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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는 세계 역사상 실크로드의 기착지이자 종착지로 거론되기도 한다. 국보만 31개이고 보물이 82개, 사적 및 명승이 78개 등 국가지정문화재만 212개다. 지금은 역사문화의 정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 방사성폐기물처리장, 양성자가속기사업 등 첨단 미래지향적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다. 경부고속도로 경주톨게이트를 빠져 나오면 오른쪽 들판 너머로 ‘부처의 세계’인 남산이 자비롭고 온화한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왕과 귀족이 불국사로 발걸음을 옮길 때 백성들은 남산에 올라 하늘과 가까워지려 했다. 남산은 그만큼 백성들에게 마음의 휴식처인 동시에 성지이기도 했다. 삼국유사는 경주를 가리켜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절은 하늘의 별만큼 많고, 탑은 기러기가 줄지어 서 있는 듯하다)’이라고 묘사했다. 그 중심에 남산이 있다.
600여점이 넘는 문화재를 보유한 지붕 없는 박물관, 경주 남산 경주남산은 신라의 흥망성쇠를 함께 한 역사적 명소다. 산 주변으로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정과 초기 왕궁, 왕릉이 다양하며 망국의 한이 서린 포석정지가 있어 실로 신라 천년의 역사를 함께 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왕릉 13기, 산성지 4개소, 사지 147개소, 불상 118체, 탑 96기 등 총 672점의 문화유적이 남아 있어 지붕 없는 노천박물관이라는 칭호를 얻었으며 2000년 12월 세계유산에 등재되어 그 가치를 보호받고 있다. |
남산은 신라인의 숨결이 배인 ‘노천 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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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러기도 즐겨 노닌 안압지와 신라궁궐 ‘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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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부활하는 7~8세기 신라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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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적 감각으로 재현된 경주세계문화엑스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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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적인 역사도시에서 동적인 첨단 미래도시로 발돋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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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에서 꼭 가보아야 할 곳
*시내권
경주국립박물관
1910년 경주시민의 요청에 따라 출발한 경주신라회가 1913년 경주고적보존회로 정식 발족하면서 신라의 문화유적 보존을 위해 경주시 동부동에 있던 옛 객사 건물에 전시관을 개설하여 신라문화재를 일반에게 공개함으로써 박물관의 기능이 시작되었다. 1921년에는 금관총 조사를 계기로 경주시민들은 '금관고'라는 건물을 마련하여 여기에 출토품을 전시 보관하였으며, 해방 후 서울의 총독부박물관이 국립박물관으로 정식 개관되자 경주도 국립박물관 경주분관으로 편제가 정비되었다. 이 때까지 동부동에 자리잡고 있었던 옛 박물관은 1,200여 평의 터에 몇 채의 건물로 이루어진 아담한 박물관이었다. 그 뒤 우리의 역사와 전통문화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높아지면서 경주지역의 유적조사가 활발해지고 많은 유물이 출토됨에 따라 보존과 전시에 보다 넓은 공간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75년에 현재의 자리인 인왕동에 만여평의 터를 마련하여 새 건물을 지어 그 면모를 새롭게 하였으며, 1985년에는 안압지관을 갖추게 됨으로서 명실공히 신라의 고도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기관으로 기능을 다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함께 개관 이래 경주지역 문화유산의 발굴·수집·연구에 전력을 다하고 있으며 전시내용의 개선을 위해서도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
분황사
되었으며 신라 경도내 7가람 중의 하나이다. 35대 경덕왕 14년(775)에 약사동상을 조성하였는데 장인은 본피부의 강고내말 이었다. 분황사는 임진왜란시에 소실되어서 후에 작게 만들 었다고 한다. 경내에 화쟁국사비귀부, 모전석탑, 석정, 석조 , 초석, 석등 대석 등이 남아 있으며 절의 남쪽 바깥에는 당간 지주가 있다. 현재 보광전이라는 작은 법당이 있으며 안에는 아미타여래를 모시고 있다. 1976년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 사내 일부를 발굴 조사하였다. 분황사는 우리 민족이 낳은 가장 위대한 고승 원효와 자장이 살다
간 곳으로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강고내말이 구리 36만
6천 7백근을 들여 만들었다고 하는 약사여래불상이 안치되었던
곳이요, 황룡사의 노송도를 그려 유명한 솔거의 관세음보살상 벽화가
있던 곳이요, 또 희명과 그의 어린이가 천수관세음보살상 앞에서
향가를 뇌던 곳이며, 지금도 남아 있는 돌우물에는 호국용이 살아서
호국사찰의 이름을 얻었다. 또한 신라시대 석탑으로서는 최초로 만들어진 모전석탑이 있으며 이탑에서 사리장치가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1965년, 현재 분황사 뒤쪽 부근 웅덩이에서 많은 양의 석불들이 발견되었는데 좌불 13점, 광배 1점, 기타 6점이며 이들은 지금 국립경주박물관에 진열되어 있다.
원효대사(A.D. 617-686)는 해동종을 창시하였는데, 이것을 또 분황종이라고 할 만큼 이 절은 원효대사와 깊은 인연이 맺어진 곳이다. 원효대사가 입적하자 그의 아들인 설총은 그의 유해를 부수어 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시고 항상 공경하며 예배를 올렸다. 그가 예배할 때 마다 소상이 고개를 돌려 돌아다 보았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설총이 그의 아버지를 얼마나 극진히 사모했느냐 하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지만 이 상은 처음부터 그를 사모하는 사람이면 누구를 향해서나 돌아다 보는 그러한 상으로서 만들어졌던 것이리라. 지금은 원효의 소상이 없지만 그의 흥미진진한 생애와 관련하여 한층 더 따스한 인품을 돋보이게 하는 이야기라 하겠다. 그는 이 절에 살면서 많은 저술을 남겼으나 화엄경소를 짓다가 완성하지 못하고 입적하였다. 대릉원(천마총) 경주시내 평지 고분군 가운데 서남쪽 부분으로 20여기의 대소 고분이 남아 있다. 그중 전 미추왕릉을 중심으로 밀집 분포된 18기의 고분들은 1973년 대 지상에 봉우리가 솟아 있는 고분들은 외형상 모두 봉토분으로 되어
있으며 단독의 원형분과 함께 표형쌍분도 있다. 이 고분들은 대부분 고신라 특유의 적석목곽분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일제시대에 조사된 109호분에는 순차적으로 조성된 3개의 매장주체부가 있었고 그 가운데 먼저 아래에 만들어진 매장주체부는 지금까지 발굴조사된 고신라 적석목곽분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3년에 발굴된 천마총(제155호분)에서는 금관과 금제과대를 비롯하여 무기, 마구, 금속용기, 칠기등 각종의 호화로운 유물이 출토되었는데, 채색 천마도를 그린 백화수피제 말다래(장니)가
나와 최고의 고신라 회화자료를 제공하였다.
