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yond reason
3. 중국식으로 변모하는 불고(수, 당의 불교)
43) 세계제국의 성립과 발전하는 불교
양무제와 강남의 번영
강남문화에서 불교의 가장 큰 번영은 양나라(502-557)때 이루어짐. 양무제는 위진남북조 시대 중 가장 불교적인 군주였기 때문에 불교 역시 크게 발전함. 무제는 '동태사'를 창건하고 출가를 단행하는 등 '보살황제, 불심천자'의 길을 걸음.
강북의 분열과 통합
남북조 시대의 북조는 북위 - 동위와 서위 - 북제와 북주 ..
북주의 3대 황제 '무제(560-578)'는 불교를 탄압하여 폐불을 단행함. 당시 환속한 승려가 2만명임. 무제가 사망한 후 선제, 정제가 대를 이으면서 불교는 다시 융성함. 이후 수나라 건국.
세계제국으로 깨어나는 중국
수나라의 탄생
44) 수문제와 중국적인 최초의 불교 '천태종'
수문제의 불교선택과 수양제의 계승
수문제는 통일제국에 걸맞는 지배 이데올로기로 불교를 선택함. 수문제는 스스로를 '천자보살'이라고 부름.
수양제와 천태종의 발전
천태종은 혜문 -> 혜사 -> 지의 -> 장안관정으로 이어지면서 발전함. 당시 주류였던 화엄종과 사상적으로 대립하면서 상호 발달함.
지의의 저술과 천태종의 핵심전적
지의는 많은 가르침을 설했는데 이를 훗날 책으로 펴낸 사람이 '장안관정'임. 장안관정이 모아 완성한 책이 '천태삼대부' - 묘법연화경현의 10권, 묘법연화경 문구 10권, 마하지관 10권임. 또한 천태소오부 - 관음현의 2권, 관음의소 2권, 금광명경현의 2권, 금광명경문구 2권, 관무량수경소 1권임.
천태종은 '묘법연화경'을 중심경전으로 삼기때문에 이에 대한 이해가 중요함.
천태종의 중요 교리에 담긴 의미
지의의 교설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삼제원유, 일신삼관, 일념삼천'과 이후 천태종에서 발전하는 '성구설'이 있음. 먼저 삼제원융이란 공, 가, 중 삼제가 하나로 융합되어 구별이 없음을 말함. 이세상 모든 것에는 실체가 없다는 공제, 그럼에도 현실에 존재하는 현상은 연기적인 관계에 의해 일시적으로 생겨난다는 가제, 공과 가라는 양극단에 치우지지 않을 것을 말하는 중도제가 상호 유기적인 관계속에서 작용한다는 관점이 삼제원융임.
참고) 천태교학(天台敎學)은 《법화경》을 근본 경전으로 하여, 천태종의 개조인 천태지자대사(天台智者大師) 지의(智顗: 538-597)가 대성한 중국 불교의 교학이다.[1] 천태교학은 화엄교학(華嚴敎學)과 더불어 중국 불교의 대표적인 중요 교학 중의 하나이다. 천태교학은 실상론(實相論)이라고도 불리는데, 그 주요 교의 및 수행 체계로는 삼제원융(三諦圓融) · 일념삼천(一念三千) · 사종삼매(四種三昧) · 일심삼관(一心三觀) · 교관이문(敎觀二門)이 있다.[1] 오시팔교(五時八敎)는 천태지자대사 지의가 주장한 천태종의 교판으로, 오시팔교의 교판은 한 종파로서의 천태종을 확립하는 기초가 되었다
참고) 삼제원융 : 천태교학에서는 실상(實相)의 진리를 나타내는 3면(三面)으로서 삼제원융(三諦圓融)을 주장한다.[1] 3제(三諦)는 공제(空諦) · 가제(假諦) · 중제(中諦)를 통칭하는 낱말이다. 공제(空諦)는 모든 것은 실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라 공으로서의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1] 가제(假諦)는 모든 것은 연(緣)에 의해 가(假)로 존재하는 가적(假的)인 존재라는 것을 뜻한다.[1] 중제(中諦)는 모든 것은 공이나 가의 어느 일면으로서는 파악할 수 없는, 사려분별(思慮分別)을 초월한 절대존재로서의 중(中)이라는 것을 뜻한다.[1]천태교학에서는 일체의 모든 것은 이처럼 3제의 면을 갖고 있으며, 나아가 이들 3제는 서로 원융(圓融)한데 그 원융한 곳에 그 자체의 진실성이 있다고 주장한다
일신삼관은 한 마음속에 공, 가, 중 삼제가 모두 갖추어져 있음을 자각하는 수행론임. 삼제원융이 이론적인 교리라면 일심삼관은 실제적인 수행론이라고 할 수 있음.
참고) 일신삼관 : 천태교학에서는 일념삼천의 교의 또는 사상을 관법(觀法)으로서 실천하는 길이 일심삼관(一心三觀)이라고 주장한다.[1] 일심삼관은 일체의 모든 존재로서의 삼천법(三千法)과 존재의 실상인 삼제(三諦)의 진리를 현실일상(現實日常)의 미혹일념(迷惑一念)의 마음 위에서 관찰하며 그 미혹의 일념의 마음 속에 삼천법이 갖추어져 있고, 삼천법이 모두 즉공즉가즉중(卽空卽假卽中)의 삼제원융에 있다고 보는 관법(觀法)이다.
