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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高麗·몽골軍의 日本 상륙(中)

작성자대한나라|작성시간18.01.29|조회수260 목록 댓글 0
高麗·몽골軍의 日本 상륙(中)

金方慶의 전략대로 계속 攻勢를 걸었다면 오늘의 日本은 없었다 鄭淳台 月刊朝鮮 편집위원

高麗장수 金方慶:『육상에서 宿營하고 계속 攻略해야 한다』
몽골장수 흔도:『피곤한 군사를 몰아 깊이 들어갈 수는 없다』

日本 도서지역에서 우는 아이를 달랠 때:『무쿠리(몽골), 고쿠리(高麗)가 왔다』

운명의 날―1274년 10월20일의 작전회의에서 麗蒙연합군의 두 장수의 견해는 팽팽히 맞섰다. 결국, 몽골장수 ?都(흔도)의 계책대로 歸艦한 연합군은 그날 심야와 다음날 새벽에 걸쳐 몰아친 大暴風雨에 의한 艦隊의 難破로 궤멸적 타격을 입고 말았다. 만약 金方慶의 전략에 따라 陸上 橋頭堡를 확보하고 武器와 兵站물자를 양육해 두었다면 그후 전투상황은 日本軍에 絶對不利했다.

日本 騎馬武士의 個人戰法에 대한 麗蒙연합군의 集團戰法, 그리고 당시의 일본인으로선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鐵砲의 위력―이에 압도당한 日本軍은 규슈의 최고사령부 大宰府까지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大宰府가 무너졌다면 가마쿠라 幕府도 붕괴되었을 터이고, 그러했다면 日本의 운명도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風濤險阻― K포인트에서 回航
<1274년 10월 麗蒙연합군의 함대가 집결했던 對馬島의 아소우灣 .>

지난 11월26일 오전 10시20분, 記者는 釜山港을 출항하는 大亞고속해운 소속 200t급 여객선 「씨플라워」에 승선했다. 지금으로부터 730년 전(1274년 음력 10월) 麗蒙연합군이 馬山港에서 출항하여 쓰시마(對馬島)-이키시마(壹岐島)를 거쳐 하카타(博多)港에 상륙했는데, 기자도 그 바닷길을 따라가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마산항에서 출항하든 부산항에서 출발하든 거제도 해역 이후엔 어차피 같은 海路(해로)를 타는 셈이다.

구름이 낮게 끼어 視界(시계)는 불량했지만 포근한 날씨였다. 부산에서 對馬島까지는 참으로 가깝다. 50km도 되지 않는 49.5km다. 쾌청한 날이면 影島 태종대나 海雲臺 달맞이고개 위에만 올라도 육안으로 그 실루엣을 볼 수 있는 섬이다.

씨플라워號는 파도를 하얗게 가르며 잘도 달렸다. 指南鐵(지남철)에라도 끌리듯 자꾸 對馬島로 다가서고 있다고 느꼈다. 구름만 끼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라고 생각하던 무렵이었다. 때아닌 船內 방송이 흘러나왔다.

『船體(선체)가 심하게 흔들리니 승객들은 船內에서의 이동을 삼가해 주십시오』

船窓(선창)을 통해 넘어다본 바다는 파고가 좀 높기는 했다. 원래, 부산과 對馬島 사이의 大韓海峽(대한해협)은 거칠기로 호가 좀 나 있다. 출항한 지 30분쯤 되었을까. 다시 船內 방송이 흘러나왔다.

『승객들의 안전을 위해 부산항으로 回航(회항)하게 되었으니, 이 점 양지해 주시기 바랍니다』

「승객의 안전」을 위해 선장이 「K포인트」에서 回航을 결심했다는 데 대해 승객으로선 오히려 고마워해야지 불평을 늘어놓을 수야 없는 것 아닌가. 출항 1시간 만에 釜山국제여객선터미널으로 되돌아왔다. 부산과 對馬島 사이를 오가는 유일한 여객선 씨플라워號는 이틀 후인 10월28일에 출항한다고 했다.

갑자기 「風濤險阻」(풍도험조: 바람과 파도가 험하여 막힘)라는 네 글자가 머리에 떠올랐다. 바로, 高麗의 재상 李藏用(이장용)이 몽골(元)의 황제 쿠빌라이에게 보낸 書狀(서장)에서 구사했던 문자다. 高麗 조정은 日本 정벌을 향한 쿠빌라이의 野望을 「기술적으로」 누르기 위해 「風濤險阻」라는 핑계를 내세웠던 것이다. 쿠빌라이가 고려 국왕 元宗에게 보낸 詔書(조서)에도 역시 「風濤險阻」라는 용어가 들어 있다.

對馬島 근해에서 停船해 버린 코비號

이 날 굳이 對馬島로 가려면 방법은 있었다. 오후 1시에 부산에서 후쿠오카(福岡)로 직행하는 배편이 있다고 했다. 후쿠오카에 가기만 하면 對馬島로 가는 여객선뿐만 아니라 여객기까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씨플라워號. 부산에서 후쿠오카로 가는 다른 여객선(항해거리 137km)은 뜨는데, 항해거리가 50km에 불과한 대마도行 여객선이 뜰 수 없다면 「그건 너, 씨플라워 때문」이 아니겠는가. 大亞고속해운 측은 『船種(선종)이 다르기 때문』이라고 변명했다.

취재 약속시간을 고치는 등의 번거로움은 있었지만, 부산에서 이틀을 묵으며 기다리기로 했다. 순서대로 답사해야 나중에 글쓰기에도 편리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씨플라워號는 이틀 후인 11월28일에도 뜨지 않았다. 출항 취소의 이유는 역시 「기상악화」였다. 기자는 같은 날 오전 9시15분에 출항하는 未來제트 소속 하카타(博多)港 직행 여객선 코비號에 승선(요금 8만5000원)했다. 꾸물거리다간 산토끼 잡으려다 집토끼까지 놓쳐 버릴 염려가 있었기 때문이다.

코비號도 對馬島 近海에서 큰 파도를 만났다. 바다 한 가운데서 230t 급은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船內 방송이 흘러나왔다.

『추진기에 異物質(이물질)이 유입되어 이물질 제거 후에 운항하겠으니 좌석에서 움직이지 말아 주십시오』

船窓 밖으로 내다보니 형무소 담 높이 만 한 파도의 연속행렬이 230t짜리 코비號를 꽤 심하게 우롱하고 있었다. 좀 불안했다.

코비號는 10분 만에 시속 80km의 정상운항에 들어갔다. 對馬島 북단을 지나 對馬해협으로 들어서니 거칠던 바다는 언제 그랬냐는 듯 얌전했다. 예정보다 25분 늦은 오후 1시20분 코비號는 하카타港 국제터미널에 입항했다.

기자로선 하카타港에의 첫 상륙이었다. 「역사의 도시」 하카타는 현재 후쿠오카市의 하카타區로 편입되어 있다. 과거의 大都護府(대도호부) 소재지였던 東萊가 釜山市의 東萊區로 편입된 것과 마찬가지의 逆轉(역전)현상이다. 하카타 지하철역에서 5분 거리의 「하카타 그린호텔」을 숙소로 삼았다. 우선 하카타 일원의 답사부터 시작했지만, 이 글은 730년 전 麗蒙연합군의 行路(행로)에 따라 기술될 것이다.

80騎로 3만大軍을 막으러 나선 對馬島主

12월1일 오전 8시30분, 記者는 쓰시마空港에 내렸다. 후쿠오카空港에서 日本航空 여객기 141편(요금 1만1950엔)을 타고 출발한 지 꼭 30분 만이었다. 공항에서 바로 택시를 잡아 타고 코모다(小茂田)로 달렸다. 나가사키(長崎)縣에 속하는 對馬島는 우리나라 울릉도처럼 길이 좁고 험난하다. 평지는 드물고 온통 산이어서 대중교통수단은 별로 없다. 면적은 709km2, 우리나라의 濟州道보다는 작지만, 巨濟島보다는 크다. 인구 약 4만3000명으로 2004년 3월1일자로 市로 승격된다.

麗蒙연합함대는 출항 이틀 후인 1274년 10월5일(이하 麗蒙연합군의 日本정벌 관련 날짜는 모두 음력) 오후 4시경, 對馬島 아랫섬의 사스우라(佐須浦)에 상륙했다. 사스우라가 바로 지금의 코모다이다. 對馬島의 중심지인 이즈하라(嚴原)와는 아랫섬의 「中央山地」를 가운데 둔 반대측 북서해안에 위치해 있다.

「八幡愚童記」(팔번우동기)라는 일본 측 사료에 따르면 앞바다를 뒤덮은 異國船(이국선)의 출현에 놀란 사스우라의 촌민들은 급히 달려가 이즈하라의 國府館(국부관)에 외적의 침입을 고했다. 당시 對馬島主는 소오 스케쿠니(宗助國)라는 68세의 武士였다. 그는 즉각 一族郎黨 80여 騎를 이끌고 그날 밤중에 사스우라로 진발했다. 뒤따랐던 一族郎黨 중에는 助國의 아들 宗右馬次郞이라는 소년무사로부터 宗甲斐六郞이라는 칠순의 노인도 섞여 있었다. 이 80여 騎는 이즈하라 주둔 武士團의 총력이었다고 한다.

