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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공부

놓아버림 : 무의욕과 암울함

작성자문형철|작성시간14.08.20|조회수744 목록 댓글 6

놓아버리면 용기가 떠오른다

 

"자신이 무의욕 상태라고 느껴지면, 스스로 무엇을 증명하른 것인지를 자문함으로써 내면에 숨어있는 프로그램을 찾아내면 된다"

 

# 삶이 끔찍하다는 증명을 하려는 것인가?

# 사랑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인가?

# 세상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인가?

# 내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인가?

# 행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 무엇을 정당화하려는 것인가?

# 내가 옳다라고 하려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를 셈인가?

 

 

 

무의욕"난 못해"라는 믿음이다. 

상황을 어떻게 할 도리가 없으며 

다른 누구도 도움이 안된다는 느낌을 말한다. 

무의욕은 절망과 무기력의 상태다. 

 

난 못해

아무도 관심없어

소용없어

지겨워

어차피 못이겨

그래봤자 별수없어!!

 

무의욕은 이런 생각과 관련있다. 만화 영화 "곰돌이 푸"에 나오는 침울한 당나귀 이요르가 보여주는 모습이 바로 무의욕이다. 이요르는 항상 "그래. 그래. 그래봤자 별수 없어"라고 한다.

 

 

 

 

낙심, 패배, 불가능, 궁지, 고독, 포기, 고립, 소외, 단절, 적막감, 암울, 박탈, 비관, 되는일 없음, 무신경, 유머없음, 무가치함, 말도안됨, 소용없음, 속수무책, 너무피곤함, 좌절, 태만, 체념, 너무 늦음, 너무 늙음, 너무 어림, 기계적임, 비운, 비관, 허망함, 쓸모없음, 도리없음, 무의미함, 절망, 무관심

 

무의욕이라는 

생명작용은 

도움을 요청하는 것에 목적이 있지만 

한편으로는 어떤 도움도 

불가능하다는 감정이기도 하다. 

 

 

세계 인구의 상당비율이 

이 무의욕 수준에 있다. 

 

그들에게는 

최소한의 필요를 충족시킨다거나 

다른데서 도움이 곧 오리라는 

희망이 없다.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삶의 특정 영역에서 무의욕이 없는 경우를 자주 겪을 순 있어도, 

삶 전체를 압도하는 무의욕은 주기적으로 맞딱뜨린다

 

무의욕은 

생명에너지가 결핍되어 

죽음이 가까이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제 2차 세계대전때 런던 대공습 기간에 목격된 현상이다. 

 

당시 영국정부는 젖먹이들을 영국의 안전지역에 있는 탁아시설로 보냈는데, 그곳에서는 아이들의 영양이나 의료와 같은 신체적 상태에 충분한 주의를 기울였다. 하지만 아기들은 무의욕 상태를 보였으며 건강이 오히려 나빠졌다. 일부는 식욕을 잃기도 했고, 사망률 또한 높아졌다. 따뜻한 보살핌, 즉 엄마같은 존재와 정서적으로 친밀감을 나누지 못하는 탓에 무의욕이 발생한 것으로 나타났다.

 

문제는

감정상태였지

육체가 아니었다.

 

사랑과 애정을 받지 못한 아이들은

살 의지를 잃었다

 

미국에는 주민 전체가 무의욕에 빠진 경제 침체지역이 있다. 이 지역사람들은 텔레비전 뉴스에 나와 보통 이런식으로 이야기 한다."복지 급여 수표가 떨어지면 굶을 수 밖에 없어요. 우린 희망이 없어요"

 

놓아버림 기법 자체에 대한 무의욕이 여러 저항으로 나타날 수도 있다. 이런 저항이 취할 수 있는 마음가짐이나 생각의 형태는 이렇다. "하여간 효과는 없을 거야, 뭐가 다른데?, 아직 준비가 안됐어, 효과가 안느껴져, 바빠서 못하겠어, 놓아버림이라면 지겹다, 버거워서 못하겠어, 잊었어, 암울해서 못하겠어, 졸려서 못하겠어" 

 

무의욕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의도를 상기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도는 

감정의 척도를 상승시킴으로써 

더욱 자유롭고 일 잘하고 행복해지는 것이며, 

또한 기법 자체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리는 것이다. 

 

못해 vs 안해

 

의욕없는 태도에서 얻는 

보상을 살펴보는 일 또한 

무의욕에서 벗어나는 방법이다. 

 

진짜 

두려움을 숨기려고 둘러대는 

체면치레용 구실속에 

보상이 있을수도 있다

 

사실 

우리는 

아주 능력있는 존재라 "못해"가 

실은 "안해"일때가 많다

 

못해나 안해의 이면에는 

흔히 두려움이 있다. 

 

이 감정이면에 있는 

참모습을 직시하면 

감정의 수준이 

무의욕에서 

공포수준으로 올라간다

 

공포는 

무의욕보다 

높은 에너지 상태다

 

공포는 

적어도 

행동의 동기가 된다. 

 

행동을 하는 가운데서 

다시 공포를 항복해 

분노, 자부심, 

용기로 옮겨갈 수 있다

 

이 모든 것이 

무의욕보다는 

훨씬 높은 상태다. 

 

 

 

 

대중연설에 대한 공포 극복

 

인간이라면 누구나 부딪히게 마련인 문제 하나를 놓고 망설임에서 벗어날때 항복기제가 어떻게 작용하는지 보자. 가장 흔한 망설임 문제로 대중연설을 꼽을 수 있다. 대중연설을 앞두고 무의욕 수준에 있다면 이렇게 말한다. "아,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하는 건 불가능해. 너무 부담스러워. 내 얘길 누가 듣고 싶어 하겠어. 이야기 할만한게 하나도 없어"

 

기법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리겠다는 의도를 상기해보면 

무의욕은 

공포를 숨기고 있을 뿐임을 알 수 있다

 

이제 

대중 연설을 해야 한다는 생각은 

두려울 뿐 

절망을 주지 않는다. 

