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리어 공부와 관련이 있으므로 제 블로그에 올린 글을 스크랩한 것입니다.
<빨리어 공부와 Pure Dhamma 공부>
‘포스트 번역’ 카테고리에 있는 ‘불자 찬팅 2_나마스까-라야 ; 붓다에 대한 예경’ 포스트 중에서, 뒷부분 <나마스까-라야(Namaskāraya)의 진정한 의미> 번역한 것만 8/6일에 한국테라와다불교 밴드에 올렸었는데,
8/7일에 빨리어를 공부하는 분과 다음과 같은 댓글이 오고갔습니다.
빨리어 공부와 Pure Dhamma 공부를 어떻게 하면 좋은지에 대해 참고가 될 만하므로, 아래와 같이 여기에 정리하여 올립니다.
-아 래-
댓글1) 문제제기
저는 싱할리어는 모르고 빨리어 공부를 조금씩 하고 있는데요ᆢ
제가 알고있는 얕은 지식으로 사전을 찾아봐도 호잔님의 단어에 대한 깊은 분석과 심오한 의미를 헤아리기 어려운걸요.
예를 들어 bhagavato는 bhagavata의 1인칭 주어가 아니고 bhaga 라는 운.행운.등의 의미를 갖는 남성명사에 ~한, ~한 사람 의 뜻을 갖는 vant, vantu의 어미가 붙어 운좋은, 행복한, 숭고한, 세존의 의미를 갖는 bhagavant 의 여격 내지는 소유격인 bhagavato 인 것으로, 세존께~의 의미입니다.
빨리어 사전엔 bhaga 라는 단어에 분리라는 의미는 찾아볼 수 없고 vata라는 단어에 몸이라는 뜻을 찾아볼 수 없네요.
tassa 또한 he 또는 that 의 의미인 ta 내지는 so 의 여격 내지는 소유격을 나타내는 지시대명사로 여기서는 bhagavato(세존께) 와 격을 맞추어 수식하는 지시대명사로 ' 그 분께' 의 의미가 되는거죠.
아라한도 우리 발음으로 아라한이지 정확한 빨리어 단어로는 a +raha 의 arahan 이라는 단어는 없구요 bhagavant 와 마찬가지로 araha (가치가 있는, 가치등의 의미,) 에 vant 어미가 붙어 arahant 로서 거룩한 님, 당연히 공양받을만한 분 등의 의미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sammaa 도 그냥 san 이 아니라 호잔님처럼 san + maa( 금지의 의미)로 나누어 본다 해도 sam 은 m 위에 점이 올라있는 단어로 모인다는 의미 맞지만 세속적인 의미보다는 함께, 모인, 그래서 완전한, 올바른 이런 의미구요
sammaa도 그 자체 뜻으로 올바로, 완전한, 원만한 이런 의미 단어이구요.
sambuddha 는 앞의 완전한, 올바른, 원만한 의미인 sam 에 buddha 로서 buddha는 생겨난, 생성된, 태어난 등 의미를 갖는 bhu( u 장음) 이랑 전혀 상관 없는 단어 bujjhati 깨닫다 이해하다 란 동사의 과거분사로 이루어진 형용사, 명사로 깨달은, 이해된,ᆢ그런 분 즉, 붓다, 부처님 인데ᆢ
전혀 다른 뜻의 단어 bhavati ~이 되다. 존재하다 등 의미인 단어의 과거분사인 bhuuta 의 단어로 설명하신 것 같습니다.
그래서 san bhu uddassa 의 조합이 아니고 buddha 에 여격인 buddhassa 즉, 부처님께 의 의미입니다.
팔리어 공부 초짜인 저같은 사람에게는 아주 혼란스럽고 너무 파격적인, 위험할 수도 있는 분석으로 느껴집니다.
제가 뭘 너무 모르고 하는 말일 수도 있으니 틀리다면 친절히 지적해주시고 밝혀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댓글2) 댓글1에 대한 답글
우선, 저의 업로드 글은 저가 해석한 글이 아니라 번역한 글이라는 것을 알려드립니다.
빨리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지는
Pāli Dictionaries – Are They Reliable?
( https://puredhamma.net/sutta-interpretations/pali-dictionaries-reliability/ )를 우선 보시고, 좀더 경전에 대해 깊이 있게 해석하기 위해서는 위 주소의 포스트가 있는 카테고리인 'Sutta Interpretations'내용을 전반적으로 자세히 검토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 저가 답하기에는 너무 긴 답변이 되며, 별 의미없는 답변이 될 것 같습니다.