다음날인 10월6일 오전 2시경, 코모다에 도착한 助國은 오전 6시 眞繼男이라고 하는 통역을 넣어 해안에 상륙해 있던 몽골군 지휘관에게 그 來意를 물었지만, 몽골군은 雜談(잡담) 제하고 화살부터 메뚜기떼처럼 날렸다.

「宗氏家譜」에 따르면 助國은 부하들을 독전하며 300명의 상륙부대를 일단 바다로 물러나게 했지만, 麗蒙軍은 다시 전함 7, 8척으로부터 약 1000명의 軍勢를 상륙시켜 맹공을 가했다. 전투는 오전 6시부터 오전 8시까지 계속되었는데, 2시간 만에 對馬島軍은 전멸했다.

助國은 戰死 직전에 郎黨의 小太郞과 兵衛次郞을 불러 「전장으로부터 탈출하여, 危急을 다자이후(大宰府)에 고하라」고 명했다고 한다. 당시 大宰府는 규슈(九州)를 통괄지휘하는 鎭西奉行(大宰)의 政廳(정청) 소재지였다. 鎭西奉行은 히젠(肥前)國의 守護(수호: 가마쿠라 幕府 시대의 지방장관)인 쇼니 츠네쓰케(小貳經資)였다.

武士의 悲壯美

助國은 노구에도 불구하고 진두에서 용전했지만, 그것은 螳螂拒轍(당랑거철: 사마귀가 수레 앞을 막아 섬)이었다. 敗할줄 뻔히 알고도 회피하지 않고 출진한 것이라면 그건 책임감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는 장렬하게 전사함으로써 「武士의 역할」을 완수했다.

「對馬島史」에는 연합군의 主力은 對馬 중앙부 아소우(淺茅)灣에 집결, 그 일부가 코모다에 내습했다고 하는 것으로 미루어 코모다 이외에 對馬의 주요 거점들인 히타카츠(比田勝), 미네우라(三根浦), 카시우라(加志浦) 등지에도 상륙, 거기서도 在地武士들과 전투가 벌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몽골군은 이후 열흘 가까이 對馬島에 머물며 약탈을 감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전투의 끝머리란 으레 그러한 것― 더구나 勝者가 악명 높은 몽골軍임에랴…. 살아남은 주민들은 모두 깊은 산 속으로 피난했을 터이었다.

지금의 코모다는 필자가 이제껏 방문했던 일본의 浦口들 가운데 가장 쓸쓸하고 가난한 곳이란 느낌을 받았다. 「對馬島의 젖줄」이었던 한반도와 가까운 코모다―帆船(범선)시대엔 휘영하게 번영했을 것이다. 코모다 해변의 古戰場을 걸었다. 해변에는 宗助國을 모시는 「코모다하마 神社」가 쇠락한 모습으로 남아 있다. 필자는 자기 나라를 지키려다 전몰한 宗助國의 石碑(석비) 앞에서 敬意를 표했다.

神社로부터 약 200m 정도 남방의 해안에는 宗助國의 부하인 사이토 스케사다(齊藤資定)라는 勇士가 분전하다가 최후엔 스스로 자기 머리를 바위에 쳐박아 죽었다는 현장도 표시되어 있다. 勇士의 최후란 이처럼 東西古今과 彼我(피아)를 막론하고 悲壯美(비장미)가 있다.

이곳 사스가와(佐須川)를 따라 내륙부로 들어가면 「카시네」라는 작은 마을 있다. 이곳 法淸寺에는 助國의 「胴塚」(동총)이 있다. 목 없는 몸만 묻었던 무덤이다.

이즈하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카미자카(上見坂) 전망대에 올랐다. 여기서 내려다본 아소우(淺茅)灣은 일본 최고의 절경으로 손꼽힌다. 육지의 침강에 의해 생성된 전형적인 리아스식 해안으로 그 돌출부들이 문어발처럼 얽히고설켜 일대 장관을 이룬다. 이곳에 麗蒙연합군의 大함대가 정박했다. 아소우만을 경계로 對馬島는 윗섬과 아랫섬으로 나눠진다.

對馬島까지 와서 百濟人(백제인)들이 만든 일본 最古의 성터인 카네타노키(金田城)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지에서 「朝鮮式山城」으로도 불리고 있는 이 城은 663년 백제부흥군-倭軍의 연합군이 白村江(지금의 금강) 전투에서 羅唐연합군에게 패전한 후 일본으로 망명한 百濟 유민들과 왜인들이 羅唐연합군의 침공에 대비하여 667년에 축조한 것이다. 성벽은 높이 2∼5m, 길이 5.4km. 이후 金田城은 大陸의 동향을 살피는 日本의 최전선 기지로 활용되었다.

카네타山城은 對馬공항에서 코모다로 가는 길목에 위치해 있다. 필자는 코모다에 들어서기 전에 택시를 잠시 세워놓고 카네타山城의 성돌이 빤히 보이는 지점까지 올랐다가 갈 길이 바빠 下山했다. 대마공항-카네타城-이즈하라 중심가 코스를 일주한 후 필자가 지불한 택시요금은 1만5080엔이었다.

對馬島를 정복한 연합군은 이즈하라港 등지에서 약 열흘간 휴식을 취한 후 다음 공격목표인 이키시마(壹岐島)로 진발한다. 여기서 잠깐, 독자들의 이해를 위해서는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대목이 있다. 바로, 몽골(大元)의 황제 쿠빌라이는 왜 日本원정을 감행했는가 하는 문제이다.

咸安 사람 趙彛의 獻策

「元史」 日本傳에 『至元 2년(1265), 고려사람인 趙彛(조이) 등이 일본국과 通해야 한다고 아룀으로써 使臣을 뽑았다』는 구절이 있다. 바로 이것이 世祖 쿠빌라이가 일본침공을 결의하는 동기였다고 한다.

즉, 쿠빌라이가 南宋의 정복에 한창 분망할 때 趙彛가 『高麗의 동방 해상에 日本이라는 나라가 있는데, 南宋과 교역하는 밀접한 관계인 만큼 (南宋을 고립시키려면) 일본을 招諭(초유)하여 (몽골 편으로) 끌어들이면 좋다』는 계책을 내 놓았다는 것이다.

趙彛는 경남 咸安 출신으로서 그곳이 일본에의 門戶(문호)인 合浦 및 金海에 가까워 일본사정에 통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몽골군의 고려 침입 때 몽골군에 붙어 몽골로 들어가 관료가 되었는데, 進士試에 합격할 정도의 수재였는 데다 여러 나라 말을 구사했으며 행정수완도 제법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곧 두각을 나타내어 쿠빌라이의 知遇(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런 그가 쿠빌라이로부터 『어떻게 南宋을 제압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위와 같이 답변했다는 것이다.

趙彛의 獻策(헌책)에 따라 世祖 쿠빌라이는 日本에 「정중한」 國書를 보내 通交를 요구했다. 그 國書가 비록 정중한 형식을 취했다고는 하지만, 그 골자는 물론 일본에 대해 服屬(복속)을 촉구하는 것으로서, 만약 그것을 거부하면 무력행사도 불사하겠다는 점을 은근히 암시하고 있었다.

이같은 通交 요구가 무력행사로까지 발전하게 된 것은 일본이 끝내 服屬을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한편 고려 정부는 처음부터 몽골의 일본원정을 저지하려고 부심하고 있었다. 일본원정을 강행할 경우 인적·물적으로 피해가 가장 큰 나라는 高麗 그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몽골의 일본 招諭(초유)와 그 원정을 저지하려고 비상하게 노력했던 인물은 당시 고려의 재상 李藏用(이장용)이었다. 그는 어떻게든 蒙使(몽사)의 일본行부터 막으려고 했다.

高麗 재상 李藏用의「演劇」

趙彛의 진언이 있었던 다음해인 1266년 11월, 쿠빌라이는 병부시랑(국방차관) 黑的과 예부시랑(문교차관) 殷弘을 日本招諭使(일본초유사)로서 고려에 파견했는데, 그들이 고려국왕 元宗에게 전달한 詔書(조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 그대 나라 사람 趙彛가 와서 일본은 그대 나라와 가깝다고 말했다. (中略) 漢·唐 이래 일본은 중국과 (사신을) 통했다. 故로 지금 黑的 등을 일본에 보내 통교하려 한다. 卿(경: 고려 국왕 元宗)은 사신이 갈 수 있도록 길을 열도록 하라. (中略) 風濤險阻(풍도험조)를 이유로 사양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이 초유사는 일본에 보내는 쿠빌라이의 國書도 휴대했는데, 그 國書의 말미에 『서로 通好하지 않는 것을 어찌 一家의 이치라 하겠는가. 兵을 사용하는 데 이르러서는 그것 누구에게 좋으랴. 王은 그것을 깊이 생각하라』고 쓰여 있었다.

