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夏至)에 관한 시모음 5)
하지 /김나영
매캐한 밤꽃 냄새가 나를 덮쳤다
능소화 진홍빛 입술이 담장을 넘었다
화단의 으아리꽃들이 쩍쩍 벌어졌다
후텁지근한 흙내가 목덜미를 휘감고 올라왔다
벌과 나비의 날갯짓에 허공이 빨갛게 부풀었다
여자의 치맛단 쓸리는 소리를 들으며 고추가 여물었다
이명처럼 끊겼다 이어지고 끊겼다 이어지는 개울물 소리
그 방에는 멀리서 온 마른 여자 하나와 눅눅한 베개 하나와
천천히 똬리를 풀기 시작하던 적요의 굶주린 혓바닥과
검은 근육질로 일렁이던 짐승 같은 밤의 숨소리와
누런 밤꽃 냄새가 탱탱하게 발기하던
핫팬츠처럼 짧았던 그날 밤
밤의 운동장을 가로지르던 온갖 것들의 붉은 하지와
하지 논물 /권달웅
논두렁에 솟아오른 쥐눈이콩 잎
써레질한 흙탕물에 꼬불거리는 올챙이
논물에 내려앉은 낮은 산
희미한 알루미늄 낮달
봇도랑에 왁자한 개구리 울음소리
척척 금간 농부 얼굴
쇠파리를 쫓는 황소 꼬리
논물에 찰랑거리는 워낭소리
하지 /한여진
살구를 밟았다
이제 여름도 끝나가고 있군요
산책로에는 야생 살구들 넘치고
익지 않은 살구 하나 구두 아래 으깨지
그래도 산책은 계속될 수 있었지만
그만 돌아갑시다 점심시간도 끝났어요
너는 두번째로 말했다 오후 열두시 오십분에는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는 잠시 멈췄다 나는 왔던 길을 돌아보았다 오늘은
낮이 가장 길다고 합니다 밤은 짧다는 뜻이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
을 땐 구두 밑바닥에 살구즙이 흐르고 있었고 하고 싶은 말을 어떻게 해
야 할지 알 수 없어 하지 못한 말로 남는다면 그것은, 까지 생각했을 때
두번째 살구를 밟았다 살구즙이 자꾸만 흐른다
자꾸만이라는 단어를 자꾸만 쓰게 되는 것
사람들이 자꾸만 짓고 자꾸만 만들고 자꾸만 낳고 자꾸만 먹어치워서
우리가 서로에게 진짜 하고 싶었던 말들이 자꾸만 뒤처지니까
어떤 열매 익지도 않고 떨어져 깨지듯
어떤 마음 말해지지도 않고 사라지듯
오후, 한낮
여름은 갔고
굴러다니는 살구 앞에서 그저 산책로를 끝까지 걷는 일이 또는 우리 다
시는 돌아가지 않기로 해요, 라고 말하는 것이 이렇게나 어려워서 너는
끝났다고
자꾸만
하지 /문성해
태광 주유소 담벼락에
오줌 누며 서있는 해바리기 떼들
뻔뻔스레 이쪽을 보고 웃는다
석유를 퍼 먹었나
검게 번질거리는 얼굴이다
여드름이
툭툭 불거진 저 얼굴들
쇠스랑으로 벅벅 긁어줄까
내 혀를 깨물어 잘게 뱉어 줄까
따분함이 희번덕거리는 정오
삼투압으로 높아지는 적개심을
우리는 높이 쳐들고
확 라이터를 갖다 대어 버려?
휙 담뱃불을 던져 버려?
하지(夏至) /김승호
하지에 낮이 가장 길고
태양이 가장 높다네
하지에 뭘 하지?
길고 높은 게 또 있지
나는 널 좋아하지
그런 넌 날 사랑하지
해바라기 꽃처럼
나도 널 늘 사랑하지
생각하지
우린 그렇게 행복하지
하지夏至 /장순금
바람이 우주 구덩이로 빨려 들어간 후
꽃잎은 입술이 허옇게 타고 나무는 선 채 뼈가 된
인기척 한 점 없던 그
하루,
공중의 수분들이 역류하여 바닥에 매달리고
네 더운 손으로 한 약속은 땅 끝으로 밀려 전생으로 흘러갔나
기다린 하루해는
물기 쫙 빠진 소금 몇 알로 남아
늘임 음표처럼 늘어진 긴 혓바닥에
어둑한 시간이 지루한 몸을 털며 서서히 밖으로 나가자
나도 나에게서 낭떠러지처럼 중지되었다
어디선가 적막을 깨는 낙숫물 소리 똑 똑 똑,
하지(夏至) /김철이
가장 긴 대낮 시간 자비에
농번기 농부들 큰절하고
나라님 더불어
뭇 백성 마음가짐 행동거지 청결히 한댔지
농심은 일각이 석삼년이라
논바닥 물 대기 가뭄 대비로
코 풀 새 없고
밭고랑 타는 아낙들 치맛자락 꽃불이 일겠네
한해 풍흉은 하늘의 몫이거늘
대자연 부려 먹을 심사인지
제단에 제물 쌓고
기우제 큰절에 군주만 등 휠 새라
초여름 문턱에서
조상님 물려주신 속담 풀이해 갈 제에
햇감자 밥상머리 걸터앉고
감자밥 감자알이 저절로 굵어간다.