다음으로 일념삼천이란 작은 한 생각에 이 세계의 모든 가치가 내포되어 있다는 뜻으로 가장 작은 최소속에 무한한 전체의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는 관점임. 여기서 삼천은 만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임. 지옥, 아귀, 축생, 수라 ,인, 천, 성문, 연각, 보살, 불의 십계가 있고 그 십계마다 또 10계가 있으며 그 안에는 십여시가 있으므로 1천가지가 세계가 존재함. 그리고 중생세간, 국토세간, 오음세간의 삼종세간마다 1천가지 세계가 있으므로 3천세계가 됨.
참고) 일념삼천 : 삼제원융이라는 존재의 진실성을 우주적으로 확대하면, 거기에는 모든 것이 서로 관계를 맺고 있는 우주관이 성립된다.[1] 이러한 천태교학의 우주관을 일념삼천(一念三千)의 교의라고 하는데, 일념삼천은 우주는 하나의 통일적인 존재이며 우주의 삼천법(三千法) 모든 것이 일념(一念)에 갖추어져 있다는 교의이다
삼제원융과 일념삼천의 본질에 일체가 내포되어 있다는 지의의 관점은 이후 본성속에 원래부터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다는 성구설로 발전함. 성구설은 성선설이 아니라 성악설에 가까운데 완전한 본성에는 악마저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임.
45) 세계 최강국 당과 종남산의 불교
수나라의 멸망과 세계제국 당나라의 건국
역사의 법칙가운데 '오랫동안 분열한 시대 뒤에 오는 통일왕조는 반드시 재분열하려는 속성이 있다'는 것이 있음. 장기간의 분열은 안정이라는 통일에 대한 열망을 증대시킴. 하지만 막상 통일이 되고나면 통일에 따른 구속력때문에 분열기의 자율성을 사라짐. 이로인해 재분열의 요구가 비등하게 되는 것임.
약 360년에 이르는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불과 15년만에 멸망함.
후한이 몰락한 후 360년가 분열된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역시 37년만에 멸망함.
수나라가 무리하게 진행한 대운하 사업은 당나라 번영의 기틀이 됨.
종남산에 움트는 새로운 불교의 기운
종남산은 해발 2600미터까지 되는 신령한 산으로 장안과 가까운 이곳에 새로운 불교의 기운이 응집함.
참고 ) 종남산(終南山,终南山)은 현 중국의 산시성(陕西省섬서성)내에 주되게 위치하는 산이다. 산시성 시안시(西安市,Shaanxi)에 위치하는 종남산은 '종남산 삼림공원'으로 지정되있다.[1] 종남산의 산줄기는 진령(秦嶺,秦岭진령) 산맥(또는 친링산맥)이다. 또한 때때로 종남산은 취화산(翠華山,Cuihua)을 참조하고 있기도한다. 종남산은 도교의 탄생지이자 불교의 율종중 남산율종(南山律宗)의 발상지이기도 하며 화엄종의 유서깊은 사찰인 지상사(至相寺)가 있는곳이기도 하다.
도선의 남산율종와 승단정비
도선은 사분율에 입각한 계율로 승단을 정비한 '남산율종'을 만듬.
참고) 모든 길은 장안으로 통한다
장안은 이탈리아 로마, 그리스의 아테네, 이집트의 카이로와 함께 세계 4대 고도로 알려준 유서깊은 도시
장안을 수도로 삼은 왕조는 1066년에 걸쳐 13국가나 됨. 인구 200만 외국인 5천명인 세계최대의 도시.
'장안의 명물'
46) 중국최고의 진정한 세계인 '현장'
현장의 위대한 발자취
현장의 생애에 대해서는 '대당서역기, 자은전, 속고승전의 권4 현장전'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음. 현장은 13세에 출가. 27세에 인도 구법의 길에 오름. 1203년 이슬람에 망한 뒤 인도불교가 사라졌는데 19세기 영국 고고학자들이 붓다의 유적지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현장이 남긴 '대당서역기'와 현장의 일대기를 담은 '자은전'의 기록덕분이었음.
현장이 인도로 향한 것은 붓다와 관련된 유적음 참배하고 '유가사지론'을 배우기 위함이었음. 유가사지론은 나란다사에서 배우게 되는데 이때 현장을 지도한 스승은 당시 나란다사의 명예총장에 해당하는 계현이었음. 현장은 나란다사에서 인도불교의 대승, 소승, 교학, 힌두교나 자이나교와 같은 다른 종교의 학문까지도 두루 수학함.
642년에는 나란다사를 대표하여 나선 힌두교 논사와 논쟁에서 승리하고 '파악견론' 즉 나쁜 소견을 깨뜨리는 논서를 저술
그해 12월에 계일왕의 무차대회에 참석하여 18개국의 소왕과 6천여명의 승려, 다른 종교성직자들이 참석한 톤쟁에서 5일동안 경쟁자를 물리침. 이후 18일간 아무도 현장에게 도전하지 못함. 현장이 전 인도의 최고 논사로 등극한 것임.
인도에 온 모든 목적을 달성한 현장은 643년 754종의 경전을 520상자에 담고 150과의 불사리와 인도의 중요 불상을 모사한 7구의 작게 제작된 불상을 모시고 인도를 떠나 당나라로 돌아옴. 이후 현장은 국가적인 존승을 받으며 646년 당태종의 요청으로 서역에 대한 보고서인 '대당서역기'를 완성함. 현장은 629년부터 645년까지 16년동안 1만 6천킬로를 이동, 110개국을 방문하고 28개국에 대한 내용을 전해들었음. 대당서역기는 이 기간동안 현장이 보고들은 주변국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불교에 대한 내용을 담은 가장 위대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음.