 

이로써 무언가가 명확해진다. 

"못한다가 아니라 

안한다"인 것이다. 

 

공포가 일어나는 것을 

놓아버리면 

두려워하는 바로 그 일에 

욕망이 있음을 자각한다. 

 

욕망을 살펴보면 

'공포가 욕망을 차단'하고 있으며 

과거에 기회를 놓친 것에 대한 슬픔이 

욕망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분노가 일어난다

 

이 시점이면 

이미 무의욕 수준에서 벗어나 

비탄과 욕망을 거쳐 

분노로 옮겨 온 것이다. 

 

분노의 수준은 

에너지가 훨씬 많고 

행동 능력도 훨씬 크다. 

 

분노는 

억울함의 형태로 

나타날 때가 많다. 

 

이를테면 이미 대중연설을 하기로 했고, 이제 와서 하지 않을 도리는 없으니 억울한 것이다. 

 

"이 시점이면 

이미 무의욕 수준(50)을 벗어나 

비탄(75)과 욕망(125)을 거쳐 

분노(150)으로 옮겨온 것이다"

 

또한 

공포에 대한 

분노가 존재한다. 

 

과거에 두려움때문에 

성취하지 못한 일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분노는 

다시 공포에 대해 

뭔가를 해보려는 결정으로 이어진다. 

 

이 결정은 

대중연설을 배우는 형태로 

나타날 수 있다. 

 

강좌에 등록한다는 것은 

마침내 문제에 정면으로 맞서 

뭔가를 해보려는 시도이므로 

자부심의 에너지 수준으로 

이미 올라간 것이다. 

 

수업을 받으러 가는 길에 

또 다시 공포가 일어난다. 

 

이 공포를 

끊임없이 인정하고 

항복할때 

 

우리는 우리의 능력속에 

다른 것은 몰라도 

공포를 직면하고 극복하기 위해 

행동할 용기만큼은 

존재한다는 점을 자각한다. 

 

용기의 수준에는 에너지가 많다. 이 에너지가 공포와 분노, 욕망의 잔재를 놓아버리는 형태로 나타나면, 연설수업 도중에 문득 받아들임(350)을 느낀다. 받아들임과 함께 저항에서 벗어난다. 이전까지 공포와 무의욕, 분노의 형태로 나타나던 저항이다. 이제는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한다. 할수있다며 받아들일 자신감이 생긴다.

 

받아들임 수준에서는 

타인에 대한 자각이 커진다. 

 

그래서 

같이 수업을 받는 사람들이 

연설수업중에 겪는 아픔과 괴로움, 

쑥스러움을 알아차리고 

그들에게 관심을 갖는다. 

 

타인을 향한 연민이 생기고 

자의식이 줄어든다. 

이타심이 생기고 

평화의 순간이 찾아온다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는 내적 만족과 좀더 성장해 타인과 함께 나누었다는 느낌을 경험한다나누면서 자신은 잠시 잊고 다른 누군가의 행복에 관심을 가졌다. 타인의 성취에서 기쁨을 얻는다. 

 

이런 가운데 

나를 탈바꿈시키는 

은총이 존재하며, 

마음속에서 연민을 발견하고, 

타인과 유대감을 느끼고 

타인의 고통에 동정한다.

 

이러한 진행과정을 통해 충분히 발전을 이루면 이제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다. 어쩌다 대중연설에 두려움이 생겼고,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어떤 단계를 거쳤으며, 성공경험이나 자존감 증가 경험은 어떠했고, 대인관계는 어떻게 좋아졌는지 함께 나눈다. 

 

이러한 

전체 진행과정은 

자조집단(self help group)이 지닌 

큰힘의 바탕이다. 

 

자조집단에서는 

알콜중독과 같이 

치유가 필요한 증상을 가진 이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서로 회복을 돕는다. 

 

이들은 

감정의 척도상 

최저수준에서 최고수준까지 망라하는 

내적 경험을 함께 나눈다. 

 

그러고 나면 

처음에는 엄청나고 어마어마하게 보이던 문제가 

극복되고 해결되면서 

생기와 안락감이 커진다

 

이렇게 높아진 자존감을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느끼게 되어 

자신감이 커지고 

나아가 물질적으로도 풍요로워지고 

직업적 능력도 향상된다

 

이 수준에서 사랑은 

타인과 나누고 

타인을 격려하는 형태로 나타나며, 

그 활동은 파괴적이지 않고 

건설적이다. 

 

타인에게 긍정적이고 

매력적인 에너지를 발산해 

긍정적인 피드백이 

끊임없이 되돌아오는 결과를 낳는다. 

 

어떤 특정영역 한가지에서 

감정의 척도가 

진보하는 경험을 하면 

한계에 부딪힌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모든 못해의 이면에는 

안해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안해는 사실 "하려니까 겁나, 

하려니까 챙피해, 

실패가 두려워"가 

숨어있다. 

 

이 모든 이면에는 

분노가 숨어있고, 

자부심(175)으로 인한 사정이 있다. 

 

이러한 

감정을 인정하고 놓아버리면 

용기(200)수준으로 올라가고 

마침내 받아들임과 내적 평화에 이른다

 

스스로 극복한 영역만큼은 그렇게 된다. 

 

무의욕과 암울함은 

자신의 왜소함을 만족스럽게 여기고 

믿어버린 댓가다. 

 

피해자를 자처한 댓가이며, 

세상이 자신을 프로그래밍하도록 놓아둔 

댓가다. 

 

부정성을 믿어버린 댓가이며, 

사랑과 용기, 위대함을 가진 자신의 일면에 

저항한 결과다. 

 

또한 

남이 나를 잘못된 인간으로 낙인찍도록 

놓아두거나 

내가 나를 그러하도록 놓아둔 결과이며, 

그에 따라 스스로 부정적인 맥락에 놓인 결과다. 

