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축복이 함께하기를!!
신의 축복속에 인류가 하나되어 평화로운 상태이기를!!
600 평화의 초월
600수준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목격하고/관찰하는 성질과의 동일시를
버릴 필요가 있는데...
이 의식수준이 실현되었을때,
약 50%의 경우 육체는 포기될 것이다.
서론
깨달음의 상태들은
선형이 비선형으로 대체된 결과
의식수준 600에서 출현한다.
이 에너지 장은
초월, 빛비춤, 지복, 신의식과 같은 용어들이 가리키는
경험과 관련된다.
600의 상태에 이를때,
주체와 객체 사이의 구별은 사라지고,
지각의 특정한 초점은 없다.
이 수준의 개인들은
세상을 떠나는 일이 잦다.
왜냐하면
지복의 상태는
일상적인 활동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부는 살아남아 영적 스승이 되고,
다른 일부는 이름없이 인류의 향상을 위해 노력한다.
몇몇은 세상으로 복귀하여
각자의 분야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천재가 되어
사회에 크게 기여한다.
종교의 테두리 안에 남아있는 이들은
결국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지명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이 수준에서는 일반적으로 공식적 종교는 초월되어
모든 종교의 원천을 이루는
순수한 영성으로 대체된다.
현재 지구상에는 600이나 그 이상으로 측정되는 사람들이 12명있다. (익명 600-700대에 3명, 700-800에 1명, 900-1000에 1명)
600수준 이상에서
행위는
시간과 공간속에 정지된 채
슬로모션으로 일어나는 것으로 지각된다.
전부는
살아있고, 빛나고, 끊임없이 흐르며,
절묘하게 조율된 진화의 춤속에서 펼쳐지는데,
그속에서 의의와 근원은 압도적이다.
이 굉장한 드러남은
생각이나 개념없이 일어나므로,
마음속에는 개념화를 중단시킨 무한한 침묵이 있다.
목격하고 있는 그것과
목격되는 그것은
정체가 동일하다.
관찰자는
녹아버리고
동등하게 관찰 그자체가 된다.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힘이 무한하지만
절묘하게 부드러운 현존에 의해 일체가 된다.
600-700사이로 측정되는
미술, 음악, 건축물의 걸작품은
일시적으로 우리를
높은 의식수준으로 데려다 줄 수 있는데,
이러한 것들은
보편적으로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영원한 것으로 인지된다.
토론
선형에서
'의식의 비선형적 영역들로의 초월'은
커다란 패러다임 전환을 낳는다.
이 수준에서는
이행을 목격하는
'이것'이나 분리된 사람이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완결적이어서
아는 자와 아는 대상이
동일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신의 현존임이
틀림없는 무한한 평화의 상태가 있으며
그것은
감정적이거나 심리적인 평화나 평온함과는
다른 차원에 속해있다.
멎어있음 속에서
전부는
저절로, 자율적으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난다.
소리는
침묵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침묵은
소리안에서 조차 지속된다.
그 상태는
전통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사치난다(침묵의 지복)'로 지칭되었다.
생리적 기능은 정지될 수 있다.
움직이거나
말하려는 욕망은 없으며,
내면의 침묵은
영원성속에 정지된 것처럼
소리가 없다.
육체가 지속되고
생존하는지 여부는
관심사가 아니고
사실상 아무런 의미도 없다.
그것은
관심밖의 문제이며
지휘하는 것은
우주에 달려있다.
카르마적 영향이
육체의 지속과 정렬된다면
육체는 생존한다.
그렇지 않다면
육체는
단순히 버려지고 만다.
육체는
흙에서 나왔으므로
영의 목적을 충족시켰다면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 의식수준이 실현되었을 때,
약 50%의 경우 육체는
포기될 것이다.
그렇지 않을 경우
육체의 지속은 세상의 반응과 일치하는데,
세상은 먹거나 마실 필요성을 강조할 수 있다.
내부에서는
이 방식이나 저 방식에 대한 기호가 전혀없고,
의사소통의 필요나 말할 필요성도 없다.
현존은
자기충족적이고 완전하고
비할바 없이 절묘하게 부드러우며,
동시에 강력하다.
그것의 본질은
존재의 근원으로서
모든 나타남에 스며든다.
일체는
나타나지 않은 것이
본유적이고
오직 현존하며
의지작용 너머에 있는 한
근원으로부터 창조로서 나타난 것이 되고,
있는 것에서 솟아나는 것으로 보인다.
단일성과 하나임안에서
모든 것은
다른 모든 것에
동시에 내재해 있는데,
그러나 이것은
동일자로 존재하기 때문도
다른 것으로 존재하기 때문도 아니다.
