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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1.21사태(김신조) 청와대 기습미수사건

작성자대한나라|작성시간18.01.23|조회수500 목록 댓글 1

 1.21사태(김신조) 청와대 기습미수사건                 

winter(우수)[무] | 조회 163 |추천 0 | 2007.02.25. 20:42 
    

저희 마을이 경기 북부지방인데.. 논밭에 가려면 민증이나, 농민증을 내야하죠..

(저도 있다는 ㄱ- 농민..) 그 곳 지방에서 김신조 무리가 뚫은 철조망이 있고 그 곳을 기념(좀그렇네)

하는 초라한 장소가 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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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新朝가 포함된 124군 부대 35명은 각자 임무에 따른 반복 훈련을 거듭하며 출동 날짜를 기다리고

있었다. 1월13일, 민족보위성 정찰국장 김정태는 공격 목표가 너무 분산되었다면서 기존의 계획을 수정,

공격목표를 청와대로 한정시키고 朴正熙 대통령만 살해하는 임무로 축소시켰다.

 

인원도 35명에서 31명으로 줄였다. 공격시점은 1월21일 20시 정각. 공격목표와 날짜가 정해지자

청와대 내부 구조를 분석하고 주요 지점별 공격조를 나눠 훈련에 돌입했다. 청와대 습격 D데이에

임박해서는 사리원에 있는 황해북도 인민위원회 청사를 대상으로 실전연습을 하기도 했다.



124군부대 - 침투 그리고 노출

1968년 1월16일 金新朝 일당은 한국군 26사단 마크가 부착된 국군 복장에 개머리 판을 접을 수 있는

접철식 AK소총과 수류탄 및 대전차 수류탄으로 무장하고 황해도 연산에 주둔한 부대를 출발했다.

이들은 자정 무렵 개성에 도착, 다음날인 17일 새벽 비무장지대內 최남단 초소가 있는 연천군 매현리에

도착하여 밤이 되기를 기다렸다. 이들은 이곳에서 야간 침투를 위한 위장(僞裝)을 했다.

이날 국방부는 「原州 회의」에서 朴대통령이 내린 특별지시에 따라 분산된 對간첩 작전을 일원화시키는

새 기구안을 마련해 국무회의에 상정했다. 새 기구안은 대통령 직속으로 對간첩작전을 총지휘하며,

정책을 마련하는 중앙협의회와 정책을 실천하는 대책본부를 두고 대책본부는 합동참모본부에 설치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1월17일 밤 8시, 무장공비들은 美 2사단 지역의 정면을 향해 포복으로 접근하기 시작, 10시 정각에

철조망이 가설된 철책선에 도착했다. 이들은 절단기로 철조망을 제거하고 휴전선을 넘어 은밀 침투를

시작했다.

 

124군 부대 무장공비들은 軍 GP들이 요소 요소에 있는 휴전선 남방한계선부터 임진강을 건너기까지는

속도를 내지 못했다. 은밀 침투는 자신의 발자국 소리는 물론 숨소리나 냄새까지 죽이며 지형의 그늘진

부분을 이용해 이동 하는 특수전(特殊戰) 기술이다. 초소나 경비병 근처에서는 땅에 납작하게 붙어

시간에 수 m 정도만을 이동할 정도로 인내력과 지구력이 요구된다 .

 

金新朝를 포함한 무장공비들은 이미 훈련과정에서 이런 능력을 배양했고, 야간 침투중 인기척을

느꼈을 경우 부동자세로 한 시간 동안 버티는 훈련까지 받았다고 한다. 어둠속에서 상대방이 이 쪽을

사람으로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훈련이었다.

이들은 美 2사단 구역을 통과하여 고랑포에서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널 때까지 약 10km의 구간을

엎드리고, 기고, 달리고, 숨고 하며 먼동이 틀 때엔 임진강을 건너 경기도 파주군과 법원리 사이의 작은

산 기슭에 도착할수 있었다. 그때까지 경비병이나 지뢰밭을 만난 적도 없었다.

이들이 선택한 침투로는 임진강과 휴전선이 가장 근접한 지역일 뿐 아니라 얼어붙은 임진강을 도강할

있는 특별한 지역이었다. 서해바다로 연결된 임진강의 중·하류가 시작되는 임진각 부근은 바닷물이

만조(滿潮)때마다 밀려 올라와 얼음이 비늘처럼 솟아오르고, 얼지 않은 바닷물이 곳곳에 고여 있어

도보로 건널 수가 없는 곳이었다. 대신 고랑포 지역은 상류에 속해 바닷물의 영향이 없고 겨울에는

단단하게 얼어 있어 이들이 침투로로 선정할 수 밖에 없었다.

휴전선에서 고랑포에 이르는 루트가 美軍이 관할하는 지역이란 점도 고려되었다.

미군 지역에서는 무장침투 간첩을 한국군으로 오인(誤認)할 수 있는 여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미군 지역 철책이 구형 철조망이었기 때문이었다.



金聖恩 당시 국방장관의 증언.
『1967년은 유달리 남침 사례가 많아 휴전선 철책부터 보강하기로 했습니다 .

그때까지 휴전선 철책이란 휴전 당시 남북한 군인들이 직접 설치한 원형 철조망 서너 가닥이

전부였습니다. 새빨갛게 녹이 슬대로 슬었고, 가끔씩 보수공사를 한다고 갈아주기는 했지만 인적이

드문 비무장지대에다 예산부족으로 개수(改修)할 생각을 못했지요. 이것을 美 국방성에 부탁해 자재를

공급받아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철책선을 만든 겁니다. 이 공사는 그 해 겨울, 249km의 휴전선

全지역에서 완성을 보았습니다. 단 미군 지역 4km 정도만 제외되었지요』



美 2사단측은 철주(鐵柱)를 박고 전기 철조망을 쳐 대적하려는 한국군의 대응자세를 못 미더워하면서

자신들이 보유한 전자 감응 경보기 등으로 대처하겠노라며 공사를 거부하고 있었다.

1968년 1월18일 오전 5시, 은밀침투로 법원리 뒷산에 도착한 31명의 무장공비들은 몹시 지쳐있어

이날밤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공비들은 가면(假眠)상태로 휴식하고 있었고 5명이 교대로 경계를 서고

있었다.

오후 2시경, 파주군 초리골에 살던 우성제(禹聖濟·현 파주경찰서 보안계장)를 포함한 네 형제는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벼랑 아래에 숨어 있던 공비들의 경계병과 마주쳤다.



『국군 대위 한 명, 소위 한 명, 그리고 사병 계급장을 단 3명 등 모두 5명 이었죠. 우리 국군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신발은 검은 농구화였고 총은 개머리판을 접을 수 있는 AK소총이었어요.

한 눈에 공비라고 알아 보았지만 도망가기엔 너무 때가 늦었습니다』



禹씨 형제를 본 공비들은 태연을 가장하고 불러 세워 담배를 권하더니 갑자기 기관총으로 등을 밀며

벼랑 쪽으로 몰았다. 禹씨 형제들이 벼랑 밑으로 와 보니 일개 소대 병력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겁을 집어먹은 禹씨 형제들에게

 

『너, 우리가 어떤 사람들 같아?』라고 물었다.

『군인 같은데요』라고 하자

공비들 중 한 명이 『우린 혁명당이야』 라며 참깨 섞인 엿과 오징어를 주고 말을 붙였다.

 



『너 쌀밥 일년에 얼마나 먹어봤어?』

『밥은 하루에 세 번 먹잖아요』

『……』

31명의 공비들은 禹씨 형제들에게 지서의 위치와 문산 동두천, 의정부로 가는 방향을 묻기도 하는

이런 저런 말을 붙여왔다.

金新朝(現 충남 예산 군 성결교회) 목사의 증언.
『원칙으로는 작전 도중 만나는 군인이건 민간인이건 무조건 죽이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날 대원들 중 일부가 「죽이면 오히려 문제가 생기지 않겠냐」며 반대를 했습니다.

투표를 했는데 역시 살려두자는 의견이 많았습니다』

禹씨 형제는 벼랑 아래 덤불 속에서 네 시간여 동안 공비들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말 상대가 되어 주었다.

그리고 어둠이 완전히 내려앉은 뒤에야 풀려날 수 있었다. 공비들 중 한명이 호주머니 속에 넣어 둔

손목시계를 꺼내 선물로 주며 『만약 비밀을 지키지 않고 경찰에 신고하면 우리 후속 부대가 내려와서

너희 마을과 가족들을 몰살시켜 버릴거야』라고 위협했다.

禹씨 형제들은 빈 지게를 지고 돌아 나오면서 자꾸만 뒤가 꺼림칙했다고 한다.

