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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라의 편지 - 5

작성자해맑은|작성시간22.08.12|조회수112 목록 댓글 1

7 – 「의혹부대

 

나의 친애하는 제7군의 임무는 ‘의혹’이라는 무기를 써서 인간들을 무력화시키는 일이다.

그대들은 제6군 ‘공포’부대와 더불어 주도면밀한 합동작전을 펼쳐야 한다.

그대들의 효율적인 양동 공격 앞에 인간들은 

한밤중에 갑자기 마주친 차량 불빛에 혼이 나간 사슴처럼 꼼짝도 못하게 될 것이다.

 

현대는 회의론자들의 시대이다. 한 때는 회의론자가 많지 않아서

우리는 부득이 상반되는 악(惡)이라 할 수 있는 경신(輕信)을 동원해야 할 경우가 많았지만

이제 어떤 종류의 확신도 갖지 못한 인간들의 떼거리로 마주하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큰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종교와 사회와 정치,

그리고 과학에 대한 오래된 믿음까지 모조리 걷어차 버렸다.

 

그것들에 비해서는 뒤늦게 등장한 편인 회의적 태도를 자유라 부르며 환호작약하고 있지만,

사실은 갈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고 있는 모습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가 중생들을 이런 혼돈 상태에서 계속 허우적거리게 만들 수만 있으면

그들은 절대로 우리 손아귀를 빠져나가지 못할 것이다.

 

회의적 의심이란 지도도 안내자도 없이 사막을 헤매고 있는 것에 비유된다.

이 비유는 그 출처를 생각할 때 인정해주고 싶지는 않지만 참 적절한 것이다.

중생들이 믿음을 상실하게 되면 도덕의 기반이 사라지게 되며

따라서 달콤하거나 혐오스러운 온갖 종류의 악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런 현상을 이 시대에서 목격하고 있다.

 

지금의 현실은 내가 특별히 즐겼던 제정로마시대의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당시는 옛 신앙이 공공연히 조롱당하고, 도덕성이 나약함의 증거로 간주되는 데 반해,

이기적 자기만족의 추구는 유일한 삶의 목적으로까지 여겨지던 시대였다.

실로 멋진 잔치판이었지!

 

인간들이 그 정도까지 타락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 일이었지만,

사실은 내가 꼭 한번 벌려보고 싶었던 희생제였었지.

그 이후 오랜만에 이 시대에 와서 다시 우리는

무분별한 회의주의가 똑똑하고 세련된 태도라고는 믿게끔 만드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가 도덕성의 붕괴로 다시 재현될 것은 뻔하다.

 

모든 행위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결과가 뒤따른다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한,

다시 말해 업의 법칙을 믿지 못하고 의심하는 한 인간들은 자신들의 탐욕을 영원히 억제치 못할 것이다.

(그래 내게는 그런 탐욕을 부추기는 데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만한 재주를 가진 군대가 따로 또 있지!)

 

우리 쪽에서 보아 썩 좋은 점은 그들이 아무리 믿지 않으려 한들

인과법의 효력이 줄어드는 일은 절대로 없다는 사실이다.

(가만! 그들이 그걸 알아차리게 해선 안 된다.)

그들은 멋도 모른 채 방탕과 폭력을 일삼다 죽은 후에도 여전히 우리의 노복신세가 될 테지.

회의를 일삼은 만큼이나 노복으로서의 쓸모는 줄어들 테지만. 

 

회의론이 만연한 시대가 낳는 또 다른 현상을 한 번 살펴보자. 

설사 인간들이 인생에서 벌어지는 제반사에 대해 그 의미를 묻기 시작한다고 해도,

많은 사람들이 그러고 있는 게 우리로서는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 의문을 풀어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을 찾아 낼 수도 없고

또 어쩌다 우연히 찾는다 해도 그걸 붙들고 늘어지지도 못할 것이다.

 

우리는 회의적인 시대가 도래 할 때마다 온갖 종파와 사교(邪敎)가 만연하는 것을 보아왔다.

미로에서 빠져나오려 발버둥치는 가련한 인간들은

어떤 것이 자신을 곤경에서 헤어나게 해줄 수 있는 길인지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승려에게서 사제에게로, 사제에게서 무당에게로, 그리고 되풀이해서 사제와 승려를 찾아 끝없이 방황한다.

그러다가는 어느 순간에 그 모두를 사기이고 시간 낭비라며 팽개쳐 버리고는

냉혹한 현실을 잠시라도 잊기 위한 방편으로 감각적 쾌락에 온 몸을 내던진다

 

인간들에게 이 냉소적이고 부도덕한 마음의 틀이 계속 힘을 쓰도록 조장하라,

옛 지혜를 비웃고 당대의 새롭고 유행에 걸맞은 기발한 언동들에 휘둘리게 하라.