귀국후의 현장과 당 왕실의 존숭 - 신역
당에 돌아온 현장은 황제의 자문역할을 하면서 당태종과 고종의 전폭적인 후원하에 19년간 74종 1,335권의 경전을 번역함. 기존의 것과는 달리 새로운 번역체계를 확립하게 되는데 이 체계를 구마라집으로 대표되는 구역에 대비해서 '신역'이라고 함. 649년 당태종은 사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함.
'내가 스님을 일찍 만나지 못해 불교를 멀리까지 전파하지 못한 것이 못내 슬프다'
당태종 이후 즉위한 고종은 자애로운 사찰 '자은사'를 건립함. 현장인 이곳에 53미터의 대안탑을 건립하고 탑안에 인도에서 모셔온 경전을 봉안함. 이후 현장은 자은사에 주석하는데 이로 인해 현장을 '대자은사 삼장법사'라고 부름. 현장의 전기를 '자은사'라고 지은 것도 바로 이 이유임.
656년 당 고종의 아이가 태어나자 지병이 있던 고종이 가족력을 두려워하자 아이를 출가시킴. 태어난지 1개월만에 출가의식을 치름. 이 아이가 불광왕 '부처님 광명의 왕'이라고 불린 제 4대 중종임. 중종이 삭발 출가한 뒤 무탈하게 성장해서 황제가 된 것으로 인하여 동아시아에서는 어린아이를 삭발시키는 풍습이 만들어짐.
이 외에도 현장은 인도를 오가는 과정에서 어려움이 있을때마다 반야심경을 암송했고 이로 인해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함. 그래서 현장은 당나라로 돌아온 뒤에 반야심경을 널리 유포하게 되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동아시아에서 티베트에 이르는 모든 불교국가에서 반야심경이 독송되는 이유임.
현장 유식학의 발달과 한계
현장이 인도로 간 이유 중 하나가 '유가사지론'이었던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현장은 미륵에서 시작된 유식학파의 사람. 그러나 인도불교를 중심으로 배운 현장의 유식학에는 중국 정서와는 다른 필연적 문제점을 내포함. '오성각별설 - 인간의 수행과 관련하여 성취할 수 있는 단계의 차등이 태생적으로 존재한다는 유식학의 교설-이 그것임. 신분차별을 인정함. .. 하지만 보편성과 평등을 앞세운 화엄종에 의해서 중국불교의 주류에서 밀려남.
47) 민중에게 다가서는 중국불교
말법 시대와 신행의 삼계교
중국불교는 경전의 번역으로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문자를 아는 지식인을 중심으로 전개될 수 밖에 없었음. 불교는 기본적으로 개인수행과 연결되는 출가문화를 바탕으로 구성되다 보니 민중적인 부분이 상대적으로 취약할 수 밖에 없음. 수나라 통일 이전 강북에서 등장안 '신행(540-594)'의 삼계교는 특이한 민중불교임. 삼계교은 정법, 상법, 말법 세단계의 불교적인 시대구분에 입각해서 만들어진 불교의 대 사회복지 신앙운동임.
정법시대란 붓다의 가르침이 잘 전해지는 때(붓다 이후 500년 기간)
상법시대란 정법시대와는 같지 않아도 그런대로 무리없이 전개되는 정법시대 이후 1천년기간
말법시대는 전쟁과 환란이 그치지 않는 그 이후의 기간
삼계교의 민중적인 타당성과 몰락
신행은 말법시대의 사람들은 자기 수행이나 불교의 다른 종파에서 말하는 방법으로는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고 주장함. 그러면서 모든 사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미래불이라는 점을 자각하고 모든 존재를 존중하고 헌신해야 한다고 함. 또한 보시를 통해 죄업을 소멸할 것을 강조하여 가진 재산으로 무진장원을 개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며 구제함. 삼계교는 자기희생을 통한 신앙 공동체와 같은 집단으로 전란기에 폭발적인 인기를 누림. 수, 당 통일제국이 들어서면서 이러한 구호활동은 국가체제에 대한 반감을 부추긴다는 점때문에 탄압의 대상으로 전락함. 당의 중기에 삼계교는 완전히 사라짐.
전란의 시기와 정토사상
중국불교의 민중성과 관련해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바로 '정토사상'에 입각한 정토종임. 정토사상은 문제가 많은 현실을 넘어 이상세계를 찾아가고자 하는 '이상세계론'임. 정토란 깨끗한 땅을 뜻하는 말로 붓다가 주재하는 불국토를 말함.
중국정토종의 흐름과 전개양상
정토종의 시원을 이루는 인물은 여산교단에서 결사를 이끈 '혜원'임. 혜원이후 정토종과 관련해 두드러진 인물은 '담란(476-??)임. 담란의 저술 '무량수경우파제사원생게주 2권, 약론안락정토의 1권'이 있는데 아미타불에 집중해서 염송하고 명상하는 방법이 핵심임. 이후 정토종의 기틀을 세운 것은 당나라때 '도작(562-645)과 선도(613-681)'라는 사제지간에 의해서임. 그중 도작은 '나무아미타불'을 입으로부르면서 생각하는 염불방식을 창안함. 이렇게 염불만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최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 도작의 저술로는 '안락집 2권'이 있음.
도작의 제자인 선도는 담란과 도작을 계승해서 정토종을 집대성함. 저술로는 '관무량수경소 4권'. 관무량수경소에서는 아미타불을 염불하는 것외에도 경전을 독송하거나 아미타불 등을 머릿속에 떠올리는 관상등의 방법을 제시해 정토종의 외연을 넓히고 종합적인 수행을 지양함. 선도는 스스로 아미타경을 10만부 필사하고 극락정토의 그림 300장을 그려 유포함.