 

사실 무의욕과 암울함은 

자신을 그렇게 규정짓도록 

부지불식간에 허용한 결과일 뿐이다. 

 

이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은 

보다 의식하는 것이다.

 

"보다 의식한다'라는 말은 

무슨 뜻일까?

 

첫째, 

자신의 참모습을 찾는 일에 나서서 

남이나 내 마음속 목소리가 

나를 나약하고 무기력한 쪽으로 깎아 내리고 

낙인찍으려 할때, 

그 목소리가 

나를 프로그래밍하도록 놓아두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그동안 자신이 부정성을 믿었으며 그것도 기꺼이 믿었다는 점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벗어나는 길 "모든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다. 

 

마음을 설명하는데 쓰는 모델이 많은데, 최근에는 컴퓨터의 구조를 마음의 모델로 삼기도 한다. 마음이 갖는 개념이나 생각, 신념체계를 프로그램으로 보는 모델이다.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이의를 제기해 

삭제하고 바꿀 수가 있다. 

 

즉 원한다면 

부정적 프로그램을 

긍정적인 것으로 대체할 수 있다. 

 

우리의 왜소한 측면은 

아주 적극적으로 

부정적 프로그램을 받아들인다

 

생각이 솟는 근원을 살펴보고 

생각을 어디서 얻는지를 확인해 

생각에 내것이라는 딱지를 붙이는 허영을 버리면 

생각이란 객관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된다. 

 

생각의 근원은 

부모나 기타 가족, 선생님에게서 

아주 어릴때 받은 교육에 있는 경우가 많고,

 친구나 신문, 영화, 텔레비전, 라디오 교회, 소설, 

아니면 감각을 통해 

무심결에 들어온 것에서 얻은 

잡동사니 정보에 있는 경우도 있다. 

 

의식적으로 

선택권을 생각해보지도 못한 채,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내게 프로그래밍되어 왔다

 

 

아울러 

우리의 무의식적이고 

무지하고 천진하고 순진한 면과 

마음의 본성으로 인해 

우리는 세상에 널린 온갖 부정적 헛소리로 이루어진 

합성물이 되고 말았다. 

 

깨어있을수록 

우리에게 선택권이 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마음의 모든 생각에 

지휘권을 더이상 맡기지 않고, 

그 모두에게 의문을 갖고, 

생각속에 우리를 위한 진실이 

과연 조금이라도 있는지를 

알아낼 수 있다. 

 

무의욕을 느끼는 상태는 

"못해"라는 믿음과 

연결되어 있다

 

마음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은 아니지만 

앞서 말했듯 

대부분의 못해는 

사실 안해다

 

마음이 

이 말을 듣고 싶어하지 않는 것은 

못해가 다른 감정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을 자각할 수 있으려면 자신에게 가상질문을 던진다. 

 

"못하기 보다는 안하는 것이 사실일까?" 

"안하는 것을 받아들이면 

어떤 상황이 펼쳐지며 그 상황이 어떻게 느껴질까? 

 

예를들어 

춤을 못춘다는 신념체계가 있다고 하면 

자신에게 이렇게 말한다. 

 

감추려는 거야. 

사실은 하고 싶지 않아서 안하는 것이지. 

 

감추려는 감정을 

알아내는 방법은 

'춤을 배우는 자신을 상상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보면 

관련된 감정이 올라오기 

시작한다. 

 

쑥스럽고 자존심 상하고, 

어색하고, 

새로운 동작을 익히느라 애쓰고 

시간과 에너지를 들이는 것이 

아깝다는 마음이 느껴진다. 

 

못해를 안해로 바꾸고 나면 

그 모든 감정이 드러나고, 

그러고 나면 감정을 항복할 수 있다

 

춤 배우기란 자부심을 

기꺼이 놓아버림을 의미한다. 

치를 대가를 살펴보고 이렇게 자문한다. 

 

이같은 대가를 

계속해서 기꺼이 치를 것인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기꺼이 놓아버릴 것일가? 

 

필요한 노력에 대한 저항을 

기꺼이 놓아버릴 것인가? 

 

배우는 사람답게 

버벅거릴 수 있도록 

허영심을 기꺼이 놓아버릴 것인가? 

 

인색함과 왜소함을 놓아버리고 

기꺼이 강습에 시간과 돈을 들일 수 있을까? 

 

관련된 모든 감정을 항복하고 나면 

진짜 이유는 거리낌에 있지 

무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아주 명확해진다. 

 

우리에게는 

감정을 인정하고 

항복할 자유도 있고, 

항복하지 않을 자유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갖가지 "못해"를 검토해 

그것이 실제로는 안해임을 알아내더라도, 

안해를 가져오는 부정적 감정을 놓아버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에게는 

놓아버림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

 

"원하는 한 

계속 부정성을 움켜쥘 

자유가 있다. 

 

부정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인이다"

 

그러나 

나는 감정의 피해자라서 못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에 비해 

"나는 안하겠다"라고 하는 것은 

사뭇 다른 느낌임을 깨달으면, 

자아개념에 큰 차이가 생긴다. 

 

예를들어 

원한다면 

누군가를 미워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다. 

남을 탓하기로 마음먹을 수도 

환경을 탓하기로 마음먹을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히 의식해 

우리는 자유로이 마음가짐을 결정한다는 점을 깨달을 때 

더 높은 의식상태에 들어갈 수 있으며, 

감정에 무력한 피해자가 되기보다는 

더 큰 힘과 장악력을 가질 수 있다. 

 

원망

 

암울함과 무의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넘어야하는 커다란 걸림돌 가운데 

"원망"이 있다. 

 

남을 원망하면 

큰 보상이 따른다. 

나는 죄가 없어진다. 

자기연민을 즐길 수 있다

 

순교자나 피해자가 된다. 

동정받는 사람이 된다. 

 

"원망의 가장 큰 보상은 

나는 죄가 없는 피해자가 되고 

상대방은 나쁜자가 된다는 점에 있다

 

이런 게임이 벌어지는 모습은 대중매체에서 늘 볼 수 있다. 수많은 논란과 비방, 인신공격, 소송으로 각색된 원망게임이 끝없이 이어진다. 

