과 왕비의 침전 및 왕세자의 동궁, 제례공간인 태원전 등을 다시 살리는 작업을 시행하여 일부나마 옛 경복궁 면모를 회복하였다.
광화문 복원을 포함, 2010년까지 93동의 공사가 끝나면, 경복궁은 12만6,337평의 터전위에 129동의 전각이 갖추어져, 흥선대원군 때 중창된 전각 330여 동의 40% 정도가 우선 모습을 보인다. 이후 20년에 걸친 장기 복원사업이 진행된다.
(23)창덕궁(昌德宮)의 창건
창덕궁은 백악산의 셋째 봉우리인 매봉에서 뻗은 산줄기 중턱에 위치한 궁으로 태종이 경복궁의 별궁으로 짓게 하여, 1405년에 완공하였다. 창덕궁은 산지의 지형적 특성에 맞추어 건물을 배치하였고, 아주 자연스럽고 자유로움을 한껏 살린 궁궐이다. 이로 인해 여러 임금들은 경복궁보다 창덕궁을 선호하였다.
창덕궁은 다른 궁에 비해 대체로 원래의 궁궐 규모를 잃지 않고 유지되었는데, 임금과 신하들이 정사를 돌보던 외전과, 왕과 왕비의 생활공간인 내전, 그리고 휴식공간인 후원으로 나누어져 있다.
창덕궁 창건을 주도한 임금이 태종이라면, 그 건설을 직접 지휘하여 기본골격을 만든 사람은 박자청이라는 사람이다. 경복궁의 설계자가 환관 출신 김사행 이었듯이, 박자청 역시 환관 출신이다.
일제는 왕조의 상징인 궁궐을 계획적으로 훼손하기 시작하였는데, 조선왕실을 일본 황실의 휘하에 편입하여 이왕가(李王家)로 격하시키고, 창덕궁을 일본 관리들과 일본 상공인 그리고 하수인 노릇을 하는 친일파들의 유희장소로 변질시켰다.
(24)창덕궁의 전각 명칭

창덕궁은 가장 오래된 궁궐 정문인 돈화문, 신하들의 하례식이나 외국사신의 접견장소인 인정전, 국가의 정사를 논하던 선정전 등의 치조공간(외전)이 있고, 왕과 왕비 및 왕가 일족이 거처하는 희정당, 대조전 등의 침전공간(내전)이 있으며, 연회∙산책∙학문을 하는 매우 넓은 휴식공간인 후원(금원)이 있다.
치조공간의 건축은 왕의 권위를 상징하여 높게 지었고, 침전공간은 정전보다 낮고 간결하며, 후원은 자연지형을 위압하지 않게 작은 정자를 많이 지었다.
(25)창덕궁 후원(後苑)
후원은 지형과 산록의 지세에 따라 각양각색의 집을 짓고 금수를 놓아 길러 정취를 더하게 하였다. 건물도 평면을 사각에서 육각으로 하고, 지붕도 기와, 초가, 수피지붕 등 형태나 수법이 다양하여 순수 한국식 건축양식과 조경양식을 엿볼 수 있게 하였다.
후원은 태종이 1406년 창덕궁 완공 후 북동쪽에 화려한 선온정을 세우고 그 앞에 연못을 파서 연향과 관등놀이 등 축하유연을 베푼 것이 오늘의 후원으로 확장되었다.
후원은 울창한 숲과 연못, 크고 작은 정자들로 자연경관을 살린 점이 뛰어나며,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400여 년이 넘는 오래된 나무들도 즐비하게 있다.
후원은 크게 5개 영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①부용지 중심의 영역, ②애련정 중심의 영역, ③관람정 중심의 영역, ④옥류천 중심의 영역, ⑤청심정 중심의 영역 등으로 나눈다.
(26)창경궁(昌慶宮)의 창건과 변화
창경궁은 9대 성종이 정희왕후(세조비) ∙ 안순왕후(예종비) ∙ 소혜왕후(인수대비-성종 생모) 등 세 분의 대비를 모시기 위해 옛 수강궁 터에 창건한 궁이다. 수강궁이란,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위하여 세종이 세운 궁이다. 창경궁 전각 이름은 서거정이 짓고, 김종직이 기(記)를 썼다.
