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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년 개천군지가 증명한 판돈령공파(개천파)의 세거지

작성자23대 영균|작성시간26.06.11|조회수2 목록 댓글 0

1992년 개천군지가 증명한 판돈령공파(개천파)의 세거지

 

 

집안의 기록에 의하면 우리 개천군의 광주이씨는 세조 13(1467) 개천군의 입향조가 되시는 위인이 이시애의 난에 연루되어 이름을 용호로 개명하고 신분을 속인 채 세조의 채포 령을 피해 개천군 조양에 숨어들어 살다가 위인 이용호공이 졸하자 1485년경 아들 흥복(영복의 개명)16세가 된 자림(흥복의 아들)을 데리고 중남면 답도리로 거처를 옮기면서 그곳에서 흥복의 아들 자림이 사금을 발견하면서 집안이 답도리를 중심으로 퍼져나가 집성을 하게 되었다 한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답도리는 처음에 사촌이라 불리었는데 자림이 사금을 발견하여 사금광을 이룬 시점부터 그곳에 논을 일구기 시작하여 사금이 고갈 될 쯤에는 사촌이라는 모래섬 전체가 논으로 바뀌어 있었으며, 일본의 강점기에 행정적 지명을 답도리라 명명 하면서부터 사촌은 답도리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연유로 한때 이곳에 사는 광주이씨를 사촌이씨라고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집안의 기록에 의하면 1700년 말에서 1800년 초경에는 1,000여 가구에 인구가 약 4,500여명이나 되었었다고 한다. 그리고 집안이 거대해지자 방계가 생기고 방계의 집안들은 차츰 독립하여 타지로 이주해 갔으며, 그 후 1992년 개천 군지에 의하면 당시에는 개천군 6개 면의 25개 리(마을) 5개 리(마을)에 세거하게 되어 개천읍 신송리에 30, 중서면 운용리에 29, 중남면 답도리에 102, 봉동면 중리에 24, 봉동면 금평리에 24호 등 개천군 5개 마을에 205호에 약 1,000여명의 일가가 집성을 이루고 세거하였다고 한다.

 

또한 야설에 의하면 평안도 쪽으로 관리가 발령이 날 때는 개천군이 돈이 많다고 소문이 나서, 조정에서는 평양 부윤으로 갈래, 개천 군수로 갈래하는 농담이 다 생겨났다고 한다. 또 어떤 야설에는 광주이씨의 땅을 밟지 않고는 개천군을 건너갈 수가 없었다고도 한다. 이처럼 개천의 광주이씨는 한때 어마어마한 부를 지니게 되었으며, 그 증거로 임진왜란 당시 선조 임금이 나라를 버리고 명나라로 망명하려는 것을 개천의 이춘우의 7형제가 전 재산을 떨어 임금을 보필할 것이니 안주하시라 하여 임금의 망명을 막았으며, 실지로 선조임금이 신의주에 머무는 동안 이여승이 이끌고 온 명나라 잔원군 10,000여명과 조선군대의 군량미를 전량 조달하였다고 한다. 물론 재산을 다 나라에 받친 후에는 선조의 명을 받아 부자들에게 공출을 받아내는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렇게 개천의 광주이씨는 임진왜란에 군량미를 조달한 공로로 이춘우가 1593년 무과에 급제하자 절충장군에 임명하였으며, 아우 춘란과 춘기 등과 함께 어가 호송 원종공신에 훈봉되었다. 이어 무과에 급제한 춘기는 훈련원판관이 되었으며, 제일 공이 컸던 춘란은 과거급제 없이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이를 계기로 1756년 이명철이 무과급제로 절충오위장에, 1795년 이속이 무과급제로 절충오위장에, 1816년 이격이 무과급제로 중추첨지사에, 1855년 이정재가 무과급제로 중추오위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1684년 이경창이 집안에서는 처음으로 문과급제자가 되어 장령이 되었으며, 그것을 시작으로 1715년 이도첨이 문과급제로 병조좌랑에, 1725년 이일서가 문가급제로 장령부사에, 1771년 이적철 문과급제로 장령에, 1780년 이휘가 문과급제로 장령에, 1780년 이신묵이 문과급제로 도사에, 1795년 이석이 문과급제로 장령에, 1795년 이원묵이 뮨과급제로 주서에, 1825년 이병의 문과급제로 한성좌윤에, 1846년 이정후 문과급제로 장령에, 1873년 이회수가 문과급제로 장령에, 1884년 이완희 문과급제로 장령에, 1885년 이교수 문과급제로 주서에, 이성 문과급제로 중추부동지사에, 오르는 등 20여명의 급제자 외에도 1596년 이덕로 무과자로 만호에, 1604년 이덕풍이 무과자로 만호에, 1650년 이유정 무과자로 만호에, 1680년 이이석 무과자로 무과관애, 1720년 이만채 무과자로 무과관에, 1732년 이순창 무과자로 무과관에, 1741년 이도추 무과자로 무과관에, 1780년 이진형 무과자로 증추부첨지사에, 1790년 이정번 무과자로 무과관에, 1868년 이진수 무과자로 절충장군오위장에, 1870년 이정 무과자로 무과관에, 1880년 이인용 무과자로 오위도청부사과에, 등 훈봉 등으로 관료를 지낸 분들이 많았다. 이상과 같이 개천의 광주이씨는 조선말까지도 거부에서 명실공이 명문대가로 탈바꿈한 왕성한 집안을 안아낸 명지인 개천은 부인할 수 없는 광주이씨 삼대 집성촌의 한 곳이다.

 

2026610일 판돈려공종회 종회장 영균 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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