중생들의 탐욕이나 욕정에 제약을 가하려드는 가르침일수록 

그런 가르침들을 우리가 밑바닥에서부터 뒤집어 엎어버리는 일은 

참으로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다,

 

자신이 길을 잃고 헤매도록 만드는 의심을 저들은 오히려 합리적 태도라 우기는데

그대들은 저들과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진짜 합리주의라면 이보다 더 우리에게 위험한 것은 달리 또 없을 것이다.

 

성가신 몇몇 소수의 인물들이 존재라는 현상에 대해

진지하게 비판적으로 따지고 들었기 때문에 우리의 사기극을 간파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들의 ‘비판적 사고’ 위에 숨어있는 욕망을 어떻게든 찾아내서 이를 적극 조종하라.

진정한 질문을 던지기에 이르도록 저들을 방치하지 말라.

 

우리의 의도대로 잘 관리되기만 한다면 인간들은 아주 흥미로운 자기모순에 빠질 것이다.

종교에 냉소 짓는 그들이 신문에 실린 오늘의 운세에 대해서는 아무런 저항감도 느끼지 않는다.

업보설(業報設)을 미신으로 치부하면서도 도로 위에 파인 금은 재수 없다면 밟지 않으려 한다.

낙태를 정당화하기 위해 인간이란 유기체가 단순히 전기 자극으로 연결된 세포덩이에 불과하다고 주장하면서도

로또 당첨을 위해서라면 점쟁이나 귀신에게 매달리는 짓을 서슴지 않는다.

 

자신들의 현대적인 합리주의를 자랑스럽게 여기면서도 너나없이 미신에 빠져있는 것이

그들의 우스꽝스러운 자화상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심각한 부류가 과학적 훈련을 받은 자들인데, 

유물론적 미망에 빠진 나머지 명백한 증거를 두고도 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독단적인 아집을 부리는 자들이 바로 그런 자들이다.

(하지만 요즘 들어 몇몇 물리학자들 때문에 조금 골치가 아파졌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재간이 없구만……,

어쩐지 우리 바가지의 물이 새고 있다는 낌새가 있어.)

 

, 그럼 요약해 보자.

인간들로 하여금 헛된 생각들 속을 끝없이 헤매게 하라.

다양한 선택의 기회를 주어 혼란에 빠뜨리고 인생을 목적도 없이 방황하게 내버려 두라.

도덕은 곧 통제이고, 절제는 곧 억압이라고 일러주어라.

천박한 냉소적 태도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예리한 지성의 발로라고 칭찬해주어라.

세월을 이겨온 진실들을 격하시키고 유행을 부추겨주어라.

과똑똑이 짓을 일삼도록 내버려두라, 

정신을 수습하기 시작하도록 방치해 두었다간 때를 놓치고 말 것이다.

그땐 그들이 이미 윤회라는 회전 유람차에서 다른 코스

―우리손이 가 닿지 않는 향상을 휘한 코스―를 타려고 덤비고 있는 모습을 봐야 할 것이다.

 

마라가 컴퓨터로 몇몇 자료들을 검색하기 위해 잠시 문서작성을 멈춘 사이

누군가가 사무실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린다.

문이 열리며 역시 미색이 출중한 천녀가 사탕과 과자가 수북이 담김 쟁반을 다소곳이 받쳐 들고 들어선다.

 

“간식시간입니다.”

 

마라가 그 천녀를 호감 있는 눈길로 바라보자 여비서의 눈초리가 가늘어진다.

잠시 후,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방을 나서는 그 천녀를 향해 여비서가 딱 소리를 내며

손가락을 한번 튕기자 졸지에 그녀의 귀가 당나귀로 변해버린다.

마라의 눈썹이 송충이처럼 꿈틀거린다.

 

“뭘 그리 할 것까지야 없지 않소.”

“흥, 꼴 같지 않은 게.”

비서가 씩씩거린다.

마라가 과자를 하나 집어 그녀에게 건넨다.

“야, 이거 아주 맛이 좋군. 옜소, 자네도 하나 들어봐. 정말 기막힌데.”

 

 

8 – 「적의와 완고함부대 

 

그대들 제8군은 ‘감각적 욕망’부대인 제1군과는 정반대의 개념을 무기로 삼는다.