1973-5년에 발굴조사된 황남대총(제98호분)은 원형분 2기가
남북으로 연접된 표형쌍분으로 남북길이 120m, 동서직경 80m, 높이 23m인 경주 최대의 고분이다. 조사 결과 남분이 먼저 축조된 남자무덤이고 북분이 뒤에 추가된 여자무덤이었음이 밝혀졌는데, 남북분에서는 모두 먼저 통나무로 가구를 설치하고 냇돌을 쌓은 적석부가 발견되어 고신라 적석목곽분 초기 대형분의 구조를
알게 되었다. 또한 먼저 축조된 남분에는 주곽과 부곽이 동서로 배치되어 있었으나 뒤에 추가된 북분에는 부곽이 생략되어 있어 적석목곽분의 내부구조 변화도 알려주었다. 남분에서는 금관은 출토되지 않았으나 금제과대를 비롯한 각종 호화로운 유물이 출토되었고 특히 여러 벌의 마구 중 한 벌은 안장, 등자, 재갈, 각종 장식구 등 모두가 비단 벌레 날개로 장식되어 호화의 극치를 이루고 있었다. 북분의 피장자는 금관과 금제과대를 비롯하여 지금까지 조사된 신라고분 가운데
가장 많은 금제 장신구로 치장하고 있었으며 부장품중에는 부인대라는 침각명이 있는 은제대구가 있어 피장자가 여자였음을 증명하였다.
한편 1966년도에 조사된 151호분에서는 횡구식석곽이 발견되었고, 고분공원 조성에 따른 공사 중 대형분 사이 사이에서 지상에는 봉분이 나와 있지 않은 소형 고분 수백기가 지하에서 발견되어 조사되었다. 이들 가운데에는 적석목곽분뿐만 아니라 수혈식석곽분, 옹관묘들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고, 또한 적석목곽분 가운데에서도 여러가지 형식의 다곽분들이 있어 고신라 묘제 연구에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분황사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3년(634) 춘(春) 정월에 창건
릉원이라 이름 붙여진 고분공원으로 조성되었다.
황룡사터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경주 월성의 동쪽에 궁궐을 짓다가, 그곳에서 황룡(皇龍)이 나타났다는 말을 듣고 절로 고쳐 짓기 시작하여 17년 만에 완성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금 3만근으로 석가삼존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을 배에 실어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을 만들게 되었는데, 5m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584)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의 권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바램의
9층목탑을 짓게 되는데,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황룡사는 93년간에 걸친 국가사업으로 조성된 큰 절이었으며,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天賜玉帶)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사 9층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황룡사는 고려 고종 25년(1238)에 몽고의 침입으로 모두 불타 없어져 지금은 그 흔적만 남아있다. 늪지를 메워서 그 위에 지은 황룡사는 중문·목탑·금당·강당이 남북으로 길게 배치된 1탑식 배치였다. 그러나 장육존상과 목탑 등이 조성된 후 금당 좌우에 작은 금당이 배치되는 1탑 3금당식으로 바뀌고, 탑의
좌우에 종루와 경루(經樓)가 대칭을 이루어 배치되었다. 또 사방은 복도와 같은 회랑으로 둘러싸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보이고 있다.『삼국유사』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1976년부터 시작한 발굴조사에서 금동불입상·풍탁·금동귀걸이·각종 유리 등 4만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으며, 높이 182㎝에 이르는 대형치미는 건물의 웅장한 규모를 짐작하게 한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를 잘 알 수 있게 한다.
첨성대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첨성대
처럼 논란이 많은 문화재도 없다. 그것은 첨성대의 쓰임에 관한
이견 때문인데, 어떤 이는 천문관측대였다고 하고, 나침반이
발달하지 못했던 시대에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다고도 하며, 또한 천문대의 상징물이었을 것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첨성대의 의의는 그 자체가 매우 과학적인 건축물이며 돌 하나하나에 상징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데에서 찾아볼 수 있을 터이다.
전체적인 외형을 보면 크게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사각형의 2중 기단을 쌓고 지름이 일정하지 않은 원주형으로 돌려 27단을 쌓아올렸으며, 꼭대기에눈 우물정자 모양으로 돌을 엮어놓았다.
각 석단의 높이는 약 30cm 이고 화강암 하나하나가 같은 형태이지만, 각 석단을 이루는 원형의 지름이 점차 줄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다. 13단과 15단의 중간에 남쪽으로 네모난 창을 내었는데 그 아래로 사다리를 걸쳤던 흔적이 남아 있어 이 창구를 통해 출입하면서 관측하였다는 추측을 가능하게 하는 증거가 된다. 이 창구
높이까지 내부는 흙으로 메워져 있다.
첨성대를 쌓은 돌의 수는 모두 361개 반이며 음력으로 따진 일년의 날수와 같다. 원주형으로 쌓은 석단은 27단인데, 맨 위의 井자 모양의 돌까지 따지면 모두 28단으로 기본 별자리 28수를 상징한다. 석단 중간의 네모난 창 아래위 12단의 석단은 12달, 24절기를 의미한다고 한다.
