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
꽃과 희망의 씨앗
선 경
초등학교 6학년 수아는 새집이 마음에 들었다. 오래된 기와집이었지만 앞마당에는 작은 꽃밭이 있었고, 뒤뜰에는 텃밭이 딸려 있었다. 예전 좁은 투룸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던 마당이었다.
엄마가 새아빠와 결혼한 지 반년. 아직은 '우리 가족'이라는 말이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이 집에서는 왠지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초등학교 3학년인 동생 민우는 첫날부터 마당을 뛰어다니며 소리쳤다.
"누나! 여기서 숨바꼭질하면 정말 재미있겠다!"
수아도 웃었다. 새아빠가 어렸을 때부터 살았던 집이었지만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오래 비어 있던 집이라 여기저기 손볼 곳은 많았지만, 햇살이 가득한 마당만큼은 두 남매에게 보물처럼 느껴졌다.
며칠 뒤 엄마가 말했다.
"꽃도 심고, 채소도 키워 보면 어떨까?"
민우는 박수를 쳤다.
"토마토! 딸기! 상추도!"
하지만 수아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지난 밤, 엄마와 새아빠가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것을 우연히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 구한다는 식당이 없어서 걱정이예요."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어떻게든 될 거예요."
엄마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다음 날, 수아는 텃밭을 한참 바라보다 말했다.
"엄마, 텃밭에 채소는 심지 않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엄마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왜?"
"씨앗도 사고 모종도 사야 하잖아요. 지금은 돈을 아껴야 할 것 같아서요."
엄마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때 새아빠가 웃으며 말했다.
"비싼 걸 심자는 게 아니란다. 이웃 할머니께서 상추 모종이랑 해바라기 씨앗을 나눠 주신대."
민우는 금세 환해졌다.
"그럼 공짜예요?"
모두가 웃었다.
아빠가 공장에 안 가는 일요일에 가족은 함께 마당을 고르고 씨앗을 심었다. 작은 손으로 흙을 덮고 물을 주는 동안 수아의 마음도 조금씩 따뜻해졌다.
씨앗은 금방 자라지 않았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싹이 올라오듯, 가족의 웃음도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수아는 싹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처음에는 아주 작구나.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기다리면 언젠가는 꽃을 피울 수 있다니까 기다려 봐야지.'
햇살 아래 작은 새싹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그 모습은 마치 새롭게 시작하는 가족을 향해 응원하는 것 같았다
햇살 아래 작은 새싹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그 모습은 새롭게 시작한 가족에게 "조금만 더 기다리면 꽃을 피울 거야." 하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수아는 미소를 지으며 물뿌리개를 다시 들었다.
수아는 미소를 지으며 물뿌리개를 다시 들었다.
"누나, 나도 물 줄래!"
민우가 작은 물뿌리개를 들고 따라왔다. 두 남매는 싹이 다치지 않도록 조심조심 물을 주었다.
그때 담장 너머에서 다정한 목소리가 들렸다.
"새싹은 사람 마음을 닮았단다."
고개를 돌려 보니 하얀 모자를 쓴 할머니 한 분이 서 계셨다. 손에는 작은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수아가 인사하자 할머니는 환하게 웃으셨다.
"나는 옆집에 산다. 너희가 이사 왔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이제야 인사하네."
할머니는 바구니를 내밀었다.
"여기 봉숭아 씨앗하고 채송화 씨앗, 해바라기 씨앗도 있단다. 여기 고추 모종도 줄께. 우리 집에서 받아 둔 건데 함께 심으면 좋을 것 같아서."
민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정말 우리 줘도 돼요?"
"나는 손주들이 먼 나라에 있어서 너희들 보니까 내 손주들 같구나. 씨앗은 나누려고 있는 거란다."
수아는 정성껏 두 손으로 씨앗을 받았다.
그날 오후, 가족은 새 씨앗을 심었다.
엄마는 봉숭아를 심으며 말했다.
"내가 어릴 적에는 봉숭아 물을 들이며 친구들과 여름을 보냈단다."
새아빠도 웃으며 거들었다.
"나는 해마다 채송화를 키웠어. 아침마다 피는 꽃을 보는 재미가 컸지."
수아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으로 깨달았다.
엄마에게도, 새아빠에게도 저마다의 어린 시절이 있었고, 행복했던 추억이 있었다는 것을.
며칠 뒤부터 작은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돌아온 민우는 제일 먼저 텃밭으로 달려갔다.