48) 중국 유일의 여성 황제와 용문석굴
중국 유일한 여성황제 '측천무후'
측천무후는 637년 당태종의 후궁으로 입궁함. 649년 당태종이 사망하자 후궁들은 모두 감업사로 출가하여 선황의 명복을 빔. 이후 당고종에 눈에 띈 측천무후는 651년 고종의 후궁으로 다시 황궁으로 들어가 655년 고종의 황후가 됨. 측천무후는 이후 주나라를 개국해 스스로 황제가 됨.
용문석굴에 새겨진 측천무후와 황제의 꿈
측천무후는 690년 낙양을 신도로 칭하고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함. 낙양에 있는 용문석굴은 북위의 효문제가 대동에서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개착된 석굴임. 용문석굴에는 현재 2,300여개의 석굴과 14만 2천여구의 불상이 조상되어 있음.
인도불교의 퇴조와 중국화된 불교의 약진
당태종과 측천무후로 연결되는 정치적인 안정은 당의 경제와 문화를 크게 발전시킴. 이로 인해 중국불교는 인도불교보다 더 약진함. 흔히 대표적인 중국불교 종파로 4가대승 '천태종, 화엄종, 선종, 정토종'이 있음. 천태종은 수나라때 만들어져 당에 들어와 형계담연에 의해 더욱 발전함. 화엄종은 측천무후 시기에 완성됨. 가장 중국적인 불교로 평가되는 선종 역시 이 시기에 확립됨. 정토종은 당의 안정과 번영으로 중국문화의 자신감을 회복시키면서 중국불교의 판도를 인도에서 중국적인 불교로 바꿈.
49) 화엄사상, 진정한 통합을 말하다
3가지 화엄경
화엄경은 묘법연화경과 더불어 동아시아 대승불교를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경전임. 화엄경은 3가지가 경전이 전해짐. 바로 60권본, 80권본, 40권본.
60권본 화엄경은 강남의 동진에서 불타발타라가 418년에 한역한 것. 이를 동진 번역본(진역본)이라고 함
80권 화엄경은 측천무후시절 호탄 출신의 실차난다(695-699)가 번역한 것으로 진역본과 구분해서 당역본이라고 함.
40권 화엄경은 당나라 덕종 정원년간(795-798)년에 걸쳐 반야가 반역한 것임.
흔히 화엄경은 60권과 80권을 일컬음.
화엄경은 화엄종의 성립배경이 되는 경전임.
모두의 모두를 위한 화엄사상
화엄사상은 다원적이고 원형적인 구조로 승자나 패자도 소외됨없이 모두가 평등하고 조화로운 관점을 제시함. 화엄사상에서 말하는 '사종법계, 육상원유, 십현문' 같은 것은 모두 전체를 포함하는 개별의 가치를 의미함.
참고) 사법계(사종법계) - 화엄교학에서는 법계를 아래와 같은 사법계(事法界) · 이법계(理法界) ·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4종으로 나누었는데,[1][2] 이를 사법계(四法界) 또는 사법계관(四法界觀)이라 한다.
- 사법계(事法界): 현실의 미혹의 세계이다. 우주는 차별이 있는 현상 세계라는 세계관이다.
- 이법계(理法界): 진실에 대한 깨달음의 세계이다. 우주의 모든 사물은 진리가 현현(顯現)된 것이라는 세계관이다.
- 이사무애법계(理事無礙法界): 이상으로서의 깨달음의 세계가 현실의 미혹의 세계와 떨어져서는 존재할 수 없는, 즉 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 현실즉이상(現實卽理想)의 세계이다. 모든 현상과 진리는 일체불이(一體不二)의 관계에 있다는 세계관이다.
-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 현실의 각 존재가 서로 원융상즉(圓融相卽)한 연기관계(緣起關係)에 있는 세계이다. 현상계는 서로 교류하여, 1개와 여러 개가 한없이 관계하고 있다는 세계관이다.
참고) 육상원융 - 육상설(六相說)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연기설을 강설하는 데 사용되는 교의로, 모든 존재는 총상(總相) · 별상(別相) · 동상(同相) · 이상(異相) · 성상(成相) · 괴상(壞相)의 여섯 가지 모습을 가지고 있음을 뜻한다.[1] 육상원융(六相圓融)은 모든 존재가 여섯 가지 모습, 즉 육상(六相)을 갖추고 있는데, 모든 존재 전체와 각 부분이 서로 원만하게 융화되어 있으며 또한 각 부분과 각 부분도 서로 원만하게 융화되어 있다는 교의이다.
참고) 십현문 - 십현문(十玄門) 또는 십현연기무애법문의(十玄緣起無礙法門義)은 사사무애법계(事事無礙法界)의 연기설을 강설하는 데 사용되는 교의로,[1] 사사무애법계의 특징을 10가지 측면에서 설명한다.
십은 만수(滿數), 현은 심현(深玄), 문은 사사무애(事社無礙)의 법문이란 뜻이다. 십현문의 하나의 문에 깨달아 들어서면, 열가지 모두를 깨닫게 되는 관계에 있다. 지엄(智儼)이 세운 것을 구(舊) 10현 또는 고십현이라 하고, 현수법장(賢首法藏)이 『오교장(五敎章)』에서 이것을 계승하고, 『탐현기』 제1권에 표시한 것을 신(新) 10현이라 한다. 현재의 십현문은 신십현을 말한다. 십현문의 한가지 문에만 들어서면, 불교 최고의 깨달음 경지인 사사무애 경지를 완전히 이룬 것이 된다.
