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꽃에 관한 시모음 1)
감꽃 /권오범
뭉근한 햇볕 등에 업고 치근거리는
오월의 집요한 입김에
달아오른 감나무가
팝콘을 톡톡 튀겨내고 있다
고향 등진 부평초 가슴에
입때껏 실신해 있던 이야기들이
화들짝 깨어나
허물없이 뒹굴고 있는 빌딩 숲
징글징글했던 보릿고개
허기로 저승문턱 넘나들 때쯤
적선하듯 쏟아지던 저것은
내 유년의 양식
긴 풀모가지에 진주목걸이처럼 꿰어
어깨동무들과 주저리주저리 걸고 다니며
가위바위보 해 서로 따먹기 하던
죽어도 못 잊을 추억들이 뛰어내리고 있다
감꽃사랑 /松花 강봉환
5월의 순수한
감꽃의 그리움이 있답니다.
어린 날 뒷집 수에게
걸어줄 감꽃목걸이 만들던
아름다운 옛 추억이
함초로이 나지막한 담장 넘어
뛰놀던 그녀의 모습에
나부끼던 바람새 까지
넘어질까 마음 조렸던 그때를
감꽃 떨어지기 아쉬워
그녀 모습 사라질 새라
마음 졸여 주워 모으던 추억
쏟아지는 소낙비에 눈물지으며
떨어진 감꽃의 아픔으로
지나간 옛 추억의 언저리엔
지금 비온 뒤의 감꽃의 아스라함에
뭇 내 이 발길 고즈넉한 달빛 속에
흩날린 감꽃의 그리움에 잠기게 합니다
노란별 감꽃Ⅱ /初月윤갑수
감잎 속에 꼭꼭 숨어라
숨기장난 하듯 바람결에
얼굴을 가리운다
반짝이는 잎 눈부심에
놀란 벌 나비도
감나무 그늘로 은근슬쩍
날아와 감꽃을 유혹하고
달아나니
시름한 감꽃은 햇살도
못 본체 땅에 누어서야
하늘을 본다
어둑밤 잔별들 속삭임에
감꽃도 노란별 되었네.
감꽃 목걸이 /복효근
"감꽃은 먹을 수 있는 꽃이란다"
가르치며 아삭 씹어서 먹어보이는데
딸아이는 "너무 예뻐 못 먹겠어요"한다
순간
입 가득 고이는 꽃의 피......
그래, 먹을 수 있다는 말은 굳이 먹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라고
꽃은 꽃이라고
내 황량한 미학을 수정하면서,
꽃으로 피어나는 내 딸아이에게
감꽃 실에 꿰어 목걸이를 둘러주고 싶었다
감꽃 /김안로
내 유년의 꿈, 새 부리처럼
모진 세월의 겨드랑이 빠져나와
붉게 타오르는 아침해를 쪼는 것.
작은 분화구 하나 모로 만들어
따가운 오뉴월에 불씨를 품었다가
멍이 들어, 끝내 혼절하여서는
질긴 탯줄 뽑아 푸른 희망을 낳았지.
땅에 떨어진 산모는 핏기를 잃고
바람에 걸려 자빠지고,
더러 찢어져서는, 남은 세월
바람에 눕는다.
바람이 분다. 모로 굴러간다.
혹 가을이 제때 찾아온다면
아직은 초라한 내 해산을, 내 영광을
부디 마무리지어 다오.
해와 달, 별 그리고 바람아!
감꽃 목걸이 /한휘준
하얀 감꽃 목걸이
그대 목에 걸고 곱게 미소 지을 때
풋감 같은 설익은 사랑 남몰래
가슴속에 고이 숨겨두었습니다
들녘에 억새풀 수줍은 옷깃 여미고
가을 국화꽃 노란향기 바람에 일렁이니
그 사랑 발갛게 먼저 볼 붉혀 미소 짓습니다
감꽃 /최홍윤
감꽃이 피는 오뉴월
고양이 손이라도 빌린다는 오뉴월에,
소꿉친구와 종일 놀다가
집으로 가는 길목엔 감꽃 흐드러지고
모 살이 하는 들녘 논두렁에
개골개골 자지러지던 개구리는
숨죽인 내 발걸음에 울음 멈추었네
어스름 녘
감나무 아래 큰기침소리에
콩닥 콩닥 뛰는 내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 묵정밭에
한 백 년쯤 되는 늙은 감 가지에는
아직 내 묵은 그리움이
텁텁한 감꽃 향기에 흩날리고
그 논두렁 풀숲엔
자지러지던 참개구리 대신
간혹 청개구리, 슬피 울고만 있네!