"누나! 상추가 또 컸어!"
수아도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꽃밭으로 향했다.
새 잎 하나가 돋아날 때마다 신기했고, 꽃봉오리가 맺힐 때마다 마음이 설렜다.
하지만 어느 날 아침이었다.
밤새 내린 굵은 비에 갓 올라온 꽃모종 몇 포기가 흙에 쓰러져 있었다.
민우는 금방 울먹였다.
"다 죽은 거 아니야?"
수아도 속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때 옆 집 할머니가 천천히 다가오셨다.
"얘들아, 꽃은 사람보다 더 강하단다. 쓰러졌다고 끝난 게 아니야."
할머니는 작은 나뭇가지를 꽂아 모종을 세워 주고 흙을 살며시 눌러 주셨다.
"살아 보려고 다시 일어설 거야. 조금만 기다려 보자."
수아는 조심스럽게 쓰러진 꽃을 바로 세웠다.
'사람도 꽃도 넘어질 수 있지만, 다시 일어설 수 있구나.'
그날 저녁, 가족은 함께 창밖의 텃밭을 바라보았다.
비를 견뎌 낸 작은 모종들이 저녁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네 사람의 마음속에는 같은 희망이 조금씩 자라고 있었다
며칠 뒤였다.
엄마는 아침 일찍 식당 면접을 보러 나갔다. 수아와 민우는 학교에서 돌아오자마자 텃밭으로 달려갔다. 봉숭아는 잎이 무성해졌고, 상추는 한 뼘이나 자라 있었다.
"엄마 오시면 깜짝 놀라시겠다."
민우가 싱글벙글 웃었다.
해가 질 무렵, 엄마가 돌아왔다.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에 두 남매는 달려나갔다.
"엄마, 어땠어요?"
엄마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괜찮았어."
하지만 수아는 알 수 있었다. 엄마의 웃음은 평소와 달랐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마친 엄마는 혼자 마당으로 나갔다. 수아는 창문 너머로 엄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꽃밭 앞에 한참 서 있다가 조용히 눈가를 훔쳤다.
수아의 가슴이 먹먹해졌다.
다음 날 아침, 엄마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번 회사도 안 됐대."
민우는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집 안은 갑자기 조용해졌다.
"당분간은 꽃보다 먹을 수 있는 채소를 더 많이 심자. 꽃은 내년에 심어도 되잖니."
엄마의 말에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마음 한구석이 허전했다.
그날 오후였다.
민우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누나! 빨리 나와 봐!"
꽃잎과 어린잎마다 작은 벌레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진딧물이야!"
며칠째 이어진 더위 때문인지 봉숭아 잎도 축 늘어져 있었다.
민우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우리 꽃도 죽는 거야?"
수아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엄마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옆집 할머니가 담장 너머로 보시고 천천히 걸어오셨다.
"왜들 이렇게 풀이 죽었어?"
사정을 들은 할머니는 웃으며 말씀하셨다.
"얘들아, 꽃도 사람도 힘든 날이 있단다. 하지만 뿌리가 살아 있으면 다시 피어나는 법이야."
할머니는 집으로 돌아가더니 마늘과 고추, 비누를 조금 가져오셨다.
"옛날에는 약이 귀해서 이렇게 벌레를 잡았단다."
할머니와 아이들은 함께 천연 살충액을 만들어 꽃잎에 뿌렸다.
시든 잎은 조심스럽게 따 주고, 해가 기울 무렵 흙에도 물을 흠뻑 주었다.
"살아날까요?"
민우가 작은 목소리로 묻자 할머니가 환하게 웃었다.
"기다릴 줄 아는 사람에게 꽃은 꼭 대답해 준단다."
그 말은 꽃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고, 엄마에게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수아는 조용히 엄마의 손을 잡았다.
"엄마, 꽃도 다시 피는데 엄마도 꼭 웃게 될 거예요."
엄마는 수아를 꼭 안아 주었다.
그날 저녁, 네 식구는 함께 텃밭에 물을 주었다.
해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희망은 아직 꽃으로 피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이었다.
수아는 창문을 열자마자 텃밭으로 달려갔다.
"민우야! 빨리 나와 봐!"
민우도 잠옷 차림으로 뛰어나왔다.
시들어 고개를 떨구었던 봉숭아가 조금씩 잎을 펴고 있었다. 진딧물이 까맣게 붙어 있던 잎에도 연둣빛 새순이 돋아나기 시작했다.