『혹시 쏘지나 않을까 겁이 났지요. 우리가 한참 걸어 나오다가 힐끗 돌아 보니 깜깜한 데 뭔가

움직임이 느껴졌어요. 이동중이란 걸 알았습니다』 형제들은 마을 입구 가로등 밑에서 미행이 없는지

살핀 뒤 언제 신고를 하느냐를 놓고 고민했다고 한다. 이들은 丹陽 禹씨 종가집으로 달려가 어른들과

함께 파주군 법원리 창현파출소에 신고를 했다. 이때가 1월19일 밤 9시경.



시속 10㎞의 중무장 산악 질주

국가간의 전투력은 戰場에서 비로소 확인되는 경우가 많다.
1·21 사태는 6·25 이후 15년 만에 남북한 전투력을 비교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金新朝를 포함한

중무장한 인민군 1개 소대병력은 휴전선을 넘어 임진강을 건널 때까지 국군 초병들에게 발각되지 않았다.

나뭇군 禹씨 형제와 우연히 부딪친 것을 제외하면 前方 거주 주민들에게 거동수상자들로 몰려 신고된

적도 없었다.당시 우리나라의 對간첩 작전능력도 6·25 이후 별로 改善된 적이 없는 상태였다.

통신 계통은 특히 전근대적이었다.

金新朝와 30명의 무장공비 목격 사건은 禹씨 4형제에 의해 1월19일 밤 9시 경 파출소에 신고 접수가

되었지만, 인근 군부대에 전달된 시각은 9시30분 경이었다. 對간첩작전 대책본부가 설치될

합동참모본부에는세 시간이 지난 자정무렵에 이 정보가 도착했다.



金新朝 목사의 회고.

『자만심 같은 게 있었어요. 훈련을 받을 때 모래주머니를 차고 산악구보를 매일같이 하면서 교관들은

우리에게 「동무들은 세계 최강의 용사다. 국방군들이 동무들을 비행기로도 못 쫓아 오게 만들어 주겠다」

혹독한 훈련을 시켰거든요』

1월19일 오후 8시경 禹씨 형제들을 살려 보낸 뒤 거의 동시에 金新朝 일당은 법원리 뒷산을 출발,

서울을 향해 급속 산악행군을 시작했다. 급속행군 이란, 약 30㎏의 짐을 진 重무장한 군인이 시간당

10km를 주파하는 구보다. 당시 한국군의 경우 급속행군은 산악이 아닌 오직 도로위에서만 가능 하다고

믿고 있었다.

한국군의 군사적 상식으로는 야간 산악행군일 경우 시간당 4㎞를 넘을 수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金新朝 일당은 시간당 평균 10 ㎞씩 주파하면서 법원리-미타산-앵무봉-노고산-진관사-

북한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을 달리고 있었다.

비슷한 시각, 중앙정보부 康仁德 과장은 이날도 자신의 분석이 들어맞지 않아 실망한 채 관사로

퇴근하여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 머리 속은 온통 북한 생각으로 꽉 차 있었다.

1월20일 토요일 새벽 두시 경, 전화 벨 소리에 선잠에 빠졌던 康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예, 강인덕 과장입니다』

『과장님, 새까맣게 들어왔습니다』

『몇 명이나 돼?』
『잘 모르겠지만 30명은 되는 것 같습니다』 강인덕 과장은 「게릴라전이 시작됐다. 이젠 정치가 아닌

군사력이 대응해야 할 때」라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했다. 이때 金新朝 일당은 앵무봉을 지나 경기도

구파발 부근의 노고산 능선을 타고 있었다. 새벽 4시경엔 노고산을 주파한 뒤 서울의 경계선이자

북한산으로 접어드는 길목인 진관사(眞寬寺)를 통과했다. 오전 6시경엔 북한산 비봉(碑峰)에 도착했다.

10시간 동안 거의 휴식없이 전력질주를 해낸 것이다.

1월20일 토요일 오전 9시, 金聖恩 국방부 장관은 청사로 출근해서야 이 사실을 보고받았다.

오전 9시30분경, 金장관은 차를 타고 청와대로 들어가 朴正熙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朴正熙는 손으로 턱을 문지르며 『어디로 들어왔소?』라고 물었다.



『임진강 상류 고랑포 쪽입니다. 얼음이 얼면 건널 수가 있는 곳이지요』

『그놈들이 뭣하러 들어왔을까?』

『각하, 지난해 놈들은 이미 우리나라의 각종 기간 시설을 파괴하는 활동을 해 오지 않았습니까.

이번에도 주한미군의 주둔지 시설 파괴나 테러일 가능성이 큽니다. 한국군 부대나 주요시설도 목표가

될 것 같습니다』

휴전 후 연간 최다 도발 횟수인 170회를 기록한 1967년 한해 동안 전방지역 에서는 전쟁에 준하는

북한의 군사도발이 한국군과 주한미군을 상대로 여러 차례 감행됐다.

1월19일에는 동해 휴전선 근해에서 순찰중이던 한국 해군 56함 당진호가 두 척의 북한 포함(砲艦)

으로부터 피격받아 침몰했고, 4월12일에는 중부산악 지대 휴전선을 북한군 90 여명이 침범해 들어와

국군 7사단과 교전을 했다. 이때 7사단의 3개 포병대대가 북한지역에 휴전 후 최초로 585 발의 포격을

가하기도 했다.

4월22일에는 북한군들이 서부전선으로 침투해 미군 막사를 폭파, 두 명의 미군이 숨지고 19 명이

부상하는 사건도 있었고 5월27일에는 북한 경비정이 연평도 근해에서 작업중이던 한국 어선단에 포격을

가해 한국 해군이 25 분간 엄호사격을 하기도 했다.

8월7일에는 침투한 북한군이 판문점 남방 대성동 자유의 마을 앞에서 미군 트럭을 습격해 3 명의 미군이

사망하고 17 명이 부상했다.

사흘 뒤엔 서부전선에서 한국군 트럭이 습격당해 아군 3 명이 사망했다. 8월 28일, 북한군은 판문점

동남쪽 30 여m에 위치한 미군 막사를 기습, 미군 3 명이 사망하고 25 명이 부상했다.

9월5일에는 경원선 열차 폭파사건이, 13일에는 경의선 열차 폭파사건이 있었고 동해상에서 조업중이던

어선을 여러 차례 납치하는 등 진행속도가 완만할 뿐 전쟁과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에게 보고하던 金聖恩 국방장관은 그 순간까지도 침투한 무장 공비들이 지난해와 유사한

작전을 펼칠 것으로 짐작했을 뿐 청와대가 목표인 것은 꿈에도 몰랐다고 한다. 이날 오전 金聖恩 장관은

李世鎬 6군단장을 전화로 불러내 예비사단까지 동원해서 서울 외곽에 집중 배치토록 지시했다. 6·25 당시

해병 전투단장(여단장)으로 한국군 1사단 지역이던 문산 지역에서 美 해병대와 연합작전을 수행했던

金聖恩 장관은 金新朝 일당이 침투해 들어오는 해당 지역의 지리를 손바닥 보듯이 꿰고 있었다.



金 前 장관은 당시 자신의 추론이 어긋나 있었음을 시인하면서 이렇게 회고했다.

『金新朝 일당이 나무꾼들을 풀어 준 지점에서 서울 진관외동의 진관사까지 산악 코스로 행군을 하면

해병대도 이틀은 족히 걸리 는 거리였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이미 진관사를 거쳐 북한산 비봉의 승가사

아래까지 도착해 있었다는 것을 나중에 알고 기겁했지요. 중무장하고 야간 산악행군으로 북한산까지

올 수 있다는 건 제 군대 상식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거든요』



때늦은 防禦線 구축

1968년 1월 20일 오후 2시경, 6군단 예하 3개 사단과 김재규 중장의 6 관구 병력이 동원되어 전방에서

부터 서울 외곽에 이르는 수십 겹의 방어선이 구축됐다. 그러나 실제로는 무장공비들이 이미 통과한 다음

병력을 배치한 것이었다 . 공비들은 자신들이 놓아준 禹씨 형제들의 신고보다 빨리 포위망을 벗어난

셈이었다.

이날 청와대에서 金聖恩 장관은 이세호 6군단장에게 『주간에는 정밀 수색을 실시해 흔적을 찾고

야간에는 매복을 하라』고 지시했다. 朴대통령은 金聖恩 장관과 점심을 함께 들며 『임진강이 겨울에도

얼지 않으면 좋을 텐데 말이오』라며 아쉬워 했다.

金장관은 오후 2시경, 수색대로부터 보고를 접했다. 받아 보니 북한산 북쪽 자락의 경기도 송추 유원지

부근에서 무장공비들의 것으로 보이는 실탄과 탄창 및 흘린 듯한 음식물 약간이 발견되었다는

내용이었다.

『설마 거기까지 들어왔을까, 하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었습니다. 철통 같은 방어선을 펼쳤는데

하루만에 그 지역을 통과하면서 유실물 흔적을 남겨 두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습니다. 朴대통령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정보분석을 함께 하고 있었지요』



이때 金聖恩 장관은 결과적으로 큰 의미를 가진 결정을 내렸다.

