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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 있는 풍경

소네트를 읽는 양치기 여인

작성자hotlip|작성시간26.06.20|조회수81 목록 댓글 0

소네트를 읽는 양치기 여인

 

  가끔 미술관을 간다. 미술관에서 작품을 만난다. 화가들이 해석한 또 다른 자연과 사물을 볼 수 있어 좋다. 마음 또한 부요해진다. 영국 낭만주의 화가 존 컨스터블이 “그림이란 결국 감정을 표현한 또 다른 말일 뿐이다.”라고 했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철학 논고》 마지막에 “말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침묵해야 한다.”라는 유명한 구절을 남겼다. 언어로 담을 수 없는 삶의 의미나, 신비, 윤리, 예술의 영역은 논리적으로 증명하거나 말로 설명하지 말고 침묵으로 그대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뜻이다. 흔히, “그곳에서 예술이 시작된다.”라는 표현은 그의 철학을 후대에 예술적으로 해석한 문장이라고 한다. 그러고 보면 화가와 철학자의 두 언술은 얼핏 서로 모순이 되는 논리 전개로 보인다.

 

  지난 주말 톨레도 미술관 명작전 ‘렘브란트에서 고야까지’를 보러 갔다. 16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활동한 거장들의 원화(原畫)였다. 50여 전시 작품에는 성화(聖畫)도 있었다.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처연한 그리스도의 〈겟세마네 기도〉, 쇠약하게 보이는 로마인 백부장이 하인의 병을 낫게 해달라는 모습을 그린 〈그리스도와 백부장〉, 고혹적 여인을 우물가에서 만난 모습을 표현한 〈사마리아 여인과 그리스도〉, 그리고 〈가나안 여인과 그리스도〉, 〈성가족과 요한〉 등이 인상깊었다.

 

  그중, 시선을 강하게 끈 작품은 〈소네트를 읽는 양치기 여인〉이었다. 네덜란드의 황금기 화가인 아브라함 블루마르트(Abraham Bluemaert)가 1628년에 그린 바로크 회화의 걸작품이다. 깃털과 꽃이 달린 넓은 챙의 모자를 쓴 가녀리게 우아한 여인이 양치기이다. 창백한 얼굴색과 하얀 피부와는 달리 손은 노동으로 거칠게 보인다. 그녀가 막대를 어깨에 건 채 조금 우수에 찬 표정으로 종이를 들고 시를 읽고 있다. 14행의 시 소네트이다. 한 손에 피리를 든 소년은 그녀를 바라보며 시를 읊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소년은 누군가의 심부름으로 그 시를 들고 여인을 찾아왔는지도 모른다. 멀리 떨어져 있는 연인으로부터 온 사랑의 노래인가. 아니면 목동과 님프 사이 순수한 사랑 이야기. 그도 아니면 <그의 연인에게 (To His Love)>라고 알려진 셰익스피어의 〈소네트 18〉인지도 모른다.

 

  소네트는 ‘작은 노래’라는 뜻을 가진 서양의 대표적 14행 정형시로 사랑과 철학을 주제로 하였다. 주로 엘리트 계층의 전유물이었다. 이 문학이 17세기에 들어서자, 양치기 여인에까지 대중적으로 향유되기 시작한 시대 분위기를 반영한 듯하다. 화가는 이 그림에서 종교적 주제에서 벗어나 보다 일상적 소재로 대중의 관심을 확장 시키려 했을 것이다. 더욱이 목가적인 자연을 배경으로 시를 읽는 모습의 연출은 파격이었다. 그 당시 네덜란드와 유럽에서 선망의 대상이었던 이상향인 ‘아르카디아’(Arcadia) 적 분위기를 담고 있는 듯했다.

