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에 관한 시모음 59)
6월의 초록은 금이다 /나초록
연분홍이 사라지고
연둣빛이 세상을 흔든다
누구의 환호도 없이
조용히, 그러나 분명히
푸르름은,
말보다 깊게 사람을 바꾼다
열정이 핀 봄꽃은 찬란하여 좋지만
나는 이 맑고 어린 푸르름이 더 좋다
속되지 않은 마음처럼
덜 말한 문장처럼
변화는 가장 조용한 빛으로 온다
초록은,
이 계절의 금이다
산속의 푸른 유월 /송석 강고진
녹음 짙어진 초록 물결 인양
푸름이 더해가는
초여름 날 풀 내음에 젖어
파란 하늘에
두둥실 떠다니는 흰 구름 바라보며
산속을 거닐어 봅니다
풀숲 찔레나무 덤불에
떼를 지어 앉아
재잘대는 뱁새 떼
하늬바람 시원하게
쏘이며 신이나
즐기는 짓이 보기 좋다
산등성 솔 나무 밑에
앉아 송진 향내 맡으며
하루해를 넘긴다
초록 짙은 여름날
산속의 풀 내음에 가며든다.
6월의 기도 /심진(心眞)
꽃잎이 말을 하였습니다
말하지 못한 내 마음을 대신하여
조용히, 아주 조용히
당신의 이름을 부르며 피었습니다
햇살 아래 피어난 장미 한 송이
그건 다름 아닌,
당신 덕분에 피어난
내 마음 속 사랑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미소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다는 걸
나는 당신에게 배웠습니다
숨결마저 아름다워지는 그 기적을
사소한 하루도 축복이 되고
지나간 시간마저 고마워지니
내가 드릴 수 있는 모든 기도는
오직 당신을 위한 것이 됩니다
부디 아프지 마십시오
고운 이마에 그늘지지 않게
당신의 하루가
늘 햇살 아래 머물 수 있도록
바람에게 부탁합니다
하루에 몇 번씩
당신 곁을 맴돌며 속삭이라고
"누군가 당신을
세상 무엇보다 아끼고 있노라"고
남은 나날의 전부를 다해
나는 기도하겠습니다
그대가 오래도록
아름답게 웃으시기를
6월에 쓰는 편지 /허후남
내 아이의 손바닥만큼 자란
6월의 진초록 감나무 잎사귀에
잎맥처럼 세세한 사연들 낱낱이 적어
그대에게 편지를 보냅니다
도무지 근원을 알 수 없는
지독하고도 쓸쓸한 이 그리움은
일찍이
저녁 무렵이면
어김없이 잘도 피어나던 분꽃
그 까만 씨앗처럼 박힌
그대의 주소 때문입니다
짧은 여름밤
서둘러 돌아가야 하는 초저녁별의
이야기와
갈참나무 숲에서 떠도는 바람의 잔기침과
지루한 한낮의 들꽃 이야기들일랑
부디 새벽의 이슬처럼 읽어 주십시오
절반의 계절을 담아
밑도 끝도 없는 사연 보내느니
아직도 그대
변함없이 그곳에 계시는지요
유월 단상 /글벗 최봉희
산과 물 푸른 물결
눈부신 빛살 되어
떠나간 임을 찾는
흐느끼는 큰 목소리
둘이서 그리움이라
들꽃으로 피었네
산 같고 바다 같은
하늘 뜻 소망 하나
병풍을 두르고서
비단옷 갈아입네
눈부신 천년의 가약
초례청(醮禮廳)에 펼친다
다가온 굽이굽이
흐르는 강물처럼
한 목숨 맺은 인연
물 흐르듯 살아가리
이제는 우리의 행복
사랑 평화 말하리
유월이 오면 /김병중
부엉이가 눈뜨고 조는 밤
형님은 장롱에서 뭉칫돈 한보자기를 꺼내 허리에 찬다
비료 값으로 거둔 거금을 훔쳐 달아나는 건 마을금고 하나를 터는 것
아버지의 호랑이 같은 눈을 짓밟고
서울행 기차를 타러 이십리 길을 단번에 내달린다
기적소리를 뒤로하고 울컹덜컹 서울에 도착해 보자기를 펼치자
돈이 가쁜 숨을 몰아쉰다
꼬리마저 짧은 촌닭이 독수리 되어 하늘 날아보겠다며
햇빛에 일하고 달빛에는 공부하며 꿈의 탑을 쌓아가는데
아버지는 자식이 몹쓸 원수라 하고
형님은 원수가 멋진 자식이 될 거라 다짐했다
꾸룩꾸룩 배고프게 이년
왈칵왈칵 눈물 터지게 이년이 되던 해 여름
도둑의 반대는 성공이라 호언했던 형님은
뻐꾸기 울음 사라진 밤섬을 눈물로 바라보며
끝내 한강을 건너지 못했다
한강은 비가 와도 푸르게 제 길로 흐르고 있건만
형님은 군번 없는 군인으로 강원도 포수가 되었는지 함흥의 차사가 되었는지
유월이면 혼은 동작동 묘지에 머물러 벙어리 뻐꾸기로 울고
몸은 밤섬의 배릿한 사내 내음으로 와서
달빛 사냥하는 처녀 가슴에 명주바람으로 분다.