첨성대 꼭대기의 井자 모양의 돌은 신라 자오선의 표준이 되었으며 각면이 정확히 동서남북의 방위를 가리킨다. 석단 중간의 창문은 정확히 남쪽을 향하고 있어 춘분과 추분 때에는 광선이 첨성대 밑바닥까지 완전히 비치고, 하지와 동지에는 아랫부분에서 광선이 완전히 사라져 춘하추동을 나누는 분점의 역할을 하였다. 이처럼 첨성대는 갖가지 상징과 과학적인 구조를 갖추고 있으며 미적으로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둥근 하늘과 네모난 땅을 상징하는 사각형과 원형을 적절히 배합해 안정감 있고 온순한 인상을 주고 있으며, 맨 위 정자석의 길이가 기단부 길이의 꼭 절반으로 된 것도 안정감을 표현하는 데 한몫하고 있다.
첨성대는 높이 9.108m, 밑지름이 4.93m, 윗지름이 2.85m이며, 제 27대 선덕여왕 재위중(632-647)에 축조되었다.
안압지
임해전은 안압지 서쪽에 위치한 신라 왕궁의 별궁터이다. 다른 부속건물들과 함께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으로 사용되면서, 나라의
경사가 있을 때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곳에서 연회를 베풀었다고 한다. 신라 경순왕이 견훤의 침입을 받은 뒤, 931년에 왕건을 초청하여 위급한 상황을 호소하며 잔치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한 후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에 3개의 섬과 못의 북·동쪽으로 12봉우리의 산을 만들었으며, 여기에 아름다운 꽃과 나무를 심고 진귀한 새와 짐승을 길렀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 임해전에 대한 기록만 나오고 안압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는데, 조선시대 「동국여지승람」에서 "안압지의 서에는 임해전이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현재의 자리를 안압지로 추정하고 있다.
일제시대에 철도가 지나가는 등 많은 훼손을 입었던 임해전 터의 못 주변에는 회랑지를 비롯해서 크고 작은 건물터 26곳이 확인되었다. 그 중 1980년에 임해전으로 추정되는 곳을 포함하여, 신라 건물터로 보이는 3곳과 안압지를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서는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 보상화무늬가 새겨진 벽돌에는 '조로 2년( 680)'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어 임해전이 문무왕 때 만들어진 것임을 뒷받침해주고 있다. 대접이나 접시도 많이 나왔는데, 이것은 신라무덤에서 출토되는 것과는 달리 실제 생활에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해전은 별궁에 속해 있던 건물이지만 그 비중이 매우 컸던 것으로 보이며, 안압지는 신라 원지를 대표하는 유적이다.
김유신장군의묘
무덤은 지름이 30m에 달하는 커다란 규모이며, 봉분은 둥근 모양이다. 봉분 아래에는 둘레돌을 배치하고 그 주위에는 돌난간을 둘렀는데, 둘레돌은 조각이 없는 것과 12지신상을 조각한 것을 교대로 배치하였다. 12지신상은 평복을 입고 무기를 들고 있는 모습으로, 몸은 사람의 형체이고 머리는 동물 모양이다. 조각의 깊이는 얕지만 대단히 세련된 솜씨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처럼 무덤 주위의 둘레돌에 12지신상을 조각하는 것은 통일신라 이후에 보이는 무덤양식으로,
성덕왕릉으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으로 받들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한 것으로 보인다. 또 『삼국사기』에는 김유신이 죽자 문무왕이 예를 갖추어 장례를 치르고 그의 공덕을 기리는 비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러나 현재 그 비는 전하지 않고, 조선시대에 경주부윤이 세운 비만 남아있다.
경주계림
이 숲은 첨성대(瞻星臺)와 월성(月城) 사이에 위치해 있으며, 경주 김씨의 시조 알지(閼智)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신라 탈해왕(脫解王) 때 호공(瓠公)이 이 숲에서 닭이 우는 소리를 들었는데, 가까이 가 보니, 나뭇가지에 금궤(金櫃)가 빛을 내며 걸려 있었다.
이 사실을 임금께 아뢰어 왕이 몸소 숲에 가서 금궤를 내렸다.
뚜껑을 열자 궤 속에서 사내아이가 나왔다하여 성(姓)을 김(金), 이름을 알지라 하고, 본래 시림(始林), 구림(鳩林)이라 하던 이 숲을 계림(鷄林)으로 부르게 되었다. 경내의 비는 조선 순조(純祖) 3년(1803)에 세워진 것으로 김알지 탄생에 관한 기록이 새겨져 있다.
소금강산
경주 벌판에 야트막하게 솟은 산이 소금강산(178m)이다.
경주의 남쪽에는 남산이 장엄하게 벌리어 있고, 서쪽에는 선도산과 송화산이 솟아 있으며, 동쪽에는 명활산과 토함산이 있다.
신라의 북쪽을 지킨다 하여 북악 이라고도 불렸다.
사로국의 여섯 마을 중 양산촌의 촌장이며 시조인 알평공과 그 야촌의 촌장이며 설씨의 시조인 호진공이 모두 소금강 품 안에서 탄생했으며, 불교 공인을 위해 죽음을 택한 이차돈의 목이 소금강에 떨어진 이후로는 불교의 성지로 높이 받아들여졌다.
