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비에 관한 시모음 11)
여름 비 오는 날 /박인걸
밤 꽃이 흐드러지던 날에
궂은 비는 추적추적 내리고
순결한 꽃송이 비에 맞아
고개 숙인 풍경에 가슴 짠하다.
점점 굵어지는 빗방울이
내 가슴 언저리로 쏟아질 때
깊이 묻어 두었던 그리움이
물안개처럼 피어오른다.
너에 대한 애잔한 그리움은
빗물처럼 깊게 고이고
이어 떨어지는 빗방울은
그리운 가슴을 더욱 부추긴다.
여름 비 종일 내리던 날에
흠뻑 젖어 웃음 짓던 네 얼굴이
기억 더미 속에서 떠오를 때면
된 시름 잠 못 이루고 뒤척이겠다.
여름비 /송근주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여름비
살아있음을 알아서 들려주기도 하고
속삭이기도 하고 그리워하기도 하고
사랑한다는 담론을 한다
숨 쉬라고 있다는 감사하는 마음을 주고
살아있기에 숨을 참으면 죽는다는 것을
천둥 번개의 신호로 참지 말고 숨을 쉬라고
고함을 고래고래 지른다
움직이라고 움직여야 살 수 있다고
살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산다고
잔소리하고 귀찮게도 하면서
온몸 움직이게 한다
여름비는 살아가는 이야기하며
여름비는 숨을 쉬는 감사 인사하며
여름비는 살기 위해 움직이게 하며
여름비는 통찰이라는 깨달음 준다
여름비 이야기 /정은희
따뜻한 봄은 이제 안녕
슬금슬금
뜨거운 태양이 높이 날아
여름이 온다
둥둥 리듬 소리 맞추어
개굴개굴 개구리가 울며
작곡한다
창문에 동그라미를 그리며
똑 똑똑 문을 두드린다
초록색 가지 사이로
먹구름 수묵화가 그려지고
여름에 내리는 비는
고요한 정적을 깨우고
재잘재잘 정겹기만 하다.
여름비 내리던 날 /최하정
난간에 매달린 파릇한 잎새들
하얗게 뿌려지는 비 맞이하며 반긴다
여름비 내려앉아 쉼 하면
이파리들 좋아라 더욱 초록을 발하며
소리 없이 흩날리는 웃비에
겨우 모인 물방울은 기둥을 타고 흐른다
은빛 물안개의 희뿌연 창밖 풍경에
난 그냥 숨이 멎을 지경이다
잿빛 하늘은 어느덧 말간 공기로
주변을 정화 시키며
맑은 한나절을 만들고 있다.
여름비의 열 손가락 /안주철
빗방울은 손가락이 열개
세상에 부딪히면서 손가락 열 개를 펼치고 있어요
잠시 후 흐린 하늘을 끌고 내려오는 빗방울을
펼친 손바닥으로 받아내려고 해요
빗방울의 손가락 열 개가 곡선을 그리면서 퍼져나가고 있어요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를 하는 듯합니다
마지막 순간에도 기도를 멈추지 않는 사람의 등이 보입니다
기차가 지나가면 빗방울들은 휘청거리면서 세상을 만나지만
빗방울의 손가락은 열개
사라지면서 하늘과 땅과 세상을 향해
사랑의 모양을 만들고 있어요
가끔씩 폭우가 쏟아지기도 해요
폭우가 거세지면 비의 빽빽한 숲이 들어서고
저는 저도 모르게 눈을 비비게 됩니다
비의 숲에서 사는 동물들이며 식물들이 궁금해서
비가 그치면 보일 듯도 하지만
비의 숲은 한 송이 꽃도 보여주지 않습니다
어떤 날은 비가 내리면서
물고 있던 씨앗을 하나씩
세상에 떨구고 날아가는 꿈을 꾸기도 해요
씨앗에서 태어날 시간의 꿈틀거림이
또 하루를 살게 하는 듯합니다
다음 주까지 장마라고 해요
비가 내렸다 그치고
내렸다 그치기를 반복하면서
내림과 그침 사이에
꽃 한 송이가
땅 끝에서 하늘 끝까지 피어 있어요
볼 수 없지만
어떤 꽃 한 송이는 시들지 않는 듯해요
―계간 《가히》(2024, 가을호)
사랑의 여름비 /김덕성
지나가는 비처럼
부슬부슬 내리는 나약한 비지만
초여름 날 촉촉하게 적시며
생명 비처럼 내린다
초록빛 물감을 뿌린 듯
나뭇가지 너무 좋아 환성을 찌르고
산야가 사뜻한 생동감 주니
이 아름다움은 무엇에 비길꼬
꽃은 웃음으로 화답하며
예쁘게 적시며 생명의 약진을 보이고
비 한 방울로 사랑의 열매를 맺으며
축복처럼 사랑이 내린다
메마른 영혼 촉촉하게 적시며
사랑 비는 고즈넉하게 내리는데 마침
그녀의 사랑의 노래가 들려오는
6월 희망의 아침이어라
여름비 내리는 카페에서 /김수진
비는 유리창을 타고 내리고
당신은 말 없이 커피를 저었다
우산을 세워둔 자리
물기 가득한 침묵만
테이블 위에 번졌다
나는 모카를 마시며
당신의 눈동자에서
내 마음의 이상음을 들었다
“괜찮아요”
그 말조차 비처럼
끝내 증발했다
그날, 떼지 않은 말들이 더 또렷했다
장마는 지나갔지만
당신의 침묵은
지금도 내 안에서
천천히 내리고 있다.