감꽃 /한종남
황금빛 왕관을 벗어 던지고
독 새기 풀밭에 별이나 되자
뻥 뚫린 가슴에 누이를 꿰고
남는 것은 까치의 밥이나 되라
감꽃의 추억 /박정재
시골집 뒤뜰에 감나무가 있었습니다
감꽃이 떨어져 소복이 쌓인 아침이면
나는 감꽃의 밀어를 듣습니다
땅 위의 진주가 말을 합니다
바다에만 진주가 있는 것이 아라고
감꽃을 실에 꿰어 목걸이를 만듭니다
진주 목걸이보다 더 아름다운
감꽃 목걸이를 걸어 주었습니다
순박한 소녀는 미소로 답례합니다
잊을 수 없는 소녀의 얼굴
감꽃 목걸이로 활짝 핀 그 얼굴은
살아오는 동안 처음 본 순수였습니다
감꽃을 주우며 /우공 이문조
뒤뜰
감나무 아래서
추억의 감꽃을 주우며
감꽃 실에 꿰어
목에 걸어주면
하얗게 웃던
그 애를 생각한다
컴퓨터 게임도 없고
별다른 놀이도 없던 시절
감꽃 줍기는
제법 재미있는 놀이였고
하얀 감꽃은
우리의 배고픔을 달래주는
훌륭한 간식이었지
감꽃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감나무 아래
아이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감꽃을 주워 먹었다는 얘기
호랑이 담배 피웠다는 얘기처럼
전설이 되지나 않을는지.
감꽃의 은유 /메주 고제웅
내장사 도량에 새벽 종성이 울리면
감나무는 가지마다
별들이 반짝이며
아가야 내 품에 안기어라
이윽고 동자승들이
금빛 가사를 수하고
엄마, 아아, 엄마하고
해쓱한 이마를 내밀며
왜, 머리가 ‘아야’ 하는지 몰라
때마침 톡 톡, 감꽃 떨어지는 소리에
단잠을 떨치고 달려온 사미승이
낙화落花를 풀 꿰미에 꿰어
108 염주를 만들어
엄마, 아아, 엄마하고
한 알 한 알 굴리니
염불 소리에 여명이 트여라
꽃피고 꽃지는 모습은
해탈의 소리
도道를 은유로 비치는 명경이어라
감꽃 /송수권
밝은 햇빛 속에
또록또록 눈을 뜬 감꽃이 지고 있다
아이들 두셋이 짚오리에
타래 타래 감꽃을 엮어 목걸이를 꿰면서
돌중 흉내를 내고 있다.
감꽃 속에 까치발 뒤꿈치도 묻히는 게 보이면서
또랑또랑 목소리도
크림색 밝은 향기에 실리면서
오월의 햇빛 속에
또록또록 눈을 뜬 감꽃이 지고 있다.
감꽃 줍는 애들 곁에서
하나 둘 나도 감꽃을 주우면서
금목걸이를 목에 두를까
금팔찌를 두를까
능구렁이 같은 나의 어두운 노래 끝도
실리면서
밝은 햇빛 속에
또록또록 눈을 뜬 감꽃이 지고 있다.
감꽃 속에 어리는 얼굴 /국순정
밤이 새도록 어둠을 끌어안고
세상 속에 내동댕이쳐진 설움은
아픔으로 숨죽인 비명만을
피를 토하듯 질러댔다
엄마!
심장을 찌르는 고통의 단어는
내 입술을 차마 열지 못하고
묵직하고도 뜨거운 돌덩이로
움켜쥔 명치를 태웠다
엄마 젖이 그리워 울던 내 동생
달래줄 수 없어 등에 업고
엄마 향기 찾아 장독대를 돌다
애꿎은 감꽃만 바라다보았다
감꽃 속에 어리는 엄마 얼굴
나보다 더 슬퍼 보여
내 뜨거운 눈물은 처절함으로
엄마 발자국 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목에 걸린 엄마는
또 밤이 찾아와도
목젖 언저리에서 뜨거운 눈물로 맴돌 뿐
토해내지 못해 더 아파야 했다
엄마!