 

원망에는 

감정적 보상만 아니라 

상당한 경제적 이득도 따른다. 

 

따라서 

죄없는 피해자가 되는 것은 

구미가 당기는 일이다. 

종종 경제적 보상까지 따르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의 유명한 사례가 수년전 뉴욕시에서 있었다. ... 버스 사고 ....

 

원망에서 벗어나는 법

 

원망은 

최고의 변명이다. 

 

원망을 하면

 매일 한계속에서 왜소하게 있으면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댓가가 있다. 

자유를 잃는다. 

 

또한 

피해자의 역할에는 

나는 나약하고 상처받기 쉽고, 

무기력하다라는 자아개념이 따라오기 마련이고, 

이 개념은 무의욕과 암울함의 주요 성분이다.

 

원망에서 벗어나는 첫걸음은 

'우리가 원망하려고 마음먹는다는 점을 아는 것'이다.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사람들은 

그 같은 상황을 용서했거나, 

잊어버렸거나, 

완전히 다른 방법으로 해결했다. 

 

앞에서 빅토르 프랭클의 경우를 보았는데, 프랭클은 나치 수용소 간수들을 용서하기로 마음먹었으며, 수용소에서의 경험속에 선물이 숨어있음을 보았다. 원망하지 않기로 마음먹는 프랭클같은 사람도 있으니 우리에게도 선택권은 있다. 

 

원망하려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원망하는 것임을 깨달을 수 있는 

정직성이있어야 한다

 

상황이 아무리 원망할 만하게 보인다 해도, 모두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는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자신의 의식을 책임질 것인가 하는 문제일 뿐이다.

 

원망해야 한다라고 보지 않고 

원망하기로 마음먹을 뿐이라고 보는 사람은 

입장이 완전히 다르다

 

같은 상황에서 마음은 보통 "그래 다른 사람이나 다른 일 탓이 아니라면 그럼 내탓이 분명하네"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남을 원망하든 둘다 필요없는 일일 뿐이다. 

 

원망의 매력에 빠지는 일은 

어린 시절에 교실이나 운동장, 

집에서 또래끼리 매일같이 아웅다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 사회의 특징인 

끝없는 소송과 재판절차에서 

"상대방 탓하기"는 

가장 중요한 안건이다. 

 

사실 

원망은 

마음이 믿도록 내버려 둔 

부정적 프로그램 중 하나다. 

 

원망을 멈추고 

원망에 의문을 가져본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이다. 

 

왜 꼭 어떤 일이 

늘상 누군가의 책임일까? 

 

왜 꼭 애초에 

그 상황에서 잘못이라는 개념이 

등장할까? 

 

왜 꼭 

우리 가운데 누군가가 잘못했거나 

나빴거나 책임이 있을까? 

 

당시에는 좋은 아이디어로 보았던 일이 좋지 않게 끝날수도 있다. 그러면 그뿐이다. 불운한 일이 생겼을 뿐이다. 

 

원망을 극복하려면 

자기연민, 분개, 분노, 자기변명에서 얻는 

비밀스러운 만족감과 즐거움을 자세히 살펴, 

그 모든 하찮은 보상을 항복해야 한다

 

이 과정의 목적은 

감정에 당하는 피해자 수준에서 벗어나 

감정을 갖고 있겠다고 

선택할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서는 것이다. 

 

감정을 그저 인정하고 

관찰 및 해체해 

구성요소를 항복하면,

 

 의식적으로 

그런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무력함의 늪에서 

벗어날 수 있다. 

 

부정적인 프로그램과 감정이 

자신의 왜소한 면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면 

이에 대한 저항을 극복하고 

스스로 책임지는 데 도움이 된다. 

 

우리의 가장 왜소한 면의 본성은 

부정적인 생각이므로 

무심결에 자기의 좁은 관점에 

찬동하기 쉽다. 

 

그러나 이런 면이 우리의 존재의 전부는 아니다. 

 

작은 자아의 밖에 

작은 자아를 넘어서는 큰 자아, 

즉 큰 나가 있다. 

 

자신의 내적 위대함을 의식하지 못할 수 있지만, 

느끼고 있지 못하더라도 

큰나는 존재한다

 

 

 

 

"큰 나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리면, 

큰 나를 느끼기 시작한다

 

따라서 

암울함과 무의욕은 

작은 자아와 그 신념체계를 달갑게 움켜쥐고, 

자신의 높은 큰 나에게 저항하는데서 나타난다. 

 

반면 

높은 큰나는 

부정적 감정에 반대되는 것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우주의 본성상 

모든 것은 그와 동등하며 

반대인 것으로도 나타난다. 

 

전자와 동등하며 반대인 것은 양전자다. 

 

모든 힘에 대해 

그와 동등하며 

반대인 힘이 존재한다. 

음은 양으로 상쇄된다. 

 

두려움이 있으면 

용기도 있다. 

 

증오가 있으면 

그와 반대인 사랑도 있다. 

 

소심한 성격이 있으면 

대담성도 있다. 

 

인색한 씀씀이가 있으면 

후한 인심도 있다.

 

마음속 모든 감정에는 

그와 반대인 것이 있다. 

 

따라서 

부정성에서 벗어나는 길은 

부정적 감정을 인정하고 

놓아버리는 동시에 

그와 반대인 긍정적 감정에 대한 저항도 

놓아버리는 자발성에 있다.

 

암울함과 무의욕은 부정적 극성에 영향을 받아 생긴다. 

 

부정적 극성은 

일상에서 어떻게 작용할까? 

 

친구의 생일이 다가오는 사람의 예!