李藏用은 이 國書의 내용을 알고 쿠빌라이의 욕망이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을 내다보았다. 有史 이래 한 번도 외침을 받지 않았다는 프라이드―더구나 유화적인 京都(교토)의 天皇조정을 힘으로 찍어누르고 실질적으로 日本을 지배하는 가마쿠라(鎌倉) 막부가 그같은 위협적인 언사에 굴복해서 招諭에 응할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난처해지는 것은 高麗다. 결국 몽골이 일본원정을 감행할 것이고, 그럴 경우 高麗가 그 선봉을 강요당해 상당한 희생을 치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李藏用은 蒙使의 일본行을 저지하기 위해 하나의 연극을 연출했다. 黑的 등 蒙使에게 『일본 招諭가 有害無益(유해무익)하고, 도중의 바다는 험난하기 때문에 결코 일본에 건너가서는 안 된다』고 강조하는 서한을 보냈던 것이다.

黑的과 殷弘은 출발 직전 李藏用의 편지를 읽었다. 바다에 약한 그들은 겁을 집어먹었던 것 같다. 일단 蒙使 일행은 고려의 樞密院副使 宋君斐(송군비)의 안내로 合浦를 경유하여 巨濟島에까지 내려갔지만, 거기서 되돌아오고 말았다. 蒙使 일행은 『風濤險阻 때문에 귀국하게 되었다』고 쿠빌라이에게 보고했다. 물론 李藏用이 연출한 「연극」이 일시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때 李藏用도 쿠빌라이에게 다음 내용의 辨明書를 보냈다.

<巨濟島에 이르러 멀리 對馬島를 바라보니 大洋萬里, 風濤가 하늘을 치고 (中略) 어찌 上國의 사신을 받들어 위험을 무릅쓰고 가볍게 나아갈 수 있겠습니까. 설사 對馬島에 이를지라도 그 풍속이 완고하고 추악해서 예의가 없습니다. 만약 不軌(불궤)가 있으면 장차 이것을 어찌하겠습니까. 이러하여 모두 두려워함에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일본은 본래 小邦(소방: 고려)과 通好(통호)하지 않고, 다만 對馬島人이 때때로 무역의 일로 金州(金海)를 왕래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쿠빌라이의 야망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1266년의 제1차 일본 초유에 이어 1267년 제2차 초유, 1268년의 제3차 초유, 1269년의 제4차 초유를 거듭 시도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전혀 응답을 보이지 않았다.

『이리처럼 용맹하여 죽이기를 좋아하고…』

1270년 제5차의 사신 趙良弼(조양필)은 일본이 朝貢(조공)하지 않으면 출병한다는 쿠빌라이의 의도를 통고했다. 趙良弼은 陜西路宣撫使(섬서로선무사)를 역임한 女眞人이었는데, 고령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일 본초유사를 자원했던 거물급이다. 그는 이전의 4차에 걸친 초유사와는 달리 교토(京都)行을 주장했다. 가마쿠라 幕府와 京都 조정을 은근히 갈라놓으려는 책략을 구사하려고 했을 것이다.

西部 일본의 통괄기관이었던 大宰府가 그의 수십 회에 걸친 요청을 거부하자 그는 國書의 寫本(사본)을 만들어 가마쿠라 幕府에 보냈다. 이때 가마쿠라 幕府의 최고권력자인 「執權」(집권)은 나이 불과 18세의 청년 호조 토키무네(北條時宗·1251~1284)이었다. 時宗은 단호하게 朝貢(조공)을 거부하고 京都 조정의 타협적인 태도를 억누르는 다음, 西國의 守護·地頭(지두: 우리나라의 현감 정도의 벼슬)들에게 방위 준비를 下命했다.

쿠빌라이는 제5차 초유의 실패 이후 일본이 위협만으론 결코 굽히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깨달았다. 쿠빌라이는 高麗에 대해 兵船 900척의 건조와 병사의 징발을 명했다.

答書도 받지 못한 趙良弼은 1272년 1월 고려의 수도 開京을 경유하여 燕京으로 되돌아갔다. 그때 그는 大宰府의 동의를 얻어 일본인 12명을 동행시켜 그 체면치레를 하려고 했지만, 쿠빌라이는 그 접견을 허락하지 않고 즉각 일본으로 되돌려 보내라고 명했다.

이리하여 1272년 4월, 일본인 12명의 송환을 겸하여 파견된 제6차의 초유사가 일본으로 건너갔다. 이때의 正使도 趙良弼이었다. 그는 이후 약 1년간 大宰府에 머물면서 日本의 國政·官制 및 州郡의 명칭 혹은 지리·풍속·산물 등을 견문한 보고서를 작성해 쿠빌라이에게 올렸다.

이때 쿠빌라이는 일본 원정의 장애로 되고 있던 고려의 三別抄(삼별초)를 토벌하고 일본에의 출병을 결의하면서 趙良弼에게 의견을 구했다. 그러나 趙良弼은 쿠빌라이의 뜻에 영합하지 않고 다음과 같이 그 무모함을 諫言(간언)했다.

<臣, 일본에 머문 지 歲餘, 그 民俗을 보니 狼勇(낭용: 이리처럼 용맹함)하여 죽이기를 좋아하고 君臣·父子·上下의 禮를 알지 못합니다. 그 땅은 山水가 많아, 耕桑(경상)의 利도 없습니다, 그 사람들을 얻어도 도움이 되지 않고, 그 땅을 얻어도 富가 더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물며 舟師(주사)가 바다를 건너는 일은 海風으로 기약할 수 없고, 禍害도 측량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有用의 民力을 가지고 無窮(무궁)의 巨壑(거학: 큰 구덩이)을 메우는 것과 같습니다. 臣 생각건대, (일본을) 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高麗 백성들의 무거운 짐

1273년 5월, 최후의 일본 초유사 趙良弼이 귀국함으로써 쿠빌라이는 일본의 의사를 거듭 확인했다. 쿠빌라이는 제주도의 三別抄를 평정한 뒤 開京으로 개선한 장수들을 元(몽골)의 大都(北京)에 소집, 회의를 열고 일본 정벌을 명했다.

원정군의 지휘부는 ♥都(흔도)·洪茶丘(홍다구)·劉復亨(유복형) 및 고려의 장수 金方慶의 4인으로 구성되었다. 총사령관은 ♥都. 홍다구와 유복형은 右副元帥와 左副元帥였다. 고려군을 이끄는 金方慶에게는 丞相(승상) 다음의 지위인 開府儀同三司(개부의동삼사)라는 작위가 수여되었다. 개부의동삼사라면 일찍이 신라·백제·고구려 임금들이 隋·唐의 황제로부터 받은 작위이다.

金方慶은 황제로부터 『拔群(발군)의 戰功을 바란다』는 격려와 金製 안장과 綵服(채복: 비단옷)을 받고 귀국했지만, 그 마음을 결코 밝지 못했다. 쿠빌라이는 고려에 대해 병사 8000명, 뱃사공·水夫 1만5000명을 차출하도록 명했기 때문이다.

40여 년에 걸친 몽골군의 침략, 3년에 걸친 삼별초의 반란으로 고려는 황폐화해 있었다. 고려 백성들이 草根木皮(초근목피)로 연명하고 있었던 것이다. 고려 국왕 元宗은 쿠빌라이에게 간청하여, 동원병력을 병사 6000명, 뱃사공·水夫 6700명으로 하향조정했다.

이러한 일본 원정의 전략을 세운 쿠빌라이는 2만 명의 自國兵을 동원했다. 그중 5000명은 高麗에 주둔하던 屯田兵(둔전병)이었고, 나머지는 신규로 징발한 몽골족·여진족·漢族의 장병들이었다. 이밖에 수천 명의 뱃사공·水夫도 따로 징발되었다. 여기에 고려군과 합치면 4만 명에 가까운 병력이었다. 그들은 1274년 5월부터 잇달아 고려의 合浦에 도착, 그 일대에 집결했다.

드디어 洪茶丘가 高麗의 工匠(공장)·役夫(역부) 3만여 명을 무자비하게 닥달해서 건조한 군함 900척도 合浦에 집결했다. 출정의 시기가 7월로 정해졌다.

그런데 그 출정을 앞둔 6월 중순에 高麗 국왕 元宗이 재위 15년에 타개했다. 元의 大都에서 세자 諶(심)과 황녀 쿠츠르가이미시(쿠빌라이의 딸인 齊國大長公主)의 결혼식이 거행된 직후의 일이었다. 그래서 세자 諶(忠烈王)의 즉위식전과 元宗의 服喪(복상)이 잇달아 거행되는 바람에 출정의 시기가 연기되었다. 원정군이 合浦를 출항한 것은 元宗의 유해가 開京 교외 소릉에 안장된 9월12일의 다음 달, 즉 1274년 10월3일이었다.

제1차 정벌군의 병력과 장비



제1차 원정군의 병력은 기록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다. 「高麗史」에는 몽골군은 2만5000명이고, 고려군은 장병 8000명과 梢工·引海(바다길 안내자)·水手 6700명 등 1만4700명이다. 이를 모두 합치면 연합군의 軍勢는 3만9700명이다. 고려군의 지휘부는 三翼軍 中軍都督使 金方慶, 副使는 左軍이 김선, 右軍이 金文庇(김문비)로 구성되었다.