"누나! 살아났어!"
민우는 두 손을 번쩍 들고 깡충깡충 뛰었다.
할머니도 담장 너머 애들을 보고 흐뭇하게 웃으셨다.
"거 봐. 꽃은 포기하지 않는 사람을 실망시키지 않는다니까."
그날부터 아이들은 학교에 다녀오면 가장 먼저 꽃밭으로 향했다.
마른 잎을 따 주고, 잡초를 뽑고, 해가 질 무렵이면 물을 주었다.
엄마도 구직 공고를 찾아보다가 아이들과 함께 마당으로 나왔다.
"엄마, 이 꽃 좀 봐요. 어제보다 더 컸어요."
민우의 목소리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엄마는 활짝 웃으며 아이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정말 많이 컸네."
그 웃음을 본 수아는 마음이 놓였다.
며칠 후, 상추가 먹음직스럽게 자랐다.
엄마는 갓 딴 상추로 저녁상을 차렸다.
"우리 텃밭에서 처음 거둔 선물이네."
새아빠가 상추 한 장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건 세상에서 가장 값진 상추야."
민우가 웃으며 물었다.
"왜요?"
"우리 가족이 함께 키웠으니까."
그 말에 모두가 웃었다.
식사를 마친 뒤 수아는 작은 화분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노란 해바라기 한 송이가 막 꽃을 피우려 하고 있었다.
수아는 화분에 색종이로 만든 작은 팻말을 꽂았다.
'엄마, 힘내세요. 우리는 엄마를 믿어요.'
민우도 서툰 글씨로 덧붙였다.
'엄마 웃는 게 제일 좋아요.'
엄마는 두 아이가 만든 팻말을 읽다가 끝내 눈시울을 붉혔다.
"엄마는 정말 큰 선물을 받았네."
그날 밤, 엄마는 다시 컴퓨터 앞에 앉았다.
식당은 포기하고 공장 한 곳에 이력서를 보냈고, 또 다른 공장에도 용기를 내어 지원서를 작성했다.
창밖에서는 바람을 타고 꽃들이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조금만 더 힘내세요.'
하고 응원하는 것 같았다.
수아는 창가에 서서 꽃밭을 바라보았다.
씨앗은 꽃만 키우는 것이 아니었다.
사람의 용기와 웃음, 그리고 희망도 함께 자라게 한다는 것을 수아는 조금씩 알아 가고 있었다.
며칠이 지나자 꽃밭은 조금씩 제 모습을 되찾기 시작했다.
봉숭아는 새잎을 틔웠고, 채송화는 햇살을 받으며 작은 꽃봉오리를 품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꽃이 빨리 피기만을 바라지 않았다.
아침이면 꽃들에게 인사를 하고, 저녁이면 흙이 마르지 않았는지 살펴보았다. 기다리는 시간도 꽃을 키우는 일이라는 것을 조금씩 배우고 있었다.
엄마도 매일 새로운 구인 광고를 찾아보고 이력서를 고쳤다.
가끔은 한숨을 쉬었고, 가끔은 미소를 지었다.
수아는 엄마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어느 저녁, 할머니가 담장 너머로 말씀하셨다.
"꽃은 서두른다고 먼저 피는 게 아니란다. 사람도 그렇고."
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그날 밤, 가족은 마당에 나란히 앉아 별을 바라보았다.
아무도 큰 소리로 이야기하지 않았지만,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했다.
민우가 손가락으로 작은 꽃봉오리를 가리켰다.
"누나, 내일쯤 피겠지?"
수아는 환하게 웃었다.
"글쎄. 하지만 언젠가는 꼭 피겠지."
창문 너머로 엄마는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또 한 장의 지원서를 쓰고 있었다.
바람이 불자 아직 피지 않은 꽃봉오리들이 살며시 흔들렸다.
수아는 꽃밭을 오래 바라보았다.
아직 피지 않은 꽃들이 있었고,
아직 이루지 못한 꿈도 있었다.
하지만 수아는 조용히 믿었다.
씨앗은 흙 속에서 보이지 않는 시간을 견디며 싹을 틔우고, 사람의 마음도 희망을 품는 순간부터 조금씩 자라기 시작한다는 것을.
달빛은 말없이 꽃밭을 비추고 있었다.
아직 꽃은 모두 피지 않았다.
하지만 희망은,
이미 그곳에 자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