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김<새기다>
이하 {네이버} 자료
새김 1
명사 물건의 바탕에 글씨나 형상을 파는 일.
새김 2
1. 명사 글의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함. 또는 그렇게 풀이한 글.
2. 명사 낱낱의 한자를 읽을 때, 한자의 음(音) 앞에 풀이하여 놓은 뜻.
새김 3
명사 소나 양 따위의 반추 동물이 먹은 것을 되내어서 씹는 일.
새기다 1
1. 동사 글씨나 형상을 파다.
2. 동사 잊지 아니하도록 마음속에 깊이 기억하다.
3. 동사 적거나 인쇄하다.
새기다 2
1. 동사 글이나 말의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하다.
2. 동사 다른 나라의 말이나 글을 우리말로 번역하여 옮기다.
새기다 3
동사 소나 양 따위의 반추 동물이 먹었던 것을 되내어서 다시 씹다.
우리 말 '새김<새기다>'의 기본적인 의미는
(어디에다) 刻印(하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단어이다.
거기에서 유래하여 '기억'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이고
혹은 '잘 받아들이다.'라는 의미에서는
어떤 대상이나 말에 대해서 '잘 알아듣는다, 받아들인다.'라고 쓰여서
그 대상이나 말에 대해서 중요하고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알아듣는다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것 같다.
그 연장선에서 반추동물인 소 등은 음식을 그냥 삼키는 것이 아니라
되새기고 되새겨서 소화시키는 것처럼
어떤 대상이나 조언에 대해서 반복적으로 '그 의미를 헤아려 본다.'라는 의미로도 쓰이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우리말 용례에서 생각해 보면
새김이라는 뜻의 범주는 '기억'이라는 범주와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공유하는 점이 많은 것 같다.
이런 점에서 '새김'은 '기억'의 유의어라고 볼 수 있다.
경험(보고, 들음 등)에 대해여
[기억 - 새김 - 헤아림<量, 照見> - 새김 - 앎 - 기억/새김]
이런 흐름이 가능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붇다나 붇다의 제자들로부터 수행방법을 ① 듣고서
혹은 경문을 ① 읽고 그 내용을 기억한다.
이때 <보거나 들은> 내용이 A를 가리키는데 B를 생각하고 있다면
동쪽을 말하는데 서쪽으로 이해하고 있는 경우이다.
이것을 동서남북도 모른다고 하고
계속해서 말해 주어도 그 의미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면
牛耳讀經이 되고 馬耳東風이 된다.
그렇게 되면 <보고 듣기>는 했는데 기억에도 남아있지 않고
기억하고 있더라도 잘못된 기억이고
그 내용은 오랫동안 남아 있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그에게는 印象적이지도 않고 의미 없는 기억이므로.
반면에
[ “idhāvuso sāriputta, bhikkhu
atthakusalo ca hoti, dhammakusalo ca, byañjanakusalo ca, niruttikusalo ca, pubbāparakusalo ca.
ettāvatā kho, āvuso sāriputta, bhikkhu khippanisanti ca hoti kusalesu dhammesu,
suggahitaggāhī ca, bahuñca gaṇhāti, gahitañcassa nappamussatī”ti.
도반 사리뿟따여, 여기 비구는 뜻에 능숙하고 법에 능숙하고
자구(字句)에 능숙하고 언어에 능숙하고 선후의 순서에 능숙합니다.
도반 사리뿟따여, 이렇게 비구가 유익한 법들을
재빠르게 알고 잘 이해하고 많이 이해하고 이해한 것을 잊어버리지 않습니다.]
이와 같다면 잊어버리지 않고 忘却(망각)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보고 들은>것을 곰곰이 씹고 씹어 反芻(반추)한다면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그렇게 기억된 ② 상태에서 그 기억에 ③ 따라 그대로 흉내를 낸다.
즉 10미터 가다가 3거리가 나오면 우측으로 가라.
우측으로 가다가 100미터 즈음에서 4거리가 나오면 우회전을 하라.
그리고 … 음~ … 얼마 즈음에서 어디로 가라고 했지?
이럴 때 그냥 가봅니까? 아니면 되돌아 와서 다시 <보거나 듣습니까?>
가능할 수만 있다면 그 자리에서 다시 反芻(반추) - 기억을 되살려서 -
기억이 떠오르지 않으면 새로 다시.
다행이 떠오르면 다행, 다행, 다행.
이 상황이
[api ca kho opapātiko opapātikaṃ sāreti —
‘sarasi tvaṃ, mārisa, sarasi tvaṃ, mārisa, yattha mayaṃ pubbe brahmacariyaṃ acarimhā’ti.
so evamāha — ‘sarāmi, mārisa, sarāmi, mārisā’ti.
dandho, bhikkhave, satuppādo; atha so satto khippaṃyeva visesagāmī hoti.
그러나 [먼저 그곳에] 화현한 자가 [나중에 그곳에] 화현한 그에게,
'존자여,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존자여,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우리는 전생에 청정범행을 닦았지 않습니까?'라고 기억을 되살리게 한다.
그러면 그는 '존자여, 기억합니다. 존자여, 기억하구말구요.'라고 말한다.
그러면 그에게 느리게 마음챙김이 일어난다. 그러나 그 중생은 재빨리 특별함으로 인도된다.]
동일한 내용이
[♦ “‘buddho janindatthi manussaloke,
♦ kāmābhibhū sakyamunīti ñāyati.
♦ tasseva te puttā satiyā vihīnā,
♦ coditā mayā te satimajjhalatthuṃ.
“부처님은 인간의 세상에서 지배자입니다.
그분은 감각적 욕망을 다스리는
사꺄무니라고 알려졌습니다.
이들은 그분의 아들들인데 마음챙김을 놓아버렸습니다.
저의 질책을 받은 그들은
마음챙김을 다시 가지게 되었습니다.]이고
[tesaṃ, bhante, gopakena devaputtena paṭicoditānaṃ
세존이시여, 그들은 신의 아들 고빠까의 질책을 받은 뒤
dve devā diṭṭheva dhamme
두 명의 신은 그때 그 자리에서 바로
satiṃ paṭilabhiṃsu kāyaṃ brahmapurohitaṃ,
마음챙김을 닦아서 범보천의 신의 몸을 받았으며
eko pana devo kāme ajjhāvasi.
한 명은 계속 감각적 욕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동일한 내용은
[♦ tesaṃ duve vīriyamārabhiṃsu,
♦ anussaraṃ gotamasāsanāni.
♦ “idheva cittāni virājayitvā,
♦ kāmesu ādīnavamaddasaṃsu.
그들 가운데 두 명은 정진을 시작하여
고따마의 교법을 계속해서 생각하였다.
바로 여기서 마음을 티끌이 없게 한 뒤
감각적 욕망들에서 위험을 보았다.]
두 명에게 해당되는 동일한 내용이다.
즉 <satiṃ paṭilabhiṃsu kāyaṃ brahmapurohitaṃ>과
<anussaraṃ gotamasāsanāni.>는 같은 현장에 대한 다른 표현이다.
본문에 나오는 중심 되는 명령은 <kāme, kāmesu ādīnava>에 대한 교설
[붇다의 명령을 반복적으로 반추하고 새겨서…]
만약 이와 같은 맥락에서 sati를 '새김'으로 번역한 것이고
우리말 용례에 맞게 사용한다면 훌륭한 번역어로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