몽골군은 원정군의 배후에서 督戰隊(독전대)의 역할을 하고, 선봉의 역할은 고려군이 감당해야 했다. 원정군의 편성은 千戶制(천호제)를 취해 그 아래로 百戶, 十戶로 세분, 제각기 지휘자를 두었다. 이것이 유목민족국가의 전통적 시스템이다.

合浦를 출항한 병선 900척은 100∼300t급의 千料舟(천료주)가 300척, 상륙용 주정인 拔都魯輕疾舟(발도로경질주)가 300척, 음료수를 싣는 吸水舟(흡수주)가 300척이었다. 이 중 장병과 軍糧, 말과 기타 군수품을 적재한 것은 천료주로서 이것이 주력함이었다. 상륙정 앞에 붙은 「拔都魯」(바토르)라는 말은 「용맹하다」는 뜻의 몽골어이다. 따라서 전함 1척이 제각기 상륙정과 흡수주를 거느리고 있는 셈인 만큼 주도면밀하게 준비된 기동부대라고 할 수 있다.

몽골의 병사들은 日本兵과 달리 가능한 한 輕裝(경장)으로서 머리에 얇은 철제의 투구를 쓰고, 가죽製의 갑옷과 장화로 온몸을 보호하고 있었다. 무기는 손에 短弓(단궁) 혹은 長槍(장창)을 들고 허리에는 曲刀(곡도) 혹은 도끼를 찼다.

短弓은 길이 1.5m의 활로서 탄력이 있고, 사정거리가 200m에 달했는데, 그것을 지닌 병사들은 제각기 화살통을 여러 개 보유하고 있었다.

기타 무기로서는 투척용 石彈과 爆裂彈(폭열탄)이 있었다. 이것은 鐵 혹은 도자기로 만든 둥근 容器(용기)에 화약을 집어넣은 것으로서 점화하여 투척하면 공중에서 작열하여 엄청난 굉음을 냈다.

연합군은 진지를 구축하면 거적이나 대나무로 만든 방벽으로 주위를 굳히고, 공격할 때는 鼓笛(고적)을 울려 사기를 북돋게 했다.

전투방식의 優劣

기자는 12월1일 오후 이즈하라 읍내의 대마역사민속자료관·향토자료관·崔益鉉기념비 등지를 답사했다. 음식점 「시마모토」에 들러 따끈한 청주를 반주로 삼아 저녁을 먹었다. 뜻밖에 기모노 차림의 안주인이 다가와 첫잔을 채우는 친절을 베풀었다.

그날 밤은 이즈하라여객선터미널과 멀지 않은 언덕 위의 한국인 경영의 호텔 「닛폰다야」(日本大亞)에서 묵었다. 朝食 포함 하루 숙박료 7000엔. 이날밤 닛폰다야 호텔의 투숙객은 필자 혼자인 듯했는데, 12월2일 朝食 때는 푸짐한 김치 한 사발까지 무료로 서비스했다.

12월2일 8시에 출항하는 이키시마(壹岐島)의 아시베(芦♥)港으로 가는 쾌속선 「비너스」에 승선(요금 4540엔)했다. 아시베港은 麗蒙연합군 함대가 규슈 공략을 앞두고 집결했던 곳이다. 쾌속으로 운항한 비너스는 바닷길 68km를 출항 1시간만에 주파, 오전 9시 정각 이키시마의 동쪽 항구 아시베港에 기항했다.

帆船시대의 이키시마라면 對馬島와 더불어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갈 때 반드시 거쳤던 「징검다리」이다. 麗蒙연합군 원정 때도 주요 공략목표의 하나였을 뿐만 아니라 17세기 이후 도쿠가와(德川) 막부 시절의 260년 동안 12회에 걸쳐 訪日한 朝鮮通信使들도 모두 이곳을 거쳐갔다. 아시베港에 상륙한 필자는 곧장 전화로 택시를 호출하여 타고 이키시마의 북쪽 항구인 가쓰모토(勝本)를 향해 달렸다.

對馬島를 초토화하고 출항한 麗蒙연합군의 함대가 이키시마 북부 해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1274년 10월14일 오후 4시경이었다. 大船 2척으로부터 약 400명의 몽골군이 상륙하자 가쓰모토의 村人들은 이를 세도우라(지금의 아시베港)의 후나카쿠죠(船匿城)에 급보했다. 城主는 이키의 守護代인 다이라노 케이류우(平景隆)였다. 가쓰모토에 상륙한 麗蒙연합군은 하카타(博多)港 공격에 편리한 세도우라를 점령하려고 동쪽으로 진격해 갔다.

세도우라에서 平景隆은 일족의 郎黨(낭당: 武家의 家臣) 100기를 이끌고 서쪽의 가쓰모토를 향해 출진했지만, 中途의 히츠메城(勝本町 新城) 앞에 이르면 연합군의 대부대와 조우하게 된다. 景隆은 古來의 戰場儀式(전장의식)에 따라 휘하의 1騎에 명해 鳴鏑(명적: 소리 내며 나는 화살)을 쏘아 開戰의 신호로 삼으려 했다. 하지만, 몽골군은 古代의 開戰 의식 따위는 아예 무시했다. 그리고는 鍾과 징을 요란하게 치면서 자신의 家系와 이름·戰績 등을 길다랗게 외치며 뛰어나오는 이 日本 무사를 에워싸고 개 패듯 때려 죽여버렸다.

「이건 無法 아닌가」라고 생각할 사이도 없이 400여 명의 몽골군은 短弓에 毒화살을 매겨 난사하고 창을 휘두르며 육박해 갔다. 이키軍도 응전, 격전이 벌어졌다.

드디어 해가 지고 연합군은 종소리를 신호로 일제히 퇴각하기 시작했지만, 창과 毒화살로 상처를 입은 일본군의 피해는 컸다. 景隆은 부하의 거의 80%를 잃었다. 남은 병력은 겨우 20여 騎에 불과했다. 그는 히츠메城에 들어가 하룻밤을 밝혔다. 당시의 히츠메城은 急造(급조)의 방어시설이었기 때문에 大軍의 공격에는 버티기 어려웠다.

壹岐島를 결딴낸 몽골군의 잔학상

다음날인 10월15일, 연합군은 이른 아침부터 히츠메城을 포위, 맹공을 가했다. 景隆은 부하를 독려하여 분전하다 최후의 순간, 郎黨인 宗三郞을 불러 大宰府에 급함을 고하도록 명하고 할복자결했다. 宗三郞은 적의 포위망을 돌파, 세도우라의 船匿城(후나가쿠시)로 달려가 敗戰을 먼저 고한 후 하카타港을 향해 쪽배를 저어갔다. 船匿城에서는 城主인 景隆의 妻가 아이들을 먼저 찌르고 난 다음에 그녀 역시 老母와 함께 자결했다.

가쓰모토로 가는 도중에 들른 히츠메城 유적에는 新城神社가 들어서 있다. 경내에는 「元寇(원구)기념비」 및 平景隆의 묘가 있다. 일본인들은 麗蒙연합군의 일본 침략을 「元寇」라고 부른다. 城跡(성적)으로부터 50m 떨어진 동쪽에 히츠메橋가 있고, 이 다리를 건너면 千人塚(천인총)이 있다. 지금은 「文永의 役 新城古戰場」이라고 하는 큰 충혼탑이 천인총 위에 세워져 있다.

일본에서는 麗蒙연합군의 제1차 정벌(1274)을 「文永의 役」(분에이노에키)이라고 한다. 7년 후의 제2차 정벌(1281)은 「弘安의 役」(코안노에키)이라고 한다. 이키島엔 「弘安의 役」 관련 현장도 많은데, 그 얘기는 다음 호에 쓸 것이다.

이키島에는 「元寇」와 관련한 무덤이 숱하게 산재하고 있어 당시의 비참함을 전하고 있다. 다음은 「文永의 役 古戰場」에 관한 「勝本町通史」의 기록이다.

『이키에 상륙한 몽골군은 섬사람들을 보는 대로 죽였다. 남녀와 아이의 구별없이 극도로 잔인한 방법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살육은 곳곳에서 확대되었다. 예컨대 乳兒(유아)의 가랭이를 찢는다든지, 남자를 붙잡으면 귀·코를 자른다든지 했다. 또 여성을 잡아 한데 모아 손바닥에 구멍을 뚫어 철사로 엮어서 끌고 다니고, 드디어는 軍船의 뱃전에 매달아 익사시켰다』

이러한 잔학행위를 되풀이한 몽골軍의 통과 후에는 섬사람들의 시체가 겹쳐 쌓였는데, 이것을 매장했던 것이 千人塚이다. 新城 천인총 이외에 浦海·本宮·立石·射場原 등지에도 유사한 무덤들이 현존한다고 한다.