인간들로 하여금 습관적으로 혐오와 악의와 성냄과 증오와 적개심에 빠져들게 하는 것

그대들에게 부여된 임무다. 

우리 사업의 기본이 되는 이런 계획들을 새삼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그 중요성을 되새겨보자는 의미에서 간단히 살피고 넘어가도록 하자.

 

존재가 감각대상과 접촉 할 때마다.

즉 매 의식의 순간마다 그에 따른 각각의 느낌이 생겨나게 된다.

이 느낌은 즐거운 느낌, 불쾌한 느낌, 또는 어떤 실제적 효과를 나타내기에 너무나 미세해서

중립적 느낌이라고나 불러두어야 할 성질의 것이다.

 

이런 느낌들은 극히 초보적인 수준의 정신생활이며 

대부분 전적으로 자연스럽게 그리고 자동적으로 일어난다.

아무리 하등한 존재라도 당기는 음식을 좋아하고 해로운 상황을 싫어하는 속성이 없으면

그 존재 자체를 유지해낼 수 없다.

이런 기초적 느낌들은 우리가 관여할 일이 아니다.

다만 그 다음 단계의 느낌으로 존재를 유인하기 위해 이런 느낌들도 이용할 수는 있다.

즐거운 느낌을 다루는 일은 ‘감각적 욕망’부대인 제1군의 소관업무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따라서 그대들의 임무는 바로 불쾌한 느낌을 갖가지로 증폭시키는 일이다.

 

우리의 상대가 자신의 마음이 돌아가는 모습을 마음 챙겨서 살피고 있지 않을 경우에는

(그리고 살피는 자라고 해도 제대로 살피기는커녕 간신히 시늉이나 낼 정도인 자조차 얼마 안 되니까)

우리는 이 단순한 불쾌의 느낌을 온통 혐오와 분노의 덩어리로 바꿔 놓을 수 있다.

생짜 그대로의 느낌은 그 본질이나 외양이나 도무지 하찮고 덧없는 것에 불과하지만

그러나 참말이지 그걸 가지고 우리는 얼마나 재미있게 놀 수 있는가.

 

물론 이런 식의 부정적 확산을 자꾸만 증장시킴으로써 

중생들은 자신들이 이미 겪고 있는 그 어떤 불가피한 육체적 불쾌감에다

전혀 겪지 않아도 좋을 불필요한 고통까지 보태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당면문제이지 우리가 지금 신경 쓸 문제는 아니다.

우리에게는 지금 해야 할 중대한 일이 따로 있다.

불행이나 분노에 정신이 팔리면 사람들은 사물에 대한 분별력을 잃어버린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금 어떤 처지에 빠져 있는지 알아차릴 수조차 없기 때문에

국면타개를 위해 손 쓸 수가 없다.

 

우리에게는 인간들의 미혹을 조장하기 위해 쓸 수 있는 여러 수단들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 정당한분노이다. 

“그가 나를 해코지한다! 그가 내 것을 박탈했다! 그가 나를 쓰러뜨리고 때렸다.”

이런 식으로 분노를 정당화함으로써 마음이 부정적 방향으로 증폭되게끔 하라,

 

그와 같은 증폭은 그 자체만으로 끝나지 않고 자아상을 쌓아 올린다는 일과

서로 얽혀 증폭되는 부대 수익을 우리에게 가져다준다. 

우리는 최근 이 분야에 괄목할만한 진전을 이뤄냈고, 

그 결과 오늘날 인간들은 그런 정당한 분노가 자신에게 힘을 실어준다는 측면을 찬양하게 되었다.

그래, 그렇게 해서 힘을 얻는 게 어느 쪽인지는 우리만 아는 작은 비밀로 하자.

 

또 이와 관련된 증후군 하나가 피해의식을 스스로 부추기는 행위이다.

나는 참 불쌍하다.”라는 감정은 ‘나’라는 개념을 더욱 굳히는 멋진 도구이다.

어떤 형태의 악의건 간에 그 모든 것은 사람들이 제멋대로 선정한

자기 입장에서 세상을 보도록 만드는 데서 출발한다.

그런 억측에 입각해서 움직이는 한 그들은 사물을 명확하게 볼 수 없다.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감정의 스펙트럼은 그 폭이 넓다.

고속도로에서 갈지(之) 자 운전을 하는 차를 만나면

그 운전자에 대해 가볍고 일시적이 미움의 감정이 일어난다.

직장에서 사려 깊지 못한 상사와 마주치면 분노가 끓어오른다.

종족간의 해묵은 증오가 온 나라를 불구덩이 속에 몰아넣는다.

