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에 관한 시모음 100)
그 여름의 끝 /이성복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 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여름을 보내며 /이원문
덥다 뜨겁다 그 아우성 치더니
이제 이 여름도 한플 꺾이고
가을 맞이의 들녘 참새 떼 기다린다
얼마나 빠른가 이렇게 빠른 것이 계절인 것을
그 며칠 사이로 조금씩 더 조금씩
절기를 기다렸는지 무더위를 보냈는지
말복 끝자락에 무너진 여름
가을은 여름의 반 그만큼 짧을 것인데
오는 가을 깊어 가면 어떻게 하나
옛 생각에 빼앗길 것 많은 가을
우선 잃어버린 그날 추억도 그렇고
어릴 적 메뚜기 잡던 그날도 그렇지 않은가
가는 여름 /박인걸
푸르렀던 청춘의 열기는
이제 저 멀리 아련해지고
불타오르던 젊은 날의 꿈은
서늘한 가을바람에 흩어지네.
두 손으로 움켜잡았던 희망들은
시간 속으로 사라지고
남은 건 이마의 깊은 주름과
가물거리는 추억뿐이네.
청춘이란 이름의 계절이
오래 머물지 않을 줄 알았지만
가을빛으로 물드는 나뭇잎이
내 마음을 먼 길로 재촉하네.
가는 여름을 붙잡는다 해도
낙엽의 그림자는 길게 드리우고
지나온 길을 뒤돌아볼 때
덧없음 속에서도 더욱 소중하네.
삶도 세월도 흘러가는 강물
누군들 감히 멈추게 하랴
가는 여름 묵묵히 바라보며
오는 가을을 고요히 맞이하리.
나는 여름이 좋다 /이재무
1
나는 여름이 좋다
옷 벗어 마음껏 살 드러내는,
거리에 소음이
번지는 것이 좋고
제멋대로 자라대는 사물들,
깊어진 강물이 우렁우렁
소리 내어 흐르는 것과
한밤중 계곡의 무명에
신이 엎지른 별빛들
쏟아져 내려
화폭처럼 수놓은 문장
보기 좋아라
천둥 번개 치는 날
하늘과 땅이 만나
한통속이 되고
몸도 마음도 솔직해져
얼마간의 관음이 허용되는
여름엔 절제를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를 마구 들키고 싶고
내 안쪽 고이 숨겨 온 비밀
몰래 누설하고 싶어라
나는 여름이 좋다
2
나는 시끄러운 여름이 좋다
여름은 소음의 어머니
우후죽순 태어나는
소음의 천국
소음은 사물들의 모국어
백가쟁명 하는 소음의 각축장
하늘의 플러그가 땅에 꽂히면
지상은 다산의 불꽃이
번쩍인다
여름은 동사의 계절
뻗고, 자라고, 흐르고,
번지고, 솟는다
여름 /이영주
악천후 속에 있다.
엄마는 찬물로 쌀을 씻었다.
우는 것은 쉽다.
엄마는 양파를 썰며 말했다.
악천후 속에서 우는 일같이,
쉬운 일은 하지 마.
엄마는 국을 끓였다.
모든 폭풍이 이 작은 집 안으로 모여들었다.
나는 물을 쏟았다.
창밖에서 목이 긴 나무가 안쪽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몹시 흔들렸다.
나는 물속에 엎드린 채 영원을 둘러싼 기후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엄마는 식탁을 닦았다.
아무리 닦아도 물이 흘렀다.
악천후 같은 영원은 이번 삶에서 끝나지 않지만 그래도.....엄마는 희미하게 웃었다.
