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당에 관한 시모음 4)
아버지의 마당 /배홍배
아버지의 의식이 빠져나간 우리 집
마당에서 어머니의 지평선과
젊은 태양이 마주쳤다
아버지가 만든 연못에선
의심으로 가득 찬 안개가 피어오르고
꽃밭의 해바라기는 태양을 머리로 받았다
깨어진 햇빛은 금 간 담 벽
벽돌들의 보호를 받으며
내 손가락을 깊이 베었다
불신의 조상들에 갇혀
상처를 꿰매는 밤은
바람이 불어도 연못은 고요했다
어머니의 검은 보자기 작은 꽃무늬는
내 평생의 흉터로 남아
가난한 밥상을 덮고
어머니의 은어를 기억해내며
향수를 하나씩 잊어갈 때
사진 속 아버지의 집시 배낭에서 나는
다시 태어나고
어머니와 태양은 더 이상 맞서지 않았다
마당을 나누다 /김경숙
우리 집 마당에는 낮의 마당과 밤의 마당이 있다
낮의 마당에선 뙤약볕을 빌려 고추를 말려도 좋고
바지랑대 걸쳐놓고 속옷을 널어도 좋겠지만
무엇보다 금 긋고 자리 깔아
온갖 마당놀이를 하는 한마당이 제격이다
다만, 밤의 마당은
눈 밝은 것들에게 내어주자
두더지 두꺼비 반딧불이, 간혹 가다
고라니나 멧돼지 가족들까지
마당에 놀러와 유유히 달빛을 굴려도 좋겠다
밤의 말을 쓰는 것들은
밤의 마당을 쓰고
말놀이를 하는 사람은
낮의 마당을 쓰게 하자는 것이다
그어 놓은 실금도 없이
둥글거나 네모난 규칙 없이도
그저 캄캄한 밤 하나로 마당을 놀다 가는 것들
낯익은 발자국에 고인 이슬을 쓸어내며
낮이 해야 할 일을
밤이 하는 것을 가끔 본다
우리 마당 /배창환
대구서 살다 온 달이 한이는
동네 아이들 마당 우리집이 최고지요
달이는 자전거놀이 배드민턴
한이는 8자놀이 그림자밟기
씽씽 달리고 치고
술래잡기 8자로 아슬아슬 놀지요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고양이도 모과나무 그늘에 누워 구경하고요
꽃밭에 숨어 있던 찔레가 아이들만 보면
나도 좀 끼워줘, 끼워줘 하얗게 쏟아지지요.
심을 수 있는 마당 /안태운
무엇을 심어도 되겠지
심을 수 있는 마당
새로운 날씨가 된다면
새로운 곤충이 온다면
심을 수 있는 마당
돋아나는 나물을 심고
그 나물 속으로
내 발자국과 현기증이 들어간다
심을 수 있는 마당
내 방을 심고
우주본도 심었다
파헤쳤다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계속 내려다보고 있었다
행복 마당 /미인 노정혜
행복 사랑받길 원해요
연습을 좋아해요
행복이 대박 납니다
행복 사랑받길 원해요
연습을 원해요
행복해도 표현에 어색해
사람 많아요
행복도 습관
불만도 습관
이왕에 사는 것 행복하게 살아요
웃을 일 있어 웃는 것이 아니다
웃으서 행복하다
웃으면 웃음을 불러오고
행복해 행복해
나 너 우리
매일 웃음마당 열려요
웃음도 불평도 습관
칭찬은 칭찬을 부릅니다
행복도 습관
연습이 필요해요.
행복을 어색해하는 사람들
이왕에 사는 것
행복하게 살아요
미소 지어 보셔요
웃음은 금방 전염됩니다
너 나 우리
우리 매일 웃으봐요
억지 웃음도 행복 부릅니다
행복이 줄지어.
손에 손 잡고 웃으면서
들어옵니다
행복 마중가요
행복이 웃으면서
줄지어 줄지어
신바람이 분다
우리 집에 신바람이 노크한다
행복 대박 웃음 대복
곡간이 배가 불룩 나온다
우리 집 우리 마을
너 나 우리
웃음꽃 매일 피어난다
마당이 깊은 집 /이관묵
외양간의 누런 소가
자신을 내일 읍내장에 내다 판다는 사립문의 몸 비트는 소릴 듣고 밤새 잠 안 자고 뒤척이는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새벽녘 오줌 누러 나왔다가 소 얼굴 쓰다듬어 주고,한참이나 목을 꼬오옥 안아주던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다음 날 이른 아침 중절모 쓴 소 장수 손에 끌려가던 소가 뒤돌아 허공에 큰 울음 던지던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그로부터 매일 달덩이 만한 소 울음이 몸이 되고 밤이 되는, 마당 넓이의 누런 가을을 종일 도리깨로 털던
그런 집을 나는 살았다
마당의 가을 /이원문
간다 하는 가을이 이제 아주 가는구나
구르는 낙엽도 굴리는 바람도
가을을 밀어 내느라 그리 서두르는지
오는 겨울은 칼바람에 얼마나 추울까
그때처럼 그렇게 춥지나 않을런지
또 그렇게 추우면 어떻게 하나
춥다 춥다 그렇게나 추웠던 겨울
누가 아는 그런 겨울이었나
문 고리 얼어붙고 문풍지 울고
젓는 화롯불에 흘러간 세월
그런 겨울날 눈이라도 소복이 쌓이면
눈 밭 위 누렁이 개 뭐가 그리 좋아 뛰었는지
여름 마당 /이순화
-엄마는 물구멍이라 했다
길다란 호스를 빠져나온 물줄기가 뱀 구멍 따라갔다
