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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이연기에서 行에 대해 동영상 법문을 들으며

작성시간22.03.06|조회수123 목록 댓글 7

어느 날 불교 동호회 회장님이 말했습니다. “오늘은 십이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 행(行, 상카라)에 대해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각 법우님들께서는 한 말씀씩 해 수십시오.”

 

법우님1이 말했습니다. “분석 경(S12:2)에 의하면, 14. "비구들이여, 그러면 어떤 것이 의도적 행위들[行]인가? 비구들이여, 세 가지 의도적 행위가 있나니 몸의 의도적 행위, 말의 의도적 행위, 마음의 의도적 행위이다. - 비구들이여, 이를 일러 의도적 행위들이라 한다." 라고 하시므로, 십이연기의 行을 몸으로 짓는 • 말로 짓는 •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의도적 행위’라고 이해해도 될 것 같습니다.”

 

법우님2가 말했습니다. “십이연기의 行은 의도(쩨따나, cetanā)를 가진 몸과 말과 마음의 행위이므로, 제행무상(諸行無常) 등의 문맥에 나오는 行과는 구분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찾아보니 ‘諸行無常에서의 行은 열반을 제외한 모든 ‘형성된 것들’, 즉 유위법(有爲法, sańkhta-dhamma)을 뜻한다.‘고 합니다.”

 

법우님3이 말했습니다. “그렇다면 行이 십이연기의 무명연행(無明緣行)으로 나타날 때는, 오온(五蘊)의 네 번째인 行과도 다르겠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다른지 검색하여 찾아보니, ‘오온의 行은 ‘심리현상들’을 나타내는데, 아비담마의 52가지 ‘마음부수(心所法, cetasikā dhammā)들’ 중, ‘느낌(受)’과 ‘인식(想)’을 제외한 “나머지 50가지 마음부수들”을 뜻한다.’고 나왔습니다.”

 

잠시 동안 회원님들 사이에 아무 말이 없자 회장님이 말했습니다. “그런데 제가 자주 가는 다음 카페 ‘빠알리공부모임’에서는 行을 身行(kāya-saṅkhāra), 語行(vaci-saṅkhāra), 心行(citta-saṅkhāra)으로 설명하는데 약간 다른 것 같았습니다. 이 경우는 어떻게 받아들이면 좋겠습니까?”

 

법우님4가 말했습니다. “저도 그런 경우를 종종 보았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가 ‘초기불교이해’(초기불전연구원)를 보니까 이제는 조금 해결되는 것 같았습니다. 그 책에서는 이렇게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1) 부미자 경(S12:25), 상세하게 경(A4:232)에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짓는 세 가지 행위인 신행(身行), 구행(口行), 의행(意行)으로 나타날 때의 行은 12연기의 두 번째 구성요소인 行처럼 의도적 행위, 즉 업 형성으로 이해하면 된다.’고 합니다. (2) 그런데 ‘문맥에 따라서는 단순한 ‘작용’을 뜻하기도 한다고 힙니다. 「까마부 경」(S41:6)에 나오는 ‘몸의 작용[身行], 말의 작용[口行], 마음의 작용[意行]’은: (십이연기의 行처럼 업 형성을 특징으로 하는 의도적 행위가 아니고) ‘작용’ 정도로 이해할 수 있다.’고 합니다.”

 

회장님이 말했습니다. “알겠습니다. 우리 동호회 법우님들께서는 십이연기의 行을 유튜브 동영상 법문에 나오는 : ‘무명 때문에 바로 알지 못하고 잘못 가기 때문에 [행복할 것을 기대하면서 어떤 세 가지 업을 형성한다.]는 의도적 행위들로 받아들이시는군요. 그럼 법우님 가운데서 누구라도 이 경우를 구체적으로 한번 만 더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러자 법우님5가 유튜브에서 ‘사단법인 빤디따라마 근본불교 수행센터’에서 올려주신 동영상 법문(한글로 녹취해 놓으신 부분)에서 한 대목을 인용하여 말했습니다(읽었습니다). “... 사성제의 법들을 ‘바르게 사실대로 알지 못하는’ 걸 뭐라고 했냐면? 무명이라고 했습니다. 바르게 사실대로 알지 못하니까 반대로 ‘잘못 아는’ 거를 무명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뭘 모르고 뭘 잘못 아냐면 육문에서 만나고 있는 대상들. 육문에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먹어 알고 닿고 생각하고 하는 것. 이렇게 육문에서 분명하게 만나고 있는 것들, 대상과 문과 의식과 이 모든 것들이 바로 고성제라고 하는 고통이라는 진실입니다. 왜 고통이냐면 찰나도 그치지 않고 생멸하고 있는 것이고 정말 나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고 의지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이것이 고통인데, 이게 찰나도 그치지 않고 생멸하고 있는 성품의 법일 뿐인 것을 알지 못하니까 ‘이것들이 항상 존재한다.’ ‘이것들이 행복한 것이다.’ ‘좋은 것이다’라고 저희가 막연히 언제나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여기니까 이거를, 이 고통을 이 무명 때문에 행복으로 여기니까, 좋지 않은 것을 좋은 것으로 여기니까 이걸 얻고 싶습니다. 그래서 이게 얻고 싶기 때문에, 이걸 행복이라고 생각해서, 행복을 얻고 싶어서 하루보다 하루가 점점 마치 행복해질 것처럼, 한 생보다 한 생이 점점 더 행복해질 것처럼 막연히 생각하면서 계속 의도하고 기대하고 계획하고 상상하고. 이렇게 하고 있습니다.