여름비의 노래 /박재원
수묵 빛 하늘을 배경으로
툭툭 투두둑
리듬을 탄 음률이 경쾌하게
우중곡으로 흐른다
열기에 지쳐있던
나를 깨우고
말을 건네고
내 귀에 속삭이던 말
사랑 海라는
하나의 우중 의식을 갖는다
비의 노래에
초록빛 마음에 수많은 동심원을 그린
세상 풍경 품은 빗방울이 구른다
여름비 /윤보영
'또 비가 온다네요!''
찜통더위에
이 말은 반갑지만
''또 보고싶어지겠네요!''
이 말도 어울릴 것 같다
비를 보면
보고 싶은 사람 생각은
당연하니까
여름비 /소순희
샹들리에 불빛 흐린
아리아스 석고상의 실내
낮술 취한 긴 하루
몰락한 청춘은
애끓는 숨소리마저
지우고 있었다
바다에 가자고
가선 돌아오지 말자던
일방의 약속은
파도처럼 무너지고
내란의 예감이 꽂히던
그 여름의 눈물.
여름비 오는 날 /최수경
비가 내린다고
부침전을 부친다고
고소한 기름 냄새에
우산을 펴들고 집을 나서
동네 가게 막걸리 한 병을 들고 들어와
내친김에 묵은지찌개도 끓여
혼술 상을 차려놓고 앉는다
아버지는 비 맞으며 논일보고
소먹이 풀 한소쿠리 짊어 지고 들어와
젖은 몸 툭툭 털고 저녁 상을 받는다
하루의 고됨을 털어줄 막걸리 한잔
사는 재미가 별거겠나
처진 하루 곡주 한잔으로 씻어 내는거지
비오는 날은 그렇게 보내는 거다
앞산 가렸던 안개가 어둠을 따라
사립문 사이로 젖어 들고
제비가 처마 밑 집으로 돌아오는
비오는 여름의 저녁이다
아들아 너도 한잔해라
오늘은 늙으신 아버지의 술친구가 되어
소싯적 이야기를 들을 일이다
여름비 /김해정
흙 내음 품고 쏟아지는
창문 밖으로 울림소리
뜨거운 열기에
고대하던 빗방울
쪼르르 수정처럼 떨어진다
가려지던 풍경
풀 내음 머금고 추억에 젖어
그리움 발밑에 하얗게 퍼지면
오늘은 아름다운 멜로디 듣는 날
거친 록 음악과 발라드가 교차하며
한줄기 작은 여운의 청량제가 되어
먹구름 사이
성난 햇살의 눈물
우당탕 발소리 가슴을 적시겠지
여름비 순정 /정보경
마른 장마 간질간질 하더니
하늘에서 구멍 뚫리듯 비가 내린다
열매를 쪼르르 매단 단감나무에 여름비
흠뻑 적시면 여름은 보라색 달맞이꽃을
입에 문다
비릿한 바닷바람이
바다에서 바다로 그곳을 부르면
갈매기들은 소리 내어 운다
플라타너스 나뭇잎은
고해성사를 하고
비는 유리창을 두드린다
빗소리가 점점 커지면
기차를 탄다
마지막 기차 맛은 아쉬움 속 설렘이고
설렘 속 아쉬움이다
빗속, 투명한 빗속
그 줄기를 잡고 흔든 적이 있다
끊어졌다 이어지고 또 이어지는,
소복소복
한세상을 채우고 강으로 떠나는
아프리카 늑대 같은 순정
여름 비 /박인걸
나뭇잎 위로
빗방울 뛰어가는 소리에
그대 걸어오시던
발자국 소리가 들립니다
어느 해 여름
아직 비는 그치지 않고
어둠이 내려앉은 거리로
당신이 걸어오고 있었죠
묵직한 발걸음으로
작은 여운을 남기며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시던
당신을 잊을 수 없습니다
긴긴 기다림에
아득하기만 했던 당신이
느닷없이 오시던 날
나는 주저앉을 뻔했습니다
여름비 내리는 날이면
그날의 추억을 되짚으며
행여 당신이 오시지 않을까
비를 맞으며 서있습니다.
여름비 /유병록
잃어버린 우산은
빗소리 속에 두기로 해요
같은 것을 찾아
빗속을 헤매지 않기로 해요
젖은 마음을
내일로 가져가지 않기로 해요
깊은 잠을 자기로 해요
여름의 일을 가을까지 데려가는 건
엄두도 내지 않기로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