지금 이렇게 언제라도 불러볼 수 있는
내 사랑하는 엄마를...
감꽃 /김영천
아침 일찍
해묵은 감나무 아래에 가서야
오호, 그 어둠 속에 반짝이던 수많은 별들이
감 꽃이 되어
땅에 떨어진 것을 알았습니다.
채 남아 떨어지지 못한 것들도
하얗게 제 얼굴을 내어밀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더러 반짝이고 있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늘에 가득 떠오를 당신은
어쩌면 조금은 달고 조금은 떫은
그런 감 꽃입니까?
한 마디 슬픈 언어입니까?
누군가 내 가슴에 대고
싸락싸락 비질을 합니다.
감꽃 /도종환
하늬바람에 감꽃이 노랗게 집니다.
떨어진 감꽃을 모아 아이와 소꿉놀이를 합니다.
감잎으로 부채를 부치며 아이는 좋아라 합니다.
감꼭지도 주워와 돌 위에 쌓으며
하나에서 열까지 세어 봅니다
가끔씩 바람이 몰려가다 감잎에 걸리면
머리 위에서 왁자지껄 감잎이 떠들고
슬픔을 가리듯 감잎으로 하늘을 가리고
혼자 울던 제 울음소리에 아이는 조금씩 잊습니
다.
하늬바람에 감꽃이 노랗게 집니다.
감꽃 지는 마을 /김용화
감꽃 피는 내 고향 가고 싶다
논두렁에 콩 심고
비 맞으며 깨 모종하고
장날이면 엄마랑 단둘이
등불 밝혀 들고
한내 장길 아버지 마중을 나가고 싶다
개구리 울음소리
가만가만 밟아가며
오늘같이 비 오다가 갠 날엔
앞산 뒷산
나란히 잠든 어르신들
한 분 한 분 깨워 일으키고 싶다
감꽃 피는 아파트 /이대준
피아노를 치는 딸아이 가느른 손가락이
어느 소설 속 윤 초시네 손녀딸 마냥 희다며
소파에 앉아 발가락 박을 치는 중년의 여인
감골 고샅에는 갈색 피부 꼬마 가시나
감꽃 같은 동심이 피어있었다
어쩌다가 신작로에 삼륜차만 지나가도
개구리 잡던 대막가지 끝에 신명이 놀아
뿌연 흙먼지 뒤를 따라 뛰어가는 머시마들
오전반 학교가 파하고 그냥 가기 아쉬워
또랑 돌 들춰 고기 잡는 길수, 응주, 성춘이.....
검정고무신에는 집게발을 치켜든 알 밴 가재들
부끄러워라, 논두렁길 돌아가는 계집아이
감꽃목걸이에서 봄 햇살이 반짝 부러져 나가고
서산마루 노을이 곱게 삭인 태양처럼
홍시 닮은 사람들이 소를 몰고 오던 마을
한바탕 소나기가 퍼붓고 가는 날이면
18층 아파트 유리창에서 감또개를 줍는 가시나
동그란 눈이 낯선 방 안을 들여다본다
감꽃 /이진선
지난밤 내린 비로 젖은 이파리
말간 햇살 내려앉아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아침
아파트 정원 한 켠,
연한 감나무 이파리 틈새마다
수줍은 듯, 벙거지 모자 쓰고
고개 숙인 감꽃
낯선 이방인의 모습으로 서 있다
어릴 적
들에 가신 어머니 기다리다
뒤란 굴뚝 옆, 감나무 밑에 앉아
하얗게 떨어진 감꽃 모아
촘촘히 실에 꿰어
꽃목걸이 만들어 드리면,
환하게 웃으시던 내 유년의 어머니
지금은
태엽 풀린 시계처럼,
시간을 잃어버리고 살고 있는
낯선 모습의 내 어머니
허공을 떠돌던 바람, 침묵 깨뜨리며
가슴을 훑고 지나가는
감나무 밑에서
감꽃 목걸이를 걸고 서성이는 낯선 나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