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짐에 관한 시모음 2)
골목의 다짐 /이은규
기억 담쟁이 넝쿨만 무럭무럭, 세상의 모든 골목은 조금씩 어두워지고 구불구불하지만 그건 마치 황무지의 나무들이 바람의 방향 쪽으로 기운 것처럼 보이는 이치, 이제 골목의 무수한 벽들을 깨 버리거나 훌쩍 뛰어넘거나 사실은 벽이 아니라고 믿거나 통과해 버리는 등의 묘기를 부리지 않겠다고 적는다 골목 끝을 두려워하지 않기로 나아가기로
골목의 다짐, 남은 한 사람은 가만히 벽을 따라 옆으로 옆으로 걸으며 기나긴 문장들을 쓰기로 한다 아무렇지 않은 듯 천천히 나아가며 벽을 따라 걷는 슬픔으로 가득 차기로 파멸과 극복을 반복하는 영웅전집이나 경들을 타인의 일기장을 지우고, 그들을 구원하는 일을 멈추기로 한다 타 오르는 문장들, 이제 일용할 양식은 매일 조금씩 갱신되는 슬픔
다짐 /임영준
핑계는 넘친다
변명은 끝도 없다
자가당착에
빠지기 전까진
꽉 붙잡고 늘어질 터
아니
막바지에 몰려서도
사슬로 묶고 늘어질 터
진창을 뒹굴 게 뻔한데
다시 어영부영
돌릴 수 있겠나
다 짐 /강영란
입춘도 지났으니 이제 꽃 오겠다
꽃 오면 보러 가자 엄마
자그락자그락 밥 먹다가
별이 참 밝네
말 뒤끝에
꽃 약속 미리 받아놓으려는데
다짐 받으려 말어라
늙으면 다짐들이
다 짐이 된다
그옛날 다짐들이 다 짐이 되어오는 저녁
아침 혹은 다짐 /양현근
동그랗게 말린 저녁을 지나
말간 새벽으로 가는 발소리는
얼마나 황홀한 기별인가
협곡을 내쳐 달려 온 바람과
밀물의 시간을 기다려 온 다짐들이 있어
산길 지나 너럭바위 비추는 별빛이 환하다
개복숭아도 돌배나무도 같이 환하다
기대앉은 어깨가 따스할 것이다
곡선의 기억을 지우는 새벽의 한 때가
울컥, 꽃으로 핀다
나무가 다른 나무에게 허리를 맞대고
꽃이 다른 꽃에게 기대어 피듯
너는 나의 오랜 꽃말이 된다
마침내 아침이다
다짐의 자세 /鞍山백원기
일 년 삼백육십오일
팽이처럼 돌다가
제자리에 멈춰 서더니
아쉬운 한 해가
낯선 한 해를 데리고 왔네
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결국 돌고 돌아 제자리에 서고
일 년 내 뛰었지만
땀 닦을 일만 남아
허무함이 밀려오네
지난 열두 달
기억되는 일들을
되짚어 생각해보면
완성 아닌 미완성으로
매듭지어야 하는데
후회스러운
한 해의 끄트머리에서
다짐의 자세로
기대에 찬 새해를
새롭게 마련해 보려네
다짐 /독운 김운중
이제 나는
웃기로 했다
살아도
살아도
웃을 일 없던 지나 온 길에도
담벼락을 껴안고 오르는 담쟁이
푸른 잎 손 흔들며
해맑게 웃고 있었다
종일 병상에 누워 자시는 어머니
아직은 가푼 솜 소리 지만 들리지 않나
드물게 정신이 들어
''내 새끼야~'' 바라보시지 않나
이제 나는
웃기로 했다
살아도
살아도
눈물 뿐인 이 길에
병 든 심장 이나마
사랑의 불 밝히고
울다가
울다가
끝내 웃기로 했다
사랑하기로 했다.
