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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핵의 책임은 결국은 좌빨퇴보들이다. [북핵문제에 문제인 책임도 크다]

작성자애국보수캐네디|작성시간17.04.16|조회수232 목록 댓글 0
이번 TV대선토론에서 문재인은 북한핵 책임을 이명박, 박근혜 보수 정권의 책임으로 돌리며 좌파정권의 책임을 회피했다.
또한 홍준표 후보의 김대중, 노무현 정권 떄 퍼준 돈으로 핵을 만들었다는 말에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는 무엇을 했냐는 어처구니 없는 말이 나왔다.
최근 10년정권에서의 일을 그전 정부를 탓하냐는 소리를 하였다.

이 정도의 말이 나온것만보면 그냥 아무말 대잔치였다 ㅋㅋㅋㅋㅋ


당장 박근혜 정부의 정책만 보더라도
개성공산 철폐, 북한광관산업 제재, 통진단해산, 중국의 북한제재 긴밀한 요청, 사드배치 등 
핵을 갖고 있는 북한에 강력한 제재를 해왔다.

이런 북핵억제정책을 펼치다 북한과 공산좌빨에 탄핵을 당한 이유중에 하나라고 본다.
박근혜 대통령은 아바타다.
박근혜 대통령은 꼭두각시다.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 등
공산좌빨에게 철저하게 통제된 언론과 선동으로 탄핵을 주도했다.

언론은 세월호 때 조차도 '전원구출'이라는 뉴스로 구출시간을 놓쳐버렸고, 
박근혜 대통령이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확인되지 않은 말들로 국민의 감정을 선동했다.
청문회 때 주사아줌마 등 별별 것들이 많이 나왔지만 청와대에서 굿을 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또한 박근혜 대통령도 이를 부인하였다.


탄핵된 주된 이유중의 하나가 강력한 북한 제재로
공산좌빨과 공산좌빨에 의해 철저히 통제되는 언론, 그로인한 국민선동으로 탄핵당한 대통령에게
그 공산좌빨이 북한 핵문제에 무엇을 했냐는 식으로 자신들의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가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북한 핵 실험 관련 그래픽 North Korea Nuclear bomb test


2003.02~2008.02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은 과연 누구인가?
북한의 2006년 첫 1차 핵실험떄의 대통령은 누구란 말인가?
그 당시 그 정권에서 민정수석하던 자는 누구인가?

모두가 알고 있듯 노무현정권과 노무현정권에서 민정수석을 하던 문재인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말처럼 통일은 대박이다.
통일은 좋다. 통일은 무조건 좋다. 평화롭게 자유통일이 된다면 이보다 좋을 수는 없다.
하지만, 북한보다 우리가 통일을 더 아쉬워서 원할 필요는 없다. [이것은 북한과의 외교협상에 대한 의미이다.] 
우리나라는 북한과 통일이 되지 않은 지금도 잘살고 있다.
다만 통일이 간절한 것은 인권유린을 당하고 굶고 배고픈 북한 주민들이다.
통일의 전제는 민주주의로 하는 자유통일이지 북한이 원하는 공산주의 적화통일이 아니다.

문제인은 이런저런 핑계를 데고 회피를 하지만 
결국은 전세계와 UN이 결의하는 북한인권 제재에 반대의미로 기권표를 던졌다.

공산좌빨인 더불어민주당은 겉으로는 북한과의 대화를 외치지만,
결국 북한인민들의 인권과 안녕보다는 결국은 김정은과 북한정권을 대변한다.



아래는 북한 인권 실태에 관한 몇가지 참고용 유투브동영상들





















+) 추가 영상
박근혜 대통령의 북한동포 자유선언





현재 대한민국의 상황은 매우 위태롭다.

결국 이 모든 상황이, 지금의 이 위기는 북한의 핵 때문이며
이 북한 핵의 책임에서 공산좌빨과 김대중, 노무현은 책임을 면할 수가 없다.