하지夏至, 그 가운데서 /김태운
뭘?
어찌 하라는 것인지
사뭇, 의아한 아랫도리의 궁금증이다
중력을 향한 공중의 불덩이 하나
쨍쨍 자오선을 긋고 있다
하늘과 땅, 그 어중간의 점 하나
콘크리트 벽 속에 숨어있다
멀리 하늘을 오르다 만 1,950미터의 해발의 시선이 바다 가까이에서 머뭇거리는 맨발의 점
호시탐탐 째려보고 있다
필시, 마냥 게으른 불알에 대한
묵언의 호통일 게다
(얼른 산으로 숨거나 바다로 뛰어들라는...)
종일, 중심을 잃고 쩔쩔 매는
건조한 그 기슭의 점
뚝, 뚝...
분명, 몇날 며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인데
이마가 대신 내리는 축축한 수액이다
축 늘어진 아랫도리를 빨고 있다
멜랑꼴리하게
하지(夏至) 전야(前夜) 2 /김영란
어제는 잠을 거의 못잤어
우리가 저녁을 어지간히 무겁게 먹었어야 말이지
내가 술 한 잔도 안마신 건
즐겁고 반가운 분위기에 이미 취했었기 때문이야
오랜만에 마음 턱 놓고 말랑말랑 보들보들 했다
실컷 크게 많이 웃었네
얼마나 떠들었는지 목이 쉬었어
목청 높이지 않아도 수다는 수다니까
살아보니 감정에도 공부가 필요한 거 같아
가끔 울어야 할 때 웃은 적 있었거든
내 나이가 몇 살인지 가늠 안될 때 혹시 있어?
자주 갈피 잃고 헤매는 난
이름 전화번호 잊는 건 비일비재
단박 기억해내는 사람 존경스러워
주민등록번호 안 잊는 걸 다행이라고 해야하나
그래서 컴퓨터를 켜고 내 챠트를 꺼내봤어
컴퓨터 나이에 두 살 더하면 얼추 맞았었는데
이상하게 터무니없이 젊은 아줌마가 나오네
이건 아닌데...
60이 되기 전에 뭐라도 되야 하지 않을까
마음이 갑자기 조급해졌어
잠을 설친 어제는 어둠에 골똘히 집중해봤어
어둠의 숱한 표정과 강렬한 감각이 이끄는대로
끌리는대로
아무 편견없이 꽂혀보려 시도해보았어
그러다 꼬일대로 꼬여 헝클어진 거기서 빠져나오느라
짧은 밤을 꼴딱 새웠어
나도 나를 도무지 모르겠을 때 멈춰 심호흡해야
겨우 넘어가는 장면 있잖아
지금 내 설명이 친절해? 그럼 다행이구
늙어가니 퇴행에도 결심같은 부단한 연습 필요해
어정쩡 어물쩡 어중간 회색의 원소들 속에서
흑과 백 가려 순위 정해 표를 만들어야 해
화학 주기율표 같은 거 말이야
물론 재미는 하나도 없지
몸과 마음이 다른 속도로 낡아간다는 건
하나같이 파괴적이고 폭력적이거든
또 그걸 잘라내고 도려내어 경계 지운다는 건
참으로 잔인한 작업이니까
그래도 어차피 해내야 하는 일인 걸 뭐 어쩌겠어
이제는 푹 빠저서 아무것이든 버리는 휴식 절실해
격렬한 감정의 기복은 너무 많은 에너지를 요구하거든
절대 익숙해지지 않는 예민도 있는 법이니까
순응이 전부 다 정답은 아니라고 봐
거스름 삐딱함이 올바른 경우도 살면서 겪었잖아
변심도 여러 갈래 진심 중 하나야
난 혁명을 하기엔 이미 너무 많은 나이지만
반항하고 싶을 때 있어
그리고 하려면 제대로 뽀대나게 해야겠지?