 

  처음 그 그림의 표제를 보자 문득 학창 시절이 떠올랐다. 영시(英詩) 강해 시간에 읽었던 셰익스피어의 소네트가 생각났다. 그가 쓴 514편의 소네트 중 가장 잘 알려진 18편 <그의 연인에게(To His Love)>란 시였다. “내 그대를 여름날에 비(比)할까?”로 시작한다. 왜 연인을 뜨거운 여름날에 비하는지 그때는 몰랐다. ‘80년대 말 런던에서 주재원으로 근무했을 때 그 비유가 적확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북유럽도 마찬가지이지만 영국의 초봄은 음산하다. 안개와 비는 일상이었고 낮의 길이도 짧아 일찍 땅거미가 내려앉는다. 수선화마저 피지 않는다면 너무 침울하다. 그런데 여름이 찾아오면 다른 세상이 된다. 일 년 중 가장 화창하고 아름다운 계절이다. 햇볕 좋은 날이면 공원에서 시민들이 상의를 벗은 채 수영복 차림으로 일광욕을 즐기는 것을 볼 수 있다.

  셰익스피어는 이 시에서 여름날의 아름다움과 연인을 비교하면서, “그대의 영원한 여름은 퇴색하지 않고/그대가 지닌 아름다움은 잃어지지 않으리라” 노래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시들지 않은 사랑을 찬양한 시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은 행복에 이르는 길일까. “행복은 마치 숟가락에 기름 한 방울 떨어뜨린 채 흘리지 않고 들고 다니며 미술관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같다”라는 말이 있다. 브라질 작가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연금술사》에 나오는 이야기를 현대 감각으로 각색한 표현이다. 소설의 비유는 성장통을 겪고 있는 젊은이에게 던지는 잠언처럼 들린다.

  어떤 상인이 행복의 비밀을 알아보라며, 자기 아들을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현자에게 보냈다. 그 젊은이는 사십 일 동안 사막을 걸어가 산 정상에 있는 현자의 성을 찾았다.

  현자는 그에게 성안에 있는 자신의 아름다운 집을 모두 구경하라고 했다. 단 기름이 담긴 숟가락을 흘리지 말고 다녀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온 집안을 둘러보았는데 숟가락에 신경을 쓰다 보니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러자 현자는 다시 둘러보라고 했다. 이번에는 편안한 마음으로 아름다운 것들을 보았지만, 그 사이에 숟가락의 기름이 모두 흘러버리고 말았다는 일종의 아포리즘이다.

 

  이번 전시회에서 나는 과연 무엇을 보았을까. 아름다운 작품만 보고 즐겼을까. 내 숟가락에 놓인 기름은 그대로인가, 아니면 흘려버렸을까. 코엘료는 《연금술사》에서 무엇을 말하려 했을까. 고대와 중세의 연금술사들은 물질적인 금만을 만드는 일에만 힘쓰지 않았음을 이야기하려 했을까.

  스위스 심리학자인 C. 융은 “연금술의 작업 과정은 물질의 변화가 아니라 정신의 변화를 나타낸다.”라고 했다. 현실적으로 물질적 금을 만드는 일과 함께 정신적으로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하는 것이 연금술임을 알리려 한 것이 아닐까.

《연금술사》의 화자인 현자는 자기를 찾아온 젊은이에게, “내가 그대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것은 이뿐이요. 행복의 비밀은 이 세상 모든 아름다움을 보는 것, 그리고 동시에 숟가락 속에 담긴 기름 두 방울도 잊지 않는 데 있도다”라 했다.

 

  세상의 아름다움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정신적으로 진정한 성숙을 이루어나가는 것이 행복의 비밀임을 궁구해보았다. 그 일은 《연금술사》에서 저자가 의미하는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리라.

  양치기 여인이 우수에 깃든 모습으로 소네트를 읽듯, 실개천과 풀꽃으로 우거진 저녁노을 풍경을 따라 시를 지으며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싶다. 그 속에 숨겨진 삶의 보화를 찾는다면 얼마나 다행하고 감사한 일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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