길게 땋은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여름 /안광수
따뜻한 열기 타고
내려오신 당신
그토록 애원하며 오신
당신을 어찌해야 하겠어요
기다렸던 시간에
어느새 눈물 흘러 눈으로
아이들은 싱글벙글
얼음장 덩어리가
집안 가득 쌓아놓고
너 한잔 나 한잔
붉게 익어가는 얼굴
덩달아 매미도 그칠 줄
모르고 하늘을 붉게 익어가네
여름의 우두머리 /남시호
예로부터 이 집안은
어마어마하다
입을 아 ! 다 벌려도
엉덩이만 건드리는 듯
몸 따로 마음 따로 아티스트인가
전설의 붉은 성질 아무도 몰라라
둥그런 속아지 살아있음을
뜯어보지 않고는
꿈이 바닥일 때는
이글거리는 둥근 정열 그냥 둘 수 없지
괴이한 전설 얼굴 감춘 갱스터
어서 가슴을 찢어라
녀석이랑 같이 놀게
여름의 곡비 /기해온
도시의 여름을 점령한
사막 같은 떼창은 그들의 강렬한 어필이다
소리가 모래바람처럼 뭉쳐져 귀 안을 휘젖는
횟대 위 날개 한 벌의 데데한 울음처럼
먹먹한 이 울음 무더기
울음에도 리듬이 있어 한마디씩 숨 고르다가도
누군가 선창을 하면 뒤질세라
오장육부 다 끌어올려 울음 우려내는
여름의 곡비들
울기 위해 태어난 것들
건조한 그들의 울음에 눈물이 있다면 한 강물 이룰 것이다
질척한 강물은 울음을 싣고 흐르다 흐르다
어느 강둑에 닿으면
새싹 움터 듯 넙죽넙죽 번져 고이지 않고 갇히지 않는 소리로
금방 강물을 덮칠 것이다
곡진한 이 곡비도
가을 길 더듬는 또 한 울음에게
자리를 내줄 그때를
기다리는지도 모르겠다
여름 /하영순
매미가 나무에 앉아 있으며
무척 더운 가보다
하루 종일 목이 시도록 울어 댄다
칠 년여 헤매며 이 땅에 왔는데
삶이 너무 짧아서
서러워 울고 있는지
잠시 살다 가는 삶 나무 위에서
좋아서 노래하는 것인지
그건 아무도 모른다.
매미는 아는지
모르면서 이름 짖지 말자
우는 것인지 노래 부르는 것인지
여름의 그림자 /이원문
이렇게 다를 수가
이렇게 빠를 수가
요 며칠에 바뀌는 계절
며칠이 아니라 하루 이틀의 시간인가
바람이 다르고
아침 저녁이 다르더니
귀뚜라미 울음 끊임 없어라
귀뚜라미가 보낸 그 여름인 듯
이 가을 더 깊어가면
단풍에 낙엽 떨어질 날이
그때는 추울 날만
쓸쓸한 가을날이 며칠이나 될까
여름 /이남일
길다
더위만큼이나
가을의 기다림은 길다.
매미소리
그 뜨거운 열정은
얼마나 더 간절하였으랴
늘어진 수양버들만큼이나
긴 여름
이 또한 지나가지 않으랴
여름 배웅 /성백군
한 사나흘,
더위가 기운 것 같아
여름이 가는 줄 알았더니만
오늘은 왜 이래
가만히 있는데도 땀이 나고 숨이 턱턱 막힌다
배웅을 못 해줘 삐쳤나 싶어
물 한 컵 떠서 시멘트 바닥에 부어주었다
찬물 먹고 정신 차리라고
말복,처서,지나 곧 있으면 추석인데
계속 뻗대며 고집부리다가는
음복(飮福)받기는 다 틀렸다고 윽박질렀더니
서러운지,흐느끼는 여름
하늘에서 빗방울이 뚝뚝 떨어집니다
그를 줄 알았더라면 달래어 보내는 건데
너 때문에
세상이 이상기온으로 고생했지만
자연현상에 대해서 많이 배우기도 했으니
가는 길이 순탄하길 기도하마.