이것도 욕심이고 오지랖이겠다
다음엔 내가 쏠게 묵직하게 거하게
드문드문 오는 하지(夏至) /류경무
죽은 고양이 발톱에 비늘을 걸고 도강하는 꽃뱀 종아리 터뜨리며 강물 거슬러 오르던 햇양파들
복숭아 과수원에 든 무지개의 일곱 난쟁이 분 바른 포도알 깨물고 자맥질하는 가시내들
정강이 파고 들던 거머리 부풀어 오르는 아랫도리에 감춘 감자며 호박이며
우뭇가사리 청산가리 탄 비눗물 한 사발 마시고 땡볕 아래 잠든 남자
우물가에 둘러앉아 마당을 쪼아대는 참새와 구름에 짓이겨진 붉은 꽃잎들이 흘러온다
온몸에 처바른 정액을 핥던 복날의 개처럼 화물칸에 올라타 이곳을 떠났던 형제들 소식도 온다
강건너 적국에서 불어오는 성근 피 냄새 털갈이할 때가 오고 있다
먹다 남은 뼈와 살을 발라내 흙 속에 따로 묻어두고 기다리는 드문드문 오는 하지(夏至)
하지(夏至)의 기도 /정연복
오늘은
양력 6월21일
북반구에서
낮이 가장 긴 날.
오늘만큼은
내 마음 내 가슴도
순수한 사랑의 빛으로
충만케 하소서.
푸른 하늘 아래
햇살 밝은 세상에
나 이렇게 살아 있음에
감사하게 하소서.
오늘은 하지(夏至) /윤보영
하지 하지 하지
생각났다고 말을 하지
하지 하지 하지
좋아한다고 말을 하지
하지 하지 하지
사랑한다고 말을 하지
하지 하지 하지
용기 없어 못했다면
하지를 핑계 대고 말을 하지
하지 하지 하지!
뭘?
네 생각!
오늘은
밤이 짧은 만큼
낮에 네 생각 더 많이 해야겠다!
하지니까~♡
하지 /최광일
무덥고 짜증나는 날중에
하지라
땅맛의 진수인 감자는
하지 감자가 최고라
그 뜨겁던 햇볕도
우중충한 우거지상에 걸려 오도가도 못하니
비라도 내리면
우중 오수나 즐겨볼까
아님 하지 감자라도 쪄
발가당까진 파삭한 감자에
빨간 고추장 푹 찍어
호호불며 즐겨볼까
옛 맛이 그리워
찾으려해도
똑 같은 하지 감자인데
맛은 옛 맛이 아니니
고개만 갸우뚱?
하지夏至 /유영애
잉걸불 사그러들어 잿가루 될 때까지
뒷마당 가마솥 안 백숙이 뜸이 든다
내 안에 도사린 불땀 어스름도 사라진다
여우비 지나갈 때 장작냄새 인삼냄새
툇마루에 아버지는 고즈넉한 눈빛으로
어머니 낡은 앞치마 가만 내려 보신다
가장 긴 낮 길이 "하지"(夏至) /임영석
여름날 바쁜 걸음
낮의 길이 최고로 길어진
"하지"란 바로 여름이 시작이라
24절기 중 열 번째
절기로 정오의 가장 높은
여름의 태양 높이 일사량 최고
모내기도 끝자락
장마가 시작되는 절기로
감자전 생각이 솔솔 기억나요
무더위와 전쟁인가
일 년 중 가장 긴 낮시간
장마 예보만 있고 비는 안 와요
밤은 가장 짧고요
낮의 길이는 가장 길다
열대야 한여름 밤이 걱정이라
폭염 주의보 발령
벌써 무더위 전투준비
여름이면 찾아오는 모기 공격
하지제夏至祭 /권천학
그 계절엔 항상 목이 말랐다
물은 차고 생각은 설익어 설사는 계속됐다
젊음은 항상 시들어버린 장미 같거나
꽃 진 자리에 돋아난 가시였다
먼 꿈을 꾸는 일에서 손을 씻고 싶었지만
그런 겨를이 없었다
고열에 시달리느 의식은 건조했고
밤은 날마다 짧아져갔다
물은 끓여먹고 음식은 익혀먹고
손을 깨끗이 씻으라는 의사들의 충고는
성경구절에나 박혀있는 잠언 같았다
감자꽃 대궁이 쑥쑥 밀어 올리는 결핍과 외로움은
초여름 장마에도 떠내려가지 않고 끈질기게 남아
발목을 걸어 자꾸만 넘어뜨렸다
물의 온도만큼 체온을 눕혀가며
목숨을 일으켜 세우고
오한에 떨면서도 별에 다다르고 싶었다
손에 닿을 듯 닿을 듯
닿지 않는 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