과거에 일어난 일로 분한 마음에 생일에 무언가를 주고싶은 기분이 아니다. 나가서 생일 선물을 사는 것이 그저 못할 일로만 보인다. 돈을 써야 하는 것이 억울하다. 마음은 온갖 타당한 이유를 지어낸다. "쇼핑할 시간이 없어" 얼마나 못되게 굴었는지가 아직도 생생해. 사과부터 받아야 해" 

 

이 경우를 보면 두가지 작용이 있다. 

 

자기 안의 부정성과 

왜소함에 집착하는 동시에 

자기안의 긍정성과 위대함에 

저항한다.

 

무의욕에서 벗어나려면 

못해는 안해임을 알아야 한다. 

안해를 잘 살펴보면 부정적 감정때문에 

안해가 존재하며, 

그런 감정은 솟는대로 인정하고 

놓아버릴 수 있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긍정적 감정에 저항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니, 

사랑과 너그러움, 용서 같은 

긍정적 감정도 하나하나 잘 살펴본다

 

자리에 앉아 너그러움의 느낌을 상상하면서 

그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린다. 

내 안에 너그러운 어떤 것이 있는가? 

 

생일인 친구에게 그 너그러움을 내어 쓰기가 처음에는 내키지 않을수도 있다. 그러다 의식속에 너그러움같은 특성이 있는 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너그러운 느낌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리면 너그러움이 존재한다는 점도 알게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는 

남에게 선물을 하는 일을 

즐긴다. 

 

선물을 받고 

감사를 표할때 

솟구치는 긍정적 감정도 떠오른다. 

 

사실은 

용서하고 싶은 마음을 억제했으며, 

너그러움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릴때 

불만을 놓아버리려는 자발성도 

생겨남을 알게 된다. 

 

이렇게 할때 

우리는 더이상 

자신을 작은 자아와 동일시하지 않으며 

보다 큰 어떤 것이 

내 안에 존재함을 

의식적으로 자각한다. 

 

그것은 항상 거기에 있지만 보이지 않게 숨어있다. 

 

이 과정은 

모든 부정적 상황에 적용할 수 있다.

 과정을 통해 맥락을 바꾸면 

현 상황을 다르게 지각할 수 있다.

 

상황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대책없이 피해보는 자에서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자로 진보한다. 

 

위에서 든 예는 뛰어나가 생일 선물을 사야한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스스로 선택한 결과로 

현재 입장에 있는 것임을 

자각하자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자유가 있어서 

보다 자유롭게 행동하고 

선택할 수 있다

 

과거의 억울한 일에 붙들려 

대책없이 피해보는 사람보다 

훨씬 높은 의식상태에 있는 것이다. 

 

의식의 법칙중에 이런 것이 있다. 

 

"자기에게 

어떤 부정적 생각이나 믿음이 적용된다고 

의식적으로 말하면, 

실제로 그 영향하에 놓인다" 

 

우리에게는 

부정적 신념체계를 믿지 않기로 

결정할 자유가 있다

 

그렇다면 

이런 신념체계는 

일상에서 어떻게 작용할까? 

 

흔한 예를 들어보자. 신문을 보니 실업률이 사상최고다. 텔레비전 뉴스에서는 해설자가 '일자리가 없다'고 잘라서 말한다. 이 시점에서 우리에게는 부정적 사고방식을 믿는 일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 대신 이렇게 말할 수 있다. 내게는 실업률이 적용되지 않는다. 

 

부정적 신념은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 

우리 삶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내 경험을 밝히면, 2차 세계대전 직후에 실업률이 높았던 기간에도 일자리를 구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사실 도시에 두세가지 직업을 가질수도 있었다. 접시닦이, 웨이터, 사환, 택시운전사, 바텐더, 공장 노동자, 온실 노동자, 창문 청소부 등을 할 수 있었다. 이는 다음과 같은 신념체계를 따른 결과였다.

 

실업률은

다른 사람에게는 적용되어도

내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뜻하는 곳에 길이 있다" 

 

또한 일자리를 얻기 위해 

자존심을 포기할 자발성이 있었다.

 

또 다른 예로 

전염병과 관련된 

신념체계가 있다. 

 

수년전 독감이 돌던 시기에 열네명의 지인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다. 그들 중 여덟명은 독감에 걸렸지만 여섯명은 걸리지 않았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여덟명이 독감에 걸렸다는 점이 아니라 여섯명은 걸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떤 전염병이 돌더라도 감염되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대공황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에도 

여전히 부자가 되는 사람들과 

억만장자가 되는 이들이 있었다. 

 

당시 사람들은 가난이 "전염성 있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부자가 될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이 생각을 믿지 않았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가난에 대한 생각이 적용되지 않았다. 

 

부정성이 우리 삶에 작용하려면 

먼저 유선방송 가입하듯 

부정성에 가입한 다음, 

부정성에 신념 에너지를 공급해야 한다. 

 

부정성이 

삶에서 현실로 나타나게 할 힘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 반대의 것이 이루어지게 할 힘 또한

 분명 우리의 마음에 있다. 

 

긍정적 선택

 

내면의 부정성을 

자발적으로 놓아버리면 

놀랍게도 부정적 감정에 

완전히 반대되는 것을 발견한다. 

 

내면의 위대함 내지 

높은 큰나라고 할만한 내적현실이다

내면의 위대함은 내면의 부정성보다 훨씬 강력하다

 

부정적 입장에서 얻던 보상을 놓아버리면, 놀랍게도 답례처럼 긍정적 보상이 긍정적 감성의 힘에서 생긴다. 예를들어 원망을 놓아버리고 나면 용서를 경험한다. 

 

우리의 큰나는 

높은 감정의 합성물이라 할 수 있는데, 

그 능력에는 한계가 없다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고, 

관계치유를 위한 상황을 

만들 수도 있다. 

 

연인관계를 맺을 기회나 

경제적 기회를 창출할 수도 있고, 

육체적 치유를 일으킬 수도 있다. 