 

세 가지 업 형성하여

 

그래서 모든 말, 모든 시간에 모든 떠올리는 것, 의도하는 것, 기대하는 것, 상상하고 생각하고 계획하는 것은 모두 다 행복하기 위한 것, 좋기 위한 것일 뿐입니다. 뭐를 하고 있건 뭐를 생각하고 있건 뭘 말하고 있건 눈앞에 좋다라고 생각되어지는 거를 계속 움켜쥐면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괴로움에 이르기 위해서 스스로가 안 좋아질려고는 아무도 생각하고 의도하지 않습니다. 좋기 위해서만 생각하고 상상하고 행동하고. 이걸 바로 형성이라고 부릅니다. 행복할 것 기대하는 갈애로 인해서 형성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이러한 형성이라고 하는 것이 생각만으로만 이것이 생각이 생겨나고 있다라면 이걸 찌따상카라(Cittasaṅkhāra) 심행(心行), 마음의 행, 마음의 형성이라고 불러요. 다른 말로는 마노깜마(manokamma) 의업(意業)이라고도 부릅니다. 형성과 업은 결국 같은 거죠. 그리고 이것이 이후로 떠올린 대로 말까지 가게 되면 와찌상카라(Vacīsaṅkhāra) 구행(口行), 입의 형성, 혹은 와찌깜마(vacīkamma) 구업(口業)이라고 부릅니다. 이거를 행동까지 이렇게 실천에 옮기게 되면, 몸이나 팔다리를 이 마음에 따라서 움직이면 까야상카라(Kāyasaṅkhāra) 신행(身行), 몸의 형성, 즉, 까야깜마(kāyakamma) 신업(身業)이 됩니다. 이거를 바로 세 가지 형성이라고 부릅니다. “바로안가 잘못보는 무명인해 행복할것 기대하며 세가지업 형성하여” 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세 가지 업, 세 가지 형성이 발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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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3.06 * 그래서 언급하신 // 呼吸에는 (자유)의지라고 할 만한 의도는? // 에 대한 저의 생각(추측)은: (업, 마음, 온도, 음식 – 이 네 가지가 물질이 생기는 요인이다.‘는 아비담마 길라잡이의 설명이 있고) ‘들숨과 날숨은 마음에서 생긴 것(바람의 요소)’이라고 하므로, 들숨과 날숨에도 (의도의 두 가지 문맥 중에서 두 번째인 업을 짓는 의도는 아니지만) 첫 번째 뜻인 의도(어떤 마음이든 함께 일어나는 반드시들에 속하는 마음부수인, '자신과 결합된 법들을 대상에 묶는다'는 의미의 의도)는 작용했다고 생각하겠습니다. (오후 8:09에 조금 수정함)
  • 작성시간 22.03.06 심(찌따)과 의(마노)에는 샹카라가 있고,
    식(위냐나)에는 샹카라가 없다는 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이십니까?
  •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3.07 예,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제가 알지 못하지만, (다른 분들께서 답변을 하지 않으시니,) 제 관점에서 한번 의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저의 견해라서 아마 많은 부분이 틀릴 수가 있으니, 저의 견해는 단지 참고로 읽으시고 버리시면 될 것 같습니다.
    * 식(윈냐냐)은 여섯 가지로 생겨난다고 합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여섯 가지로 생겨날 때의 識은 그 여섯 가지가 무엇인가에 따라 각자 이름을 달리 합니다. 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의식으로 각각 다릅니다. 그리고 이때의 식은 과보로 나타난 마음이라서 현재 업을 짓는 의도(思, 쩨따나)는 작동하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업 형성(업을 짓는 행위)이 아니라는 뜻에서 상카라가 없다는 표현을 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았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2.03.07 * 심(찟따)은 ‘몸과 마음’의 관계로, 또는 ‘삼매’의 문맥에서, 또는 ‘청정한가 오염되었는가’ 등 여러 곳에서 나타나는 듯 하고, 이때는 바른 수행자라면 적극적으로 선법(善法)과 관련된 의도(思, 쩨따나)를 일으켜서 心의 상태를 향상시키려고 노력하니까 아마 心에는 상카라가 있다고 하신 것이 아닐까 하고 추측해 보았습니다. ,
    * 의(마노)는 제가 배운 바에 의하면 ①안식이식비식설식신식이 일어날 때 그것을 받아들이는 역할을 하는 마음이고(받아들이는 마음), / ②(색성향미촉) 대상으로 향하는 마음(오문전향의 마음)인데, (이때 ①의 받아들이는 마음은 과보의 마음이고, ②의 오문전향의 마음은 작용만 하는 마음이라서, 이러한 의(마노)는: 현재 업을 짓는 의도(思, 쩨따나)는 작동하지 않을 것 같고,) 그래서 이때의 상카라는 ‘자신과 결합된 법들을 대상에 묶는다-대상을 알려는 최소한의 자극’ 정도의 상카라만 작동할 것 같습니다. (오후 8:04에 수정함)
  • 작성시간 22.03.07 감사합니다. 식을 과보의 마음으로 보시는 듯 합니다. 그런데, S12:38 경을 보면, 의도하고, 도모하는, 무엇인가에 경향을 갖는다면 이것은 식(위냐나)을 일으키는 바탕(대상)이라고 합니다. 심행과 의행은 있는데, 식행이 없다는 것의 의미를 저는 여전히 잘 모르겠습니다. 뭘 가지고 행이라고 할까? 심행은 상과 수라고 하는데, 이렇게 자신(심)을 두텁게 증장(복제, 팽창)하는 것을 행이라고 하는가? 등등을 저는 궁금해 하고 있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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