6월, 장미처럼 붉은 그리움 /고은영
하염없이 바라보는 창가
유월 한낮 흐드러진 넝쿨장미
그 얼굴이 왜 저리 붉은가
청춘을 바친 제단에 사랑과 그리움마저
필요에 의해 꺾였던 비애만큼이나
죽도록 고독했던 몸부림
릴케가 장미 가시에 찔려 죽어갔을 슬픔처럼
진실로 사랑과 그리움을 부르다 죽어간
찰나적 모든 사유의 시간
그러나 아직도 그리움은
사랑보다 더 아픈 상처로
6월의 장미처럼 붉은 꽃을 피우고
내 가슴에 날마다 외로움의 가시를 돋게 한다
유월의 언덕에서 /박희홍
여름을 몰고 오는
비가 데굴데굴 구르며
땅속으로 파고든다
후덥지근하지만 지치지 않고
활짝 웃으며 꽃 피운
아까시나무가 가볍게 흔들린다
힘겨운 삶을 시작해야 하는
비밀의 문들이 열리는 여름
풍요를 꿈꾸며 시뻘게 달군
짠 내 속에 빠져든다
때때로 바람은
먹구름을 몰고 와
가을 풍요를 누릴 수 있게
아무도 없는 언덕배기에서
사방팔방으로 오줌을 갈긴다.
유월의 시골 풍경 /한영택
살짝 여우비가 지나간 한낮의 들판,
탁 트인 청명한 하늘 아래로 바람이 스며들면
싱그러운 물줄기처럼 일렁이며 익어가는 청보리밭은
유월의 바람에 넘실대며 춤을 춘다.
콩밭은 연초록 콩잎으로 가득하고,
모종을 옮겨 심은 고추는 힘차게 가지를 뻗는다.
모내기를 마친 논에는 물 대는 일이 분주하고,
과수원 적과에 농사꾼의 손길은 바쁘다.
계절의 여왕, 오월의 장미가 지고 나면,
가지마다 대롱대롱 탐스럽게 살구가 익어가고,
산비탈 곳곳엔 밤꽃이 하얀 꽃술을 풀어 놓고,
계곡 따라 번지는 시큼한 향내가 여름을 알린다.
6월의 기도 /안성란
어둠의 터널에 빛을 주시고
메마른 가지에 이슬을 주시어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흐르는 맑은 물과 같은 사람이 되게 하소서.
온종일 지친 어깨
삶의 흔적 후회의 그늘을 만들기보다
빛 가운데로 걷는
자신감 넘치는 발길을 주시고
향기가 없는 꽃이지만
입에서 흐르는
고운 향내로 따뜻한 마음을 주소서.
소리 없이 사라지는 먼지 같은 인생에
반쪽의 흔적을 소중히 여기게 하시고
자신을 향해서 크게 웃는
마르지 않는 기쁨을 주소서.
한 사람의 사랑으로
수없이 많은 이들의 미움을 버리게 하시고
두 손에 거머쥔 행복을 소중히 여겨
절대로 놓치지 않는 세월로
인생도 삶도 사랑도 귀중함을 알게 하소서.
사랑 받기보다 사랑하는 마음을 주시고
세상을 한탄하며
시들어 버리는 꽃이 되지 않게 하소서.