 

자신의 생각에서 생겨나는 

모든 부정적 프로그램에 

더 이상 권한과 에너지를 넘겨 주지 않으면, 

자신의 힘을 다른 것에 주지 않고 

되찾는다

 

그에 따라 

자존감이 올라가고, 

창조성이 되살아나고, 

노심초사하는 대신 

미래를 긍정적으로 볼 수 있다. 

 

분함이 풀리지 않아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을 상대로 실험을 해보자. 

 

자리에 앉아 

속으로 이것은 

실험일 뿐이라고 

말한다. 

 

실험의 목적은 

순전히 배움에 있다고 

말한다. 

 

그저 

의식의 법칙에 친숙해지고 싶고, 

일어나는 현상을 

지켜보고 싶을 뿐이다. 

 

부정적 감정에서 

보상을 얻고 있음을 인정한다. 

감정을 이루는 낱낱의 요소를 항복하는 동시에, 

관계치유에 자발적인 마음에 대한 저항도 놓아버린다.

 

상대방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해 실험하는 중이니까. 

상대방과 접촉할 필요도 없다. 

 

내면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분노 밑에

무엇을 숨기고 있지?

 

분노 밑에서 공포를 발견할수 있다. 

분노외에 질투도 보인다. 

경쟁심도 보이고, 그동안 관계를 가로막은 

감정 복합체의 자잘한 요소들이 

모두 보인다. 

 

부정성 놓아버림과 

긍정에 대한 저항 놓아버림을 

동시에 한 결과 

내면의 에너지가 달라지고, 

자존감도 미묘하게 바뀐다.

 

관계에 

무언가 긍정적인 일이 생기게 하려는 

자발성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리기만 하면 된다

 

이제 그냥 편히 있으면서 

무슨 일이 생기는지 

지켜본다. 

 

이 실험에서

상대방이 이해했는지는 관심사가 아니다. 

 

내가 이해했는지만 

중요하다. 

 

문제를 대하는 

나 자신의 입장을 바꾼 다음, 

무슨 일이 생기는지 지켜보는 것만이 

관심사다

 

보통은 

아주 보람찬 경험이 따라오기 마련인데, 

이 경험은 

상황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이전에 겪은 트라우마의 찌거기를 아직 해결하지 못하면 이 또한 무의욕에 빠지는 원인이 된다. 

 

마음은

 과거가 되풀이되리라는 예상을 

미래에 투영한다. 

 

이런 

무의식적 심리역동이 나타나면, 

감정 복합체를 

다시금 잘 살펴보려는 마음을 먹고

 

 그것을 낱낱이 나눠서 

부정적인 면을 놓아버리고 

긍정적인 면에 대한 저항도 

놓아버린다. 

 

이렇게 하면 

미래를 보는 눈이 

달라진다. 

 

격정에 압도되었을 때 

해결할 방법을 몰랐던 자신을 

용서할 수 있다. 

 

당시에 

남은 찌꺼기로 인해 

감정 장애에 빠졌지만 

무의식적인 마음속에는 

시간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이제 언제라도 

과거의 일을 치유하기로

 마음먹으면 된다. 

 

자신을 위해 

감정치유를 할 때,

 과거 일이 다른 의미를 띠기 시작한다. 

 

우리의 높은 큰나가 

그 일을 이해할 

새로운 맥락을 창출하기 

시작한다. 

숨은 선물이 보인다. 

 

끝내는 그일 덕에 배우고, 

성장하고 지혜를 습득할 기회를  

새롭게 얻은 것에 감사를 표하기에 이른다. 

 

감정장애를 볼 수 있는 흔한 경우 중에 이혼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이혼한 후에 억울함만 남아 새로운 연인관계를 맺을 능력이 손상되는 일을 겪는다. 원망 놓아버림을 꺼리면 감정장애가 계속되어 수년 혹은 평생동안 지속될 수도 있다. 억울함과 마주할때 확실히 알게 되는 것은 자신의 감정구성 중 치유가 되지 않는 부분이다. 그 부분을 치유하기 위해 노력하면 커다란 보상을 얻는다. 고통이 따르는 상황마다 이렇게 자문해야 한다. 

 

"언제까지 대가를 치를 참이지?" 

카르마에서 온 성향은 애초에 어떤 것이었을까? 

 

얼마나 원망하면 될까? 

원망에 마침표를 찍을 날이 올까? 

원망에 언제까지 집착할까?

 

진짜로 잘못한 것이든 

상상한 것이든 

남이 잘못한 일에 

내가 얼마나 큰 희생을 치르려는 셈일까? 

 

죄책감을 얼마나 느끼면 될까? 

얼마나 자학하면 될까?

언제쯤 자학의 은밀한 즐거움을 포기할까?

이 형벌이 언제 끝날까? 

 

원망을 확실하게 살펴보면 

무지하고 순진하고 전진하며 

정신교육이 되어 있지 않다는 이유로 

자신을 벌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렇게 자문해보자. 

 

"감정자가치유법을 교육받은 적이 있는가?

"의식에 대해 가르쳐주는 수업이 있었는가?

"마음에 무엇을 넣을지 선택할 자유가 있다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나?

" 의식의 법칙을 가르쳐준 사람이 있었나? 

 

그런적이 없었다면 

순진하게 어떤 것을 믿었다고 

자신을 두들겨 팰 이유가 있을까?

 

당시에 

최선이라 생각한대로 

했을 뿐이다. 

 

영화제목처럼 "그때는 그게 좋은 생각 같았다"라고 하는 것이 나와 남의 과거행동을 그나마 설명해주는 말이다. 

 

의식적으로 동의한 적도 없는데, 

부지불식같에 모두에게 

부정적 프로그램이 설치되었다.

 

뭐가 뭔지 모르고 순진무구했던 까닭에 

우리는 설치된 프로그램을 믿었고, 

이것에 휘둘렸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만 멈추기로 마음먹을 수 있다. 

방향을 바꾸기로 마음먹을 수 있다. 

 

보다 잘 자각하고 

잘 의식하고 

잘 감독하고 

잘 파악하겠다고 

마음 먹을 수 있다

 

녹음기 마냥 앉아서 세상이 건네주는 대로 프로그램을 흡수하기를 거부할 수 있다.