*불국사권
불국사
불국사는 토함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으며 앞은 넓은 조양평야를 건너 남산이 마주 보이는 곳이다. 신라 법흥왕 22년(535년)에 창건되었다고 전하는데 후대에 여러 번 중수를 하였으나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시에 전부 소실되고 다만 석조물과 동불만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 후 효종 10년(1659)에 일부 중건하였고 1924-1936년 사이에도 여러번 중수하였다. 1970-1973년 사이에 유지만 남아 있는 곳에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회랑 등을 복원하였다. 현재 경내에는 자로문, 범영루, 경루, 다보탑, 석가탑, 석등, 봉로대, 대웅전, 무설전, 안양문, 관음전, 비로전, 간주, 석조, 석부도, 석등 등이 남아 있다. 삼국이 통일되어 나라가 안정되고 모든 문화가 골고루 발달하던 시기에 불국사는 만들어졌다. 「삼국유사」에는 경덕왕 10년(751), 김대성이 불국사를 창건하였다는 이야기가 실려있다. 「불국사고금창기」에 의하면 불국사는 법흥왕 15년(528)에 지어졌고, 문무왕 10년(670)에 지은
무설전에서 의상의 제자인 표훈이 머물렀다고 하는 등 불국사 창건에 관해 「삼국유사」와 다른 기록을 보이지만, 이는 믿을 만한 연대가 못된다. 다만 총 2천여 칸에 이르는 60여 동의 크고 작은 건물들로 이루어졌다는 기록으로 보아 불국사의 규모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이후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여러 차례 중수되었으며 임진왜란 때 크게 불타 석축만 남게 되었다. 창건 후 650여 년간 뭇사람들에게 참된 부처님, 참된
아름다움의 세계로 기억되던 불국사는 그 뒤로 여러차례 다시 세워지곤 하였다. 그러나 이미 전쟁으로 국력이 기운 뒤였고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도 퇴락의 길을 걷고 있던 까닭에 신라의 정신을 되살릴 길이 없었을 터였다. 그 뒤 자하문, 범종각, 대웅전, 극락전 등만 간신히 남아 있다가 1969년 발굴조사 뒤, 없어졌던 무설전, 관음전, 비로전, 경루, 회랑 등이 1973년의 대대적인 보수공사로 복원되었다. 불국사는 높은 축대 위에 평지를 조성하고 여기에 전각들을 세운
대표적 가람이다. 현재의 경내는 크게 세 영역으로 나뉘는데, 대웅전과 극락전, 비로전이 각각 중심 건물이 된다. 극락전 뒤쪽에 복원되지 않았으나 법화전지로 알려진 건물터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창건 당시의 불국사와 현재의 불국사 규모에는 차이가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낱낱의 영역은 영역에 이르기 위한 계단, 영역 입구인 문, 영역의 중심 건물, 영역을 둘러싼 회랑 등의 네 가지 기본 요소로 이루어진다. 불교적 해석을 빌면 각 영역이 하나의 이상적인
피안세계인 불국을 형상화한 것으로, 대웅전 영역은 석가여래의 피안세계를, 극락전 영역은 아미타불의 극락세계를, 비로전 영역은 비로자나불의 연화장세계를 나타낸 것이다. 뛰어난 문화적 가치로 1995년 세계문화유산목록에 등록되었다.
석굴암
석굴암은 통일신라 경덕왕 10년(751)에 재상 김대성에 의해 창건된 것으로 전한다. 토함산의 동쪽 봉우리 아래에 동남향하여
동해를 마주하고 있는데 석벽의 석재를 짜맞추어 인공석굴을 만든 것으로 인도나 중국의 석굴사원을 본뜬 것이다.
석굴암 석굴은 국보 제24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며 석굴암은 1995년 12월 불국사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동 등록되었다.
석굴은 전방후원의 형식이고 원형주실과 방형전실, 간도로 구성되어 있다. 주실은 구릉형으로 그 위에 봉토로 덮었으며 전실에는 원래의 지붕이 없어져 1963년 목조건물을 새로 덮었다. 굴 중앙에는 높이 3.48m의 석가여래좌상이 안치되어 있고 전실과 굴 입구 좌우 벽에는 팔부신상, 인왕 및 사천왕 등의 입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본존불 주위에는 천부입상 2구, 보살입상 2구 및 나한입상 10구를 배열하고 본존불 뒤에는 11면 관세음보살입상이 조각되어 있다. 또한 천장 주위 10개의 감실안에는 좌상의 보살과 거사 등이 안치되어 있다. 따라서 석굴에는 모두 40분의 불, 보살, 천, 나한이 모셔져 있다. 이러한 조각들은 심오한 믿음과 우아한 솜씨가 잘 조화를 이룬 한국불교의 대표적인 예술품이다.
김대성은 전생의 부모를 위해 석불사 곧 석굴암을 창건하고 현생의 부모를 위해서는 불국사를 세웠던 것이다. 석굴암은 자연석을 다듬어 돔을 쌓은 위에 흙을 덮어 굴처럼 보이게 한 석굴사원으로, 전실의 네모난 공간과 원형의 주실로 나뉘어 있다. 주실에는 본존불과 더불어 보살과 제자상이 있고 전실에는 인왕상과 사천왕상 등이 부조되어 있다. 석굴사원이긴 하지만 사찰건축이 갖는 격식을 상징적으로 다 갖추어 하나의 불국토를 이루었다.
석굴암이 창건된 이후 고려나 조선시대에는 어떠한 모습으로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나, 큰 변화 없이 창건 당시의 모습을 유지해왔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숙종 때 정시한의 「산중일기」를 보면 석굴암에 유숙하면서 석굴암의 장관을 찬미하고 그 절묘한 솜씨에 감탄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또한 겸재 정선은 '교남명승첩'에 경주의 골굴암과 석굴암을 그려놓았다. 이 화첩은 최근의 복원공사에서 석굴암과 목조 전실을 첨가하는 데 자료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이삼백년 전까지만 해도 석굴암이 잘 보존되어 있었음을 말한다. 일제는 석굴암에 세 차례의 복원공사를 하였다. 그러나 석굴암을 완전 해체하고 잘못 조립하였기 때문에 지금으로서는 불상들의 위치와 석굴암의 정확한 구조를 전혀 알 수가 없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습기가 많은 자연적인 장애를 극복하고 천년을 넘게 버텨온 석굴암은 그 자체가 과학기술의 결정체라 할 만큼 우수한 것으로 자체적으로 환기와 습도를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나, 보수를 하면서 당시 신소재로 각광을 받던 시멘트로 석굴암 둘레를 막아버렸다. 결국 이는 석굴암 내부에 습기가 차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석굴암은 해방 뒤 계속 방치돼 있다가 1961년에 들어서야 우리 손으로 다시 복원하였다. 이때는 이미 일제가 만들어 놓은 시멘트벽 때문에 내부 벽면에 물방울이 생기는 등 보존에 문제가 생겼다. 그러자 실내 습도를 유지하기 위해 일차 시멘트 벽 위에 공간을 띄어놓고 다시 시멘트를 바르고 석굴암 내부에 인위적인 환기장치를 마련하였다. 또한 석굴암에 악영항을 미치는 자연 조건을 차단한다는 명목으로 목조전실을 설치하고 또 목조 전실과 석굴암 사이에 유리벽을 설치하였다. 현재 일반 관람객은 목조 전실로 들어가 유리로 막아놓은 벽 너머로만 석굴암의 내부를 들여다볼 수 밖에 없다. 무척 안타까운 일이다.