내년에는 우리 서로 좋은 낯으로 만나 사귀어 보자며
미웠던 여름이지만 간다는데 어찌하겠습니까
마음 비우고 배웅했지요
여름의 우두머리 /남시호
예로부터 이 집안은
어마어마하다
입을 아 ! 다 벌려도
엉덩이만 건드리는 듯
몸 따로 마음 따로 아티스트인가
전설의 붉은 성질 아무도 몰라라
둥그런 속아지 살아있음을
뜯어보지 않고는
꿈이 바닥일 때는
이글거리는 둥근 정열 그냥 둘 수 없지
괴이한 전설 얼굴 감춘 갱스터
어서 가슴을 찢어라
여름의 황제 수박이여
여름이 떠나가기 /이영지
여름이
구슬땀을 흘리며 떠나가기
떠나는 자리마다 옴포복 동글동글
땀방울 익어가느라 자리 잡는
포도알
동그란
포도알이 살짜기 앉느라고
천둥이 물난리로 쿵 쿠웅 소리 질러
남기고 떠나가기에 몽울몽울
포도알
여름 /윤홍조
쏴~ 한줄기 소나기 다녀가신 뒤
제 몸 늘렸다 줄였다
마른 흙바닥이 꿈틀거린다
때맞춰 비 따라 나온 지렁이 한 마리
풀숲의 고무줄 하나 튕겨 나오자
심심하던 햇빛이 냉큼 주워들고 놀고 있다
땡볕 쏟아지는 불 마당
꿈틀꿈틀꿈틀……
얼마나 가지고 놀았던지
발길에 축 늘어져 있다
밟아도 꿈틀하지 않는다
팽팽하게 당겨졌던 고무줄의 한순간이
툭, 스스로의 한계를 놓아버린
무엇이나 쨍쨍 말려버리는
뻣뻣 목 타는 여름날!
여름을 허락하다 /장대송
봄이 갑니다
딸기가 광주리에 담겨져 나온 모습
딸기 하나를 입속에 오물거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봄을 보내고 여름을 허락합니다
해마다 묵새긴 마음을 가지고
한두 개 정도의 문살이 부러진 문을 여는 일처럼
봄을 보내고 여름을 허락합니다
나보다 더 쓸쓸한 사람을 곁에 두고
마음을 달래는 일처럼
봄을 보내고 여름을 허락합니다
여름은 간다. /박인걸
그 지루했던 계절은 가을 뒤로 숨고
은행잎 빛바래는 언덕에는
북방을 유랑하던 바람이 찾아든다.
햇볕은 지는 꽃잎처럼 흩어지고
버즘나무 그림자가 건너편 인도를 덮을 때
작열하던 여름 기세는 바지랑대처럼 기울어
이제는 노출된 어깨가 시리다.
청청하던 풀잎을 대할 때
한없이 부끄럽던 늙은 피부가
이제는 긴 팔 소매가 가려주니
한치의 부끄러움 없이 당당하다.
떠들썩했던 풀벌레 소리 사라지고
흙길을 밟는 발자국엔 나뭇잎이 내려앉는다.
산골짜기 타고 흐르던 냇물 소리도
조용히 사라진 그 자리에
반가운 가을은 작년처럼 자리를 잡는다.
잊고 지내던 한숨들이
서늘한 바람에 실려 날아가 버리고
하늘은 짙푸르게 맑아져
이제는 내 마음도 가벼워진다.
양어깨를 짓누르던 짐을 내려놓고
가을 그늘에 숨을 고른다.
그 지루했던 여름은 갔지만
계절의 흔적은 여전히 가슴에 남아
겨울이 오더라도 나의 기억 속에
아무 말 없이 조용히 머물리라.
여름日記 /최병무
60고개를 넘고보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지구의
자전속도가 빨라지는 것이었는데, 말하자면
노년은 지는 태양인 것인데 나는 이 사실이 서운한
것이 아니라 하늘에 있다는 (우리가 온 곳이라는)
그 나라가 몹시 궁금해지는 것이었다 혼자
길위에서 내 나이를 계산하다가 신빙성이 없어
웃음만 나오는 것이었는데, 生이 일회성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어떤 사람은 가는 세월을
잡지 못하여 안달하고, 어떤 사람은 노년의 하루가
못 견디게 지루하다 나는 바쁘다, 마음이 바쁘다
우리는 경험을 위하여 지구에 왔다
점점 낮아지는 내 자리는 수행의 現場인데
부쩍 사후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애벌레는 나비가 되는 것을 알고 있을까,
애벌레는 나비가 되는 꿈을 꾸지 않아도
나비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