전부임의 무한한 맥락안에서
잠재성은
일반적으로
신의 의지로 알려져 있는
신성한 명령에 의해 활성화된다.
하지만
의지라는 용어는
그것이 고의성을 암시한다는 측면에서
다소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창조는
무한한 잠재성의 출현이
창조로서 펼쳐지고 드러나는 것으로
목격된다.
그래서
이것(창조)을 창조하는
이것(창조주)의 이원성은 없는데,
왜냐하면 창조주와 창조는 하나이자 동일자이고
창조는 스스로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완벽하고 온전하다.
창조는
에고가 목격하는 바와같이
완벽하지 않음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완벽에서 완벽으로 이동한다.
완벽하지 않음에서
완벽함으로 이동한다는 환상은
정신화이다.
예를들면
장미 봉우리는
완벽하지 않은 장미가 아니라
완벽한 장미 봉우리다.
반쯤 벌어졌을때
그것은 완벽하게 피어나고 있는 꽃이고,
완전히 벌어졌을때 그것은 완벽한 활짝 핀 꽃이다.

시들때 그것은
완벽한 시든 꽃이고
그 다음에는 완벽한 마른 식물이 되며
그 이후 완벽하게 수면상태에 든다.
그러므로
각각의 상태는
창조의 진화의 출현이자
펼쳐짐으로서
장미가 갖는 표현의
모든 확장에서 완벽하다.
그리하여
변화라는 환상은
잠재성으로부터 현실이 나타나는 과정
(이행, 출현, 펼쳐짐, 변형)의 목격으로 대체된다.
정신적 해석에 의한
간섭이 없을 때,
존재하는 전부의 완벽함은
그 고유한 아름다움으로 증명되는데,
일체의 고유한 아름다움은
그 완벽함의 변형된 물질의 외관이다.
선형적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편집과 분류가 없을 때,
일체는 동등하게
절묘한 것으로 보인다.
세상이
잡초라고 무시하는 것이
꽃의 아름다움과
동등한 아름다움을 갖는다.
모든
자연의 살아있는 조각 설계는
동등하며,
'분류하지 않을 때'
일체는
동일한 장점이나 가치를 갖는 것으로
각성된다.
전부는
창조로서
신성의 한 표현이다.
전부는
동등하게
신성하고 성스럽다.
다른 어떤 것과도 마찬가지로
육체 또한 자율적이어서
알아서 돌아다닌다.
600대 수준에서는
원인적 행위자나
행위의 결정자로 상상되는
시적인 자기나 나와같은,
의지작용을 갖는 원인적 자리는 없다.
평화와 빛비춤의 역학
보통의 삶에서,
에고는
행위의 저자임을 주장한다.
내적 실상으로 경험되는
이 자기 본위적 주장은
즉석 편집이라는
에고의 인지되지 않은 기능에
기초한 망상이다.
이 즉석 편집현상은
어떤 현상이 실제 일어난지
만분의 1초뒤에 벌어진다.
에고의 이 기능에 대한 최상의 비유는 전에 언급한 것처럼 카세트 녹음기의 재생기능 덕분이다. 소리가 테이프에 녹음될때 테이프의 재생기능 덕분에 사람은 찰나전에 막 녹음된 것을 들을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원본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찰나의 지배와 더불어
녹음본을 경험하는 것이다.
이러한 지체는
보통의 삶에 대한
모든 에고 경험에 내재해 있으며,
이로써 마음은
실상을 경험하는 것이 아니라
실상의 지체된 즉석재생을
지각의 필터를 통해
경험하는 것이다.
600수준에서
이 지체는 사라지고
그와함께
이것 혹은 저것이라는
망상 또한 사라지는데,
그것은 처리하는 지체가 없을 때,
이것과 저것은
인위적으로 분리되지 않은
단일체로 결합되기 때문이다.
에고의 심사장치라는
내적 위치가 없다면,
현상들은
관객환상을 거치지 않고
곧바로 경험된다.
현상과 분리되는 대신
현상과 하나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하는 전부로 표현된
현존의 살아있음과
전부임의 경험으로 귀착된다.
존재를 갖는 전부는
그저 수동적으로
"거기"있는 것이 아니며,
어떤 고의적 의도로서가 아닌
존재의 한 성질로서
그 자체를 표면적으로
앎에 드러낸다.
그리하여
우주는
신의 내재적 광휘와 함께
빛을 발하는
절묘하게 아름답고
완벽한 선물처럼 보인다.