영지
불국사로부터 4km 떨어진 곳에 있는 저수지이다. 못가를 따라 산책길이 나 있어 토함산을 바라보며 걷기 좋다. 아사달과 아사녀의 애달픈 사랑 이야기가 떠올라, 더 정감이 가는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불국사의 석가탑을 만들던 백제 석공 아사달의 아내 아사녀가 남편을 만나러 왔다가 만나지 못하고, 이곳에서 석가탑이 완성되기를 기다리다 못에 뛰어들고 말았다. 석가탑이 완성되면 이곳에 그림자가 비출 것으로 믿고 기다렸으나, 끝내 석가탑의 그림자가 연못에 비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가탑은 그림자없는 탑, 이곳은 그림자 못 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탑을 완성한 아사달이 아내의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못으로 달려왔으나 아내의 모습은 볼 수가 없었다. 못 주변을 방황하던 어느날 바위에 아내의 얼굴이 겹쳐져 조각을 하였더니 부처님의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그 불상이 영지의 남쪽에 있다. 훼손이 심하기도 하지만 원래 미완성의 불상이라고도 한다.
괘릉
이 능은 신라 제38대 원성왕(元聖王, 재위 785∼798, 김경신)을 모신 곳이다.
경주 시내에서 울산 방면으로 약 12km 떨어진 거리에 있다. 밑둘레 70m, 지름 21.9m, 높이 7.7m로 능의 둘레에 있는 호석(護石)에는 십이지신상(十二支神像)을 돋을새김되어 있고 그 주위로 돌난간이 에워싸고 있다. 봉분에서 약간 떨어져
좌우에 화표석·문인석(文人石)·무인석(武人石)과 돌사자(石獅子)를 마주보게 세웠으며, 무인석은 서역인(西域人)의 얼굴 모습이어서 눈길을 끈다.
이 무덤은 당나라의 능묘제도를 본받았으나 둘레돌·십이지신상·난간·석물 등 모든 면에서 신라 능묘 중 가장 완비된 형식을 갖추고 있다. 조각 수법은 신라 왕릉 가운데서 가장 우수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괘릉'이라고 부르는 것은 무덤의 구덩이를
팔 때 물이 괴어 널(棺)을 걸어(掛) 묻었다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왕은 독서출신과(讀書出身科)라는 제도를 두어 인재를 뽑았으며 벽골제(碧骨堤)를 고치기도 하였다.
덕봉정사
이 곳은 토함산(吐含山)의 한 줄기가 뻗어내려 넓은 들판과 만나는 곳으로 자연경관이 빼어납니다. 이 건물은 조선 광무(光武) 9년(1905) 덕봉 이진택(李鎭宅, 1738∼1805)을 추모하기 위해 그의 증손인 이우영(李祐營)이 세웠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처음 이곳에는 덕봉이 고향으로 내려와 후학들을 교육하면서 학문에
매진하던 건물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진택은 경주 이씨(慶州李氏)로 자는 양중(養重)이고, 정조(正祖) 때에 문과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承文院 副正字), 예조와 병조 정랑(正郞)을 거쳐 사헌부 장령(司憲府 掌令) 등을 거치고 고향에 돌아와 교육에 힘썼다고 합니다.
앞쪽에 있는 연못은 언제 조성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정자 건물을 짓기 전에 판 것으로 추측됩니다. 연못 가운데에 원도(圓島)라는 섬을 만들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연못을 갖춘 정자들이 바깥 경관을 고려하지 않는데 비하여, 이 곳은 주변의 경관을 고려하여 건물도 'ㄴ자' 모양으로 지었습니다. 멀고 가까운 경치를 잘 살리고 있어 전통 조경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남산권
선덕여왕릉
이 능은 신라 제27대 선덕여왕(재위 632∼647, 김덕만)이 모셔진 곳이다.
경주시 동남쪽에 있는 낭산(狼山)의 남쪽 능선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밑둘레 74m, 높이 6.8m, 지름 24m되는 이 능의 겉모양은 둥글게 흙을 쌓아 올린
형태이며, 아랫부분에는 능을 보호하기 위한 2∼3단의 자연석 석축이 있다.
선덕여왕은 신라 최초의 여왕으로 첨성대(瞻星臺)를 만들고, 분황사(芬皇寺)를 건립하였으며, 황룡사(皇龍寺) 9층 목탑을 축조하는 등 신라 건축의 금자탑을 이룩하였다. 또 김춘추(金春秋), 김유신(金庾信)과 같은 인물들을 거느리고 삼국 통일의 기반을 닦았다.
<삼국유사, 三國遺事>에는 "왕이 아무 날에 죽을 것이니 나를 도리천속에 장사지내도록 하라고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어느 곳인지 알지 못해서 물으니 왕이 낭산 남쪽이라고 말하였다. 그날에 이르니 왕이 과연 세상을 떠났는데, 여러 신하들이 낭산 양지에 장사지냈다. 10여 년이 지난 뒤 문무대왕(文武大王)이 왕의 무덤 아래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처음 건립하였다. 불경에 말하기를 사천왕사 위에 도리천이 있다고 하므로, 그제야 선덕여왕의 신령하고 성스러움을 알 수가 있었다."고 한다.
경주 나정
혁거세의 탄생지로 알려지고 있는 나정은 혁거세의 능으로 전해오는 오릉(五陵)과 인접하여 있다.
사실여부의 문제는 접어두고 이들의 실체를 모두 인정할 경우 탄생과 죽음이 모두 동일한 공간에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릉사거리에서 경주시 내남면으로 진입하는 35번 국도를 따라 남으로 내려가다 300~400m 정도 가다보면 좌측으로 하여 남간마을로 들어가는 입구가 나온다.
이 길은 양산재,신라 제7대 일성니사금의 능, 남간사지, 천은사지, 창림사지등으로 가는 길이기도 하다. 입구에서 동으로 보면 낮은 구릉지대에 송림이 울창한 공이 보인다.