창경궁은 창덕궁과 연결되어 동궐(경복궁 동쪽에 있는 궁)이라는 궁역을 형성, 독립적인 궁궐의 역할을 하며, 창덕궁의 모자란 주거공간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한다.
임진왜란 때 민란으로 모든 전각이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때 재건되었고, 이괄의 난과 23대 순조 때 대화재가 발생하여 내전이 소실되었다.
이때 살아남은 명정전∙명정문∙홍화문은 17세기 조선시대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으며, 정전인 명정전은 조선왕궁 법전 중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27)경운궁(慶運宮)의 역사-1
현재의 덕수궁은 본래 세조의 장자인 도원군 장의 큰 아들, 즉 세조의 큰 손자인 월산대군 정의 개인 저택이었다. 도원군은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18세에 사망하였고, 이에 따라 세자빈 한씨는 출궁하게 되었으며, 나라에서 이 집을 지어주어 그의 두 아들과 함께 살게 되었다.
덕수궁은 원래 궁터가 아니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무덤인 정릉이 있었던 곳으로, 태종 때 이 능이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겨지고 빈터로 남아 있다가 세조 때 월산대군의 집이 들어선 것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의주로 난을 피하였던 선조가 1년 만에 다시 돌아와 보니, 한양 내에는 거처할 만한 곳이 없을 정도로 황폐해졌으며, 부득이 이곳을 행궁으로 정하면서 [정릉동 행궁]이라 하였다.
선조는 이곳에서 거처하며 내외 정무를 보다가 세상을 떠났고, 뒤를 이은 광해군 역시 이곳에서 즉위하였다. 즉위 초 행궁을 넓혀 지금의 정동 1번지 일대를 대부분 궁궐의 경내로 만들었다.
(28)덕수궁(德壽宮)의 역사-2
광해군은 1611년 창덕궁으로 이거 하면서 이 행궁을 [경운궁(慶運宮)]이라 이름하였고, 1618년에는 그의 계모인 인목대비를 이곳으로 유폐시키고 대비의 칭호를 폐지하였으며, 경운궁은 서쪽에 있는 [서궁]이라 칭하게 하여 그 격을 하락시키면서 점차 퇴락의 길을 걷게 된다.
아관파천으로 러시아공사관에 도피해 있던 고종은, 1년여 만에 경운궁으로 이어하여 집무를 시작함으로써, 경운궁은 대대적인 확장 공사가 이루어지고, 인근 정동일대는 정치의 중심지역이 되었다.
1897년 9월 17일, 고종의 황제 즉위식이 거행되면서 이 궁은 대한제국의 정궁이 되었으며, 연호를 [광무]라 하였다. 1900년 봄에는 발전소가 설치되어 궁내에 전기가 공급되기 시작하였다.
1907년 일제의 횡포로 고종이 퇴위하고, 순종이 즉조당에서 즉위하였으며, 이때 경운궁은 덕수궁(고종의 장수를 빈다는 뜻)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 이후 덕수궁은 3분의 1의 크기로 축소되었다.
(29)경희궁(慶熙宮)의 비극
경희궁은 인조의 아버지 정원군(추존 원종)의 사저였던 자리에 광해군이 이궁으로 창건하였다. 경희궁의 규모는 이름있는 전각이 120여 동이고 부속 건물을 포함하면 수천 칸의 독립된 큰 궁궐이었다. 처음 명칭은 경덕궁이었으나 정원군의 시호가 경덕이어서 영조 때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인조 이후 철종에 이르기까지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이곳 경희궁을 이궁으로 사용하였다.
19대 임금인 숙종이 경희궁에서 출생하였고, 경종∙정조∙헌종 등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식을 거행하였으며, 숙종∙영조∙순조가 이곳 경희궁에서 세상을 떠났다.
경희궁은 일제 때 일본인 자제가 다니는 경성중학교를 세우면서, 궁궐이 훼손되어 궁궐로서의 모습을 잃어버렸다.
서울시의 [경희궁 터 복원과 시민사적 공원 조성계획]에 의거 복원사업이 현재 진행 중이며, 1988년 흥화문, 1991년 숭정전, 1998년 자정전, 2000년 태령전 등이 복원되었다.다만 경희궁의 정문인 흥화문은 원래의 위치에 구세군회관이 있어 서쪽으로 100여m 이동되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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