현상적으로 목격함은 모든 움직임이 슬로모션으로 일어나는 듯 목격되는 것처럼 황홀하다고 묘사될 수 있다.
이전에
에고/자기에 기인하는 것으로 여겨졌던
현상, 움직임, 행위는
이제 자율적인 것으로 보이는데,
여기에는
특정한 기점이 없으며
더구나 독립된 나라는 초점이 없다.
대신
나임의 감각이 확장하는데,
그것은 분리된 정체들로서가 아닌
본질로서
보다 원초적이고
전부를 감싸며
본유적인 어떤 수준에 이르기까지
전부를 포괄한다.
결과적으로
관계에 대한
이러한 지각 또한 사라지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분리를 지각하는 것과 관련되는
정신적 구조물이기 때문이다.
분리에 대한 지각은
비선형적 포괄성에 대한
앎으로 대체된다.
그래서
설명되어야 할
지각된 분리가 없을때,
관계 개념은 무의미해지고
적용할 수 없게 된다.
참나는
세계와 관계하지 않는데,
왜냐하면
존재는
참나의 불가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이와 비슷하게 과학은 우주에 확인가능한 중심이 없다는 것을 발견하였다)
비록
기억의 데이터 뱅크는
계속해서 이용가능하지만
그것의 가치는
묘사적 인지능력에 있고,
인지능력은
육체기능의 지속이
카르마적 선택지일 경우
그것을 가능하게 해준다.
육체는 그때
대략 타성에 비길만한 원리에 따라
작동하는 듯 하다.
이전의 책에서 기술한 것처럼,
육체는
카르마의 태엽을 감아놓은 인형처럼
혼자서 예정된 길을 간다.
600수준과
그 이상에서의 변형은
에고의 자기애적 핵심이 녹아버린 결과인데,
그것은
스스로를 통치권자로
따라서 제일의 원인적 행위이자
의지 작용을 갖는 저자로
그릇되게 추정한다.
이러한 추론은
에고 중심적이라는
용어의 의미에 포함된다.
이렇듯
에고의 핵심은
그 기본추정에 있는데,
에고는
그것으로써
스스로를 존재, 행위, 결정의 일차적 근원으로 보고
그리하여 신성의 통치권을 찬탈한다.
이 원시적 추정은 "악성 메시아적 자기애"라는 병리적 상태에서 공공연하게 전시되는데, 여기서 에고의 핵심은 사실상 숭배된다. 이러한 자기 신격화는 자기자신을 말 그대로 신으로 선언했던 로마황제들의 시대에서부터, 과대하고 전능한 에고팽창을 보여준 현재 세계지도자들에 이르기까지 전 역사에 걸쳐 노골적으로 표현되었다. (악성 메시아의 자기애적 증후군 측정수준 30)
600수준의 초월
보통의 개념화 교육에 대한
지복상태는
궁극적 상태처럼 보일 것이다.
에고자체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정확히 그러하다.
불안, 예상, 후회, 매력,
열망은 사라진다.
규칙, 목적, 목표, 과정들
그리고 충족되거나 완성되어야 할 조건이나
해내야 할 역할
또한 사라진다.
이 수준에는
사람, 자기, 혹은 다툼을 벌일
타인이 없다.
모든 것이
저절로 자연발생적으로 일어나며
순전히 있는 그것으로
스스로를 드러낼 뿐이다.
이와 비슷하게 묘사적 지각인 성질은 사라진다. 일체는 형용사없이, 단순히 있는 그대로 있다.
마음은 멎는데,
그것은 주체나 대상이 없고,
저것을 하는
이것이라는 행위자가 없으면
동사의 필요성이 없기 때문이다.
성질부여가 없다면
형용사의 필요성도 없다.
게다가
내려야할 결정이 없기 때문에
의지 작용은 사라지고
전부는
창조의 진화의 표현으로서
자연발생적이고
자율적으로 진화한다.
이러한
에고기능의 해소뒤에 남는 것은
앎/목격함이지만,
거기에는 사실 목격자가 없다.
남는 것은
의식자체다.
의식에 대해서는
처리의 필요성이 없는데,
왜냐하면 덧씌워진 선형적 성질로 인해
선택지들이 분리되는 일이
더이상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선택하거나 찬반양론을 따져볼 필요는 없다.
운용상으로 정보는
정보자체로 충분하며
그로 인해 행위는 자율적이다.
의사결정은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데,
왜냐하면
일치가 관계나 선택지들을
대체하기 때문이다.
또한
'하는 자"가 없으므로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는데,
사건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제한된 관점의 투사와 수반하는
전신작용이 요구될 것이다.
시간 경험이 그치면서
연쇄는 사라진다.