당시 이키島 사람들의 다수는 산으로 도피했지만, 對馬島와는 달리 숲이 깊지 않아서 곧 발견되었다. 「산으로 도망쳤어도 아이들의 울음소리에 의해 발각되어 모두 학살되었다」는 傳承(전승)도 있다.

이 때문에 「무고이」(잔혹하다)라는 일본말은 이 「무쿠리」(몽골), 「고쿠리」(고려)로부터 유래되었다는 傳承을 이키島 등 도서·연안지역에 남기고 있다. 떼를 쓰며 우는 아이에 대해 『무쿠리, 고쿠리가 왔다』고 겁을 주어 달랜다고 한다.

몽골군은 野戰 능력에 있어 世界戰史上 冠絶(관절)했지만, 그 잔혹함에 있어서도 유례가 없었다. 원래, 그들은 落城(낙성) 때까지 항전한 城民들에 대해선 入城 후에 모조리 학살해 버렸다. 몽골군의 西征史를 보면 이런 몽골군의 흉폭함에 관한 소문이 一波萬波(일파만파)로 번져 싸워보지도 않고 開城해 버리는 城市가 적지 않았다. 그것도 하나의 위력적인 心理戰(심리전)이긴 했다.

상호 親緣性 깊은 韓民族·몽골족·倭人

그러나 이키島의 사람들이 모두 도망가 숨은 것만 아니라는 사실은 몽골 측의 기록 「心中大義」에 『倭人(왜인), 이리(狼)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는 것에 의해 실증되고 있다. 일본인의 용맹성에 대한 驚異(경이)로움이 아니었겠는가.

그야 어떻든 韓·蒙·日의 3국은 모두 알타이系 언어를 구사하는 등 민족간 親緣性(친연성) 차원에서 보면 서로 「4촌쯤」 된다. 이 세 나라 사람의 조상은 원래 알타이산맥 일대 스텝(草原)지대에서 살던 유목민족이다. 좀 거칠게 말하면 몽골인은 동쪽으로 조금 이동했고, 한국인은 훨씬 남쪽으로 내려왔고, 일본인의 主流는 한반도에서 다시 일본열도로 건너갔던 先祖의 후예인 것이다.

이런 세 나라 사람의 DNA 속에는 好戰性(호전성)이 숨어 있는지도 모른다. 몽골인은 워낙 騎射(기사)에 뛰어난 데다가 野戰性이 강했고, 일본인도 칼싸움과 용맹성에 관한 한 세계 제1의 자리를 결코 양보하지 않던 민족이었다. 대륙과 陸接(육접)해 있어 끊임없는 異民族의 침략을 받아왔으면서 民族의 正體性(정체성)을 지켜 오늘에 이른 것을 보면 한국인의 끈질김도 他의 追從(추종)을 不許한다.

이런 상념에 젖어 있던 중 불현듯 이번 답사에 앞서 잠시 통화한 江原大 사학과 周采赫 교수의 말이 생각났다.

『일본 무슨 절엔가 보존된 사료에는 「몽골이 침략해 왔다」고 하지 않고 「무쿠리가 왔다」고 쓰여 있다고 합디다. 그렇다면 「Mogol」의 原音이 貊高麗(맥고려)·貊槁離(맥고리)일 수 있습니다. 「Mogol」을 아프가니스탄에선 「모골」, 印度에서는 「무갈」이라 했고, 시베리아 쿠르테킨의 돌궐碑文(비문)에는 「Bo¨kli」(뵈크리)라고 했는데, Bo¨kli는 학자들의 논문에서는 대체로 貊高麗로 풀이되고 있습니다』

가쓰모토港에 들러 우선 관광안내소를 방문했다. 관광안내소의 56세 여성 계장은 한국에서 찾아온 기자를 珍客(진객)으로 대접했다. 기자로부터 몇 가지 질문을 받은 그녀는 『대답을 못한 부분에 대해 보충설명해 줄 「元寇」 전문가가 있다』면서 전화를 걸어 마을의 교육위원까지 불러왔지만 갈길이 바빠 곧 일어섰다.

기자는 다시 아소베港으로 되돌아가 오전 11시15분에 출항하는 하카타行 페리호에 맨 꼴찌 승객으로 승선했다. 출항 2시간30분 만에 하카타港에 상륙한 기자는 다시 인근 뱃머리로 옮겨 오후 3시 시카노시마(志賀島)行 연락선을 탔다. 시카노시마는 하카타港을 바깥바다(玄界灘)로부터 보호하는 방파제 구실을 하는 섬이다.

출항 30분 만에 연락선은 시카노시마 부두에 닿았다. 이 뱃머리에서 남쪽 해안도로를 따라 2.4km를 西進하면 조그마한 구릉 하나가 나온다. 이곳은 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의 전쟁 때 쟁탈의 요지였다. 가파른 계단을 걸어 구릉 위에 오르니 하카타港의 모습이 정면으로 다가온다. 지휘관이라면 누구나 탐을 낼 만한 절묘한 관측고지다.

이곳에는 몽골군의 寃魂(원혼)을 위로하는 供養塔(공양탑)이 後世 일본인들의 손에 의해 건립되어 있다. 이 공양탑은 1274년의 제1차 정벌 때 大폭풍우로 인해 본대와 떨어져 이 섬에 표착했다가 일본군의 토벌로 섬멸당한 몽골兵 220명의 유해를 묻은 무덤 위에 세워진 것이다.

倭寇의 본거지 伊萬里灣과 鷹島

이키島를 초토화시킨 麗蒙연합군은 이어 肥前(히젠: 지금의 나가사키縣) 마쓰우라(松浦)郡의 다카시마(鷹島)를 습격했다. 일본 측 기록인 「日蓮註畵讚」(일련주화찬)에는 『肥前國 松浦黨 수백인이 戰死했다. 이 섬의 백성과 남녀가 당했던 참사는 對馬와 같다』고 했다.

마쓰우라(松浦)는 다카시마 對岸의 지역이다. 그런데 왜 유별나게 그 지역의 部隊名에만 「黨」(도우)字를 붙인 것일까? 바로 이 점을 필자는 평소 궁금하게 생각해 왔다. 「松浦黨」에 대한 필자의 의문은 다카시마에 가서야 비로소 풀리게 된다.

松浦黨은 「海商집단」을 자처했으나 실은 한반도 연안에 출몰하여 갖은 약탈행위를 일삼던 倭寇(왜구)의 중심세력이었다. 다카시마역사민속자료관에서 「松浦黨硏究」라는 논문집을 잠시 읽어 보니 그들은 자신들이 「松浦黨」이라고 불리는 것을 몹시 꺼려했다고 한다. 松浦黨이라면 바로 악명 높은 倭寇가 聯想(연상)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나라 史書(高麗史)에서 「倭寇」라는 존재가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高宗 10년(1223)이었다. 倭寇는 대개 일본 사회의 변동으로 몰락한 무사들이 주동이 되었다. 이들의 노략질은 갈수록 격화되어 고려 말기에는 우리나라 동·남 연안뿐만 아니라 江華·喬洞·禮成江口로 출몰하여 수도권까지 위협하게 된다. 다카시마는 倭寇의 본거지 이마리(伊萬里)灣과 松浦港의 입구에 위치, 外海의 풍랑을 막아 주는 방파제 역할을 하고 있다.

11월29일 오전 8시에 필자는 다카시마를 향해 숙소인 하카타 그린호텔을 나섰다. 하카타驛에서 메이노하마까지는 지하철, 메이노하마에서 가라쓰(唐津)까지는 철도, 가라쓰에서 다카시마行 연락선의 부두가 있는 호시노(星賀)港까지는 택시(요금 4500엔), 호시노港에서 다카시마의 히비(日比)港까지는 연락선(선임 200엔)을 탔다. 히비港에 상륙한 후엔 택시를 호출하여 타고 다카시마역사민속자료관으로 달렸다.

다카시마는 麗蒙연합군의 제1차·제2차 원정 때 모두 對馬島-이키島에 이어 세 번째로 점령을 당한 섬이다. 지도를 펴놓고 보면 馬山-對馬島-이키島-다카시마가 일직선상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카타港에 상륙해 大宰府를 함락시키려 했던 麗蒙연합군으로선 다카시마의 확보가 필수적이었다. 戰列(전열)을 가다듬는 집결지로서 필요한 입지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섬이었기 때문이다.

麗蒙연합군의 하카타港 습격

1274년 10월17일, 麗蒙연합군은 다카시마(鷹島)로 침입, 이 섬의 阿翁과 船黨津의 해안으로부터 상륙했다. 한편 松浦黨의 무사들도 다카시마의 殿浦에 상륙, 남방의 곶(岬)에 日本山城을 구축하여 내습하는 麗蒙연합군에 항전했지만, 衆寡不敵(중과부적)으로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

전황은 갈수록 일본군에게 불리했다. 松浦黨 무사를 비롯한 규슈의 御家人(고케닌: 가마쿠라 막부의 직속 무사)들은 크게 분전했지만, 日本 騎馬무사의 개인전법에 대한 연합군의 집단전법, 그리고 당시 일본인으로선 상상하지도 못한 鐵砲(몽골語로 「데츠하우」라고 발음함)의 위력에 압도당했던 것이다.

