멍게는 유생시절에는 뇌도 있고 운동기능도 있지만 일단 바위에 정착하고 나면 더 이상 운동의 필요가 없으므로 뇌를 스스로 먹어서 없애버린다. 그리곤 바위에 고착돼 섭생수준의 삶을 영위한다.
잠시 멍게 얘기를 꺼낸 이유는 五慾樂에 관한 불교의 입장도 그와 비슷하기 때문이라 사료되기 때문이다.
무명을 연으로 행, 식, 명색을 거치면 六入이 연기하는데 여기서 행은 五慾樂을 영위하는 활동이라고 보면 된다.
그 결과가 六入의 연기다. 즉 五慾樂=六入의 기능이라는 등식이 성립되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빛깔을 쫓는 탐욕을 부리면(집성제) 눈과 마노가 미래에 일어나게 된다(고성제).
나머지 성향미촉 또한 이와 같다.
五慾樂을 포기하면 멍게의 예처럼 미래에 六入이 일어나지 않게 된다. 불필요한 것은 과감히 생략하는 진화의 원리이다.
六入이 없으면 태어남, 늙음, 죽음도 일어나지 않게 된다. 五慾樂이 없으면 六入이 일어나지 않는다.
다음검색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hwanheebonghang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05.04 눈과 형상을 인연으로 눈의식이 일어난다. 이들 3사화합이 눈접촉이다. 이것은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이것은 명과 색이 함께 어우러지는 현상을 말한다. 물질과 비물질이 혼합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전혀 다른 두개의 성질이 함께 혼합돼서 발현할 수 있다는 사실은 신기히기 그지없다.
이러한 경우는 물질과 비물질의 접촉이지만 비물질간에도 접촉이 일어난다. 마노와 담마의 인연으로 마노의식이 일어날 때
비물질간의 접촉이 일어난다. 마노와 마노의식이라는 비물질간의 접촉이 그것이다. 담마는 외연이 가장 넓은 개념이므로
비물질이라고 칭하지 않기로 한다.
그로므로 접촉은 물질간 물질과 비물질간 그리고 비물질간의 접촉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물질이 물질을 만나고 물질이 다시 비물질을 만나기도 한다. 무색의 세계에서는 비물질간의 접촉만 있다.
색(5욕)에 대한 욕망을 여의고 비물질에 대한 갈망만 키우면 무색의 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
결국 6입을 여의느냐 아니냐는 개체의 욕망과 관련이 있다. 집성제에서 이점이 뚜렷이 부각된다.
버려야 할 전체가 있다면 그것은 눈과 형상과 눈의식과 눈접촉과 눈접촉에 의한 느낌들이다. 그리고 욕망이다.
멍게의 교훈은 그것을 말한다. -
작성자해맑은 작성시간 20.05.04 봉행님...정말 놀라운 말씀입니다...
결국 우리는 오욕락이라는 산을 넘지 못해서 쉼없는 生死를 반복하네요...
心은 항상 色을 향해 밖으로 치닫고...
그 사이에서 발생하는 느낌에 대한 무명과 치가 身行을 ...
그 결과로 생긴 까야에는 識과 六入이 ...ㅋㅋㅋ
이 識이 다시 오욕락을 쫒아서 밖으로 나가면 ...
거기서 四食을 얻고서 ... 이 몸을 유지하는 저열한 즐거움을 경험할 뿐 ...
까마를 떠나서 얻는... 안으로 향해서 얻는 수승한 즐거움은 경험하지 못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