 

세상은

왜소함 특유의 자만심과 공포심을 최대한 자극해서

우리의 순진함과 왜소함을 이용하는 일에

혈안이 되어 있다. 

 

자신에게 어떻게 조종되고 이용되고 

기만당했는지 깨달으면 

분노가 치밀어 오를 것이다. 

 

이런 시도가 있으면 

즉시 상대하라. 

화내도 괜찮다. 

무의욕에 빠지느니 화를 내는 편이 백번 낫다. 

 

분노 속에는 큰 에너지가 들어있다. 

행동을 취할 수 있다. 

 

마음을 바꿀 수 있다. 

방향을 거꾸로 할 수 있다. 

그럼 분노에서 용기로 뛰어오르기가 쉬워진다

 

용기의 수준에서 

그런 시도를 조사해보고, 

대체 어떻게 발생하는지 관찰할 수 있다. 

 

자신의 왜소함은 

돈주고 산 짝퉁 상품과 같은 것임을 

알게된다. 

 

이 조사를 하다 

뜻하지 않게 

자기 내면의 결백성과 

만날때가 있을 것이다. 

 

결백성을 재발견하면 

죄책감을 놓아버릴 수 있다. 

 

죄책감이 사라지면 

자학할 필요도 사라지고, 

그러면 무의욕과 암울함에서 

곧바로 탈출한다

 

우리는 자기 자신을 인정하기로 

즉 자신이 중요하며 

가치있음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을 수 있다. 

 

또한 자신이 겪었던 프로그램이 다른 이들에게 어떻게 설치되었는지 볼 수 있다. 그들 역시 당시에 최선이라 생각한대로 행동했던 것 뿐이다. 

 

그들을 

더이상 원망할 필요도 

나 자신을 원망할 필요도 

없다. 

 

더이상 쓸모가 없고

 먹히지도 않으니 

원망게임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다. 

 

함께하는 사람들

 

무의욕과 암울함에서 벗어나는 

요긴한 방법이 있다. 

 

자신이 씨름 중인 문제를 

이미 해결한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다.

 

긍정적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조집단이 발휘하는 위대한 힘의 일부다. 부정적 생각에 빠져 있을때 부정적 생각형태에는 에너지가 많고 긍정적 생각형태는 허약하다. 

 

에너지 진동수가 높은 사람은 

긍정적 생각형태에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그들과 같이 있기만 해도 

이롭다. 

 

그렇게 하는 것을

 몇몇 자조집단에서는 

"성공한 사람과 시간 보내기"라고 

부른다. 

 

그 이점은 의식의 정신적 측면에 작용한다. 긍정적 에너지가 전해져서 잠재하던 긍정적 생각형태를 일깨운다. 이 현상을 어떤 자조집단들은 "삼투현상으로 얻기"라 부른다. 현상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필요는 없지만 정말로 일어난다는 점만은 알아야 한다. 이 현상은 흔히 볼 수 있다. 

 

예를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대개 논리적이고 좌뇌적인 성향을 갖도록 교육받는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날때부터 우뇌지향적이다. 우뇌적인 사람들은 직관과 창의성, 텔레파시 의사소통, 생각형태와 에너지 진동감지에 큰 능력이 있다. 

 

이런 능력에 

흔히 포함되는 것으로 

몸 주위에 생체 에너지 장인 

오라를 보는 능력도 있다. 

 

이 능력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 

능력을 공유하는 일이 가능해진다. 

 

 

 

 

이런 현상은 회의적이고 논리적인 좌뇌성향의 과학자에게도 일어난다. 좌뇌 성향의 과학자가 오라는 보는 능력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였다. 

 

오라를 보는 법을 따라하자 

놀랍게도 사람들의 머리 주위에 있는 

빛의 장이 보였다. 

 

특히 어떤 사람 주위의 오라는

 "엑토플라즘'이라는 심령체같은 것이

 왼쪽귀에 많이 매달려 있는 것처럼 

보였다. 

 

반면 머리 오른 쪽에는 거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이 현상이 사실인지 상상으로 인한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오라를 보는데 능숙한 옆 사람에게 확인해 보았다. 그녀 또한 한쪽으로는 폭이 넓고 다른 쪽으로는 거의 아무것도 없는 오라를 보고 있었다. 

 

그의 오라를 보는 능력은 그런 능력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때만 나타났다. 그리고 그 자리를 뜨자 그 능력이 사라졌다. 이후로도 수년간 오라를 볼 수 있는 친구들과 함께 있을때면 능력이 되돌아왔다. 

 

그 중 한번은 병원에서 어느 심리학자와 함께 있을 때였다. 그녀의 직업은 사람들의 오라를 관찰해 색깔이 바뀌는 패턴을 보고 심령진단을 하는 일이었다. 그녀와 함께 있자 오라를 보는 능력이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흥미진진한 색깔도 보였고, 출렁이는 감정에 따라 오라가 바뀌는 모습도 지켜볼 수 있었다.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것만으로 능력을 느닷없이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어떤 능력이 있는 사람 

가까이 있으면 

그 능력이 전해지는 것 같았다.

 

다시 말해 

우리는 

계속 함께 있는 사람들에게서 

긍정적, 부정적으로 영향을 받는다. 