그곳이 사로국의 개창자인 혁거세가 탄생한 곳으로 전하는 나정이라는 우물이 있는 곳이다.
서출지
신라 21대 소지왕(488) 정월 보름날, 명활산성에서 옛 궁성이던 월성으로 대궐을 옮겨 놓고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해 천천정에 행차하였다. 임금과 신하들이 거나하게 취하여 있을 때, 한 마리의 쥐가 상 밑으로 기어들고 한 마리의 까마귀가 나뭇가지에서 시끄럽게 울고 있었다. 임금은 음식이 있는 곳에는 으레히 오는 짐승들이라 고기를 집어 쥐에게 던져 주었다. 고기를 받아먹고 쥐가
사람처럼 말했다. “임금님, 저 까마귀 가는 곳으로 사람을 보내시오.”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임금은 그제서야 쥐가 나타난 일이 보통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날쌘 장수를 시켜 까마귀를 따라 가게 하였다. 까마귀는 동남 산으로 날아갔고, 장수는 까마귀의 뒤를 따라갔다. 까마귀는 장수를 기다리는 듯이 일천바위 위에 잠깐 앉았다가 피리마을 양기못 쪽으로 날아갔다. 장수도 부지런히 뒤를 쫓아 양기못으로 갔다. 양기못 가에서는 큰산돼지 두 마리가 무섭게 사우고 있었다. 송곳같은 어금니로 상대방을 떠받으며 밀리고 밀며 서로 힘을 겨루다가 그만 한 마리가 풍덩하고 물에 빠지니 떠밀고 가던 돼지도 뒤따라 풍덩하고 물에 빠지고 말았다.
돼지 싸움을 정신없이 구경하던 장수가 풍덩소리에 정신이 번쩍들었다. 그동안 까마귀는 어디로 날아갔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장수는 임금님 명령을 어기었으니 큰 벌을 받게 되었다고 못가를 두어번 돌다 주저 앉아 버렸다. 이때 못에서 파문이 일더니 머리도 하얗고, 수염도 하얗고, 하얀옷을 입은 할아버지가 물속에서 나타나서 “그대는 이 글을 급히 임금님께 갖다 바치라”하며 한 장의 봉투를 주고는 다시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장수는 너무도 뜻밖아라 절을 하고 달려와서 글을 임금님께 바쳤다. 임금님께서 글을 받아 열어보니 봉투 속에 또 하나의 봉투가 들어 있는데 그 봉투위에 “열어보면 두 사람이 죽고, 열어보지 않으면 한 사람이 죽으리라.”라고 적혀 있었다. 임금님은 두 사람이 죽는 것 보다는 한 사람이 죽는 것이 나은 일이니, 열어보지 말도록 하자 하고 그 봉투를 덮어 놓았다. 이 때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 한 것은 임금님을 가리키는 말이옵고, 두 사람이라 함은 평민을 가리키는 말이오니
그 봉투를 열어봐야 합니다.”하고 옆에 있던 일관이 아뢰었다. 여러 신하들도 그 말이 옳으니 봉투를 열어보라 아였다. 임금님께서도 하는 수 없이 그 봉투를
열고 글을 끄집어내어 읽었다. 사금갑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거문고 갑을 활로 쏘라는 뜻이다. 임금은 곧 돌아와서 왕비의 침실 모퉁이에 세워놓은 거문고 갑을 향해 화살을 날렸다. 쿵! 화살이 박힌 거문고 갑에서는 피가 흘러 내렸다. 거문고 갑을 열어 봤더니 대궐안에서 불공을 맡아 보던 중이 궁주와 짜고 그 날밤 왕을 해치려고 거문고 갑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궁주와 중은 사형되고 살아난 임금은 하늘에 감사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정월 보름날은 짐이 생명을 구한 날이니 오곡밥을 지어 제사드린 후 쥐와 까마귀에게 밥을 주라 명령했음으로 사람들은 오곡밥을 쥐와 까마귀 복시로 담위에 얹어놓는 풍속이 생겼다.
그 후부터 양기못은 서출지로 불리우게 되었다.
포석정
이곳에 대한 가장 오랜 기록으로 『삼국유사』에 헌강왕과 연관된 이야기 속에서 보인다. 혼강왕이 포석정에서 신하들과 함께 향연을 베풀고 있을 때 남산신이 왕 앞에서 춤을 추었으며 왕은
신이 돌아간 후 신하들 앞에서 그 춤을 흉내내어 보였다고 한다. 그리하여 그 춤을 어무상심무라 하였다고 한다.
창건연대는 미상이고 석구의 폭이 평균 약 31㎝, 깊이가 약 22㎝, 총 길이는 22m 정도이다. 이것은 신라 궁원예술의 특이한 상징이며, 주위의 아름다운 경관을 배경으로 독특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즉 자연환경을 최대한으로 활용하면서 인공적인 기술을 가미한 궁궐인 것이다. 원래 이곳에는 계곡의 물을 끌어 들여 수로를 따라 흐르도록 조성한 것으로 물이 들어오는 입구에 거북모양의 돌이 있었다고 하나 1871~1873년 사이 누군가가 안동으로 옮겨간 후 소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지금은 거북이 토해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물을 받는 둥근 모양의 석조와 여기서 시작해 굽이굽이 돌아 타원형을 그리며 되돌아가는 수로만이 있을 뿐이다. 시라 혜공왕 이후 기울기 시작한 신라의 국운은 시대가 내려 갈수록 걷잡을 수 없는 혼란에 빠지게 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제도하기 보다는 저만의 안락을 탐구했던 왕실의 차락상은 신라의 멸망을 재촉했던 큰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포석정의 애화도 결국 이러한 당시의 상황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는 교훈적 사실이라 하겠다. 경애왕 4년(927) 11월, 왕은 비빈, 종친 등과 함께 포석정에서 잔치를 즐기고 있었다. 그때 견원의 군사가 쳐들어왔고 왕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리고 경순왕을 왕으로 세우고 신라의 재주 많은 사람을 데리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러한 굴욕적인 사건이 있은 후 10년이 채 지나기 전에 신라는 고려에 항복하였고, 천년영화의 막을 내렸다.