빨리어는 구어이며 원래 문법이 없으며, 한글을 배우지 못한 시골사람들이 문자없이 음성으로 그 의미를 전하며 발음의 의미를 전승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경에서 글자로 적은 것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저는 매우 공감되지만, 팔리어를 공부하는 분들에게 사전적 의미가 경의 심오한 의미를 전달할 수 없으며 심오한 의미는 그렇게 해석해서는 안된다고 설득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 그리고, 위에서 소개한 곳을 보시면 알겠지만, 소개한 곳에서 경전(삼장)해석은 청정도론 등의 주석서를 기준으로 한 것이 아니라, 쿳다까 니까야에 다행스럽게도 직계제자들의 주석서(patiniddesa)로 전승되고 있는, Patisambidhā Magga Prakarana, Nettipparakana, 및 Petakopadesa 3개를 기준으로 합니다.
Patisambidhā Magga Prakarana는 사리뿟다 존자의 주석서이며, Nettipparakana는 깟자야나 존자의 주석서입니다.
사이트에서는 청정도론이 그때까지 전승되는 원 주석서를 모두 참조했다고 보지 않습니다.
이것이(참조한 것이) 진실이면 위 세가지 주석서와 해석이 모순되지 않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청정도론의 일부 해석은 위 세가지 주석서와 모순되며, 경전에 나오는 하계나 간답바들을 무시하고 논장도 그에 따라 해석했기에 논장도 잘못 해석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삼장은 경전 전체가 아무런 모순이 없는 해석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기준으로 해석되어야 한다고 보므로 모순되는 것을 그대로 믿고 따르는 것은 붓다께서 원래 말씀하신 심오한 의미를 매우 왜곡하며 따르는 것이라고 저는 봅니다.
이것도 물론 저의 개인적 견해가 아니며, 저가 현재 배운 지식으로 어떠한 모순도 발견할 수 없고 반박할 수 없는 위 사이트의 해석에 따른 것입니다.
댓글3) 댓글2에 대한 답글
하지만 맞는지 틀리는지 검증되지 않은 파격적인 해석들을 밴드에 올리시는 건 좀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댓글4) 댓글3에 대한 답글
글쎄요?, 그럼 직계제자들의 주석서를 무시하고 성자의 계열에도 들지 못한 붓다고사스님의 주석서 모음을 그대로 믿어야 하는지? 저는 더 의문이 들고, 이와 같이 경전 전체로 검증되지 않은 청정도론을 절대시하여 일부 해석까지 모두 안전하다고 하는 믿음이 더 위험하다는 생각입니다.
즉, 저는 현재의 청정도론을 기준한 경전해석에 따른 수행으로는 언제까지나 윤회에 얽매여 있을 수 밖에 없는 위험한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것으로는 청정도론 보다 더 좋은 해석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계학과 정학을 제외하고, 혜학은 청정도론에 따라서 해석하며 수행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사이트의 수행도 현재의 일반적인 수행의 기본과는 다릅니다.
'바와나(명상)' 카테고리를 참조해 보시기 바랍니다.
연기에 대한 해석도 아꾸살라 물-라 연기만 언급하고 있는 청정도론의 해석과는 다릅니다.
꾸살라 물-라 연기를 이해하고 이에 따라 수행하지 않는 이상, 성자의 해탈 열반으로 향한 길은 요원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댓글5) 댓글4에 대한 답글
저는 사실 청정도론도 모르고 아비담마도 모르구요 단지 사전을 찾아가며 빨리어경전을 더듬더듬 읽고있는 수준인데요ᆢ 단적인 예로 buddhassa 를 전혀 어근이 다른 bhu 와 uddassa 로 분석해서 뜻풀이 하는 등의 방식은 제가 보기에는 청정도론이나 아비담마를 떠나서 너무 위험할 정도로 독창적인 거 같다는거죠.
빨리경전이 물론 구전돼온 말씀인 구어체이지만 결집해서 경전으로 만들고 모두가 동의하는 문법체계를 만든거자나요?
그 문법에 따라 사전적의미로 경전을 읽는다면ᆢ
청정도론이나 아비담마는 그 이후의 문장의 행간의 해석문제가 아닌가요?
댓글6) 댓글5에 대한 답글
문장의 행간의 해석문제 이전에 구전되는 구어의 의미가 우선이라고 생각합니다.