굳게 다짐합니다 /이하석
아름다운 사람은 머문 자라도 아름답습니다
나는 화장실을 깨끗하게 사용할 것을
굳게 다짐합니다-
라는 글이 화장실마다 붙어 있다
아름다운화장실문화협의회라는 게
나의 바로 옆에 있는 모양이다
그 사람들이 내 뒤를 캐는 모양이다
뒤를 보기가 무섭다
시 쓰는 일은 앞을 보며
뒤를 보는 일
도깨비가 나올까봐 겁나긴 하지만
뒤를 보는 힘으로 앞을 보는 일
그래서 나는
뭐든, 깨끗하게 뒤를 볼 것을
굳게, 매일 다짐한다
절벽, 구절초가 다짐하다 /김금희
절벽을 타는 바람 한 점 까딱,
안타까이 매달린 구절초 한 포기
환한 웃음 놓지 않고 휘어진
몸뚱이 힘겹게 일으킨다
바람 스러진 날부터 뿌리 끝 파고드는
여름 부스러기에 이리 뻗고 저리 뻗어 보아도
파고드는 통증을 재울 수 없었다
뿌리가 밀어 올린 가는 대궁 어디쯤
누군가 알을 슬었는지 물관이 욱신거려
바람이 스칠 때마다 식은땀이 났다
밤은 알 수 없는 통증으로 고통스럽고
온 몸이 비에 젖듯 젖은 몸은
날씨와 상관없이 오한에 시달렸다
아침이면 아무 일 없을거라고
태풍이 지나간 아침 햇살처럼
아무 일 없을 거라고
진통제 같은 새벽별 가슴에 물고
구절초는 중얼거린다
가만가만 시린 발끝 돌 틈에 기대본다
까무룩 잠이 든다 별도 구절초도
국보 1호의 다짐 /남시호
자연산 얼굴 마을에
중심을 이룬 코와
맵시 다른 눈 입 그리고 귀가
이웃으로 살아가며
불거지는 허물은 덮어 준답니다
서로 다른 혈액형이라
올해 결실을 무난히 거두고져
늘 미안스러운 언저리의 귀는
더욱 벌리기로 매듭지었고
국보 1호로 자리매김한
탁 트인 입은
말문을 좁히기로 이웃간에
뜻을 같이 했답니다
유서깊은 얼굴마을에
올해는
새해 아침의 다짐 /우심 안국훈
희망찬 아침 맞아 해맑은 햇살처럼
어둠 헤치고 그대 찾아가서
새해엔 착한 양 되어
초원 노닐며 그대와 함께하고 싶다
설령 지치거나 상처 입어도
눈보라는 축복이고
비바람은 행운이라 여기며
눈시울 붉히더라도 웃음 지으리라
허구한 날 일에 파묻혀 살거나
집착에 빠진 사람이 아닌
주고 또 주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그대를 후회 없이 사랑하며 살고 싶나니
그리운 만큼 아름다운 세상
감사하는 만큼 행복한 인생이라면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여서 더 아름답고 행복해지고 싶어라
굳은 다짐 /박인걸
휴전선이 가로막거나
망막(茫漠)한 바닷길도 아닌
내륙(內陸) 육백리길 안팎에서
뱅뱅 돌아 온 삶이었네라.
그립지도 그리울 것도 없는
맘먹으면 단숨에 달려갈
고향땅 지척(咫尺)에 두고
타향살이 운운했네라.
타국(他國)살이 고달파
눈물짓는 동포들 생각할 때
객지삶이랄 것도 없는
엄살이 한 없이 부끄럽네라.
철벽같은 담장에 갇혀
생전에 밟지 못할 땅에 사는 양
그럴듯한 향수(鄕愁)를 지껄이며
뉘 마음을 빼앗은 일이 괴롭네라.
결코 호읍(號泣)하지 않으리.
간단(簡單)히 삭여 넘기리.
거창한 수식어로 남을 호리며
고개를 틀어 매고 살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삶의 이정표 /박종영
혼자서는 적적하겠기에
운 좋은 시절 아름다운 인연으로 선택한 그대,
오늘은 작정하고 반려자의 의무로
옆에 앉아 가쁜 숨결을 조심스럽게 듣는다.
수줍어 가녀린 심장의 소리로 들려주던 언약
처음의 그 날 밤엔
사랑의 의미를 모른 채,
부끄러운 마음으로 뒤늦은 시간을 반성한다.
사람이 누구를 그리워하는 것은 정이다.
진정한 일체의 의미로 유행을 따르지 않았고,
사계절의 소문에 휩쓸리지 않았으니
지켜주고 나누는 즐거움도 그대와 약속한 백년해로다.
아픈 시련과 눈물을 아끼면서
지루한 가난에서도 사랑의 깊이를 곱게 다스려
삶의 물음에 행복의 문을 열고 우뚝 서 있는 한 사람,
오늘에야 어지러운 인생의 남루를 벗으니 눈물이 난다.
새해의 다짐 /박인걸
동쪽 하늘이 열리며
그 붉은 태양이 첫 발을 내디딜 때
어둠은 축이 말린 듯 물러가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다.
하늘은 청옥(靑玉)처럼 맑고
대지는 용암처럼 꿈틀거리며
강물은 비단결처럼 흐르고
바다는 힘차게 용솟음친다.