특히 다카시마 해역은 제2차 원정 때의 主戰場이었다. 지금도 다카시마 해역에선 麗蒙연합군의 유품이 계속해서 발굴되고 있다. 다카시마역사민속박물관과 倂設(병설)된 매장문화재센터에선 현재 엄청난 수의 발굴유물을 보존처리·분류·연구하고 있다. 그곳은 水中고고학의 「천국」이었다. 발굴유물에 관해서는 이 기사의 순서 때문에 다음 2월호에 소개할 것이다.

麗蒙연합군은 이어 大宰府 공략을 위해 하카타灣으로 진격한다. 연합군 함대는 머뭇거리지도 않고 玄界島(겐카이도)의 西水道를 거쳐, 하카타灣에 그대로 침입했다. 6차례의 蒙使 파견, 특히 두 번에 걸친 趙良弼의 장기체재에 의해 규슈의 지리·풍속 등을 사전에 탐지해 두었기 때문인 것 같다.

10월19일, 우선 일부 병력은 하카타灣의 서부 해안 이마쓰(今津)에 拔都魯輕疾舟를 대고 상륙하여 외곽에 거점을 확보했다. 다음날인 10월20일, 여명과 함께 하카타灣의 중앙부인 早良川(사와라가와) 河口인 모모치바라(百道原), 이키노하마(지금의 오키노하마), 하코자키(箱崎)해안 등 3개 방면에서 연합군의 상륙작전이 전개된다.

大宰府의 총사령관 츠네쓰케(少貳經資)는 對馬島의 전령 小太郞 및 兵衛次郞, 그리고 이키島로부터 달려온 宗三郞의 보고에 의해 麗蒙연합군의 내습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곧 가마쿠라(鎌倉)막부와 교토(京都)의 로쿠하라단타이(六波羅探題)에 急使(급사)를 날렸다. 로쿠하라단타이는 가마쿠라 幕府의 京都 조정에 대한 감시기관이다.

츠네쓰케는 또 규슈 管內의 슈코(守護: 지방장관)·지토우(地頭: 고을원)를 비롯한 고케닌(御家人: 막부 직속 무사)들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원래부터 御家人(막부의 직할 무사)들도 그럴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었던 만큼 즉각 하카타灣으로 집결, 미리 정해진 대로 각 부서에 착임했다.

하카타 지구에는 前線사령관이며 츠네쓰케의 동생인 쇼니 케이쓰케(少貳景資)가 지휘하는 주력부대가 배속되었다.

그 병력은 守護인 少貳·오토모(大友)·시마즈(島津)씨의 각 隊가 500騎씩이었고, 각 地頭·御家人의 평균병력이 125騎, 그 地頭·御家人의 수는 31家였기 때문에 합계 3875騎. 여기에 守護 3家의 1500騎를 더하면 총계 5375騎였다. 이는 일본 측 사료 「元寇紀略」(원구기략)에 기록된 숫자이다.

다음은 역시 일본 측 사료 「本土防衛戰史」에 기록된 하카타 방어전의 모습이다.

10월19일 이마쓰(今津) 해안에 상륙한 몽골군 支隊는 이마쓰의 監視隊를 밀어내고 포진, 그 일부가 다음날 하카타灣 중앙부인 모모치(百道) 해변에 상륙할 主力軍을 엄호하기 위해 해안을 따라 東進하여, 모모치하마의 남방 소하라(祖原)山을 점거했다. 그때 祖原지구의 방어를 책임진 것은 하라다(原田) 一族과 마쓰우라(松浦)黨이었는데, 몽골군의 集團戰法과 新兵器의 위력 앞에 무참히 패퇴했다. 지금은 공원화한 소하라山에는 「元寇戰跡」碑가 세워져 있다. 여기에 麗蒙연합군의 本陣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10월20일, 드디어 金方慶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메이노하마(姪浜) 앞 小戶海峽을 항행하여, 여명과 더불어 사와라가와(早良川) 河口인 모모치바라(百道原)에 상륙작전을 감행했다. 早良川의 지금 이름은 무로미가와(室見川)이다.

고려軍이 상륙한 지점에는 현재 초현대식 건물 「후쿠오카(福岡) 타워」(높이 123m에 전망대가 있음)가 들어서 하늘을 찌르고 있다. 일본에서 두 번째로 높은 건물이다. 그 바로 남쪽에는 후쿠오카 박물관, 동쪽엔 일본 프로야구단의 하나인 「다이에 호크스」의 홈그라운드인 「후쿠오카 돔」이 이웃해 있다.

필자는 후쿠오카 취재 첫날인 11월28일 오후, 맨 먼저 고속 엘리베이터를 타고 「후쿠오카 타워」의 전망대로 올라갔다(입장료 800엔). 여기에 오르기만 하면 후쿠오카 全지역이 一目瞭然(일목요연)할 뿐만 아니라 730년 前 하카타 상륙작전의 모습이 파마노라마처럼 연상된다.

하카타 地區 前線사령관인 카게쓰케(景資)는 고려軍의 상륙작전을 보고 아카자카(赤坂)지구를 맡고 있던 菊池武房에 출격을 명했다. 그럴 때 소하라(祖原)山을 점거하고 있던 몽골軍 부대가 고려軍의 상륙부대를 엄호하는 가운데 격전이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서 고려軍은 白道原을 완전히 확보하고 東進하여 현재 후쿠오카의 중심부인 鳥飼·別府·赤坂를 강습했다. 하카타의 이키노하마 앞바다로 침입한 몽골軍의 主力도 이키노하마와 하코자키(箱崎)에 상륙하여 少貳·大友·島津의 부대를 패퇴시켰다. 이로써 일본군 측의 하카타灣 해안방위선 30km가 모두 붕괴되었다.

그때까지의 전황에 대해 高麗史에는 다음과 기록되어 있다.

<壹岐島에 이르러 1000여 명을 죽이고, 길을 나누어 진격하니 倭人이 퇴각 도주하였는데, 죽어 넘어진 시체가 삼대 쓰러진 것처럼 많았으며, 날이 저물 무렵에 포위를 해제하였다>

幕府와 京都朝廷의 대처

烽火(봉화)체제 및 驛馬(역마)제도가 미숙했던 탓이었겠지만, 교토(京都)와 가마쿠라(鎌倉)에서는 初戰 패전의 상황을 상당한 시일이 지난 후에야 파악할 수 있었다. 大宰府로부터 교토의 六波羅로 파발마가 달려가 麗蒙연합軍의 對馬 내습을 보고했던 날짜가 10월17일이었다. 10월19일과 20일에 하카타灣에서 合戰이 있었다는 것은 물론 이키島가 점령당했다는 것조차도 10월28일이 되어서야 보고가 들어갔다.

따라서 幕府가 추고쿠(中國) 以西의 守護大名에게 『몽골軍이 공격해 오면 御家人뿐만 아니라 朝廷 公卿 관할하의 非어가인도 소집해서 방어전을 하라』고 하명한 것은 이미 전투가 끝나고 열흘이나 지난 11월1일이었다. 朝廷에 대한 보고는 더욱 뒤늦어 그 다음날 11월2일에 가메야마(龜山) 上皇이 외적 격퇴를 기원하는 친필을 역대 御陵(어릉)에 봉헌하고 있다.

가마쿠라 幕府는 몽골황제 쿠빌라이의 국서를 처음 받았던 1268년부터 西國守護들에게 몽골 습래에 대비해 경계를 엄중히 하도록 지령했다. 그 후에도 거듭된 사절의 來日에 위협을 느낀 막부는 異國警固番役(이국경고번역)의 제도를 정했다. 이것은 치쿠젠(筑前)·肥前(히젠), 兩國 연안의 요충을 규슈 諸國의 地頭·御家人에게 윤번으로 수비케 하는 것이었지만, 1271년에 이르면 규슈에 所領을 가진 關東 거주의 御家人들에게도 규슈로 내려와서 定住하도록 명했다.

다시 1272년이 되면 幕府는 諸國의 守護들에게 영내의 地頭·御家人의 所領뿐만 아니라 社寺領·公領에 대해서도 그 地名, 전답의 넓이와 領主 이름을 조사해서 보고하도록 명했다. 이것은 닥쳐올 국난에 대비하여 總動員令을 발하기 위한 긴급조치였다. 그러나 1274년에 對馬·壹岐·鷹島가 차례로 침공되었을 때까지 하카타의 방위태세는 충분하지 않았다.

막부가 西國의 守護에게 그 領內의 本所一圓地의 非御家人에 대해서도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했던 것은 對馬·壹岐 침공의 소식이 幕府에 도착한 후였다. 本所一圓地라는 것은 莊園領主(장원영주) 등이 배타적으로 권력을 행사하는 所領을 말하는 것인데, 그 영내의 武士는 非어가인이라고 했다.