붓다께서 힌두교에서 개종한 산스크리트어에 해박한 지식을 가진 빅쿠가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해도 될까요?'라고 묻는 말에 힌두경전의 문어인 산스크리트어로 번역하지 말라고 하신 의미를 알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일상 의미 외에 붓다의 가르침을 담고 있는 그 구어의 심오한 의미를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싱할라어는 그 구어의 의미를 어느정도 담고 있으므로 빨리어의 심오한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산스크리트어보다는 싱할라어를 잘 아는 것이 큰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붓다고사 스님은 베다에 정통한 스님이었습니다.
베다 언어의 의미로 빨리어를 이해한 그 사고방식이 문제였다고 합니다.
성자가 되면 그 심오한 의미를 바르게 파악하므로 왜곡된 의미로 주석할 수가 없으며 중요한 부분을 무시한 논서를 쓰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를 인정하고 테라와다불교의 경전해석의 부동의 준거로 인정한 당시의 스님들 중에도 성자가 없었다는 결론이 됩니다.
이미 붓다고사 스님이 스리랑카로 오기 전에 의미가 왜곡되어 성자가 나오기 어렵게 되었다고 합니다.
자세한 것은 경전 주석서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 역사를 참고해 보시면 됩니다.
Incorrect Thēravada Interpretations – Historical Timeline
https://puredhamma.net/historical-background/incorrect-theravada-interpretations-historical-timeline/ 를 참고해 보시면 됩니다.
댓글7) 댓글6 보충
윗 댓글에서 저의 말이 잘못 전달될 수도 있는 것을 삭제하고, 여기 원문을 인용합니다.
The Buddha had foreseen this and warned not to translate the Tipitaka to ANY LANGUAGE, and particularly to Sanskrit. There were two Brahmins by the names of Tepula and Yameru who were experts on the Vedic Texts; they became bhikkhus and asked the Buddha whether they should translate the suttas to Sanskrit. That is when the Buddha admonished them that Sanskrit was a language with musical overtones developed by the high-minded Brahmins and thus it was not possible to convey the true meanings of Māghadhi words in Sanskrit (described in the Chūllavagga Pāli, Vinaya Pitaka).
~
One grave problem we have today is the many people try to translate a given sutta word by word to another language. Thus the Dhamma Cakka Pavattana sutta that we mentioned above is translated to a few pages.
That is why most of the existing translations are inadequate at best and erroneous in most cases; see, “Sutta – Introduction“.
전문은
http://puredhamma.net/historical-background/preservation-of-the-dhamma/ 에서 보세요.
댓글8) 댓글5 보충설명
행간의 해석이라는 말은 잘못된 표현입니다.
경전으로 부처님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의 의미, 그 말씀으로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는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 대한 해석 차원에서 청정도론,아비담마가 거론되야 한다는 말씀을 드리려했던 것입니다.
야튼 호잔님 말씀 잘 알겠습니다.
[밴드에 올렸던 글]
<나마스까-라야(Namaskāraya)의 진정한 의미>
‘나모- 땃사 바가와또- 아라하또- 삼마- 삼붓다사’
‘Namō tassa bhagavatō arahatō sammā sambuddhassa’
1. 대부분 빨리어 구절은 둘 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관습적(빠다빠라마, padaparama)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구절 뒤에 있는 더 깊은 아이디어를 이해하게 하는 심오한 의미입니다. 불행하게도, 모든 경을 해석한다고 하지만 대부분 관습적인 의미로만 나타내고 있습니다.
* 경의 경우에, 한 시간(때로, ‘담마 짝까 빠왓따나 숫따’와 같은 경은 몇 시간) 넘게 걸쳐 설한 경이 보통은 단 몇 페이지로 말 그대로 표현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Pure Dhamma 웹사이트의 ‘Sutta Interpretations’ 카테고리를 참조해 보세요.
* 위 카테고리(Sutta Interpretations)의 ‘Preservation of the Dhamma’ 포스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부분 현존하는 번역 경은 잘 보아주면 불완전하고, 대개 그릇되게 번역되어 있습니다.
* 나마스까-라야(Namaskāraya), 띠사라나(Tisarana) 및 빤짜 실라(Panca Sila)와 같은 어떤 경우에는 관습적인 의미도 유용할 수 있습니다. 깊이 이해할 수 없는 사람에게는 심오한 의미에 의해서는 기쁜 마음(citta pasāda, 찟따 빠사-다)이 생기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찟따 빠사-다(citta pasāda)에 대해서는 Abhidhamma 카테고리의 ‘Javana of a Citta – The Root of Mental Power’를 참조하세요.