윤기 자르르 흐르는 호스가
사루비아 붉은 마당에 누워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불룩한 배를 뒤틀고
담 밑에 물컹 쏟아낸
희멀겋고 미끌미끌한
저 놈의 장닭
구-구-구
마당을 구르는 천둥소리
물어라 물어뜯어라
구멍 파고 꼬리 감추는 것이
제 아비를 닮았구나
백랍처럼 사근거리고 맹독처럼 재바른 것이
제 어미 닮았구나
어디까지 갔을까
옷을 여기다 벗어두고
요정의 마당 /김복희
한 뼘을 두고 마당이라고 하려면
한 뼘보다 작은 창문 있는 집
한 뼘을 두를 만치 울타리
손톱만 한 사람
손톱보다 작은 빗자루가
필요하다
요정의 보폭
요정이 걸어올 길
요정의 없는 마당이 근심이다
요정의 발 마당에 닿을 일 없대도
마당은 있어야지
우리에게 올려다볼 하늘이 필요하듯이
틈틈이 남의 집 앞 한 보 걸어보며
둘러보는 것
마당 쓰는 사람이
마당 쓰는 소리를
묘사하는 것
삭삭
슥슥
말고
빗소리 같다고 하는 것
잠결 창턱에 걸리는 빗소리 같다고 하는 것
자러 가던 요정이 유리창을
스치듯
순식간에
나는 그것을
요정의 살짝 휜 척추
라고
훅
불어
거기 없음 확인할 것이다
요정의 마당 무엇이든 출입 가능하다고
적어둔다
환한 마당 /고재종
활활거리는 화톳불이 온 마당에 환하다
잘 갔다고 한다, 맏상제도 덩달아서
아침밥 잘 잡숫고는 잠든데끼 가셨구먼, 한다
윷판에선 윷 모 떨어져 환호성 지르고
초경 이경 상여 놀이로 서로들 낄낄거리고
필요도 없이 오래 사는 치도 많은데
잘 갔다고 한다. 마나님도 덩달아서
평생을 흙 파묵고 살았응께
인자 흙밥 되는 게 옳지라우, 한다
텃밭 가에선 초롱초롱 오동꽃도 등 밝히고
내일 발인 날엔 날씨도 화창할 거라 하니
활활거리는 온 마당에 화톳불이 환하다
그래도, 그래도 쪼끔은 서러워야 한다고
배경음을 깔아대는 저 지랄 불여귀들!
- 고재종,『쪽빛 문장』(문학사상사, 2004)
마당을 쓸며 /장석남
어둡는데 멧새들이 울어댄다
따라서 적막은 곱디곱다
하늘의 별은 곱은 주먹을 쥐었다 폈다 쥐었다 폈다
누가 희디희게 왔다 갔다
누가 희디희게 울다 갔다
나는 마당에 물 뿌리고 꽃을 쓴다
한때는 물결이었던 것들
거품이었던 것들
어느 밍밍한 차맛이라도 떠올리듯
쓴 입맛을 가시듯
때없이 마당을 쓸어보는 것이다.
하, 빗질 자국 위로
또 누가 오실라
오실라
오신다
- 장석남,『뺨에 서쪽을 빛내다』(창비, 2010)
마당 /고진하
눈도 못 뜬
흰 강아지들이
마당에 나와
꼬물거리며 놀고 있었다.
강아지들의
마당엔
빛이 가득했는데,
어디 딴 데서
흘러온 빛이 아니라
흰 강아지들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 같았다.
인간의
마당하곤
달랐다!
- 고진하,『거룩한 낭비』(문학에디션 뿔, 2011)
옛마당을 그리워함 /이시영
태풍 곤파스가 철탑을 무너뜨리고 항구의 배를 묶고 모든 문명을 비웃으며 무서운 속도로 북상하는 동안, 나는 영도네 집 잘 쓸어놓은 옛 마당이 그리웠다. 홀엄씨를 닮아 하도 정갈하여 뺨이라도 갖다 대고 싶은 대빗자루 자국 선명한 그 마당에 가 자치기를 꼭 한번 하고 싶다.
- 이시영,『경찰은 그들을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창비, 2012)
마당 약전略傳 /곽효환
나무울타리나 토담에 에워싸인 나는
갓 걸음을 뗀 꼬맹이들과 닭, 오리, 강아지의 놀이터이고
저녁엔 모깃불 올리고 멍석 깔고
온 가족이 둘러앉아 소박한 저녁을 먹는 식당이고
감자 옥수수 수박을 먹으며 담소를 나누는 사랑채였다
닭장과 개집, 외양간과 돼지우리가 있고
봄 파종의 시작점이고 가을걷이의 종착지였다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
다시 그 아버지와 어머니가
걷고 넘어지고 일어서고 뒹굴고 뜀박질하고
나로부터 세상을 향해 무수히 나아가고
다시 나에게로 돌아왔다
태어난 아이를 맨 처음 맞고 알린 것도
품어 자라게 한 것도 나의 몫이었다
그 아이가 신랑 신부가 되어
수줍게 초례를 올린 결혼식장이고
그 신랑 신부가 늙어
회갑과 고희 잔치를 연 연회장이며
그렇게 한세월 가고 망자가 된 그들을
먹먹한 가슴으로 떠나보낸 장례식장이었다
윷 놀고 널뛰고 떡메 치는
마을 사람들의 흥성거리는 잔치터이고
고된 농사일 잠시 멈추고
농주로 지친 몸을 달래는 휴식처였다
지신 밟고 농악 놀고 풍년과 안녕을 빌던 사람들
나는 그들의 처음이자 전부이고 마지막이었다
내가 그들이고 그들이 곧 나였다
먼 아버지 적부터 연년이 이어져 내려오다
이제 놀이도 잔치도 예식도 사람도 사라지고
존재마저 희미해진 내 이름은……
- 곽효환,『너는』(문학과지성사,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