『미심쩍은 구석이 있어 대통령 집무실에서 전화로 채원식 치안국 장을 불러냈습니다. 그리고

서울 지역에 갑종 비상을 걸도록 하고 세검정에서 정릉과 창동에 이르는 축선에 경찰 병력을 배치하라고

지시했습니다』

1월6일 「原州회의」에서 결정된 비상 경계령을 처음 적용한 것이었다. 갑종 경계령이 내려진 서울에서는

경찰들이 비상 근무에 들어갔다. 이무렵 무장공비들은 북한산 승가사 아래 기슭에 모여 휴식에 들어갔다.

계획대로라면 이날 오후에는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까지 가 있어야 했다.

金新朝 목사의 증언.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4일 동안 강행군했기 때문에 지쳐버렸던 것이죠. 원래 루트는 다음날인 21일

오후까지 북악산을 지나 밤 8시경에는 세검정 쪽으로 빠져 나와야 했습니다. 그런데 북악산을 타려면

공격시간에 제대로 도착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허리까지 눈이 쑥쑥 빠지고 발밑은 미끄럽고 더 이상

산을 타는 것은 무리였다고 판단해 계획을 수정했습니다』

이들은 마지막 남은 산 하나를 둔 채 휴식에 들어갔다. 그리고 다음날 비봉에서 세검정쪽으로

내려가기로 결정한 것이다.

1월21일 일요일 오전, 金聖恩 국방장관은 청와대로 곧바로 출근해 임충식 합참본부장과 함께 대통령

집무실로 들어갔다. 朴대통령은 지도를 펴 놓고 이리저리 살펴보고 있었다.

김형욱 정보부장이 드나들었지만 對간첩 작전권이 국방부로 이첩되고 사건 성질상 자신이 개입할

만한 것이 아니어서 별 말이 없었다는 것이 金聖恩 前 국방장관의 증언이다.



자하문 임시 검문소에서 방첩대로 가장

1968년 1월21일밤 8시경, 북한산 비봉 밑에서 마지막 공격 캠프를 차린 金新朝와 무장공비 30 명은

조용히 개인 장구류를 챙긴 뒤 눈 덮인 산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각자 기관단총, 소련제 TT 권총,

수류탄 10발 및 對전차 수류탄 2발, 실탄 300 발 그리고 대검을 착용하고 있었다. 방한모 차림에 한국군

군복이었으나 소련군식의 장외투에 검은 농구화여서 어딘지 어색하기 짝이 없었지만 추 위와 어둠이

이를 가려주었다.

밤 9시30분, 이들은 산길을 내려와 내리막인 일반 도로로 접어들었다. 접철식 AK소총과 수류탄을 숨긴

외투가 밖으로 불룩했다. 이들은 행군하는 군인처럼 2열 종대를 갖추고 침묵속에 움직였다.

반짝이는 것은 눈동자뿐.


 


金新朝 목사의 회고.
『생각해 보세요. 1개 소대가 휴전선을 넘어 4일 동안 한번도 걸리지 않고 서울까지 온겁니다.

중간에 나무꾼을 살려두어 경계령이 펴진 것을 알게 되었지만 우리는 남한의 경찰이나 군인들을 한번도

겁낸 적이 없었습니다 . 지난 4일간의 경험도 우리가 그들을 비웃는 계기가 되었지요. 검문을 당한다 해도

해치워버리면 그만이라는 자신감에 차 있었습니다』

영화라고 해도 믿기지 않을 정도의 대범함 뒤에는 한국군의 약한 전력이 배경이 되어주고 있었다.

비봉에 숨어 있을 동안 이들은 세부 작전 계획을 수립했다. 침투, 습격, 탈출조 등 3개 조로 나누어

3∼4분 만에 끝낼 계획이었다고 한다.

침투조가 청와대 보초를 제거하고 경계를 펴는 동안 습격조는 청와대 내부를 공격하고 철수하면 그동안

탈출조는 청와대 경내의 차량을 탈취해 시동을 걸어 놓고 있다가 임무를 마친 동료들을 싣고 문산

쪽으로 도주하는 임무를 띠고 있었다.

습격조는 목표에 따라 네 개조로 세분되었고 제1조는 청와대 2층을 습격하여 朴대통령을 살해하고,

2조는 청와대 1층, 3조는 경호실, 4조는 비서실에 침입하여 기관단총과 수류탄으로 전원 살해한 다음

도피 및 탈출을 한다는 계획이었다. 청와대 1층 습격을 맡은 2조 조장이 金新朝 인민군 소위였다.

이들이 세검정 길을 2열 종대로 걸어갈 무렵 서울 시내는 갑호 비상이 걸린 상태에서 사람들의 발길이

무척 뜸해 있었다. 이 괴한들을 처음 확인한 사람은 이각현 서대문경찰서장이었다.

그는 정체불명의 괴한들이 나타났다는 무전보고를 받고 현장으로 출동했다.

李서장은 구평동 버스 정류장 부근에서 세검정길을 따라 걸어내려가는 괴한들을 목격하고 즉시 세검정

파출소에 들어가 서울시경에 보고했다. 그 직후 李서장은 스리쿼터에 6명의 형사를 태우고 괴한들을

쫓아가 대열 선두에 차를 세웠다.



『당신들 뭡니까』

『우리는 CIC 방첩대다. 훈련 끝내고 돌아가는 길인데 참견 말라』 고압적인 자세로 나오자 李서장은

차를 타고 뒤쫓아 갈 수밖에 없었다. 밤 10시경, 자하문 고갯길로 방향을 돌린 괴한들은 누각이 있는

언덕까지 올라와 청와대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고개 아래 30여m 쯤엔 당시 종로구 청운동 국립과학수사

연구소가 있었고 그 담을 끼고 종로경찰서 관할의 자하문 임시 검문소가 설치되어 있었다.

이날 검문소에서 근무하던 종로 경찰서 수사 2계 박태안, 정종수 형사가 언덕길을 내려오는 괴한들을

발견하고 검문소 밖으로 나왔다.

괴한들에 대해서는 아?? 아무런 연락을 받은 바 없었다.

 



『당신들 뭐요』

『너는 뭐냐』

『종로서 형사다』

『우리는 CIC 방첩대원들인데 특수 훈련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다. 서장에게 알렸는데 아직 아무

얘기도 못 들었나. 우리는 너희와 상대할 사람들이 아니다. 알려거든 너희 서장에게 물어보라』

공비들은 조금 전 서대문경찰서장을 따돌린 것과 같은 방법을 썼다. 함경도 억양이 묻어 나왔다.

공비들은 긴장해서 과장된 행동을 하는 바람에 외투 속에 숨겨진 총구가 드러나는지도 몰랐다.

朴형사는 살짝 드러난 총구를 순간적으로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들이 경기도 북쪽에서 신고된 공비들이란 직감을 했다. 곁에 섰던 鄭형사가 朴형사의 눈치를

보고 예삿일이 아니란 느낌을 받았다. 두 형사는 서로 거리를 좁혀 이들과 맞섰다.

그러자 공비들은 이들을 밀치고 앞으로 나아갔다.

대열이 옆으로 지나가는 동안 두 형사는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에게 「불신검문에 응하지 않는

괴한들이 나타났다」고 무전 보고를 한 뒤 저만큼 가고 있는 이들의 앞을 달려가 가로 막았다.



『거, 신분증 좀 봅시다』

『신분증 같은 거 없어』

『우리나 당신들이나 비슷한 수사기관에 있는데 피차 고생하는 처지에 서로 신분을 밝히는 게 좋지

않습니까』


『우리 신분을 알려면 계속 따라오면 될 것 아니야』 자하문을 내려가 효자동에 이르면 육군 방첩대

본부가 위치하고 있어 딱히 이들의 말에서 거짓말임을 발견해 내기는 어려웠다. 그만큼 지리를 확실하게

익히고 들어 온 공비들이었다.

 

그러나 형사들은 직감을 믿었다. 두 형사는 공비들과 숫적으로 상대가 되지 않았고 자신들은

권총 한 정 없는 상태여서 진땀이 흘렀다. 다시 공비들의 대열이 움직였다. 두 형사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끌기 위해 대열 맨 뒤에 따라가는 공비에게 말을 걸면서 자하문 고갯길을 함께 내려가기 시작했다.





崔圭植 종로경찰서장 전사(戰死)

1968년 1월21일 밤 10시5분경, 청와대가 지척인 자하문 내리막길에서 두 형사는 무장공비의 대열

맨 뒤에 걸어가던 부대장격인 김춘식과 이야기를 나누며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김춘식은 朴형사에게 『당신 경상도 말씬데, 고향이 어디요?』하고 물었다. 朴형사가

『대구인데요』라고 대답하자 그는 『우리 친척집도 대구인데…』 라며 말을 흐렸다.