- 동시구족상응문(同時具足相應門)
- 십현문의 총설(總說)이며 나머지 9문은 별설(別設)이라고 한다. 불설수능엄삼매경에 즉시에 우주의 모든 부처님의 신통력을 모두 갖춘다고 나온다.
- 광협자재무애문(廣狹自在無碍門)
- 고십현의 제장순잡구덕문(諸藏純雜具德門)이다. 명상 속에서, 아무리 좁은 구멍도 출입이 자유롭고, 별보다 큰 의자에 앉는 것도 자유롭다. 유마경에 큰 의자에 앉는 신통력이 나온다.
- 일다상용부동문(一多相容不同門)
- 제법상즉자재문(諸法相卽自在門)
- 명상 속에서, 부처는 우주의 모든 다른 부처님을 포함해서, 그 어떤 중생의 모습으로도 변신할 수 있다.
- 은밀현료구성문(隱密顯了俱成門)
- 고십현의 비밀은현구성문(秘密隱顯俱成門)이다. 명상 속에서, 부처는 허공의 몸으로 바꿀 수 있으며, 이럴 경우 다른 부처님도 모든 우주의 그 어떤 존재도 허공의 몸이 된 그 부처님을 찾을 수 없다. 그럼에도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그 누구도 찾을 수가 없기에, 그 누구도 위해를 가할 수도 없어서, 매우 편안하게 그 자리에 존재한다.
- 미세상용안립문(微細相容安立門)
- 인다라망경계문(因陀羅網境界門)
- 탁사현법생해문(托事顯法生解門)
- 십세격법이성문(十世隔法異成門)
- 명상 속에서, 한점 티끌 속에 과거, 현재, 미래 3세(三世)의 모든 부처님 세계(佛刹)를 넣을 수 있다. 현재의 한 사건에 과거 현재 미래의 전부가 비추어 나타난다는 관법(觀法)이다. 열반경에 무량겁의 시간을 일초로 줄일 수 있고, 일초의 시간을 무량겁으로 늘일 수 있다고 나온다. 수천억년의 명상 수행을 일초만에 끝낼 수 있다.
- 주반원명구덕문(主伴圓明具德門)
- 고십현의 유심회전선성문(唯心廻轉善成門)이다.
화엄의 세계는
'바다는 빗방울 하나도 소홀히 여기지 않아서 바다가 되었다'와 같은 모든 존재의 존엄성에 대한 환기임... 화어종은 등장 이후 계속해서 지배세력과 좋은 관계를 형성하며 동아시아 불교 교종의 최고 위치를 유지하게 됨.
화엄종의 확립과 전개
화엄종의 초조는 장안과 종남산 일대에서 활약함녀서 문수보살이 화신이라고 평가받는 두순(557-640)임. 두순의 저술 '화엄법계관문 1권, 화엄오교지관 1권, 화엄일승십현문 1권 등이 있음.
화엄종의 2조인 지엄(602-668)은 두순의 제자로 신라의 의상과 화엄종의 실질적인 완성자인 법장의 스승임. 지엄은 '화엄경수현기(화엄경탄현기) 10권을 통해서 60권 화엄경의 체계와 내용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화엄종이 성립되는 토대를 마련함.
참고)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K.1513, T.1733)는 당나라 시대 때, 화엄종을 크게 일으킨 법장(法藏: 643~712)이 687년에서 695년 사이에 저술한 《화엄경》에 대한 주석서로, 불타발타라가 번역한 《60권 화엄경》에 대한 주석서이다.[1][2] 《60권 화엄경》에 대한 주석서로는 법장의 스승 지엄이 저술한 《수현기(搜玄記)》가 있지만, 그의 《탐현기》만큼 방대하고 정교한 주석서는 다시 없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런 점에서 《탐현기》는 법장에 의해 완성된 중국 화엄교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문헌으로 여겨지고 있다.[3]
약칭하여 《탐현》《탐현기》《화엄경소》 또는 《화엄탐현기》라고도 한다.[1] 총 20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게 다음의 10문(十門) 즉 10가지 범주로 나누어 《화엄경》을 상세히 풀이하고 있다.[4][5][6][2][3] 10문을 통한 해설에서 5교10종(五敎十宗)의 교판, 10현문(十玄門), 10신(十信) · 10해(十解) · 10행(十行) · 10회향(十廻向) · 10지(十地) · 불지(佛地)의 51위(五十一位)로 이루어진 보살 수행계위와 각 계위들의 원융상섭(圓融相攝)[7][8] 등의 화엄교학을 체계적으로 밝히고 있다.[3]
- 제1문 교기소유(教起所由): 《화엄경》의 가르침이 있게 된 이유를 밝힘[9][10]
- 제2문 장부소섭(藏部所攝): 불교 교의를 분류함[11][12]
- 제3문 입교차별(立教差別): 교를 세우는 차별, 즉 5교10종의 교판을 밝힘[13][14]
- 제4문 교소피기(教所被機): 《화엄경》의 가르침을 받을 근기를 밝힘[15][16]
- 제5문 능전교체(能詮教體): 가르침의 본질을 표현하는 10단계의 방법을 밝힘[17][18]
- 제6문 소전종취(所詮宗趣): 《화엄경》의 근본사상에 대한 여러 견해를 소개하고 인과연기(因果緣起)의 이실법계(理實法界)가 근본사상인 것으로 밝힘[19][20]
- 제7문 석경제목(釋經題目): 《화엄경》의 원제목인 '대방광불화엄경(大方廣佛華嚴經)'의 뜻을 분석 · 해설함[21][22]
- 제8문 부류전역(部類傳譯): 《화엄경》의 종류와 유형의 판본들과 그 번역된 경위를 기술함[23][24]
- 제9문 문의분제(文義分齊): 화엄종의 궁극적 세계관이자 주요 교의인 십현문(十玄門)을 논함[25][26]
- 제10문 수문해석(隨文解釋): 경문에 따라 해설함[27][28]
10문 가운데 제9문까지는 모두 제1권을 이루고 있으며, 《화엄경》의 대요를 밝히는 서론적인 주석에 해당한다.[2][6] 제10문 수문해석은 《화엄경》의 내용을 경문을 따라서 해석한 것으로 제2권 이하 전체를 차지하고 있다. 제10문 수문해석에서는 특히 《화엄경》의 〈십지품〉과 〈입법계품〉에 대해 자세히 주석하고 있다.[1] 〈입법계품〉은 원래 본문이 방대하기 때문이지만 〈십지품〉은 제9권부터 제14권에 이르기까지 총 5권에 이르는 분량으로 상세하게 주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만큼 10지(十地)를 근간으로 하는 보살 수행계위가 화엄교학에서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법장(643-712)은 화엄종의 제 3조이면서 화엄종의 실질적인 완성자임. 젊어서는 현장의 번역사업에 참여했고 실차난다가 80권 화엄경을 번역할때도 함께함. 699년 80권 화엄경의 번역이 완성되자 측천무후의 요청으로 불수기사에서 화엄경을 강설함. 법장은 저술은 20여종 100여권에 달하는데 그중 '화엄경탐현기 20권, 화엄오교장 4권, 대승기신론의기 4권'이 유명함.