*감포 동해안권
문무대왕릉
멀리서 보는 대왕암은 평범한 바위섬이지만, 가까이 다가가 보면 바위 한가운데가 못처럼 패어 있고 둘레에 자연암석이 기둥 모양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세워진 모습이다. 한 변의 길이 약 3.5m 되는 못 안에는 거북이 등 모양의 길이 3m, 폭 2.2m의 돌이 얹혀져 있다. 못 안의 물은 돌을 약간 덮을 정도이며, 거센 파도에 아랑곳없이 항상 맑고 잔잔히 흐르도록 되어 있다. 동서남북 사방으로 트인 십자형의 수로를 통하여 동쪽으로 들어온 물이 서쪽으로 난 수로의 턱을 천천히 넘어 다시 바다로 흘러나가고 있다.
문무왕은 신라 제30대 왕으로 태자로 있으면서 백제정벌에 참전하였고, 재위 중에는 고구려를 정벌하여 삼국통일의 대업을 완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통일 후 한반도를 잠식하려는 당의 야심을 알아차리고는 고구려와 백제 유민을 융합하여 당의 세력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는 살아서 삼국을 통일했을 뿐 아니라 죽어서는 용이 되어 신라를 침범하는 왜구를 막겠다는 일념을 가진 호국의 군주였다.
대왕암이 보이는 언덕 위에는 '이견대'라는 누대가 있는데, 利見이란, '나는 용이 하늘에 있으니 대인을 보는데 이롭다'(飛龍在天 利見大人)라는 『주역』에서 나온 말이다. 신문왕이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설화가 깃든 곳이기도 하다. 만파식적은 바다의 용이 된 문무왕이 하늘의 천신이 된 김유신장군과 합심해서 용을 시켜 보낸 대나무로 만들었다는 피리로 이것을 불면 천하가 화평하고 재난이 방지되었다고 한다
감은사지삼층석탑
신라 31대 신문왕이 아버지 문무왕의 뜻을 받들어 즉위한 이듬해(682)에 완공하고 감은사라고 불렀다. 1959년 발굴조사에 의하면 중문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기단석은 전혀 남아 있지 않고 초석이 놓인 자리만 확인되고, 금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으로 기단은 이중기단이다. 북쪽에는 기단석과 계단석이 남아 있다.
금당의 바닥은 방형대석을 이중으로 놓아 위쪽 대석위에 장대석을 걸쳐놓았고 그 위에 큰 장대석을 직각으로 마치 마루를 깔 듯이 깔고 그 위에 초석을 놓았다. 이 마루 장대석 밑은 공간이 된 특수한 구조로 다른 예가 없는 것으로 보아 동해의 용이 된 문무왕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한 것 같다. 강당지는 정면 8칸 측면 4칸으로 일부만 발굴되어 기단석과 초석들이 거의 완전하게 지하에 보존되어 있다. 회랑은 강당의 정면어간에 연결되어 있었다.
이 사지는 쌍탑식 가람으로 창건연대를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석탑 역시 우리나라 석탑의 대종을 이루는 신라양식의 석탑 중 양식적인 완성을 보이는 가장 오랜 것이다. 1959년과 1997년의 동·서탑 해체 수리때 삼층탑신에 마련된 사리공속에 당대를
대표하는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어 신라의 금속조각이 성당을 능가하고 있다. 현재 중문지, 회랑지, 남반 및 금당지 대부분은 밭이 되었고, 회랑지 북반과 강당지는 민가에 있다. 동서로 두 탑을 세우고, 이 두 석탑 사이의 중심을 지나는 남북 선상에 중문과 금당, 강당을 세운 형태이다. 중문은 석탑의 남쪽에, 금당과 강당은 석탑의 북쪽에 위치한다. 회랑은 남, 동, 서 회랑이 확인되었고, 금당 좌우에는 동, 서 회랑과 연결되는 주회랑이 있다. 이는 불국사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또한 중문의 남쪽으로 정교하게 쌓은 석축이 있으며, 이 석축의 바깥으로는 현재 못이 하나 남아 있다. 이를 용담이라 부르는데, 통일신라 당시 감은사가 대종천변에 세워졌고 또 동해의 용이 드나들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이 못이 대종천과 연결되어 있고 또 금당의 마루 밑 공간과도 연결되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가능하게 한다. 금당터 주변에는 석재들이 흩어져 있다. 금당터 앞의 석재 중에는 태극무늬와 기하학적인 무늬가 새겨진 것이 눈에 띄는데 언뜻 보기에도 예삿돌은 아니고 금당이나 다른 건물에 쓰였던 석재임이 확실하다. 금당 뒤쪽 대숲을 지나 언덕에 오르면 절터와 주변 경치가 어우러진 속에 장엄하게 우뚝 솟은 탑을 볼 수가 있다. 대종천 건너 아래쪽에서부터 두 탑을 올려다보는 것도 또 다른 멋이 있다.