미국 의회조사국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노무현 전 대통령 시절인 1998~2008년 한국이 북한에 약 70억달러의 경제협력을 제공했으며 이 가운데 29억달러는 현금으로 지원했다고 공식화했다. 특히 북한은 이 기간 중인 1999년 핵무기용 우라늄 농축기술을 해외에서 구입하기 시작해 2000~2001년에는 기술 조달을 가속화했다고 밝혔다. 


이 같은 사실은 한국경제신문이 30일 입수한 미 의회조사국(CRS)의 '의회 한 · 미관계 현안 보고서'에 의해 확인됐다. 이 보고서는 "북한이 한국의 지원 자금을 핵무기 개발에 전용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공식화 및 공론화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CRS 보고서는 미 의원들의 정책입안 자료로 제공돼 활용되고 있다. 


래리 닉시 한반도 전문가가 지난 12일 작성한 이 보고서는 한국이 북한에 제공한 현금의 출처가 금강산 관광사업과 개성공단 사업이라고 지적했다. 


"北, 경협자금 70억달러로 핵무기 만들었다"…美의회 조사국 보고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15&aid=0002192023


"북 금괴 DMZ통해 한국에 대량 유입 미, 유엔 대북제재 위반 가능성 주시"



김대중-노무현 정부는 북한의 우라늄 개발사실을 알고서도 은폐해왔습니다. 2002.11.17. 미국은 북한이 우라늄농축 프로그램을 시인했다고 발표했습니다. 2010.11.21. 지그프리드 해커 스탠포드대 국제안보협력센터 소장이 2010.11.9-13. 방북 당시 영변에서 수백 개의 원심분리기가 설치된 것을 목격했다는 보도가 나왔습니다. 북한은 해커 박사에게 원심분리기 2,000개가 있다고 밝혔고 이는 해마다 20kg급 원자탄을 2개씩 만들 수 있는 것으로 평가들 했습니다.  

2010.11.23. 조선일보는 김대중의 우라늄 은폐지시를 보도했습니다.  

“이날 정부 고위관계자는 ‘실무선에서는 1998년부터 북한의 농축장비 반입 등을 알았지만, 2002년 이를 부인한 것은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정부는 이미 1990년대 후반부터 북한과 파키스탄의 핵 연계 움직임을 알고 있었지만 2002년 10월 HEU 사태 당시에는 윗선 지시로 축소.은폐되었다는 것이다.”

2010.11.23. 청와대는 김대중-노무현 정부가 HEU 개발을 알고도 은폐했다며 해명하고 사과하라고 요구했습니다. 

정진석(사진) 청와대 정무수석은 23일 본지와 전화통화에서 “김대중·노무현 정부 당시 인사들이 우라늄 핵개발 의혹에 대해 ‘미국 네오콘(신보수주의자)들이 조작한 것’이라고 북한 편을 드는 주장을 했는데 지금이라도 해명하고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도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 정세현·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임동원 전 국정원장 등이 미국의 정보에 대해 부정하는 발언을 해온 게 사실”이라며 “이제 (북한이 HEU 프로그램을 가동해 온) 사실이 밝혀졌기에 정확한 입장을 밝혀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 관계자는 “한국은 1998년부터 (북한의 HEU 프로그램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었지만 전(前) 정권이 부인한 것”이라며 “부인한 이유는 HEU 프로그램 가동 자금이 햇볕정책에서 나온 것 아니냐는 지적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1998.8.30.자 조선일보는 뉴욕타임스 ‘1면 주요기사’를 인용하여 북한이 핵무기 제조공장 건설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비밀내용을 김대중 정부에 제공하면서 경고했지만 김대중 정부가 이를 경시 또는 묵살했다(Play down)고 보도했습니다.  