화엄종의 제 4조인 징관(738-743)은 혜원을 비판하면서 법장의 관점을 계승해 제 4조라는 평가를 받음. 796년 화엄경 40권 번역에 참여하고 796년 40권 화엄경의 주석서인 '화엄경행원품소'를 저술함. 799년 당나라 9대 덕종에게 강설하니 덕종은 화엄의 이치를 터득하여 마음이 청량해졌다고 하여 '청량법사'라고 함. 저술로는 총 30여존 400여권이 있는데 대표적인 것은 '대방광불화엄경수소연의초 90권 대방광불화엄경소 60권' 등이 있음. 징관의 큰 제자만 100여명이 되는데 이중 종밀, 승예, 법인, 직광이 뛰어나서 '징관사철'이라 부름.
마지막 제 5조인 종밀(780-841)은 본래 유교를 공부하다가 불교로 전향한 인물로 징관의 가르침에 감화됨. 종밀은 선과 화엄이 다르지 않다고 선교일치를 주장하였음. 저술로는 '선원제전집 100권과 화엄경륜관집 15권, 원각경대소석의초 13권, 원인론 1권' 등 30여종 200여권이 전해짐
50) 달마의 중국토착과 선에 대한 갈망
달마의 불투명성과 설화의 옷을 입은 달마
선종은 중국에서 재구성된 천태종과 화엄종보다 더 중국적인 성향을 가진 불교임. 선종에서는 그 시원을 보리달마(??~535)라는 인도승려에 두고 있음. 선종은 천태종이나 화엄종처럼 경전에 의지하지 않고 심법 즉 마음의 전수를 주장함.
달마에게 '능가경'을 전수받은 혜가
참고) 《능가경(楞伽經)》(산스크리트어: लंकावतारसूत्र 랑카바타라 수트라)은 후기 대승불교의 경전이다. 400년 쯤에 성립되었다고 한다.[1] 한역으로는 송역(宋譯) 4권본 · 위역(魏譯) 10권본 · 당역(唐譯) 7권본의 3종과, 티베트역으로는 법성(法成)의 손으로 이루어진 2종이 현존하는데 그 중에서도 송역 4권본이 가장 원초적인 형태를 전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1] 《능가경》은 대승불교 중에서도 후기에 속하는 것으로서 여래장사상(如來藏思想:모든 인간은 여래와 같은 본성을 구비하고 있다는 입장)에 입각하여 그 이전의 여러 학파의 설을 풍부하게 채택하고, 이들 학설이 종교경험과 어떻게 맺어져 있는가를 설명하고 있는 점에서 귀중한 불교 경전으로 여겨지며 특히 초기의 선종에서 중시되었다
40세에 출가한 혜가는 후에 달마의 제자가 되어 '이입사행론과 능가경 4권'을 전수받음. 능가경은 모든 존재에게 여래의 가능성이 있다는 여래장을 설하는 경전.
선종의 계보와 흥인의 동산법문
선종의 계보 '초조 달마 -> 2조 혜가 -> 3조 승찬 -> 4조 도신 - > 5조 흥인
금강경으로 인도되는 혜능과 흥인의 제자들
육조단경을 편집한 것은 혜능의 제자 신회와 그 문도들임. 선종의 5조 흥인의 제자 '신수, 현색, 혜능, 법여, 지선, 혜안'은 각기 다른지역에서 선종의 가르침을 전파함. 이는 동산법문이 당나라의 전역으로 확대되었음을 의미함.