사람들아 가슴을 활짝 열고
삼백예순 다섯 날을 두 손으로 받자
돈 없이 값이 거저 주는
조물주의 최고 선물(膳物)이다.
첫 출근하는 심정으로
신발 끈을 힘껏 졸라매고
여행 티켓을 손에 쥔 설렘으로
첫 발을 힘차게 내 딛자.
의(義)와 평강과 희락을
우리 모두 마음껏 누리자
자유와 기회와 평등이
차고 넘치는 세상을 만들자.
삶이 절벽처럼 가파르고
꿈이 돌담처럼 허물어져도
단념(斷念)하고 돌아서지 말자
인내와 끈기로 겨루어 이기자.
5월의 다짐 /정연복
초록 이파리들의
저 싱그러운 빛
이 맘속
가득 채워
회색 빛 우울(憂鬱)
말끔히 지우리.
살아 있음은
아직 희망이 남아 있다는 것
살아 있음은
생명을 꽃피우기 위함이라는 것
살아 있는 날 동안에는
삶의 기쁨을 노래해야 한다는 것.
초록 이파리들이 전하는
이 희망의 메시지
귀담아 듣고
가슴 깊이 새기리.
우리의 다짐 /장석원
우리는 형식을 고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최초의 현대소설 『無情』의 주인공이 이형식이라죠) 읽기에 무척 힘들지만 (너무 길어서) 거품 같은 찬사로는 해결되지 않을 어떤 에너지와 아름다움과 슬픔이 들어 있는데 우리의 작품을 읽지 않아서 알지 못한다니 어쩔 수가 없습니다
나의 산문은 시가 되려 하고 그의 시집은 산문이 되려 하는데 시와 산문의 경계에서 시적인 것으로 응축되는 어떤 불가사의를 연주한다는 의미에서 나와 그는 동일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 명료성, 우리에게 불필요한 것, 통일성) 우리가 한국시의 가장 외곽에 존재한다는 것 맞는 말입니다
우리에게는 조용한 혁명이 필요합니다 많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태양이 프로펠러를 펴고 대지를 장악할 때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우리의 시는 깊은 상처에서 배어나오는 어둠과 바람과 숲과 초원과 하늘의 화음에 처연하게 젖을 때마다 파괴됩니다 (우리를 배제시킨 것 서정성) 의식의 세계로 무의식을 데려와 소통하고 이 세계의 고통을 경청하면 더 좋아지겠지요 (번역될 수 없는 것들이 있어요 우리가 어떻게 외국어를 구
사한단 말인가요) 어떤 텍스트는 무의식이 투영되어 새로운 의미의 영역으로 역전이되기도 하지요
무엇을 써야 할까요 문제는 ‘쓰느냐 못쓰느냐’이고 문제는 ‘무엇’이 아니라 ‘어떻게’이고 ‘왜 쓰는가’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문학으로 데려와 폐허의 묘망 속으로 인도했을까요 절실한 것이 과연 시일까요 생활일까요 이팝나무가 꽃을 피웠습니다 (立夏에요) 거리는 꽃의 상실을 기억하겠지요
시인과 시민이 술을 마십니다 사라진 것들 떠나고 없는 것들 그리운 것들 때문에 분노와 사랑의 불꽃을 우리도 모르게 꺼버린 것은 아닌가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석유를 좋아해요 우리는 의미도 모르고 형식도 모르지만 그것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요 이것을 이론이라고 부를 수는 없지요)
지치지 않아야 합니다 새로운 주제와 형식(2형식도 5형식도 아닌 새로운 食性)이 필요합니다 방아쇠처럼 기다립니다 시가 툭 끊어졌습니다 거미줄이 없어졌습니다 생각하고 집중하는 일은 계속되지만 문득 언어로 바꿀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고통에게 몸과 마음을 내주기로 마음먹어 봅니다 저곳의 별을 떠올립니다
새해 다짐 /박노해
새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가지런해야겠다
세상이 어지럽지만
내가 단정하지 못했구나
새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고요해져야겠다
세상이 시끄럽지만
내가 말이 너무 많았구나
새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멀리 내다봐야겠다
세상이 숨가쁘지만
내가 호흡이 짧았구나
새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간소하고 나직해야겠다
세상이 온통 대박행진이지만
내가 먼저 비우고 나누지 못했구나
세해에는
단 하루만이라도
홀로 외로워져야겠다
좀 흔들리고 눈물도 흘리고 가슴 아파하면서
내 사람이 온유해져야 겠다.
그리하여 새해에는
나의 하루하루가
좀 더 치열해져야겠다
과녁을 향해 팽팽히 당겨진 화살처럼
하루하루를 내 삶의 가장 깊은 곳으로
온전히 집중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