朴형사는 이들과 농담까지 주고 받으며 시간을 끌어 보려했으나 기다리던 증원부대는 오지 않았다.

입안이 바싹 타들어가고 있었다. 그때 마침 괴한들은 자하문 고개를 넘어 오는 원효여객 60번 버스를

세웠다.

 

 



박태안씨의 회고.
『무장공비가 분명한데 그 자리에서 놓칠 수가 없었습니다. 「한 명이라도 못 잡으면 우리는 죽는다」

생각이 들더군요. 공비들은 이미 7∼8 명이 버스에 올라타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극성스럽게

저지하기 시작하자 대장인 듯한 자가 부하들에게 내리라고 했습니다. 우리 두 명이 이들을 다 상대할 수는

없고, 미치겠더라고요. 하지만 그때까지 공비들의 목표가 청와대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버스에서의 시비가 끝나자 대열은 다시 움직였다. 경복고등학교 후문을 지나 청와대로 꺾어지는

커브 쯤에서 맨 뒤에 가던 김춘식에게 朴형사가 끈질기게 말을 붙이는 바람에 김춘식은 어느새 대열과

7∼8 m 떨어지게 되었다 . 朴형사는 속으로 「이놈 한 놈만이라도 잡아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밤 10시10분.



朴형사는 길이 꺾어지는 쪽으로 공비들이 빠지면 연락을 받고 달려올 증원 부대가 자신을 발견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장공비들이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이르자 鄭형사와 함께 승강이를

벌이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헤드라이트 불빛이 길 아래에서부터 올라오기 시작했다.

 

지프차는 괴한들의 대열 앞에 멈춰섰다. 전진하던 대열도 멈칫 했다.

헤드라이트가 이들의 몰골을 기괴하게 비추고 있는 동안 차에서 당당한 체구의 사나이가 내렸다.

崔圭植 종로경찰서 서장이었다.

 



『나는 종로경찰서장이오. 소속을 밝혀야지요. 외투 안에는 뭐가 들었소?』

『아무 것도 아니오. 우리는 CIC 사령부가 있는 효자동으로 가는 길이오』

『여기는 내 담당구역입니다. 신분을 밝히지 않고는 아무도 못 지나가요』 2조 조장 金新朝는

대열 중간에 서 있다가 지프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비추는 가운데 최규식 서장이 권총을 뽑아들고

저지하는 모습을 목격하고는 남침 후 처음으로 당황했다고 한다.

 

공비들의 신경이 극도로 날카로워졌을 때 최규식 서장 뒤로 시내 버스 한 대가 올라오다 길을 가로막은

지프차 뒤로 멈춰섰다. 공비들은 버스를 국군의 지원 병력인 줄로 착각했다.

 

잠시 후 또 한 대의 버스가 커브를 돌아 나오다 앞 차량이 멈춰 서있자 급정거를 했다.

공비들은 연이어 두 대의 차량이 도착한 것을 목격하고는 외투 속의 총과 수류탄을 더듬었다.

그 순간 최규식 서장과 시비가 붙었던 공비가 외투 속에서 총을 꺼내 崔서장의 가슴을 향해

연발 사격을 가했다.



『드르륵, 드르륵』

『국방군 출동이닷!』 1·21 사태의 첫 희생자가 된 당시 36세의 최규식 서장은 가슴에 세 발을 맞고

자리에서 숨을 거두었다. 밤 10시15분경이었다.



총성이 나기 무섭게 공비들이 일제히 버스를 향해 사격을 가하면서 세 발의 수류탄이 작렬했다.

버스에 타고있던 청운중학교 3학년 김형기(17)군과 회사원 홍유경(29)씨가 수류탄 파편을 맞아

그 자리에서 숨지고 버스 차장 김정자(18세)양은 오른 팔에 관통상을 입었다. 버스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뛰어 내렸다.

 

어둠 속에서 공비들은 자신들을 공격하는 국군인줄 알고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순간 대열 뒤에서 부대장 김춘식과 말을 걸었던 두 형사가 김춘식을 쓰러 뜨렸다.

朴형사는 오른손으로 김춘식의 목을 죄면서 왼손으로는 아무거나 손에 잡히는 것을 들고 머리를 내려쳤다.

졸지에 돌멩이로 머리를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의식을 잃은 김춘식을 朴형사는 수갑으로 채워 생포하는데

성공했다.



멀리서 동료가 경찰에 의해 쓰러지는 것을 목격한 공비들은 도망가면서 두 형사를 향해 총을 쏘았다.

정종수 형사가 쓰러졌고 박태안 형사는 왼쪽 귀 위로 총알이 스쳐 지나갔다.

(鄭형사는 며칠 후 병원에서 숨졌다).

경복고 후문 일대는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총성이 퍼지자 청와대 외곽을 경비하던 수경사 30대대(대대장 전두환 중령) 병력들이

즉시 달려오기 시작했다.

 

 

 



金新朝 목사의 회고.


『한 명이 쓰러지는 걸 보고는 「틀렸구나」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지휘부가 무너졌다고

판단하는 순간 휴전선에서 청와대까지 내려왔다는 자부심이고 뭐고 다 없어졌고 동료들이

순식간에 흩어지는 겁니다. 청와대고 작전이고 없었어요.

 

불과 5분 정도 교전한 것 같은데 모두 사방으로 흩어졌던 겁니다.

일부는 오던 길을 거슬러 세검정 쪽으로 튀었고 일부는 청와대 뒷산인 북악산을 탔고,

저는 경복고등학교 뒷담을 넘었지요. 인왕산을 타고 北으로 가려고 말입니다』



인민군 소위 金新朝는 동료들이 많이 택하지 않은 루트를 골랐다. 자하문을 넘어 세검정쪽으로

도망가려던 공비들은 뒤따라 내려오던 시내버스를 향해 수류탄을 던지고 기관총을 난사했다.

그러나 승객들이 미리 대피한 상태여서 피해는 없었다. 이들은 세검정에서 시내로 들어오는

두 대의 버스에도 수류탄과 기총소사를 해대며 도망쳤다. 밤 10시30분경이었다.

 

야간에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심장부 부근까지 침투한 것은 성공했지만,

무고한 양민을 학살해 가며 유격전을 벌인 것만큼 어리석은 非정규전 사례도 없을 것이다.

밤 10시 40분경 세검정 길과 북악산 일대는 수도경비사령부 소속 30대대 병력들이 투입되어

총격전으로 이어졌다. 30대대 병력이 현장에 투입될 무렵 , 경복궁 옆에 주둔하던 30대대 연병장에서는

대대장 전두환 중령과 작전주임 장세동 소령의 지휘하에 81mm박격포 10 여 문에서 조명탄이 날아

올랐다. 조명탄은 밤새도록 세검정과 북악산 일대를 대낮같이 밝혔다.

청와대 밖 하늘은 수경사 30대대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으로 훤하게 밝아 있었다. 윤필용 방첩대장은

金聖恩 국방부 장관에게 전과와 피해상황을 수시로 보고했다. 자하문에서 최초 총격전이 벌어져

종로경찰서장이 피격당해 순직했으며, 한 명은 생포했고 현재 청와대 외곽으로 몰아내며 추적중

이라는 내용이었다.

밤 12시가 가까워지자 청와대로 속속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청와대 쪽에서는 이후락 비서실장,

김시진 정보비서관 등이 정부쪽에서는 정일권 국무총리, 홍종철 공보부 장관, 신직수 검찰총장,

김현옥 서울시장, 이낙선 국세청장 등이 달려왔다. 각료들은 朴대통령과 대화를 나누던중

『총성이 난 이상 시민의 불안을 덜어주기 위해 진상 발표를 신속히 해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다음날 아침 6시에 평소와 다름없이 일어난 朴대통령은 라디오를 켰으나 사건은 여전히 보도되지 않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신범식 청와대 대변인을 불러 『왜 방송이 늦어지고 있나』면서 『중계방송 하다시피

소상하게 보도해서 국민의 불안을 덜어주고 공비 수색에 국민의 협조를 얻도록 하라』고 지시했다.

보도 관제는 22일 오전 7시를 기해 해제되었다.





공비爆死

자하문 부근에서 교전이 있기 직전인 1월21일 오후 10시 10분경, 채원식 치안국장실 무전기로

긴급 보고가 들어오고 있었다.
「세검동 고갯길에서 이상한 옷차림의 군인 30여명이 술에 취해 청운동 쪽 으로 내려가고 있음」

蔡국장이 현장에 도착했을 땐 이미 교전이 끝난 뒤였고 도로에는 수류탄으로 반파된 버스가

팽개쳐져 있었다. 길바닥엔 최규식 종로경찰서장의 시체와 아직 숨이 붙은 정종수 형사가 그대로

쓰러져 있었다.

 

박태안 형사가생포한 김춘식을 지키고 있었다. 蔡국장은 朴형사와 생포 공비를 차에 태워 근처

효자동 파출소로 데려 갔다가 다시 蔡국장 차로 치안국으로 이동했다 .