51) 경제적 안정과 남방문화의 역습
당나라의 번성과 안정은 경제적 풍요를 뜻하며 이는 화엄사상을 통해 개인의 행복이 문제의 전면으로 대두되었음을 뜻함. 이로써 중국불교는 화엄정에서 점차 선종으로 무게중심이 이동함. 이 변화의 초기에 해당하는 인물이 '흥인'이고 강남의 약진과 더불어 강남의 개인적인 문화 역시 대두하게 되는데 이를 대변하는 인물은 '혜능'임
혜능의 사상과 신수의 위치
혜능은 모든 사람에게 존재하는 불성 즉 붓다가 될 수 있다는 본질에 입각해서 견성할 것을 주장함. 자기가 마음만 밝히면 모든 사람이 붓다가 될 수 있다는 혜능의 주장은 중국에서는 혁명적일 수밖에 없었음. 그래서 이를 육조혁명 즉 육조 혜능이 일으킨 혁명이라고 함. 누구나 본 마음인 불성을 자각해서 붓다가 될 수 있다는 혜능의 주장은 경제적인 안정속에서 개인의 완성을 추구하는 당나라 사람들을 매료시킴. 이것이 이후 전개되는 선종의 유행임.
당대의 승려 '신수'
양경법주 삼제국사라는 표현이 있을정도로 신수의 세력은 대단했음.
혜능과 신수의 차이는 '깨달음이 즉각적이냐, 순서적이냐'에 있음. 오를 중심으로 돈오와 점오의 문제임. 신수는 강북의 장안과 낙양을 중심으로 가르침을 설했고 혜능은 강남에 있었음. .. 결국 신수가 몰락하고 혜능이 주류가 됨.
52) 밀교의 발전과 사상의 정체
당나라의 번영이 초래한 밀교의 발달
당의 안정과 번영에 따른 개인화의 요구는 선종의 발전과 더불어 밀교의 발전을 가져옴. .. 인도불교가 밀교화되면서 중국도 그 영향을 받는데 대승불교 안에서 밀교적인 요소를 포함하는 진언이나 다라니가 발견되는 것을 통해 확인할 수 있음. .. 선종이 명상을 통한 자기정화와 붓다화라는 주체적인 측면을 가진다면 밀교는 주술과 종교의식을 통해서 이와같은 욕구를 해결함.
선무외의 '대일경'과 태장계 만다라
밀교의 번성을 주도한 이들은 선무외를 필두로해서 중국으로 들어오는 '개원삼대사'임. 개원삼대사란 명칭은 선무외, 금강지, 불공금강이 모두 당 현종 개원년간인 716년 719년, 720년에 차례로 중국에 입국해서 중국밀교를 정립하기 때문임. 이중 선무외는 인도의 나란다사에서 스승인 달마국다에게 밀교를 배우고 중국으로 가서 교화하라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중국으로 온 인물임. 이후 724년 태장계 밀교의 중심 경전이 되는 '대일경 7권'을 번역함.
대일경은 진언밀교의 방법에 대한 총체적인 내용을 언급하고 이후 진언의 가치를 완성할 수 있는 종교의식적인 부분을 설명하고 있음. 또 대일경의 권1, 2의 입만다라구연진언품에 입각하여 불보살과 천신 및 밀교적인 신장 등을 그림으로 나타낸 태장계 만다라가 만들어지기도 함. 태장계 만다라는 금강계 만다라와 더불어 밀교의 두가지 대표적인 만다라임. 태장계 만다라는 붓다의 안에서 전 우주가 하나되어 있는 것을 상징하는 도상인 동시에 태장계 밀교의 깨달음을 상징하는 그림임.
이 외에도 선무외는 726년 '소실지갈라경 3권'을 번역하는데 이 경전은 '대일경, 금강정경과 더불어 진언 밀교의 삼부경(밀교 삼부경)'이라고 칭해짐.
금강지의 금강정경과 금강계 만다라
선무외의 '대일경-태장계 만다라'와 더불어 중국밀교를 견인하는 것이 금강지의 '금강정경과 금강계 만다라'임. 금강지는 723년 금강계 밀교의 중요경전인 '금강정경 4권'을 번역함. 금강정경은 손으로 진리의 상징을 맺고(무드라), 입으로는 진언을 외우며(만트라), 정신으로는 붓다가 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음. 또한 금강정경에 입각한 만다라를 금강계 만다라라고 하는데 비로자나불의 지혜의 경계를 무엇으로도 무너뜨릴 수 없는 금강에 비유한 그림임.
불공금강의 밀교완성과 혜초
금강지의 제자인 '불공금강'은 금강지가 입적한 741년 남인도로 건너가 밀교경전을 더 구해서 746년 중국으로 돌아옴. 이후 77부 101권의 많은 경전을 번역함. 이로 인하여 불공금강은 '구마라집, 진제, 현장과 더불어 중국의 4대 역경승'으로 꼽힘. 불공금강의 제자들언 2천명에 달할 정도로 많았는데 그중 함광, 혜초, 혜과, 혜낭, 원교, 각초가 특별히 뛰어나 육철이라고 함. 이중 혜초는 왕오천축국전을 저술한 신라승임. 혜과의 제자인 공혜(774-835)는 일본 승려로 일본 진언종의 시조가 됨.
53) 인사의 난, 남종선을 꽃피게 하다
남종선의 수도권진출과 신회의 야망
인사의 난으로 꺽이게 되는 당나라
장안과 낙양의 파괴와 신회의 약진
하택종의 몰락과 새로운 남종선이 전개
신회의 혜는 현창운동 즉 육조현창운동에는 자신이 7조가 되려는 의도가 포함됨. 그러나 이후 선의 주류가 남종선이 되고 남종선이 점차 발달하면서 남종선내에서 '깨달음과 관련된 돈오문제' 이후 수행과 관련된 돈점문제가 다시금 제시됨. 즉 돈오와 점오에서 돈오돈수와 돈오점수로 문제가 세분화됨.