타임스는 첩보위성의 탐지가 백악관에 경종을 울렸고, 국방부는 94년 핵합의의 파기를 우려하고 있다고 전했다. 신문은 또 미 정부가 수주 전 비밀브리핑을 통해 "북한이 원자로와 재처리공장 건설 의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는 내용을 미 의회와 한국 정부에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타임스는 미 관리를 인용, "한국 관리들은 미국의 경고를 경시(play down)했다"며 "이는 김대중 대통령의 햇볕정책이 손상되는 것을 우려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고 전했다


사실이 이와 같은데도 김대중은 2001년 북한의 핵개발을 적극 커버해주었습니다.  

“북은 핵을 개발한 적도 없고, 개발할 능력도 없다. 그래서 대북지원금이 핵개발에 악용된다는 말은 터무니 없는 유언비어다. (북이 핵을 개발하면) 내가 책임지겠다.”



2010.11.8일 이명박 대통령은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대북지원금이 ‘핵무장에 이용된 의혹이 있다”고 밝혔습니다. 통일부는 현금으로는 29억 달러, 현물을 합치면 69억 달러가 북으로 갔다 합니다. 이 중에는 정상회담 대가 4억 5천만 달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은 2009.7.3.에도 영국 파이낸셜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지난 10년간 북한을 많이 지원했는데도 불구, 북한은 결과적으로 핵무기를 만들었고, 이 때문에 우리 국민들의 대북 신뢰도는 많이 후퇴했다”고 발표했고, 7.7. 유로뉴스와의 인터뷰에서도 “지난 10년간 막대한 돈을 지원했으나 그 돈이 북한 사회의 개방을 돕는 데 사용되지 않고 핵무장 하는데 이용됐다는 의혹이 일고 있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2009.7.8.자 세계일보도 “지난 10년 대북지원금 핵무장 의혹 있다”는 제하의 사설을 통해 햇볕정책은 북한의 핵개발을 도왔다고 논평했습니다.  

“지난 10년간 방식은 평화를 돈으로 산다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핵무장만 도운 꼴이 됐다. 이 대통령의 문제 제기에는 퍼주기식 햇볕정책의 폐기를 선언한 의미가 있다”




김대중 내란 음모사건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은 1980년 신군부 세력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김대중 일당이 정권을 잡기 위해 민중을 선동해 일으킨 봉기'로 조작, 김대중과 문익환 목사 등 20여명을 연행해 군사재판에 회부한 사건.

1979년 '12.12 사태'로 군을 장악한 신군부가 1980년 5월17일 전국에 계엄령을 실시하면서 당시 국민연합 공동의장이던 김대중과 그 지지세력 24명을 내란음모나 국가보안법, 계엄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한 사건이다. 

5·18광주민주화 운동이 일어나기 하루 전인 1980년 5월17일. 신군부는 비상계엄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고 문익환목사, 함석헌옹, 윤보선 전대통령 등과 함께 당시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대표였던 김대중과 지지세력 수십명을 체포했다. 

이후 5일만에 김대중이 ""대중을 선동해 민중봉기와 정부 전복을 획책했다""는 내용의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고 7월4일 김대중 등 37명을 내란음모 등 혐의로 육군본부 검찰부에 송치했다. 


■ 김대중 사형 선고

군법회의는 그해 8월14일부터 재판을 시작, 9월17일 19차 공판에서 김대중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김대중은 최후진술에서 ""아무리 죄와 벌을 받아도 내가 잘못이 있다고 납득이 가야 한다""고 항변했지만 군법회의는 이른바 '김대중내란음모사건'의 주동자 혐의를 씌워 사형을 선고했고 1981년 1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내렸다. 

사형 확정 후 독일·미국·일본·프랑스 등에서 현지 교포들과 각국의 양심적 지식인·문화인·정치인들이 김대중 구명운동에 나서자, 군사정권은 형량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하고, 이어 1982년 12월에는 그를 석방하였다. 그 뒤 미국으로 건너간 김대중은 한국인권문제연구소를 열어 해외에서 활동하다 1985년 제12대 총선을 앞두고 귀국하였다. 