시간은 21일 밤 11시가 넘어서고 있었다.

뒤로 젖힌 양 손에 수갑이 채워진 김춘식은 머리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는 소매 없는 등산용 조끼를

입고 양 옆구리에도 주머니를 차고 있었다. 조끼 앞가슴엔 작은 주머니 같은 것을 만들어 위, 아래

두 줄로 네 발씩 모두 여덟 개의 수류탄을 넣고 흔들리지 않게 실로 누벼놓았다.

채원식 국장은 金의 허리에 찬 권총을 뽑아내고 양 옆구리의 주머니에서 휴대용 식량과 주머니

칼을 찾아냈다.蔡국장은 칼날에 쓰인 글을 보더니 곁에 서있던 朴형사에게 보여주었다.

「Made in Japan」이라고 쓰여 있었다. 직원들은 蔡국장의 무장해제 장면을 지켜보고 있었다.

朴형사도 蔡국장을 돕기 위해 金이 입은 조끼 양 옆의 매듭을 풀고 있었다 . 바로 그때 蔡국장이

소리쳤다.



『엎드려!』

몇 초후 「꽝!」하는 폭음과 함께 김춘식의 복부는 산산조각 나고 치안국 복도는 피범벅으로 변했다.

박태안씨의 회고.
『그때 蔡국장은 조끼 윗줄의 수류탄 네 발을 모두 제거하고 아래쪽의 수류탄 세 번째 것을 제거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수류탄은 낚시줄 같이 가는 선으로 네 번째 수류탄 안전핀을 물고 있었던 것을 몰랐던

겁니다.蔡국장이 세 번째 수류탄을 제거하는 순간 네 번째 수류탄 안전핀이 뽑혀 올라온 것이죠』

蔡국장은 안전핀이 뽑힌 채 조끼에 달려 있는 수류탄을 보면서 공비를 복도 한쪽으로 힘껏 밀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때문에 무장해제를 지켜보던 직원들과 朴형사는 파편상도 입지 않았다. 대신 복도와

수사과장실 유리창이 박살나면서 벽면 전체가 피범벅이 되었다.

생포된 공비가 폭사(爆死)로 사라져 버렸다.



蔡국장은 차를 타고 나와 종로경찰서를 들러 직원들을 격려하고 치안국 감찰계장 김덕중 총경을 임시

종로 경찰서장으로 임명했다. 자정 무렵 채원식 치안국장은 청와대 정문을 지나고 있었다.

이 시간에 정일권 국무총리, 이호 내무부장관 등과 군 장성들이 속속 청와대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늘에선 수경사 30 대대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이 누런 연기를 흘리며 빛을 발하는 가운데 화약 냄새가

청와대 주위를 애워싸고 있었다.

蔡국장은 청와대를 지나 세검정 쪽으로 차를 몰게 했다.

경찰과 공비들의 격전이 있은 직후 신문, 통신, 방송사 기자들도 취재에 뛰어 들었다. 그러나 한 시간

여가 지나는 동안 사방으로 튀어 달아난 공비들로부터 언제 어디서 총알이 날아올지 모르는 상황이

되자 자정무렵 각 언론사는 현장 취재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기자들을 철수시켰다.

 

곳곳에 군인과 경찰들이 검문을 하는 중에중앙일보 손석주(61세·現 M&R대표) 사회부 기자와 장홍근

사진부 기자는 만하장(現 올림피아 호텔) 부근에 신문사 깃발을 단 지프차를 세워두고 검문소 통과를

시도하고 있었다.

이들은 지프에 무전기가 없어 본사로부터 철수 지시를 받지 못한 채 현장에 남아 있던 중이었다.

군인들은 검문소를 통과하려는 孫, 洪 두 기자에게 『죽고 싶으냐』며 위협해 시비가 일었다.



채원식 치안국장은 순찰中 무전을 통해 파주 부근에서 교전이 있다는 연락을 받고 출발을 서두르는

순간에 군인들과 시비가 붙은 두 기자를 발견했다. 채원식 국장은 현장을 기록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이들을 불렀다.



『어이! 기자. 이리 와!』

『아, 蔡국장님이십니까. 중앙일보 사회부 손석주 기잡니다』

『당신, 나하고 파주에 갈 수 있겠어? 교전중이라는데도?』

『당연히 가야죠』



타라는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두 기자는 차에 오를 준비부터 했다. 이들을 태운 蔡국장의 차가

구파발을 지나 경기도 벽제 부근에 도착했을 때 蔡국장의 차량 무전기에서 보고가 들어왔다.

『한 놈 잡았습니다. 홍제동 파출소로 연행중입니다』 蔡국장은 즉시 서울로 차를 돌렸다.

당시 홍제동 파출소는 30사단(사단장 허준 준장 )의 임시 작전 지휘본부가 설치된 곳이었다.

시간은 22일 새벽 3시를 넘어서고 있었다.

蔡국장과 두 기자가 파출소에 도착한 지 얼마 안되어 30사단 군인들이 민가 부근에서 생포한 공비

한 명을 파출소로 끌고 들어왔다. 여러 사람이 공비 의 허리춤과 웃옷을 잡고 있었기에 국방색 군복

상의는 몇 군데 단추가 떨어져 나가고 검은 목면 바지는 앞 단추가 열린 채 무릎까지 흘러내린 상태 였다.

 

 

사진부 張기자가 플래시를 터뜨리며 몇 장을 찍은 뒤 밖으로 튀어 나갔다.

軍에 의한 보도관제가 심한 때여서 언제 필름을 빼앗길지 몰랐기 때문이었다.

몇 평 안되는 파출소는 일순간 사람들로 붐볐다. 소속을 알 수 없는 군인, 경찰, 中情요원들로 복작거렸다.

서로가 서로를 모르는 상황에서 孫기자가 공비에게 고압적인 자세로 말을 걸었다.

 



―너, 이름이 뭐야. 나이는.

『김신조다. 스물일곱 살이다』

―주소와 계급은.

『군관(장교)이고 함경북도 청진시 청암구 청암동 3반에 가족이 살고 있다』

―남파 목적이 뭐야.

『청와대를 까러 왔다. 21일 밤 8시에 공격을 개시해 5분 만에 끝낸 후 청와대 車를 뺏어 타고

문산 방면으로 도망하기로 했다. 이것이 잘 안되면 비봉쪽으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지휘자의 잘못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몇 명이 왔어?

『31명이 국군 복장을 하고 왔는데, 1명은 대위, 2명은 중위, 3명은 소위 계급장을 달고 나머지는

사병 복장을 하고 넘어왔다』

―넘어 온 게 언제야?

『16일 평양에서 출발했다』

―무기는?

『수류탄, 장총, 권총이다. 1인당 수류탄 열 개와 탄알 300개 씩을 가져왔다. 우리는 결사대 훈련을

받았으며 모두 군관(장교)이다』



―현재 기분은?

『모든 것이 끝났다. 이젠 겁도 안난다』
孫기자는 金新朝의 윗주머니에서 「지식인들이여 언론 출판의 활동을 위해 싸우라」는 내용의 삐라를

발견했다. 잠시 후 金新朝는 앰뷸런스에 실려 방첩대로 끌려갔다.

 

 



金新朝가 체포된 곳은 자하문 밖 인왕산 기슭에서였다. 1월22일 새벽 1시 30분경, 자하문 밖 세검정

부근에서 잠복 근무를 하던 30사단 공병대 소속 차장석 이병은 세검천 위쪽 인왕산 기슭에서 계곡 쪽으로

살금살금 기어 내려오는 그림자를 발견했다.

 

 

M1소총 자물쇠를 푼 車이병은 검은 그림자를 조준하려 애썼다.

야간사격은 총열 끝에 붙은 가늠쇠도 잘 보이지 않아 빗나가기 일쑤다. 車이병의 사격도 빗나갔다.

괴한은 세검천변 외딴 집 옆에 있는 바위로 몸을 숨겼다. 두 시간 반 전에 경복고등학교 담장을 넘어

도망쳤던 인민군 소위 金新朝였다.



『한 놈 나타났다!』 소대장 박원조 소위와 소대원들이 달려 와 포위망을 쳤다.

朴소위가 플래시로 바위 쪽을 비춰보니 짚단 더미 사이로 사람 그림자 비슷한 것을 보았다.

수하를 위한 암구호를 외쳤다.



『피아노』

『……』

『피아노』

『……』

대꾸가 없자 병사들이 바위 주변에 위협사격을 가했다. 순찰중이던 주희준 소령이 트럭을 끌고 와

헤드라이트로 괴한이 숨은 바위 주변을 환하게 밝혔다. 괴한은 그때서야 짚더미를 헤치고

어정쩡하게 두 손을 들고 일어났다.