* 그래서, 담마의 심오한 의미가 낯선 사람에게는 관습적인 해석에 따라 시작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담마에 대한 앎이 깊어지면, 첫 번째의 관습적인 의미를 버리지 않으면서 두 번째의 심오한 의미가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즉, 붓다의 담마가 얼마나 가치가 있는지 배워감에 따라 붓다에 대해서도 더욱 진심으로 경배하게 될 것입니다.
2. 나마스까-라야(Namaskāraya)의 내용은 짧은 구절이므로 이 짧은 포스트로도 정확하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이 구절이 정말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기로 하겠습니다.
* ‘나-모(Namō)’는 이 경배 받을 만한 가치있는 것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기울이는 것을 의미하고, ‘땃사(tassa)’는 ‘이것에’ 또는 ‘이것 때문에’를 의미합니다. 여기서 ‘이것’은 우리가 머리를 숙이는 이유로 나타내고자 하는 것입니다.
* ‘바가(bhaga)’는 ‘분리’를 의미하고, ‘와따(vata)’는 보통 ‘몸’으로 번역되지만, 이 세상 모든 것으로 더 넓은 의미를 가집니다. 붓다께서는 몸을 32가지로 나누어 보고 그 부분의 어떤 것에도 실체가 없다는 것을 보도록 권하시면서, 몸에 집착하는 것이 무익함을 보여주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몸을 매우 소중하게 생각하지만, 나이가 들면 쇠퇴하고 병으로 고통을 받게 되며, 몸은 겨우 백년 정도 지속될 수 있을 뿐입니다.
* 넓게 보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고, 그 부분에는 어떤 실체도 없습니다.
* 우리 몸(일반적으로 모든 것)에 집착하는 것이 헛된 것임을 보게 되면, 그것에 대한 갈망(빨리어 및 싱할라어로 라하, raha)을 하지 않고 아라한(arahan)에 이르게 될 것입니다. 아라한(arahan)은 ‘갈망없음(a + raha)’로부터 나온 말이며, 세상의 진정한 특성(아닛짜, 둑카, 아낫따)을 이해함에 따라 ‘세상 것들에 대한 갈망을 끊은 자’라는 뜻입니다.
* Key Dhamma Concepts 카테고리의 ‘What is “San?” – the Meaning of Sansara’ 포스트에서 본 바와 같이, ‘산(san)’은 ‘세상 것들을 축적’하는 의미입니다. ‘마(ma)’는 그러한 행을 하는 것으로부터 자유로움(해방)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삼마(samma = san + ma)’는 ‘결국 괴로움만을 야기할 뿐인 세상 것을 축적하는 행을 그친 상태’를 의미합니다.
* 세상 것들을 축적하는 마음의 행은 미래에 태어나도록 준비하는 것, 즉 ‘바와(bhava)’로 이끕니다. ‘삼마삼붓다사(Sambuddhassa)’는 ‘산(san)+뷰(bhu)+웃닷사(uddassa)’로 나누어 볼 때, ‘산(san)의 축적을 통해 바와(bhava)를 준비하는 원인을 뿌리까지 제거하는 것’, 즉, 재생 과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거나 닙바나(Nibbāna) 쪽으로 작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3. 구절 전체의 심오한 의미는 다음과 같습니다.
“나의 몸과 다른 세상 것들을 지혜로 검토하여, 그러한 것에 집착함이 무익하고 헛됨을 이해하고, 31존계계에 재생하는 과정을 없애는 것으로 기울여 열반을 얻는다”
* 여기서 기울인다는 것은 목표에 도달하도록 그 방향으로 기울이는 상태를 계속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담마를 깊이 이해할수록 결의는 더욱 강해지게 될 것입니다. 붓다 담마(붓다의 가르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항상 자신의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 결의는 이해를 통한 결의가 되어야 합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으며 아무도 진행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 모든 것을 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입니다.
4. 마지막으로, ‘나마스까-라야(namaskāraya)’라는 말은 ‘나마(nama) + 아스(as) + 까-라야(käraya)’로 나누어볼 수 있으며, ‘나마(nama)’는 누구의 ‘이름’을 뜻하고, ‘아스(as)’는 ‘제거’를 의미하며, ‘까-라야(käraya)’는 ‘행함’을 뜻합니다. 따라서, ‘나마스까-라야(namaskāraya)’는 ‘어떤 자가 세상의 것들을 가지려고 하는 집착을 제거하는 결의를 하는 것’이라는 관념을 전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 응축되어 내포된 심오한 의미는 이것입니다.
* 물론, ‘나마스까-라야(namaskāraya)’의 관습적 의미는 ‘예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