따라서 이때부터 非어가인들도 가마쿠라 幕府가 임명하는 守護의 지배하에 들어오게 되었다. 北條(호조)씨 得宗(득종: 호조씨의 嫡統)에 의한 전제지배체제는 이러한 거국일치의 비상조치 속에서 전국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近世的 군대와 中世的 군대의 合戰

對馬島와 壹岐島로부터 몽골군 내습의 급보가 大宰府에 도착했을 때 하카타와 大宰府의 주변에 주둔하고 있었던 것은 異國警固番役(이국경고번역)의 책임을 진 가문인 쇼니(少貳)씨와 그 지배하의 하라다(原田) 일족, 그리고 시마즈(島津)씨와 그 一族 및 오토모(大友)씨와 그 일족이었다. 총사령관인 鎭西奉行으로서 규슈 所在 9개 國과 2島를 통괄 지휘한 인물은 少貳經資였다.

9개국의 守護 밑에는 地頭·고케닌(御家人)이 있어서 제각기 이에노코(家子: 武家의 子弟), 로우도우(郎黨: 武家의 家臣), 잡병인 所從들을 지휘했다. 일본군은 麗蒙연합군처럼 통일적으로 편성된 부대가 아니라 本家·分家라고 하는 血族(혈족)을 단위로 하여 끌어모은 조직이었기 때문에 병력수가 명확하지는 않다.

「元寇紀略」(원구기략)에 기록된 각 씨족의 騎兵병력을 합계하면 5300騎가 된다. 그것에 從士 1騎당 從者 1인으로 가산해서 少貳經資 휘하의 일본군은 대략 1만600명이었다는 것이 「육상자위대 후쿠오카修親會」의 견해이다.

다음으로 장비에 대해서 말하면 일본군은 各人이 비교적 무거운 갑옷과 투구를 착용했고, 무기는 일본도와 長弓 및 長刀를 들고 다녔다. 일본에서는 전통적으로 白兵戰을 중시했다. 백병전이 벌어지면 일본도와 長刀가 주종이었지만, 몽골군이 短弓을 주요무기로 삼았기 때문에 화살戰의 귀추가 승패를 결정했다. 史書에 의하면 이 短弓의 사정거리는 2丁, 즉 약 200m였다. 일본군이 보유한 長弓의 화살은 몽골의 短矢(단시)보다 크긴 했지만, 그 사정거리는 100m에 불과했다고 한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몽골軍의 화살촉에는 毒이 묻어 있었다. 맞기만 하면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또한 短弓인 까닭에 速射(속사)가 가능하여 일본군이 長弓으로 화살을 한 번 날리는 사이에 몽골군은 3회의 화살을 쏘았다고 한다. 일본군은 장비면에서도 압도당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일본군은 戰鬪作法(전투작법)은 아직도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의 방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우선, 1인의 무사가 앞으로 나서 敵陣에 鳴鏑(명적: 우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신호용 화살) 한 발을 쏘아 開戰의 신호로 삼았다. 전투가 개시되면 피아 1騎씩 나서 『나로 말하면…』이라고 운을 떼면서 자기의 家門 및 이름·벼슬·戰績 등을 장황하게 늘어놓으며 1대1 대결을 통해 서로의 勇力을 뽐내었다.

그런 절차를 거친 후에야 弓矢(궁시)의 合戰이 벌어졌고, 최후로 돌격을 감행, 백병전으로 승패를 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고전적 방식은 조직적인 集團密集隊形(집단밀집대형)으로써 징과 太鼓(태고)를 치면서 돌격해 오는 몽골군과의 戰法에 비해 현격하게 후진적인 것이어서 처음부터 승패가 뻔했다. 그것은 近世的 군대와 中世的 군대의 合戰이었다.

몽골군의 新戰法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0월20일의 하카타의 하코자키 지구 전투에서는 상륙한 麗蒙연합군을 島津久經의 부대가 용감하게 맞싸웠고, 하카타의 이키노하마의 전투에서도 少貳景資(經資의 동생으로 前線사령관)의 부대는 노도와 같이 몰려오는 몽골군에게 밀리면서도 힘껏 항전했다. 그는 스스로 長弓을 쏘아 몽골군의 副元帥(부원수)를 馬上으로부터 추락시켰다. 다음은 「八幡愚童記」 관련 기록이다.

<少貳景資는 부하들과 함께 力戰했으나 불리하여 퇴각하고 있던 바, 키 7척, 수염을 배꼽 부근까지 늘어뜨린 푸른 갑옷의 대장이 葦毛(위모: 갈대처럼 생긴 털)의 말에 올라 14, 15騎와 80人의 잡병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景資는 馬術의 명수였기 때문에 퇴각하면서도 뒤를 돌아보며 長弓에 화살을 먹여 쏘았는데, 그 화살은 선두로 달려오는 대장의 胸板(흉판)에 꽂혀 대장이 낙마했다. (中略) 주인을 떨어뜨린 葦毛의 말은 金覆輪(금복륜)의 안장만 붙어 있는 상태로 (戰場에서) 돌아다녔는데, 후에 그 말의 주인의 이름을 물었더니 그것은 征東左副元首(정동좌부원수) 劉復亨이었다>

「八幡愚童記」는 국난 극복의 상황을 愚童(어리석은 아이)도 알아야 한다는 차원에서 저술한 古書인 만큼 일본 무사들의 滅私奉公(멸사봉공)과 「神國日本」에 대한 神佛의 加護(가호)를 유별나게 강조하여 신빙성이 좀 떨어지는 부분도 없지 않다. 그러나 전투장면과 彼我의 力量관계 등을 놀랄 만큼 리얼하게 서술하고 있어 後世 연구자들에게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하카타灣岸에 있어서 양군의 主力戰은 10월20일 새벽부터 일몰까지 전개되었다. 이 전투에 있어서 일본군은 그 편성·장비·전투법의 어느 면에 있어서도 연합군보다 열등했다. 다음은 「八幡愚童記」의 기록이다.

<몽골은 太鼓와 징을 두들겨 신호했는데, 그 소리가 엄청났다. 일본 말들은 모두 이에 놀라 미쳐 날뛰었는데, 그렇게 허둥대는 바람에 적의 화살을 맞았다. 몽골의 화살은 짧았지만, 화살촉에 毒을 발라 맞으면 중상을 당했다. 몽골군은 수백인이 矢先(시선)을 정렬하여 화살을 비오듯 쏘는 데다 창이 길고, 갑옷도 빈틈이 없었다. 전투대형을 갖추고 있다가 적이 공격해 오면 중앙을 열어 몰아넣은 다음에 兩端(양단)으로 포위하여 무찔렀다. 갑옷은 가볍고 말도 잘 탄다. 힘도 강하다. (中略) 豪勢勇猛自在(호세용맹자재)하기 짝이 없고, 임기응변의 진퇴에 능하다.

대장은 高地에 올라 (형세를 관망하고) 太鼓를 쳐서 부대를 생각대로 진퇴시킨다. 특히 물러날 때는 (적의 추격을 저지하기 위해) 鐵砲(철포)의 鐵丸(철환)을 발사한다. 명중하면 사방에 화염과 연기가 치솟아 주위를 덮어 버린다. 또 그 소리, 우레와 같아 간담을 서늘하게 한다>

이런 전술 때문에 일본군의 장병들은 魂魄(혼백)이 빠져 방향감각조차 잃어 버리고 말았다. 소바라로부터 赤坂에 이르는 戰場에서는 鳥飼瀉 부근이 습지대였던 것이 일본군에겐 다행스러워 한동안 연합군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하카타 지구에서는 少貳·島津 부대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일거에 동남방이 뚫렸다. 몽골군은 奉行所를 습격, 하카타町의 민가와 氏神을 모신 쿠시다(櫛田: 즐전)神社를 불태웠다.

특히 大友賴泰가 수비하고 있던 하코자키(箱崎)지구가 뚫리자 鎭西軍 전체가 大宰府의 최종 防衛라인인 미즈키(水城: 수성)로 퇴각했다. 이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의 무사들이 최고로 숭배하던 武神을 모신 신사 ♥崎宮(거기궁: 하코자키구우)이 兵火로 소실되었다.

神社 편액에 쓰인 네 글자 「敵國降伏」

필자는 11월29일 오후 하코자키 神社를 찾아갔다. 후쿠오카市營 지하철의 하코자키쿠우마에에키(箱崎宮前驛)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오면 걸어서 3분 거리다. 도리이(鳥居: 신사의 입구에 세운 기둥문) 세 개를 지나면 웅장한 本殿과 마주한다. 1086년에 건립되었고, 몽골병에 의해 불탄 지 1년 만인 1275년에 복원되었다고 한다.

본전 1층과 2층 지붕 사이에 커다란 扁額(편액)이 걸려 있다. 편액에는 「敵國降伏」(적국항복)이라는 네 글자가 적혀 있다. 敵國이라면 元은 물론 高麗까지 포함된다. 「元寇」 당시의 上皇 가메야마(龜山)가 紺紙(감지:보랏빛 종이)에 金泥(금니: 금가루를 괜 물)로 적은 것을 옮긴 것이다.