골굴암
석굴사원은 인도나 중국에서 흔히 보이는 형식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드문 형태이다. 가장 큰 이유는 자연환경 때문이다. 석굴을 조성할 정도의 대규모 암벽이 없고 또 단단한 석질의 화강암이 대부분이라 석굴이 생기기가 쉽지 않다. 불국사의 석굴암만 해도 자연석굴이 아니라 인공으로 만든 석굴이다.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함월산 기슭의 골굴암에는 수십 미터 높이의 거대한 석회암에 12개의 석굴이 나 있으며, 암벽 제일 높은 곳에 돋을새김으로 새긴 마애불상이 있다. 조선시대 화가 정선이 그린 '골굴석굴'이라는 그림을 보면 목조 전실이 묘사되어 있고, 숙종 12년(1686)에 정시한이 쓴 「산중일기」에 의하면, 이 석굴들의 앞면을 목조 기와집으로 막고 고운 단청을 하여 화려한 석굴들이 마을을 이룬 듯하였으며, 법당굴이니 석법굴이니 하는 구별이 있었다고 한다. 지금 남아 있는 굴은 법당굴 뿐인데 4굴 앞면은 벽을 바르고 기와를 얹어 집으로 보이지만 안으로 들어서면 천장도 벽도 모두 돌로 된 석굴이다. 북쪽 벽에 감실을 파고 부처를 모셨으나 마멸이 심해 얼굴 표정은 알 길이 없다. 법당굴말고는 여러 굴들이 모두 허물어지고 그 형체만 남아 있다. 굴과 굴로 통하는 길은 바위에 파놓은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정상에 새겨진 마애불로 오르려면 자연동굴을 지나게 되어 있다. 최근에 골굴암 마애불로 오르내리는 길을 안전하게 단장하였다. 절벽 꼭대기에 새겨진 높이 4m, 폭 2.2m 정도의 마애불상은 오랜 풍화로 떨어져나간 부분이 많다. 바위를 이루는 석회암의 약한 성질 때문에 더 쉽게 부서진다고 한다. 지금은 훼손을 막기 위해 비닐하우스 같은 둥근모양의 투명한 보호각을 설치하였다. 골굴암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기림사 사적기에 따르면, 함월산의 반대편에 천생석굴이 있으며 거기에는 굴이 12곳으로 구분되어 각기 이름이 붙어 있다고 했으니, 골굴암은 기림사의 암자였던 것이 확실하다. 원효대사가 죽은 뒤 그 아들 설총이 원효의 뼈를 갈아 실물크기만큼의 조상을 만들었다는 기록이 「삼국유사」에 있다. 또 설총이 한때 아버지가 살고 있던 동굴 부근에 살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골굴암은 원효대사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이견대
동해구 표지석 아래로 내려가면 우현 고유섭 선생의 반일 의지를 기리기 위해 1985년 제자들이 세운 기념비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가 보인다. 일제 시대 명백한 침략을 내선합일이라는 명목으로 정당화하려는 일본의 우격다짐에 쐐기를 박듯, 이미 통일신라시대에 왜구의 침략을 경계한 문무왕의 호국 의지를 돌이켜 생각하며 고유섭이 지은 '대왕암'이라는 시와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대왕암이 바라다 보이는 자리에 나란히 세워져 있어 뜻이 더 깊다. 이견대는 사적 제159호로 지정되어 있다.
*안강북부권
옥산서원
옥산서원을 둘러본 뒤에 자계천을 따라 500m 쯤 더 올라가면 독락당(獨樂堂)(보물(寶物) 제413호)이다. 이곳에는 사랑채인 독락당(獨樂堂)과 ㅁ자형의 안채, 노비들이 거처하던 행랑채와 공수간(供需間:음식을 장만하는 공간), 임금의 하사품 서책을 보관하던 어서각(御書閣)가 사당, 그리고 별당인 계정(溪亭)등이 합쳐 큰 살림집을 이루고 있다.
서원(書院) 내 독락당(獨樂堂)은 이언적이 낙향하여 학문에 몰입하던 곳으로, 주위에 수려한 정자와 계곡이 어울려 운치를 더해 주고 있다. 또 독락당(獨樂堂) 뒷편 정혜사지(淨惠寺地)에는 일반탑과 판이하게 다른 양식의 정혜사지13층석탑(淨惠寺地十三層石塔)이 세워져 눈길을 모으고 있다.
흥덕왕릉
신라 제42대 흥덕왕(재위 826~836)의 이름은 수종(秀宗) 혹은 경휘(景徽)라고 한다. 진골귀족들 사이에서 왕위쟁탈전이 한창이던 시절에 활약하였다. 뒤에 헌덕왕으로 불리우는 김언승이 조카인 애장왕을 죽이고 왕이 된 뒤 상대등이 되었고 3년 뒤에는 부군(副君)이 되었다가 헌덕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10년간 재위해 있으면서 장보고의 건의로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했고, 복식 등 골품제의 규정을 재확인하는 조서를 내리기도 하였다.
삼국사기에 왕의 유언에 따라 먼저 죽은 장화부인의 무덤에 합장하였다고 했는데, 주변에서 '흥덕(興德)'이라는 제액을 비롯한 수많은 파편이 수습되어 흥덕왕의 무덤이라는 것이 입증되었다. 신라 왕릉 중 피장자가 확인된 몇 안되는 무덤 중의 하나이다.
양동마을
경주에서 경주(慶州)~포항(浦項)간 산업도로를 16km 쯤 달려가면 안강 평야 끝자락에 1백50여 크고 작은 고가와 초가집이 펼쳐진 부채처럼 소담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이곳은 조선 중, 후기에 걸치는 다양하고 특색있는 우리나라의 전통가옥 구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고건축 전시장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경주시 강동면 설창산(雪倉山) 기슭에 터를 잡은 양동마을은 14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亂)때 공을 세운 손소(孫昭/1433~1484)와 외손자인 유학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후손들로 형성된 마을이다. 이곳은 민가로는 드물게 보물로 지정된 곳이 3곳이나 되며 중요민속자료 12곳, 향토문화재 11곳 등 문화재급 전통가옥이 즐비하다.
대왕암을 의미 있게 눈여겨 볼 수 있는 곳이 두 군데 있다. 대본초등학교 앞쪽에 있는 이견대와 동해구라는 표지석 아래 '나의 잊히지 못하는 바다'라는 기념비가 서 있는 자리이다. 이견대는 화려한 능묘를 마다하고 동해 바다의 용이 되어 나라를 지키겠다고 한 문무왕이 용으로 변한 모습을 보였다는 곳이며, 그의 아들 신문왕이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값진 보배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유서 깊은 곳이다. 이견대라는 이름은 '주역'의 '비룡재천 이견대인(飛龍在天 利見大人)'이라는 이름에서 따온 것이며, 현재의 건물은 1970년 발굴조사 때 드러난 초석에 근거하여 최근에 지은 것이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포석정은 임금의 놀이터로 쓰이던 이궁이었던 것 같다고 한다. 지금 이궁은 없어지고 전복모양의 석구가 남아 있을 뿐이다. 이 석구가 유상곡수(흐르는 물에 잔을 띄워 잔이 자기 손에 닿으면 詩를 짓는 놀이)의 잔치를 베풀었다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