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재 우(雨) 유감
비가 내린다. 마치 무덥고 길었던 한여름을 재촉하여 떠나보내듯 가을비엔 차가운 바람도 묻어 있다. 이 땅에 처음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인가. 성서에는 노아의 홍수 이전에 비가 내리지 않았다고 한다. 전승에 의하면 노아가 창조주의 명령을 받아 방주를 지을 때 비를 몰랐던 그 당시 사람들은 노아의 어리석음을 조롱하였다고 한다.
비는 농경 민족에게 생존의 수단이자 생명 그 자체였다. 그리하여 항상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달라고 기도하였다. 고대 근동의 가나안 지역에서는 4월부터 10월에 이르는 시기가 건기였다. 그들은 풍요와 다산을 상징하는 바알 신이 여신(女神)과 관계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나안 지역에 비가 오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들 자신이 바알 신전에 모여 기우제를 드린 후 여 사제들과 신전 꼭대기에 올라가 집단으로 한바탕 성의식을 행하였다고 한다, 그러면 하늘에서 바알 신이 그 장면을 보고 흥분하여 사정하게 되는데, 이것이 비가 되어 가뭄을 해결한다고 믿었다.
고대 중국 신농씨 딸의 슬픈 운우지정(雲雨之情)의 이야기에서도 등장하는 비와 사랑과의 상관관계는 동서고금에 걸쳐 널리 오르내리게 되는 경우이다.
우리 문학작품에도 그러하다. 황순원의 ‘소나기’는 어린 소년 소녀의 풋풋한 사랑의 감정이 애잔하게 녹아있다.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에서 볼 수 있다.
이 같은 이야기는 우리 주변의 산과 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지난여름 문경새재를 오를 때의 일이다. 제 2관문인 조곡관을 지나 얼마쯤 지나가자 ‘바위굴과 새재 우’라는 안내표지가 보였다. 바위굴은 통나무로 막아 놓아 접근할 수 없었으나 안내문 내용이 흥미로웠다.
먼 옛날 새재 길을 지나던 길손이 갑작스레 소낙비를 만나 이 바위굴에 들어오니 마침 과년한 처녀가 이곳에서 비를 피하고 있어 두 남녀가 깊은 인연을 맺고 헤어졌다. 그 후 처녀가 아이를 낳아 십수 년이 흘러 이 아이가 성장하나 주변에서 아비 없는 아이라고 놀림이 심하므로 어머니에게 아버지의 내력을 물은즉 자초지종을 이야기 해주고 아버지의 엉덩이에 주먹 크기 만한 검은 점이 있다고 했다.
그 후 아이는 아버지를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던 중에 어느 깊은 산골에서 세찬 호우를 만나 주막에 들었는데 먼저 들어있던 중년의 선비가 말하기를 ”어허, 그 빗줄기, 마치 새재 우 같구나“라 혼자 말을 했다. 이에 이야기가 짚이는 바가 있어 새재 우가 무슨 뜻이냐고 물었다. 그 선비가 어머니와 같은 이야기를 하여 아이가 자신의 내력을 말했다. 확인한즉 부자간임을 알게 되어 아버지를 모셔 와 행복하게 살았다고 한다.
비 오는 날 한 번의 인연이 십여 년이 지나서 부자의 확인으로 전개되는 새재 우 이야기는 충남 공주시 반포면 공암마을의 고청 서기(徐起)의 출생 이야기와 흡사하다.
공암마을의 어느 아리따운 처녀가 논에 날아드는 새를 보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자, 근처 공암굴(고청굴)에 들어가 비를 피했다. 마침 청벽 나루에서 소금 장수가 지게에 소금을 지고 지나가다가 비를 만나 그 굴로 들어갔다. 그래서 인연이 만들어지고 그 처녀는 사내아이를 가지게 되었다. 바로 그 아이가 고청 서기선생이다.
고청이 점차 자라나자, 어머니는 고청에게 아버지가 소금 장수라는 사실을 알렸다. 청년이 된 고청은 아버지를 찾겠다는 일념으로 집 옆에 참외를 심고 막을 세운 다음 행인을 쉬어가게 했다. 일일이 손님의 내력을 물어보던 중 어느 날 초라한 소금 팔이 영감의 사연이 어머니가 말한 이야기와 일치되어 드디어 아버지를 찾았다. 이후 고청은 아버지를 정성스레 모셨다고 한다.
우리 문학이나 전설에서 나오는 인연 또는 사랑의 이야기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무대는 비 오는 날의 동굴이나 여름밤의 물레방앗간처럼 어두운 곳이다. 그들은 단 한 번의 우연한 만남으로 운우지락(雲雨之樂)을 나누고, 그 결과로 모두 사내아이를 낳는다. 그리고 그 아이들은 장성하여 아버지를 끝내 찾아 정성스럽게 섬긴다는 이야기를 매우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허 생원이나 선비, 소금 장수 모두 그 처녀들이 당했던 힘든 고통과 고난에 대해 연민의 정을 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허 생원은 뜻밖에 찾아온 첫 경험을 평생 추억하며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모두 사내아이가 태어난다는 설정은 부자연스럽다. 아마 사내아이가 태어나야 나중에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찾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이야기는 요즈음의 표현으로는 남성우위의 폭력행위라고 할 수 있다. 물레방앗간에서 울고 있는 성 서방 처녀를 취하는 것을 기막힌 인연으로 둘러 된다. 새재에서 조우(遭遇)한 중년 선비도 주막에서 내리는 비를 보고 "어허, 그 빗줄기, 마치 새재 우 같구나" 라고 하며 그날을 추억할 뿐, 비 피하러 왔던 처녀가 평생 당한 고통과 고난은 전혀 생각하지 않는 듯 보인다. ‘그건 모두 비 때문이야’라고 자신을 합리화하지는 않는지.
문학은 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사상이나 감정을 언어로 표현하는 예술의 한 분야이다. 실제를 반영하거나, 허구와 상상력을 동원하여 인간의 삶을 진솔하게 표현함으로써 감동과 삶에 대한 성찰과 교훈을 주는 미학이라 할 수 있다.
문학작품이 종교나 도덕이 정하는 규범을 따라 이야기를 전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최소한 가해자인 강자는 약자인 피해자가 당하는 고난의 심경을 조금이나마 헤아려보는 인간미가 엿보였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