『두 손을 높이 들어! 안 그러면 쏜다!』 괴한은 주먹쥔 왼손 안에 가지고 있던 수류탄을 땅에

떨어뜨렸다. 안전핀이 빠진 채 땅바닥을 구르던 수류탄은 군인들과 괴한을 초긴장 속으로 몰았다 .

그런데 몇 초가 지나도 수류탄이 터지지 않았다.

 

불발탄임을 감지한 한 병사가 뛰어나가 수류탄을 차 버리고 괴한을 생포했다.

현장에서 몸수색을 한 결과 괴한의 소지품이 쏟아져 나왔다. 참깨 섞은 엿 두 개, 말린 오징어

한 마리,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의 약품과 30cm짜리 파이프를 가지고 있었다.

물이나 흙 속에 몸을 은폐할 때 숨을 쉬기 위한 호흡용 파이프였다.



나머지 공비들 중 일부는 세검정 부근 민가쪽으로 튀었다. 21일 밤 11시경 홍제동 쪽으로 달아나던

공비 한 명은 지붕을 타고 도망가다 지붕이 내려 앉아 그 집 부엌으로 떨어졌다. 잠을 자던 이상래

(당시 65세)씨와 아들 용선(당시 31세)씨 등 가족 5명이 『도둑이야』라고 소리치며 뛰어나가 몽둥이로

괴한에 달려 들었다. 이들이 괴한과 몸싸움을 하던 도중 괴한의 몸에서 수류탄이 떨어져 나와 가족들은

비로소 무장공비임을 알게 됐다.

李씨 가족 중 한명이 30여m 떨어진 홍제동 파출소에 신고했으나 경찰이 늑장 출동을 하는 바람에

공비와 격투를 벌이던 아들 용선씨는 공비가 쏜 권총에 복부를 맞아 숨졌다. 신고를 받고도 즉시

출동하지 않은 홍제동 파출 소장은 며칠 뒤 파면되었다.



자하문 경복고등학교 후문 부근에서 첫 교전을 벌이고 학교 담을 뛰어넘은 공비는 金新朝뿐 아니라

5명 가량이 더 있었다. 이들은 몰려 다니며 교장 사택으로 뛰어 들어 마당에 수류탄을 던지는 바람에

집안의 유리창이 박살 났다. 폭음소리에 놀라 달려 나온 수위 정사영(당시 45세)씨에게 수류탄을 던져

살해했다.

밤 11시30분 경에는 홍제동 파출소 앞 버스 정거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여자가 유탄에 맞아 숨지는 등

이날 밤 우리측은 최규식 서장과 민간인 6명 등 모두 7명이 사망했고, 박태안 형사 등 3명의 경찰관과

민간인 한 명이 부상했다. 공비를 쫓던 수경사 30대대는 22일 오전 8시경 북악산에서 3명,

오전 11시쯤 다시 한 명의 공비를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22일 오전까지 첫 교전에서 김태식을

포함한 다섯명의 공비를 사살하고 한 명(金新朝)을 생포했다.



1월23일 오후 1시쯤 북한산에서 한 명의 공비가 사살된 이후 공비들은 서울 외곽으로 완전히 빠져

나갔다.

이 무렵 생포?? 金新朝를 심문했던 방첩대에서는 「124군 부대」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해 金新朝에게

북한 전역에 걸친 부대 위치와 金新朝 자신이 훈련받은 부대의 위치 및 건물 요도를 그리게 했다.

金聖恩 당시 국방장관은 이 그림을 들고 본스틸 유엔군 사령관을 만났다. 첩보기를 띄워 항공 촬영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

 



金 前 장관의 증언.
『오산 비행장에서 첩보기 SR-71이 이륙하더니 서해안에서 곧바로 북상하다 가 평양 부근에 이르러

우회전하더군요. 그리고 원산까지 통과하는데 정확히 3분이 걸립디다.

이렇게 해서 얻은 항공사진으로 김신조가 그린 건물과 비교를 해 봤는데 정확했습니다』

방첩대의 조사와는 별도로 공비 소탕에 나선 군경합동 수색대는 1월30일까 지 31명의 공비 중

27명을 사살하고(자폭 포함) 金新朝 한 명을 생포했으나 우리측도 민간인 7명이 사망했고,

이익수 대령 이하 23명의 장병이 전사했으며 부상자만도 52명이나 되는 등 큰 피해를 보았다.

행방이 묘연해진 공 비 세 명 중 한 명은 2월 중순 경기도 양주군에서 시체로 발견되었고

나머지 두 명은 월북한 것으로 판단해 작전을 종결지었다.

 



자료출처 : 월간x선



◈ 당시 생포된 김신조가 말하는 1.21 침투사건


『남조선 수괴를 처단하는 막중임무』

1968년 1월16일 밤 10시. 황해북도 연산군의 124군 부대. 영하 25도로 떨어진 초강추위 속에

남파 특수공작원 31명을 태운 버스가 어둠을 타고 부대를 빠져나갔다. 목적지는 개성 남동부에 위치한

남파공작원 초대소.

얼어붙은 표정의 20대 초중반의 청년 장교들은 24kg에 달하는 꽉찬 배낭을 저마다 하나씩 울러멨다.

모두가 하사관에서 하루 아침에 소위로 임관되는 파격적인 계급승진을 며칠 전 경험한 뒤였다.

그 중 2명은 대위와 중위로 승진했다.

배낭 내용물은 다양했다. 사단 마크가 달린 남조선 군복 일습, 일제 바바리코트에 신사복 한벌,

운동화, 손목시계, 망원경, 트랜지스터 라디오, 지도, 아스피린 소화제 페니실린 각성제 등 비상 약품,

찹살가루를 섞은 엿, 오징어 등 비상식품, 그리고 30발이 한꺼번에 쏟아지는 소련제 기관단총,

8발이 장전되는 소련제 권총, 방어용 수류탄 8개, 대전차 수류탄 2개, 단도…



당초 대원은 76명이었으나 돌연 31명으로 축소됐다. 공격 목표가 청와대만으로 압축된데 따른

조치였다.

원래의 타깃은 청와대 외에 미대사관 육군본부 서울교도소 서빙고 간첩수용소 등 5개소였다.

가히 휴전 이래 최대라 할 만한 초특급 작전이었다.

전날 밤 환송회에서 대취했던 대원들은 최전성기의 체력을 과시라도 하듯, 이미 평소의 모습으로

말끔하게 되돌아와 있었다. 추위 속에서 더욱 맛을 내던 소련제 보트카에 북한 인삼주, 박하술에 생강주,

생맥주…먹다 남긴 닭고기, 돼지고기가 다시 눈앞에 삼삼했다.



『남조선 해방을 위해 남조선 수괴를 처단하는 막중임무』를 강조하던 124군 부대장의 말이 청년

엘리트 전사 김신조의 폐부에 아직도 비수처럼 꽂혀있었다. 그 부대장은 불과 1년반 전 남파돼 경기도

송추에서 고정간첩과 접선하려다 군경 포위망에 걸려 도주, 복부에 총상을 입고 5일만에 임진강을 건너

귀환한 경력을 가진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다음날 새벽, 한때 개성경찰서장의 관저이기도 했던 남파공작원 초대소에 도착했다. 대원들이 남파

직전 잠시 대기하거나 귀환한 다음 하루를 자고 가는 곳이었다. 인삼차를 마시며 40분 휴식을 취한 후

바로 남으로 향했다. 북방 분계선 초소에 도착하자 초병들이 긴장된 표정으로 이 「특수전」의 사나이들을

바라보았다. 부대장의 제의로 즉석에서 혈서를 썼다.

 



『수령동지의 명령대로 임무수행할 것을 맹세함』

『임무를 확인한다. 1조는 청와대 본청사 2층, 2조는 1층, 3조 경호실, 4조 비서실 공격.

5조는 정문 보초 제거 및 청와대 차량 탈취 후 탈주 준비』

 



김신조는 2조의 조장이었다.

『돌아올 때 초소와의 문답 암호는 611이다』



살아 돌아왔을 때나 필요하게 될 것이지만 생명선이나 다름없는 그 암호를 뇌리 깊이 각인해 두었다.

살아 금의환향할 수 있을까. 아마 힘들 것이다. 그러나 화살은 이미 시위를 떠났다. 부모 형제라도

내몫의 행복까지 누릴 수는 있겠지. 복잡한 상념이 빠르게 머리를 스쳤다.

부대장의 한마디를 뒤로 하고 북방한계선을 넘은 것이 밤 9시. 비무장지대 안으로 난 「안전통로」를

따라 전투대열을 갖추고 침투를 개시했다. 1조 소속 전방 척후 2명이 길을 개척하면 후방 척후는

눈위로 발자국을 솔가지로 지우며 뒷걸음으로 진행했다.

예상 침투로는 한국군 25사단과 미군 2사단 관할지의 경계선. 사각지대가 되기 십상인 부대간

경계지역으로 빠진다는 침투전술의 기본을 따른 것이다.