6월의 엽서 /심미숙
정강이에 스치는
풀잎이슬 파르르 털어내며
산모롱이 돌계단
원시로 밟아 향일암 가는 길
뎅뎅-
개골짝 물줄기 같은 풍경소리에
흩어진 매무새 단정히 움켜쥐고
가지런한 피아노 건반처럼
등을 돌려도 마주선 오솔길
차례차례 흔들어 깨우는 독경소리에
후줄근한 내 영혼 입맞춤으로 섞인다
차-암, 싱그럽다
이런 날에는
온 몸의 신경을 나사처럼 죄었다가
어느 순간 아메바처럼 분해해버린
목마른 고독의 촉수 낱낱이 게워내고
향일암 모퉁이 섬세하게 피어난
피튜니아 같은 사랑
유월의 풀빛으로 덧칠하고 싶다
유월 마중 /다감 이정애
푸르름이 짙어가는
오월의 막바지
어느새 마음은
유월로 달려가고 있다
이른둥이 손녀는
토실토실 살이 타
백일을 기다리니
맘은 벌써 유월이다
여행을 다녀오며
오월을 마무리하고
방실대는 아이들 그리며
행복한 유월을 기다린다.
유월 /이수인
연보라 오동꽃 흔적도 없이 지고
무성한 잎새 뒤에
오동동 열매 달린 유월
노란 창포꽃 피어난 연못 속에는
비단 붕어들 뻐끔대며 노래하는 유월
패랭이꽃, 찔레꽃, 토끼풀꽃, 망초꽃
산마다 길마다 지천으로 흐드러진 유월
갈증 난 산들은 강물을 마시고
진초록의 살이 올라
등성이가 불룩한 유월
밤꽃 하얗게 피어난 숲길을 걷노라면
코끝으로 스미는 아찔한 유혹
아직 유월인데 어인일로 서둘러
덥단 말이냐
유월이 오면 /박영원
해마다 유월이 오면
짙붉은 장밋빛 울음이
장대비로 쏟아진다
지난날, 밀어닥친
해일의 발굽 아래
짙푸른 대지 피 토하던
유월이 오면
동작동 구릉을 날아드는
흰 소쩍새들, 차가운
돌비석만 어루만지다가
이 골짜기
저 능선 쓰다듬다가
소쩍소쩍 흐느끼며
흐르는 구름 한 점
동공에 담는다
잊혀지는 기억 속으로
해마다 연년이
유월이 오면
동공에 가득한 구름만
가슴 저며내는 한이 되어
짙붉은 장대비, 하염없는
소쩍새 울음이 된다
강물이 된다
유월의 시인 /김필로
개망초가 막 말문을 트기 시작한
우리 동네 막내제 호수에는
유월의 시인이 있다
물안개가 거미줄처럼 넘실 거리는 호숫가를 도는데
밤꽃 향기에 걸음이 늦어지고 빨라지고
눈뜬 물고기도 잠에서 도드라진다
또 어쩌자고 그의 솜씨는 이토록 영민한가
톡 터지는 알갱이가 발바닥을 건드린다
새신을 신고 폴짝 뛰는 개구리가 되려는데
바닥은 이미 검은 버찌물이 들었다
산벚꽃이 피는 이유를 만들어 주는 피멍들 사이를
서너 바퀴 더 돌다가 도구도 없는 작가 노트를 꺼낸다
역사의 혼령으로 피어나는
개망초에서 개망초 사이로
유월을 모아모아
시인의 집을 지어간다
유월의 들국화 /허화석
가시는 임 그리며
유월의 들국화 한 송이 걸어간
그 길 끝에 서 있는 큰 사랑을 본다
슬픔, 고통, 번민
이런 것들은 안고 갈 테니
행복해지라는 마지막 말
동해 푸른 바닷물을 다 채우지 못했는데
허물을 벗은 매미의 울음소리는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언제나 그랬듯이 우주를 노래하건만
임께서는 어찌 먼 길을 마다하지 않았을까
먼지 쌓인 사진첩 속에 뻥 뚫린 기억의 조각은
아스라이 멀어져 가고
이제 남겨진 사람들은
별빛 그리움 물감들인 채
어둠을 품고 살아야겠지
봄 여름 가을 뒤에 오는 겨울
아직 유월인데 벌써 얼어붙은
이 그리움을 어찌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