이 모두가 우리 제분소에서 생산된 밀가루들인 것이다. 

다른 말로하면 증오심이라는 한 가지 감정이 여러 형태로 표출된 것일 뿐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그들이 생명이 없는 대상, 특히 자신들의 손으로 만든 물건들에까지도 악감정을 갖게 할 수 있다.

작동이 불량한 기계를 향한 인간들의 격앙된 모습을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는 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기계에 감정이 없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그들의 분노는 도무지 멈출 줄을 모른다.

 

벽창호처럼 변화를 거부하는 태도가 완고함’이다.

이것 역시 많은 인간들이 띠고 있는 성향이다.

일단 감정적 에너지를 원한 쪽으로 투입하면 그 원한을 풀어버리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것은 곧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었는지 자인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일은 결코 하려들지 않을 것이다.

 

이 분야에 있어서 우리의 입장은 아주 확고하다.

지구상에 인류의 숫자가 증가함에 따라 서로 밀치고 서로 상대방의 신경을 거스르는 일들이 비일비재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악의를 제거하는 데에 확실한 효능을 가진 

유일한 해독제에 대해서 잠시라도 긴장의 끈을 늦춰서는 아니 된다.

그것은 바로 보편적 자애의 마음’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그대들을 전율에 떨게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자애’에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내 입장을 이해해주리라 믿는다.

 

자애는 빠알리어로는 멧따(mettā), 그리고 그리스어로는 아가페(agape)라고 한다.

자애야말로 유일하게 우리가 대적할 수 없는강력한 힘이다.

자애는 곧 나약함이라고 폄하하라.

날이 갈수록 인간들의 마음속에서 연민이 설 자리를 잃고 있으니

자애의 폄하가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가까운 예로, 가난한 사람을 동정하는 일은 이제 더 이상 시류에 맞는 일이 아니다.

보편적 선의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진정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저들은 거의 알지 못하고 있다.

생각해보라, 그처럼 꼭 필요한 기개(氣槪)를 가진 자들이 극히 드물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얼마나 다행인가.

 

만약 그들 중 누군가가 명상과 같은 방법으로 마음 닦는 수행을 시작한다면,

그건 탈출자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도 노력을 배가해야 한다. 

 

다른 부대에 보낸 공문에서도 이미 언급한 바 있지만,

특히 그대들의 전문분야이기도 하기 때문에 명상자를 공격할 기회를 많이 갖고 있다는 점을 잊지 말라.

신체를 통해 공격을 감행하라.

꼼짝없이 앉아있어야만 한다니 애송이 수행자가 어찌 좀이 쑤시지 않겠는가.

그 순간을 노려서 조금만 자극을 가해도 그 불편함은 곧 짜증이나 자기연민으로 발전한다.

 

그 밖에도 괴로움의 종류는 끝이 없다.

중생의 몸을 받았으니 신체적 괴로움을 피할 길은 없지만,

신체적 괴로움과 더불어 느끼는 정신적 자학은 전적으로 자신이 덧보탠 것임을 깨닫기까지

실로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게다가 우리는 스승이나 수행법이나 음식이나 기후 같은 여러 외부 요인들에 대해

못마땅한 마음을 내도록 그들을 부추길 수도 있다. 

그런 하찮은 고통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오는 데도 그들은 몇 시간을 쉽게 허비해야만 할 것이다.

저들이 단 한명도 우리 손아귀에서 탈출하지 못하도록 그대들의 헌신적인 분투를 기대한다.

 

비서가 마라의 눈치를 보며 리모컨을 누르자 이번에는 분위기 있게 생긴 가수가 흐느적거리는 걸음걸이로 화면에 등장한다.

그가 온몸을 흔들며 구슬픈 음색으로 노래를 부르자 객석을 가득 메운 관중들이 괴성을 지르며 열광한다.

“와, 엘비스가 진짜 좋아.”

 

비서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앗아든 마라가 신경질적으로 그걸 누르자 순식간에 화면이 바뀐다.

이제 그 잘생긴 가수가 퉁퉁 부은 얼굴로 잡동사니 가득 찬 침대 옆 서랍을 열어 초조하게 진통제를 찾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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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 「명성부대

 

인간들이 왜 그토록 명성을 갈구하는지 이성적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명성이야말로 재능 있는 수많은 이들을 파멸의 구렁텅이로 몰아가는 흉기가 아니던가.

‘자아에 대한 환상’을 병적으로 부풀리는 행위는

언젠가 죽기 마련인 존재에게는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짐이 될 뿐이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마냥 명성을 갈구하여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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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혜정 | 작성시간 22.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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