경계선을 밟되 3백m 쯤 미군 지역으로 들어선다는 전략이었다.

지금과는 비교가 안될 정도로 허술한 당시의 휴전선 방어망 이었지만 미군의 경계는 더욱 빈 곳이

많을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 예상은 적중했다.



별어려움 없이 남방 분계선에 다다랐다.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각, 철조망을 헝겊으로 두르고 천천히

잘라냈다. 이곳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다. 경계가 일렬로 펼쳐지는 철책선을 통과한다면 앞으로

듬성듬성 펼쳐질 초소와 검문소를 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나 다름 없다.

중요한 것은 대원들이 감기나 복통에 걸리는 일 없이 계획된 시간에 계획된 장소에 정확히 들어서는

일이다. 날이 밝기 전, 늦어도 새벽 5시 이전에 철책을 2km 정도 벗어나 숙영지를 마련해야 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낮 시간은 숨어 휴식을 취하고 야간 이동에 대비하는 것이다. 대원 중 하나라도 기침이나 설사를

할 정도로 몸상태가 나빠지면 작전은 연기된다. 임진강이 바라다 보이는 야트막한 산중턱에 자리를 잡는

데 성공했다. 보초 2명을 교대로 세우며 휴식을 취했다. 잠들면 얼어죽기 십상이다.

서로를 규칙적으로 흔들며 잠깐씩 눈을 붙였다.



밤에 건널 임진강의 동태를 쌍안경으로 살폈다. 맞은편 석포리의 강언덕, 도하 예정지점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사위가 충분이 어두워진 틈을 타 강변까지 난 조그만 내를 따라 내려선 뒤 얼어붙어 눈이 쌓인

강을 건넜다.

머리에는 위장용 흰 붕대를 감고 몸에는 흰 천을 둘러썼다. 앉은 걸음으로 키를 한껏 낮추며 강을 건넜다.

충분히 결빙됐다고 본 얼음은 순간순간 무게를 받아 쩍쩍 기분 나쁜 소리를 냈다.

 





치명적 실수

어려운 관문은 거의 통과했다. 대원들은 5m 간격을 유지하며 인적 없는 밤 들판을 냅다 달렸다.

마을 하나를 우회하면서 밤 발자국에 놀란 동네 개들이 한차례 짖어댔을 뿐 별다른 소란 없이 파평산을

바라보는 들판까지 진출했다. 파평산을 거쳐 법원리 뒤 삼봉산에 올라 2차 숙영을 했다.



이들이 산악 구릉지를 이동하는 모습은 「행군」이 아니라 「질주」였다. 생각보다 루트가 수월하게

뚫려 방심한 탓일까. 다음날 오전 우연찮게 문제가 발생했다. 오전 10시경 야간 루트를 미리 살피러

나갔던 정찰조가 민간인 나무꾼과 맞닥뜨린 것이다.

 

우씨 성을 가진, 대원들보다 나이가 어린 형제 나무꾼이었다.

이미 한국군 군복으로 위장해 한국군 행세를 했지만 상대는 사태를 대충 짐작하는 눈치였다.

얼르기도 하고 협박도 했지만 처리가 모호했다. 당초 훈련받은 방침대로라면 이런 경우는 즉시 처단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철칙이었다. 그러나 대원들 사이에는 돌려보내자는 의견이 만만찮게 제기됐다.

번거롭고 불필요한 시간이 소요된다는 이유였다.

간단히 말해 사체를 묻기 위해 꽁꽁 얼어붙은 흙구덩이를 파내는 작업을 하기 싫다는 뜻이었다.



조장과 대위 계급장을 단 지휘관은 있었지만 전체를 통할하는 일사분란한 피라미드 조직이 아니라

각기 훈련 수칙대로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수평적 편제가 치명적 결함을 노출한 것이다.

대위와 중위 하나씩을 제외하고는 계급도 모두 똑 같아 지휘계통이 일사분란하지 못했다.

예상했던 상황에는 일기당천의 힘을 발휘하는 용사들이었으나 돌발상황 대처 능력에는 문제가 있는

조직이었음이 차차 드러났다. 야간 이동이 시작되는 시간에 맞춰 풀어주자는 방침이 최종 결정됐다.

나무꾼 형제들은 간발의 차이로 사지를 벗어났지만 대원들은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른 셈이었다.

이는 곧 그들의 생과 사를 가르는 계기가 됐다. 전 일정을 통해 세차례 빚어진 작전 미스 중 첫

과오였다.



처리방침을 무선으로 북에다 조회했으나 공교롭게도 암호가 해독되지 않았다.

무선 교신에 뒤이어 트랜지스터라디오를 통해 아리따운 목소리의 여자 방송원의 목소리가 또박또박

숫자를 토해냈지만 어찌된 일인지 소지하고 있던 암호문으로는 도저히 풀어지지 않았다.

중에 수사기관에서 해독해준 바에 따르면 암호전문은 「원대복귀」였다.



북으로 되돌아가야 했을 31명의 대원들은 계속 남으로 전속질주했다.

발길을 재촉해 노고산을 넘으니 송추골짜기에는 벌써 군인들이 길을 차단하고 있었다.

설마했던 신고가 들어간 게 틀림없었다. 진관사 쪽 계곡을 따라 북한산 자락을 타고 비봉에 도착한

것이 20일 새벽 5시. 영하 20도의 강추위였다.

체력소모가 예상보다 훨씬 심했다.



20일 낮에는 숨어있다가 마지막 코스를 향한 행군을 밤 8시부터 다시 개시했다.

계획대로라면 새벽까지 청와대 뒤 북악산에 도착하게 된다. 그날 밤이 거사 날이다.

지금의 북악 스카이웨이 팔각정 부근이 최종 숙영장소로 잡혀 있었다.

신고가 이미 들어갔건, 군경이 방어망을 구축했건 간에 최종 숙영지까지만 정한 시간에 확보하면

날 밤 북악산을 통해 청와대 뒤통수를 치고 내려가는 루트는 별저항이 없을 것이란 생각이었다.



다음 날은 일요일. 대통령은 이날 밤만은 예외없이 숙소에 있다는 첩보에 따라 거사일을 잡은 터였다.





필사의 탈주

어처구니 없는 일이 또 한번 일어났다. 밤새 눈덮인 바위를 타고 넘는 악전고투 끝에 새벽녘

희뿌옇게 시야에 들어온 자리는 북악산이 아니라 승가사를 바라보는 지점의 북한산 자락이었다.

체력이 소모된 상태에서 눈길에 수도 없이 미끄러져 내리면서 밤길에 방향착오를 일으켜 다람쥐

쳇바퀴 돌기에 그쳐버린 것이었다. 절망감이 엄습해왔다

 


북악산은 아직 멀었는데 날은 잔인하게 밝아왔다. 헬기가 산 주위를 분주히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그 소음이 마치 간을 도려내는 듯했다. 이 상태로는 일요일 밤 안에 도저히 청와대에 닿을 수 없다.

루트를 변경했다. 산행을 포기하고 어두워지자 8시경 산을 내려섰다.

배낭은 산에 묻고 사복으로 일제히 갈아입었다.

기관단총과 권총에 탄환 3백50발 수류탄 단도를 몸에 차고 바바리를 덧입었다.



바로 세검정 길에 닿았다. 버스 정류장에는 종점인지 버스 3대가 한가롭게 서있고 운전사와 차장

아가씨들이 잡담을 나누는 게 보였다. 원 계획대로라면 밤 10시 30분까지 청와대를 습격한 뒤 청와대 차

량으로 북으로 전속질주, 자유의 다리나 남파루트를 통해 야음을 타고 귀환하는 것이었다.



버스를 탈취해 청와대 정문으로 바로 돌진하자는 의견이 있었으나 도보로 걸어가자는 안이 최종적으로

채택됐다. 예정 프로그램이 허물어진 상태에서 일으킨 세번째 판단착오였다. 어둑한 야간 도로 양편에

종대로 갈라서서 행진했다. 상명여대 입구 삼거리 검문소를 별다른 제지없이 통과, 터널이 생기기 전의

자하문고개를향해 비포장 자갈길을 걸어 올라갔다. 고개를 넘어설 무렵 순경 2명이 처음으로 검문을 했다.



『누구냐』

『방첩대다』

『신분증을 보여라』

『부대에 두고 나와 없다』



옥신각신하며 계속 걸음을 재촉하는 대원들 뒤를 순경 하나가 뒤따라가는 형국이 됐다. 곧 청운중학교

조금 못미처 내리막에서 지프 하나가 길을 막아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종로경찰서장』이라며

대원들의 신분을 추궁했다. 『귀대중인 방첩대』라고 하자 『나를 모르는 방첩대원이 어디있느냐』고

심문하듯 말했다.

누군가가 서장에게 총을 발사했고 대원들은 길 양쪽으로 흩어졌다.