참고) 돈오점수 : 육조혜능의 제자인 하택신회가 돈오점수를 주장했다. 이 주장이 규봉종밀로 이어지며, 나중에 고려 지눌의 돈오점수가 되었다. 신회의 제자 규봉종밀의 저서에서는 "797년 황제의 칙명이 있어 신회를 7조로 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택신회가 남돈북점설, 전의설(傳衣說) 등을 제창하면서 남북분종이 일어났다. 신회는 육조헌창 운동을 하여, 무명이었던 자신의 스승 육조혜능을, 죽고나서 엄청나게 유명하게 만들었다. 오늘날 한국불교는 조계대사인 육조혜능의 이름을 따 조계종이라고 하며, 육조단경을 매우 중시하는데, 하택신회가 돈오의 남종선과 점수의 북종선을 구분하여 북종선이 매우 삿되다고 배격하면서, 당시 황제가 아꼈던 북종선의 신수대사를 폄하하고, 무명으로 살다 죽은 자신의 스승 육조혜능을 사후에 엄청난 대선지식으로 유명하게 만들었다. 육조단경도 하택신회가 썼다고 한다. 그러나, 이렇게 돈오 남종선이 점수 북종선 보다 뛰어나다고 주장하여, 21세기 한국에서도 돈오 남종선을 믿게 한 하택신회는, 돈오돈수를 주장한 것은 아니고, 돈오점수를 주장했다. 즉, 돈오를 세상에 처음 주장하여 널리 퍼뜨린 게 당나라 하택신회이며, 저작권자로도 볼 수 있는데, 돈오돈수가 아니라 돈오점수를 주장했다.
돈오점수는 깨달음의 관점이 환기되더라도 그것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수행이 필요하다는 주장임. 돈오돈수는 완벽하게 안다면 더이상 수행은 필요하지 않다는 주장. 마치 태양이 밝다는 것을 보게 되면 두번 다시 태양이 어둡다는 의심은 있을 수 없는 것과 같음. 돈오점수는 하택신회의 '하택종임. 이에 반해 돈도돈수는 남종선 내의 남악 회양, 청원행사로 이들 문하에서 각각 마조도일과 석두 회천이 나타게 되면서 신회의 입적 후 남종선의 주류는 돈오돈수가 됨.
깨달음의 문제(오) - 점오 : 신수 -> 보적
돈도 : 혜능
수행의 문제(수) - 점수 : 신회 - 돈오점수
돈수 : 회양, 행사 - 돈오점수
54) 가장 중국적이지만 주류는 아닌 선종
남종선의 분파와 황금기
안사의 난 과정에서 일어난 장안과 낙양의 파괴는 당지 중국불교의 주류였던 교종이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
남종선의 슬로건이 의미하는 것
남종선이 주장하는 내용을 흔히 16자로
'교외별전 불립문자 직지인심 견성성불. 敎外別傳, 不立文字, 直指人心, 見性成佛'
여기서 교외별전 불립문자란 붓다의 가르침의 핵심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며 그러한 문자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뜻
이 말은 경전을 중심으로 하는 교종의 공부와는 대별되는 선종의 마음 중심 수행을 잘 나타내줌.
직지인심 견성성불이란 '곧장 마음을 가리켜서 견성함. 즉 불성을 보아서 성불한다는 의미.
즉 본마음과 불성을 바로 보기만 하면 누구나 붓다가 되는 것. 이러한 변화는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돈오'라고 함.
'지금 이순간 붓다가 된다'
깨달음의 집중과 깨달음 속에 존재하는 현실
남종선의 돈도돈수설은 오직 깨달음만 존재할 뿐 어떤 수행도 존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음. 또 내마음을 통해서 붓다가 된다는 것은 현재의 내 존재와 현실을 긍정하는 것이 됨. 마조도일이 '평상심 시도' 즉 일상적인 마음이 곧 깨달음이요 진리의 구현'이라고 한것.. 이러한 남종선의 주장은 진리의 보편화라는 관점에서 타당하지만 '그렇다면 굳이 출가할 필요가 있는가'라는 다음 세대 신유학의 비판을 초래함.
55) 신유교의 맹아와 불교의 대응
불교와 신유교의 사상교체
불교는 위진남북조 시대에 번성하여 북송시대까지 약 900년간 중국 사상계를 장악하며 지배 이데올로기로서의 역할을 담당함. 이후 신유교가 발흥하면서 불교는 사상계의 2선으로 물러나게 됨.
과거제의 발달과 함께 위축되는 불교
유교의 부활은 과거제와 관련이 있음. 과거 시험이 '시경, 서경, 역경, 춘추, 예기'였음.
유교의 본격적인 불교비판
56) 회창법난으로 표면화된 불교의 문제점
당나라 16대 황제인 무종(840-846년)의 회창법난은 중국 전지역에 걸쳐 일어난 폐불사건임. 실제로 회창법난이후 다시 불교를 용인하지만 당나라에는 경전이 없어서 고려에 경전을 요청할 정도였음.
회창폐불은 당 무종이라는 국가권력에 의한 사건이기는 하지만 26만명의 승려들이 환속하고 600년이나 지속되었던 지배 이데롤로기인 불교가 일거에 무너진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려움.
회창폐불이 가능한 이유
첫째, 당시불교가 국가권력에 의지하여 존재하고 있었다는 점.
둘째, 민중과의 유리. 민중의 지지가 강력하다면 제 아무리 국가권력이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것이 종교임. 그런데 중국불교는 폐불사건 이후 민중의 반봉기와 같은 사건이 일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민중과 유리되어 있었음.
독주체제를 완비하는 선종
선수행을 중심으로 한 선종은 타격이 덜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