 

기없는 사람이 

같은 문제가 있는 이들과 함께 있기로 마음먹는다면 

수줍음 극복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이런 현상은 이혼 뒤에 상담을 하러 온 여성의 경우에서 뚜렷이 나타났다. 그녀는 심리치료를 받는 것이 좋을지 알고 싶어했다. 궤양 재발과 편두통으로 몸이 아픈 상태였다. 이야기가 펼쳐지자, 뜻박의 이혼으로 입은 상처때문에 그녀가 심히 억울해 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페미니스트 의식화 그룹에 가입했다고 했다. 이 집단의 구성원은 거의 전부가 남자에게 원통함과 분노, 증오를 느끼는 이혼 여성이라고 했다. 그들은 한데 모여 자기들의 부정성에서 큰 보상을 얻고 있었다. 그들이 자존감을 되찾으려 애쓴 방법은 극단으로 치달으며 감정균형을 무너뜨리는 것이어서 실제 삶은 쓸쓸하고 애처로워보였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생활여건도 살펴본 후에 심리치료를 받는 대신 석달동안 간단한 권고대로 해보라고 제안했다. 효과가 없으면 그때 가서 다시 심리치료를 받아야 할지 다시 따져보기로 했다. 

 

권고는 단지 

그 집단에서 나와 

이혼한 여성들과 얽히지 말라는 것과 

이혼 경력에도 불구하고 

관계를 다시 맺는데 성공한 사람들과 

함께 있으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처음에는 저항하면서 

자기는 그런 사람들과는 

아무런 공통점이 없다고 단언했다. 

 

그러더니 두가지는 분명한 사실이라고 인정했다. 

 

첫째는 

긍정적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에는 

에너지가 훨씬 덜 들어간다는 것이고, 

 

둘째는 

의식의 법칙중 하나가 

유유상종이라는 것이다. 

 

원통함은 원통함을 끌어당기고, 사랑은 사랑을 끌어당긴다. 그녀는 자문했다. 

 

"원통함에 빠져있었던 결과로 

나는 지금 어디에 있는 걸까?  

 

긍정적이고 도움이 되는 것에서 

뭐라도 얻으려 한적이 있었나? 

 

시간이 가면서 

그녀는 기존 집단에서 

시간보내기를 그만두고 

자기보다 건강하고 균형잡힌 사람들과 

관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기보다 행복한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자신이 속으로 정말 많은 부정성을 부둥켜안고 있었음을 

자연히 깨닫고 몹시 기뻐했다

 

즉 

부정성을 부둥켜안기로 마음먹고 

의식적으로 그것을 쥐고 있었음을 깨닫고 

부정성으로 인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도 제대로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하면서 

사회생활 전체가 

달라졌다. 

웃음과 행복을 되찾았다. 

편두통이 사라졌다. 

 

결국 

다시 사랑에 빠졌고 

사랑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이제껏 자기가 받아본 

궤양 치료가운데 

최고라는 농담도 했다. 

 

자신이 

무의욕상태라 느껴지면 

스스로 무엇을 증명하려는 것인지를 

자문함으로써 

숨어있는 프로그램을 

찾아내면 된다

 

삶이 끔찍하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인가? 

사랑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인가? 

 

이 세상이 절망적이라는 것인가? 

내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인가? 

행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무엇을 정당화하려는 것일까? 

내가 옳다라고 하려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를 셈인가? 

 

이때 생겨나는 감정을 인정하고 놓아버리면 해답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긍정적인 사람들과 

관계를 맺는 일에는 

에너지가 덜 필요하다. 

사랑은 사랑을 끌어당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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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문형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9.07 "자신이 무의욕 상태라고 느껴지면, 스스로 무엇을 증명하른 것인지를 자문함으로써 내면에 숨어있는 프로그램을 찾아내면 된다"
    # 삶이 끔찍하다는 증명을 하려는 것인가?
    # 사랑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인가?
    # 세상이 절망적이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인가?
    # 내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려는 것인가?
    # 행복은 불가능하다는 것인가?
    # 무엇을 정당화하려는 것인가?
    # 내가 옳다라고 하려고 얼마나 많은 대가를 치를 셈인가?
  • 작성자문형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5.09.15 무의욕과 암울함에서 벗어나는 요긴한 방법이 있다. 자신이 씨름 중인 문제를 이미 해결한 사람들과 같이 있는 것이다. 긍정적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과 함께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자조집단이 발휘하는 위대한 힘의 일부다. 부정적 생각에 빠져 있을때 부정적 생각형태에는 에너지가 많고 긍정적 생각형태는 허약하다. 에너지 진동수가 높은 사람은 긍정적 생각형태에 에너지를 불어넣는다.

    그들과 같이 있기만 해도 이롭다. 그렇게 하는 것을 몇몇 자조집단에서는 "성공한 사람과 시간 보내기"라고 부른다. 그 이점은 의식의 정신적 측면에 작용한다. 긍정적 에너지가 전해져서 잠재하던 긍정적 생각형태를 일깨운다. 이 현상을 어떤 자조집단들
  • 작성자문형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7.04 "우리에게는 놓아버림을 거부할 자유가 있다"
    "원하는 한 계속 부정성을 움켜쥘 자유가 있다. 부정성을 포기해야 한다는 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자유인이다"
  • 작성자문형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8.16 울함과 무의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넘어야하는 커다란 걸림돌 가운데 "원망"이 있다. 남을 원망하면 큰 보상이 따른다. 나는 죄가 없어진다. 자기연민을 즐길 수 있다. 순교자나 피해자가 된다. 동정받는 사람이 된다.

    "원망의 가장 큰 보상은 나는 죄가 없는 피해자가 되고 상대방은 나쁜자가 된다는 점에 있다" 이런 게임이 벌어지는 모습은 대중매체에서 늘 볼 수 있다. 수많은 논란과 비방, 인신공격, 소송으로 각색된 원망게임이 끝없이 이어진다
  • 작성자문형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8.16 내면을 들여다보며 묻는다. "분노 밑에 무엇을 숨기고 있지?" 분노 밑에서 공포를 발견할수 있다. 분노외에 질투도 보인다. 경쟁심도 보이고, 그동안 관계를 가로막은 감정 복합체의 자잘한 요소들이 모두 보인다. 부정성 놓아버림과 긍정에 대한 저항 놓아버림을 동시에 한 결과 내면의 에너지가 달라지고, 자존감도 미묘하게 바뀐다. 관계에 무언가 긍정적인 일이 생기게 하려는 자발성에 대한 저항을 놓아버리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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