 * 미 정보당국에서 입수한 김대중 - 김정일 녹취록
2000년 6월13일 김대중 대통령을 평양 순안비행장에서 맞아 자신의 전용차에 태운 김정일이 숙소까지 가는 도중에 일방적으로 통보한 극비대화 내용을 미국 정보당국이 감청 제3자를 통해 전달받은 마지막 주월공사 이대용 장군의 증언.

요약하면 
 - 김정일이 김대중에게 유일하게 충성한 사람이라고 함.
 - 반공법 무력화하고 평화헌법 만들라고 지시
 - 고려연방제를 해서 남북 대표가 차례로 대통령하는데 
 - 김대중이 먼저하고 한달하다가 병이 낫다고 하고 김정일이 대통령함ㅋㅋㅋㅋㅋㅋㅋㅋㅋ

* 고려연방제는 결국 적화통일의 시작이 되는 것으로 교묘한 말속임에 지나지 않는다.







과거 간첩 김대중이 내란죄로 사형을 선고 당했을 때 
해외에서 김대중 구명운동을 하며 김대중을 풀어주라는 여론을 형성했는데 어처구니가 없다.

공산주의자 김대중은 항상 민주주의 그늘에 숨어 한국을 공산화하려 했고, 북한과 내통을 했으며
한국 국민들의 상당수까지 속이고 있다.

전라도 사람들은 전라도 특유의 열등감과 피해의식, 자격지심으로 뭉쳐져 있다.
이로 인해 현재 전라도는 종북 공산주의자들과 
그들에게 선동당하여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전라도민 둘로 구분된다.
공산좌빨에게 선동된 전라도는 결국 공산좌빨들의 정치적 노예일 뿐이다.




북한 간첩출신의 김대중의 햇빛정책은 처음부터 국민들을 속이고 기만한 정책이였으며,
이는 김대중 좌파정권의 명백하게 실패한 정책이다.

공산좌빨들과 전라도는 김대중햇빛정책으로 인한 북핵문제에 대해
책임회피와 변명이 아닌 반성하고 사죄하는 태도로 결자해지하여야 한다.


황장엽은 북한의 정치인. 주체사상 이론가이자 노동당 비서, 최고인민회의 의장 등을 지낸 북한 최고위층 인사로, 1997년 한국으로 망명하였다.

1958년 노동당(조선노동당) 서기실 이론서기
1959년 노동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맡았으며 이 무렵부터 김일성의 눈에 들어 철학담당 비서로 활약하였다. 
1962년 북한최고인민회의(국회에 해당)의 대의원으로 정계에 발을 디뎠고, 
1964년 김일성을 보좌하는 내각 참사관으로 일하였다.

1965년 43세의 나이에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에 임명되었고, 
1970년 노동당 중앙위원이 되었다. 
1972년부터 1983년까지 11년간 최고인민회의 의장직을 수행하며 최고위층에 올랐다. 
1979년 노동당 과학교육담당 비서 및 주체사상연구소장, 
1980년 노동당 비서, 
1984년 노동당 국제담당 비서, 
1986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부위원장, 
1987년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위원장, 
1993년 최고인민회의 외교위원회 위원장 등을 맡았다.

북한의 통치 이데올로기 중 하나인 주체사상의 최고 이론가로서 주체사상을 해외에 전파하는 외교업무를 병행하였으며, 김일성의 비공식 방중을 단독 수행하는 등 굳건한 입지를 구축하였다. 또 김정일이 백두산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는 백두산 출생설을 퍼뜨리며 김정일 후계자 구도 구축과정에서 핵심 역할을 담당하고,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 등의 호칭을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한때 북한 권력 서열 13위에 오를 정도로 핵심적 권력층에 있었던 그는 김정일과의 갈등으로 망명을 결심하였고, 1997년 베이징 주재 한국총영사관을 통해 한국으로 망명하였다. 망명 후 탈북자동지회, 북한민주화위원회 등 탈북자 단체에서 활동하며 강연과 방송 등을 통하여 북한의 체제와 권력을 비판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황장엽 [黃長燁]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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