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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아카시아 길

작성자hotlip|작성시간26.06.06|조회수64 목록 댓글 0

아카시아 길

 

  화창한 5월 어느 오후, 남산 둘레 길을 걸었다. 장충단 공원에서 긴 계단을 오르기에는 조금 숨이 가쁘지만, 둘레 길에 접어들면 시야가 확 트인다. 단풍나무가 길 양쪽으로 차양을 두른 듯 시원하게 뻗어있어 걷기에 쾌적하다.

 

  산길 옆 실개천에는 맑은 물이 졸졸 흐르고, 간간이 조성된 꽃밭에는 온갖 색깔의 들꽃들이 절정을 이루고 있다. 북악산을 비롯하여 병풍처럼 둘러선 산세와 4대문 안이 한눈에 들어온다. 참으로 평온한 성읍과도 같다.

  한참을 가다 보니 숲속에 오래된 아카시아 군락이 만개한 꽃들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듯 힘들어 보인다. 어릴 때 그 향긋한 향기와 은은한 내음에 끌려 한 움큼씩 따 먹던 추억이 생각난다. 그리고 영국 작가인 알란 알렉산더 밀른Alan Alexander Milne의 수필 〈아카시아 길〉이 떠오른다.

 

  그의 수필을 좋아하시던 분이 있었다. 첫 직장 상사였다. 고교 선배이자 신입사원들의 롤모델이었다. 바흐와 브람스를 좋아하는 꽤 젊은 교회 장로였다. 개성이 강한 분이라 일에는 매우 엄격하였지만, 예사롭지 않게 멋을 아는 분이었다. 결재 때 서명이 독특했다. 본인의 한글 이름을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글자체로 쓰셨다.

  매주 금요일 점심시간에는 직원들을 조금 일찍 중국집으로 데리고 가서 짜장면 한 그릇을 급하게 비운 뒤, 회사 앞 교회의 직장인 금요 기도회로 인도하셨다. 그 영향으로 나는 크리스천이 되었는지 모른다. 어느 날 〈아카시아 길〉이란 수필 영문 원본을 구해 줄 수 없느냐고 물으셨다. 대학도서관에 가서 어렵게 찾아 드린 적이 있었다.

  그때에는 왜 그 수필을 원하셨는지 몰랐다. 중역이 되셨을 때 불현듯 주말에 계실 집을 서울 근교에 지었다고 하여, 집사람과 함께 구경 간 일이 있었다. ‘80년대 중반, 세곡동 허허벌판에 2층 양옥집을 생뚱맞게 지은 것을 보고 놀랐다. 집사람이 “동네 조용한 풍경을 다 망쳐버리셨네요!” 하자, 너털웃음을 웃으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마도 수필 속의 〈아카시아 길〉과 같은 꿈을 교외의 집에서 실현하신 것처럼 보였다.

퇴임하신 후 더 나은 ‘이니스프리’ 호수 섬을 찾았다. 스스로 ‘지구의 가장 시골’이라고 부르던 뉴질랜드로 90년대 초 이민을 떠나셨다. 영원한 로맨티시스트이자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수필 〈아카시아 길〉은 교외 전원생활의 아름다움과 여유로움, 그리고 자연과 함께 사는 사람들의 순박하고 정겨운, 참 인간의 모습에 찬사를 보내고 있다. 사람이 생활할 집이란 복잡한 도시 한 복판에서 단순히 들어오고 나가는 구조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직장에서 퇴근 후 한 시간 정도 기차를 타고 한적한 교외로 나와 ‘아카시아 길’과 같은 아름다운 길을 걸어가야 좋은 쉴 곳이다. 가족에게 들려줄 즐거운 이야기를 상상하다, 문득 도착해야 하는 시골집이야말로 참다운 집이고 가정이라는 말이다.

  니체는 “나는 숲을 사랑한다. 도시에선 살기가 좋지 않다. 도시에선 음란한 자들이 너무 많다”라며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순결에 관하여”를 시작했다. 그러함에도 ‘월든’ 호수 숲에서 통나무집을 짓고 2년여 동안 혼자 자급자족해 온 헨리 데이비드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될 용기를 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 땅의 은퇴자들에게는 도시교외의 전원주택에서 텃밭을 가꾸며 여유 있게 노후를 보내는 로망을 한 번쯤은 꿈꾸었을 성싶다.

  〈아카시아 길〉 수필에서 보여주는 정감 있는 풍경을 제대로 공감한 것은 ‘80년대 말경 런던에 주재할 때였다. 퇴근길엔 금융 중심가인 시티City에서 워털루역을 거쳐 남행 기차를 탄다. 25분 후면 평화롭고 한적한 주택지역의 우스터 파크Worcester Park 역에 내려 가로수 길을 10여 분 걸어가면 집에 도착한다. 길거리엔 사람이 없다. ‘아카시아 길’은 아니지만 온 동네가 숲이며 공원이다. 그래서인지 살던 동네 이름이 ‘오소리 숲Badger’s Copse’이다. 아파트 숲에서 살았던 지난날이 오히려 낯설게 느껴질 정도로 3년을 휴가처럼 지냈다.

  이제 인생의 언덕길을 내려올 연수가 되었을 때, 나의 ‘아카시아 길’을 찾았다. 6년 전 번잡한 도시의 소음을 떠나 한적한 산동네로 거처를 옮겼다. 전철역에서 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20여 분 동안 개천 다리 두 곳을 건너, 산모퉁이를 돌아간다. 그 길에서 청계산 수변공원에 흐드러지게 핀 수레국화와 꽃양귀비, 개망초를 비롯한 온갖 풀꽃과 초여름 장미와 산딸나무꽃들을 반기며 대화를 나눈다. 저녁이면 노을을 따라 여의천 야생화 길을 걷는다. 이즈음 ‘아카시아 길’보다 운치가 있는, 청순한 5월 신부의 면사포 같은, 이팝나무꽃 길을 걷는다. 산과 시냇물과 꽃으로 둘러싸인 나의 ‘월든’이고 ‘이니스프리’다.

 

  이곳에서 부러울 것도, 두려울 것도 없이 느리게 자유인의 몸짓으로 살아간다. 언젠가 그분 앞에 어떻게 설 것인가를 생각하며 하루를 정리하며 보낸다. 그날까지 한가히, 못다 읽은 책을 읽고 풀꽃 일기와 시를 쓰며, 남은 시간을 모든 것에 감사하며 맑은 영혼으로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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