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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시간의 무게

작성자hotlip|작성시간26.06.18|조회수71 목록 댓글 0

 

시간의 무게

 

 

  중세 프랑스 어느 시골 교회 해시계에는 “매 순간 상처를 입히고 끝내는 죽인다”라는 라틴어 문구가 씌어있다.

  그 무서운 대상은 시간이다. 아마, 시간은 긴 낫을 가졌고, 생명은 그 굽은 낫에 갇혀 어찌할 수 없이 연한을 다하는지 모른다. 여기서 생명은 존재로 바꾸어 놓을 수 있다. 결국 존재는 시간 속에서 이해된다. 양자는 떼어놓을 수 없는 핵심 개념으로 오래전부터 철학자들에게는 난해한 문제로 남아있었다.

 

  시간의 본질에 관해 아우구스티누스는 그의 《고백론》에서 유명한 역설적인 언술을 남겼다. “만일 아무도 내게 묻지 않는다면, 나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묻는 자에게 설명하고자 하면, 나는 알지 못합니다.”

  그는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의 ‘객관적 시간론’과는 달리 ‘주관적 시간론’을 주장했다. 시간은 인간의 의식과 무관하게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연의 객관적인 질서가 아니라, 우주가 아닌 인간의 마음(영혼) 안에 존재한다는 논리다. 그의 시간관은 근대철학의 칸트와 현대철학의 베르그송에 이어졌다,

  이 땅의 모든 존재물은 시간 안에서 생성과 변화를 경험하므로 생로병사와 생자필멸의 어찌할 수 없는 힘에 갇혀있다. 그들은 살아가는 시간을 ‘존재물의 시간’, ‘물리적 시간’, ‘세속적인 시간’인 ‘크로노스 시간’이라 일컬었다. 인간도 시간의 힘 앞에는 예외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라는 묘비명을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웠을까? 그의 《영혼의 자서전》을 무거운 마음으로 다시 읽는다. 부인 헬렌 N. 카잔차키스가 쓴 ‘영혼의 자서전이 써지기까지’라는 서문에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그의 신에게 10년만 더 시간을 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하고 싶은 일을 완수하여, 할 말을 모두 다 하고 ‘속이 텅 빌 수 있도록’, 10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는 쓰고 싶은 욕구와 열정이 처절하도록 충만했다. “난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나는 세 개의 웅대한 주제, 세 개의 새로운 소설 때문에 또다시 고통을 받고 있어. 하지만 난 우선 《영혼의 자서전》을 끝마쳐야 해” 그러나 그는 연필을 쓸 수가 없어, 부인에게 받아쓰도록 시도했다. 하지만 이 또한 이루지 못했다. “불가능해! 난 받아쓰게 할 줄을 모르겠어. 난 연필을 손에 쥐어야만 생각이 머리에 떠올라”라고.

드디어 그는 죽음에 관해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였다. 컴컴한 곳에서 새까만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는 가끔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난 베르그송의 말대로 하고 싶어. 길모퉁이에 나가 서서 손을 내밀고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구걸하는 거야. ‘적선하시오. 형제들이여! 한 사람이 나에게 15분씩만 나눠주시오’ 아, 약간의 시간만, 내가 일을 마치기에 충분한 약간의 시간만을, 그런 다음에는 죽음의 신이 찾아와도 좋아”라고 말했다.

  그가 얼마나 간절했으면 프랑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의, 시간 철학을 설명하기 위한 역설적 비유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말을 실현해 보고 싶어했을까. 시간은 존재하나, 시간의 흐름은 나눌 수 없다는 비유였다.

  그는 베르그송을 좋아했다. 붓다와 호메로스, 니체와 희랍인 조르바와 함께 자신의 삶을 이끌어준 다섯 명의 위대한 스승 중 한 사람으로 베르그송을 꼽으면서 찬사를 바쳤다. “베르그송은 젊은 시절에 해답을 못 얻어 나를 괴롭히던 철학의 온갖 문제들로부터 나를 해방시켜 주었다”라고.

 

  베르그송은 생명철학을 통해 시간과 삶의 의미를 성찰했다. 그는 시간을 시계로 측정하는 객관적 단위가 아니라, 마음이 흐르는 주관적 경험이자 창조적인 과정으로 보았다. 이러한 시간관이 주는 의미는, 시간에 쫓기며 효율성만 추구하는 현대인들에게 ‘삶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이라는 통찰을 전했다. 늙어가는 것은 상실이 아니라 성장이자 새로운 가능성의 탄생이며, 우리는 시간을 관리하기보다, 그 흐름 속에서 기쁨과 창조를 발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삶을 그저 ‘흘려보내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은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는 뜻일까. 1830년 7월27일 프랑스 파리 곳곳에서 시민들이 무리 지어 시계탑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고 한다. 7월 혁명이 시작된 것이었다. 왜 그들은 하필 시계탑을 부수었을까. 마치 낡은 체제에 분노하듯 시간을 멈추려는, 옛 체제의 가치를 청산하려는, 상징의 몸짓이 아니었을까.

  혁명이란 거대한 가치전환의 표상이다. ‘크로노스란 물리적 시간’을 ‘카이로스란 창조의 시간’으로의 운행을 선언하는 장엄한 의식이기 때문이다. 카잔차키스가 10년 동안 생명을 더 가지려 했던 것은 바로, 이 ‘창조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창조의 시간은 흘러간다. 시간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시간이란 어디론가 흘러가야 하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마치 ‘인간의 마음이 사는 삶’과 같다고 한다. 불완전한 존재는 완전해지려는 가능성이 있다. 완전하다는 것은 무엇일까. 영원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영원으로 가는 문이라 할 수 있다.

  시간의 끝에는 영원이, 신이, 구원이 기다리고 있다. 시간은 영원의 모상(摸象)이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신의 마음이 사는 삶‘으로 다가갈 수 있으니, 시간이란 얼마나 위안이 되는 생명의 과정인가. 이러한 신플라톤주의 시간관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시간과 영원의 관계 정립에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산수(傘數)의 나이에 접어들자, 시간의 의미를 생각하게 된다. 《영혼의 자서전》을 다시 읽으려 한다. ’나‘를 돌아보면 섬뜩한 기분이 든다. 과연 나의 지난 시간은 의도된, ’창조의 시간’이었을까. 그저 ‘인간의 마음이 사는 삶’만 살지 않았는지. 시간의 끝에서 그분 앞에 어떻게 설 것인지에 관한 두려움이 앞서기 때문이다.

 

  이제 늦게나마 내게 주어진 시간의 무게를 알아차릴 때가 되었다. 내게 남아있는 창조의 삶은 어떤 것일까. 다름 아닌 진리를 찾는 일이리라. 그분의 세미한 음성을 들으며 진실이 존중되는 이 땅이 되도록 힘쓰는 일이겠다. 카잔차키스가 그렇게 갈망했던 10년의 삶이 내게 허락될 때까지 진선미를 노래하며 그분을 찬미하련다. 시나브로 ’신의 마음이 사는 삶‘인 진정한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다가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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