그리하여
전이나 후는
없다.
일치의 단일성의 조화로움은
잠재성이 그자체를
나타남으로 표현함(그러나 의도성이 결여된)에 따라
진화한다.
이와 가장 비슷한 것이
전체와 조화롭게 일치하는
우주의 운동일 것이다.
그래서
중력은
창조에 내재해 있으며,
중력의 장은
정신적, 탐구적, 가설적 구조물을 나타내는 용어들인
"원인적"이나 "결과적"이 아닌
"부수적"이다.
일치는
신성한 단일성과 조화의 표현인데,
이것은
데카르트의 레스 인테르나(코기탄스와 레스 익스테르나/익스텐사(있는 그대로의 세계)의
이원적 분리를 초월하면서
명백해지게 된다.
하나임의 단일성안에
곧 분리된 저것의 원인되는
분리된 이것이 없다.
600수준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목격하고/관찰하는 성질과의
동일시를 버릴 필요가 있는데,
목격하고/관찰하는 성질은
사실상 의식자체에 내재한
자율적 성질이다.
깊은 명상을 통해
이러한 성질에 대한
무의식적 동일시가 있었음을 알게되는데,
이것은
목격자나 관찰자로 존재함의 환상이나
그런 식의 존재에서 얻는
보상을 내맡길 것을 요구한다.
한층 더 앞선
깨달음의 수준으로 옮겨가는데 대한
일차적 장애는
지복상태 자체에 대한
만족과 쾌락 및
그에 대한 부지중의 집착이다.
게다가
지복의 상태는
완성이자 전체로서 경험된다.
그 다음
그 상태가 아무리 절묘할지라도
그것조차 신에게 내맡겨져야 한다는 인식이 일어난다.
지복의 내맡김과 더불어
이제껏 상상된 적 없는,
한층 더 확장된 패러다임이 솟아난다.
600대 스승과 측정수준
노자 610, 마하가섭 695, 멕데부르크 640, 묵타난다 655, 비베카난다 610
기적수업 워크북 600, 노자도덕경 610, 누가복음서 699, 도마복음서 660, 신약(킹 제임스판) 640, 시편(람사판 성경) 650, 아함경 645, 창세기(람사판 성경) 660, 카발라 605
참고) 마하가섭
마하가섭은 고타마 붓다의 십대제자 중 한 사람이다. 가섭 또는 대가섭이라고도 하며, 의역하여 대음광 또는 대구씨라고도 부른다. 인도의 왕사성 마하바드라의 거부였던 브라만 니그루다칼파의 아들로서 태어났다. 비팔라 나무 밑에서 탄생하였으므로 비팔라야나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집착에 사로잡히지 않는 청결한 인물로서 고타마 붓다의 신임을 받아 제자들 중에서 상위를 차지하였다.
참고) 비베카난다
비베카난다는 인도의 종교가이다. 벵골 사람으로, 라마 크리슈나의 애제자였다. 처음 이름은 나렌드라나트 다타였고, 캘커타 대학에서 수학한 수재이며 설득력이 풍부한 고결한 인격의 소유자였다. 뒤에 스승 라마크리슈나를 만나 그로부터 결정적인 감화를 받고 세속을 떠나 6년간 히말라야 산중에서 수도하여 이미 지니고 있던 서구적 교양과 지성 위에 열렬한 힌두교 신앙을 전개시켰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문형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4.11.04 종교의 테두리 안에 남아있는 이들은 결국 공식적으로 성인으로 지명될 수도 있는데, 하지만 이수준에서는 일반적으로 공식적 종교는 초월되어 모든 종교의 원천을 이루는 순수한 영성으로 대체된다. 현재 지구상에는 600이나 그 이상으로 측정되는 사람들이 12명있다. (익명 600-700대에 3명, 700-800에 1명, 900-1000에 1명)
-
작성자사랑챠크라 작성시간 14.11.10 깨달음의 가르침을
대단히 아껴가며 배우고 익히니
모든 염려가 사라지고
기쁨과 평화와 고요가 충만한 나날입니다
날마다 좋은날입니다_()_ -
작성자문형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12.12 600수준을 초월하기 위해서는 목격하고/관찰하는 성질과의 동일시를 버릴 필요가 있는데.
-
답댓글 작성자문형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20.12.12 지복의 상태는 완성이자 전체로서 경험된다. 그 다음 그 상태가 아무리 절묘할지라도 그것조차 신에게 내맡겨져야 한다는 인식이 일어난다. 지복의 내맡김과 더불어 이제껏 상상된 적 없는, 한층 더 확장된 패러다임이 솟아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