김신조는 언덕바지 숲 사이로 뛰어내려갔다. 경복고 후문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인왕산으로 튀어올랐다.

가는 데까지 북으로 튀자는 생각이었다 . 다행히 아직 총은 한 발도 쏘지 않았다. 붙잡히더라도 살인

누명은 쓰지 않는다. 만약의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무기를 모두 산에다 버리고 위협용 수류탄 하나만 남겨

간편한 몸으로 뛰었다.

인왕산 능선에서 바라보니 시내전역이 수경사에서 쏘아올린 조명탄으로 환했다. 당시 청와대 경비를

맡았던 수경사 예하 30대대의 지휘관은 67년부터 전두환 대대장이었다.

그를 따라 도주하던 대원 2명이 홍제동 길에서 처참하게 사살되는 광경을 코 앞에서 목격한 뒤였다.

그보다 나이가 어린 그 두 대원은 노련한 군경력을 갖고 있는 그를 본능적으로 의지하려 했던 것이다.

적진 속에서, 특히 시가지 전투에서는 여럿이 몰려다니는 것이 위험하다는 상식에도 불구하고

『흩어져 뛰라』는 그의 말도 아랑곳 않은 채 따라붙었다. 홍제동 쪽으로 접어드는 큰 길이 앞에 열렸다.

길 건너에는 수색대가숨어있을 것 같은 느낌이 왔다.

그러나 그 길을 건너야만 진로가 열리게 돼있는 상황이었다. 좌우로 나눠

건너뛰라고 지시했다. 길로 나서는 순간 집중 사격이 쏟아졌고 대원 둘은 그 자리에서 거꾸러졌다.

인왕산 서북쪽 8부 능선을 타고 올랐다. 새벽 3시. 차가운 밤 하얀 초생달이 그를 내려다 보고 있었다.

흥건하게 젖은 땀이 채 마를 새도 없이 연신 새로운 땀이 솟아올랐다. 일이 성사됐다면 지금쯤

임진강을 넘어섰을 시간이다. 틀린 것 같다. 자폭할까, 항복할까.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3년 넘도록 한번도 보지 못한 그리움이 순간적으로 스쳐갔다.

문득 눈앞이 아득해지며 허깨비를 보았다고 생각하는 순간 바위 뒤편에 잠복하고 있던 군인과

마주쳤다. 수류탄을 들고 잠시 대치했다. 찰나의 시간이 지구를 한 바퀴 도는 듯 느껴졌다. 투항해서

살아남아야 한다. 순간적인 결정이었다. 뭐라고 외치는 상대의 말을 귓전으로 스치며 맥없이 수류탄을

땅에다 떨궜다. 풀린 혁대로 손을 묶인 채 인근 홍은동 파출소로 연행됐다. 머리 속이 멍해올 뿐,

마음도 몸도 무감각했다.

파출소 안이 따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이 쏟아져왔다.





「생포」 아닌 「투항」

한참 후 수사를 받으면서 자신이 마지막 들고 있던 수류탄이 작동하지 않는 불발탄이었음을

알게 됐다. 자폭하려 했어도 죽지 못할 운명이었던 셈이다. 그동안의 신문 스크랩을 얼핏 훑어

보았다. 접전 이후 궁금했던 쌍방의 희생자는 이를 통해 짐작할 수 있었다.



『1월 21일 밤 10시경 서울 종로구 청운동 서대문구 홍제동 등에 31명의 무장공비가 침입,

휴전 이후 북괴는 가장 큰 규모로 도발행위를 자행했다. 이들 공비들은 19일 오후 경기도 파주군 삼봉산에

나타났다가 민간인들에게 발견된 자들로 청운동 어귀까지 침입했다가 비상망에 걸렸는데 이 자리에서

공비들을 검문하던 최규식 종로경찰 서장이 총격을 받고 순직했으며 마침 현장을 지나던 시내버스 한 대에

수류탄을 던져 승객들을 부상시키고 홍제동 민가쪽으로 달아난 일부 공비들은 집주인을 사살하는등 만행을

자행, 민간인 6명이 희생되었다.

이튿날인 22일 군 수뇌부는 합참에 대간첩작전지휘소를 설치하고 서부전선의 3개사단 32전투단 미2사단

등을 투입, 합동수색작전을 벌이고 공군도 헬기등을 동원했다. 합참 당국자가 밝힌 바에 따르면 서울에

침투한 이들 무장공비는 전원이 인민군 장교로 그들의 임무는 청와대 공격이었다. 노고산 지역 작전을

진두지휘하던 15연대장 이익수 대령을 포함, 장교 5명과 사병 19명이 전사했다』

산 자와 죽은 자의 차이는 뚜렷했다. 기자회견과 현장검증 때까지도 남파당시 올백으로 빗어넘겼던 포마드

바른 머리칼을 가지런히 간직하고 있던 김신조는 이곳 저곳을 다니며 동료들의 주검을 하나씩 확인했다.

홍제동 길 눈 앞에서 사살됐던 두 후배 대원은 눈을 부릅뜬 채로 죽어있었다.

그 둘은 오랫동안 꿈에 나타나 그를 괴롭혔다.

임진강까지 북상, 강 위를 흐르는 얼음을 타고 손으로 노를 저어 북으로 헤쳐나가다 사살된 대원도 있었다.

노고산에서 가장 많은 11명이 사살됐다. 쓰러지면서 수류탄 안전핀을 문 채 엎드려 수색대원을 폭사케 한

대원도 있었다. 대부분 교육받은 대로 왔던 길을 되돌아 퇴로를 삼은 흔적이 역력했다.

당시 군당국은 「생포 1명, 나머지 전원 사살」로 발표했지만 실은 1명이 북으로 탈주해갔다는 사실을

오랜 세월이 지난 후 알게 됐다. 그 대원은 이후 남파 특수부대의 지휘관이 되어 영웅대접을 받고 있다는

말을 귀순자를 통해 듣게 됐다.

김신조는 지금까지 남한 생활에서 몇가지 크게 섭섭한 점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생포」라는 당국의

발표다. 도주중 붙잡힌 것은 사실이지만 분명히 교전 의사가 없었고 자폭용 수류탄을 버리고 자의로

투항했다는 사실이 감춰졌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는 그때까지 단 한번도 무기를 사용한 적이 없었는데 이는 현장검증에서 그가 버린 탄창이

한발도 없어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었고 총신에서도 전혀 발사 흔적이 나타나지 않은 데서도 확인된

사실이었다.

당시의 수사기록도 분명히 그렇게 남아있지만 대국민 홍보과정에서만 「생포」로 발표된 것이라는 것.

남들에게는 별차이가 아닐지 모르지만 본인에게는 하늘과 땅만큼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이 생포와 투항이다.

희생자들에 대해 그가 직접 가해 행위를 한 적은 없다는 사실에 대해 유가족들이 일말의 의혹도 갖지말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 때문이다. 사실관계를 떠나서 살아남았다는 이유 하나로 그에게 쏟아졌던 유가족들의

원망이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비상 경계령이 이미 내려진 상황에 야간 청와대 뒷길을 시내버스가 헤트라이트를 켜고 한가롭게

운행하도록 방치한 당국의 무신경한 조치, 대규모 무장공비 침투 신고를 일찌감치 접수하고서도 소수

경찰병력으로 청와대 뒷 길목을 차단하려 했던 일, 대로변 민가에 대한 안전 조치가 전혀 취해지지 않았던

일…

 

휴전선 자체가 마음만 먹으면 여반장으로 뚫리던 당시의 방위망 수준으로 미루어보면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는 치안수준이었다. 그처럼 허술한 상태에서 희생자가 더 많이 생겨났던 측면도 있다.



그러나 그 모든 책임은 무장공비, 특히 살아남은 김신조에게 쏟아부어졌다.

그가 마음 속에 담아두고만 있던 몇몇 생각을 조금씩 말하기 시작한 것은 94년 자신의 짧은 자서전격인

「나의 슬픈 역사를 말한다」(동아출판사)를 출간하면서부터다. 관계당국의 논란을 거쳐 어렵게 결정된

이 책 출간은 문민시대 하에서 그가 얻은 가장 큰 소득 중 하나다.

어쨌거나 그는 살아남기를 선택했다. 그때부터 그의 목숨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26세, 아직 세상의 여러

가지를 채 경험하지도 못한 청춘은 이날부로 지금까지의 전생을 한칼에 끊어버린 채 덤으로 받은 새

인생을 살도록 운명지워졌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어느것도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진행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수사가 시작됐다. 가혹행위는 없었고 스스로 과분하다 생각될 정도로 신사적인 대접을 받았다.

오히려 괴로움은 과거를 회상하는 진술을 하면서 시작됐다. 자신이 완전히 뿌리를 상실했다는

공포감, 그리고 북에 남겨진 가족들이 당할 고초가 현실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료출처 : 신x아 




김신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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