본전인 고센구우(御遷宮) 안을 들여다보니 참으로 可觀(가관)이다. 건물 내부를 온통 검붉은색으로 칠한데다 장지문을 단 방 안에선 샛노란 불빛이 요상하게 흘러나오고 있고, 방문 앞에는 鬼面(귀면)의 탈과 兵仗器(병장기)가 배치되어 있다. 거기엔 安東 하회탈처럼 諧謔(해학)도 없다. 엄숙하다기보다 너무나 으스스하다.

아! 이것이야말로 신토(神道)의 성격, 아니 본질을 적나라하게 밝혀 주는 현장이 아닌가? 이곳을 참배하는 日本人의 발걸음이 끊어지지 않는 한 韓國을 아직도 「降伏해야 할 敵國」이라고 보는 일부 日本人의 생각, 韓國人에 대한 우월감 같은 것이 지워지지 않을 것 아닌 것인가?

하코자키 神社를 둘러본 만큼 후쿠오카 縣廳 앞에 있는 히가시(東)공원을 찾지 않을 수 없다. 택시 기본요금 정도로 갈 수 있는 거리다.

히가시 공원에는 몽골군의 침략을 예언했던 日蓮宗의 開祖인 니치련(日蓮)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그는 天地異變(천지이변)과 異敵襲來(이적습래)의 원인은 邪宗(사종)의 유행에 있다면서 다른 종파를 격렬하게 비판하는 「立正安國論」을 주장하다가 귀양을 가기도 했다. 麗蒙연합군의 日本 침략 이후 그는 大예언자로 존숭받게 된다. 높이 23m에 이르는 「日蓮聖人의 동상」의 座臺엔 「立正安國」의 네 글자가 돋을새김되어 있다.

히가시공원에는 가메야마(龜山) 上皇의 동상도 세워져 있다. 그 동상의 座臺에도 하코자키 神社와 마찬가지로 「敵國降伏」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 것 아닌가.

공원 입구로 돌아나와 「元寇史料館」에 들렀다. 관장인 요시오카 간스케(吉岡完佑)씨를 찾아갔다. 그와 만난 적은 없지만, 그가 한글로 쓴 高麗청자 관련 논문은 읽은 기억이 있다. 한국대학에 유학하여 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한다는 그와 「元寇와 神道」를 주제로 삼아 대화를 한번 해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는 수개월 전에 이미 사직해 버려 만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여성직원이 자료를 꼼꼼히 챙겨 주었다.

일본군, 大宰府로 퇴각

소바라 및 아카자카(赤坂) 지구에 있어서 일본군의 善戰에도 불구하고 하코자키(箱崎) 지구에서 劣勢(열세)에 처한 大友·島津 부대의 패퇴에 의해 일본군은 하카타灣으로부터 50여 리 밖 大宰府의 서쪽 방벽인 미즈키(水城: 수성)로 일제히 철퇴했다. 후쿠오카 일대는 방어전을 전개할 만한 요새지가 별로 없는 평야지대이기 때문이었다. 「本土防衛史― 元寇」의 제2장 「文永의 役」 제4절의 「군사적 고찰」에서는 하코자키 지구에서 일본군이 먼저 철퇴했던 것은 병력의 열세였던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즉, 소바라·赤坂지구에서 양측의 병력비가 1.72 대 1, 하카타 지구가 1.77 대 1인 것에 비하여 하코자키 지역에서는 2.67 대 1이었다. 그러나 일본군은 바다를 건넌 麗蒙연합군과는 달리 언제든 충원이 가능했던 것 아닌가.

이 오토모(大友)·시마즈(島津), 양군의 철퇴에 따라 하코자키팔번궁의 宮司는 御神體를 받들어 宇美(粕屋郡 宇美町)의 極樂寺로 피란했다. 그 직후 일본 3大 社殿의 하나인 하코자키神社는 몽골군에 의해 불탔다.

몽골군은 하카타灣에 상륙하면 곧장 大宰府로 진격해서 이를 점령할 계획이었다. 몽골군이 퇴각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지 않은 것은 일몰인 데다 地理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10월20일의 전투에서 主力병기인 短弓의 화살이 다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일본군은 왜 미즈키(水城)로 퇴각했던 것인가.

麗蒙연합군의 공략목표가 大宰府에 있었는데, 그 主방위진지가 이 水城이었기 때문이다. 이 방어진지가 돌파되어 大宰府가 연합군에 점령되어야 비로소 일본군이 完敗를 당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11월29일, 필자는 다자이후(大宰府)와 水城을 차례로 답사했다.

다자이후 政廳(정청) 유적을 찾아가려면 현재의 太宰府市를 관통하는 西鐵의 도후사쿠라마에(都府櫻前)驛에서 내려 동쪽으로 15분 쯤 걸으면 된다. 다자이후는 백제부흥군-일본군 연합군이 663년 白村江(지금의 금강) 전투에서 羅-唐연합군에게 패한 이후 日本조정이 설치한 西部 일본 지역의 최상급 사령부인 동시에 대외교섭의 창구였다. 지금도 다자이후의 位相과 규모를 말해 주는 礎石(초석) 등이 남아 있다.

다자이후 政廳 유적을 둘러본 후 미즈키(水城)로 찾아갔다. 水城은 도후사쿠라마에역에서 西鐵을 타고 후쿠오카 쪽으로 두 정거장째인 下大利역에서 내려 25분쯤 걸으면 된다. 그 규모는 길이 1.2km, 基底部(기저부)의 폭 80cm이다. 이 土城 역시 羅唐연합군의 침입에 대비하여 쌓은 것이다. 水城이란 이름은 하카타 쪽을 향해 폭 60m, 깊이 4m의 호를 파서 물을 저장했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日本書紀에는 『츠쿠시(筑紫)에 大堤(대제: 큰 둑)를 쌓고, 물을 저장했는데, 이름하여 水城이라고 한다』고 되어 있다. 지금도 내측과 외측의 호를 연결하는 木♥(목통)의 흔적이 남아 있어 文字 그대로 水城인 것을 확인할 수 있다.

大宰府는 北의 오노(大野)城, 南의 사이城이라는 山城에 의해 방위되고, 西方 하카타灣을 향한 正面에는 이 水城이 막아서 있었다. 하카타灣에서 연합군의 상륙을 저지할 수 없었던 일본의 鎭西軍은 어쩔 수 없이 水城까지 철퇴했던 것이다. 결국 이것이 鎭西軍의 최후 저지선이었던 것이다.

몽골군이 돌연 하카타灣으로 부터 사라진 까닭

10월20일 밤, 연합군은 勝勢에도 불구하고 陸上 교두보에서 野營하지 않고 상륙정 拔都魯輕疾舟를 타고 하카타灣에 떠 있던 군함 千料舟로 물러났다. 육지에서 宿營하지 않았던 것은 일본군이 장기로 삼는 夜襲(야습)을 두려워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귀함 후 연합군 수뇌부는 전투를 계속할 것인가의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作戰會議(작전회의)를 열었다. 「東國通鑑(동국통감)」과 「高麗史節要(고려사절요)」는 이 논의의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忽敦(홀돈=흔도)가 말하기를 『우리 軍勢는 전투엔 習熟(습숙)하고 있지만, 종일 싸워서도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무기를 거두었다. 내일도 또 전투를 할 것인가』라고 했다.

金方慶이 말하기를, 『우리 兵들이 이미 敵陣에 침입해서 잘 싸우고 있어 「지금부터 一步」라는 상황에 있다. 옛날 秦(진)의 명장 孟明(맹명)은 (상륙 후에) 스스로 (타고 온) 배를 불태웠고, 漢의 淮陰侯 韓信(회음후 한신)은 背水陣(배수진)으로 싸워 승리를 쟁취했다. 그렇다면 우리들도 이 故事에 따라 決戰을 해야 할 것 아닌가』라고 했다.

이에 忽敦이 말하기를, 疲兵(피병: 피로한 병사)을 가지고 大敵과 싸우더라도 完勝을 얻지 못할 것이니 물러서는 것이 좋다』고 했다 >

高麗의 사령관 金方慶은 하카타 교두보에서 野營한 뒤 다음날 일본군과 決戰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한 데 대해 총사령관 ♥都와 右副元首(우부원수) 洪茶丘는 이 이상 싸워도 결정적인 승리를 얻어지지 않을 것이니 만큼 철병해야 할 것이라고 거부했던 것이다.

일본 측 사료들을 보더라도 그때까지 일본군이 부대 단위의 전투에서 이긴 사례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일본무사의 개인적인 용맹이 드러나는 대목만 더러 보일 뿐이다. 그런데도 東征都元帥(동정도원수) ♥都로 하여금 철수 쪽으로 결심을 굳혀 가게 했던 요인은 무엇일까.

사실, 연합군에게도 상당한 약점이 있었다. 몽골의 강요로 출전한 고려군이 士氣를 떨칠 리 없었고, 洪茶丘가 다그쳐 불과 6개월 만에 急造한 900척의 戰船들도 대체로 허술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자기 땅에서 싸우는 일본군에 비해 연합군은 병력충원과 병참부분에서 弱勢일 수밖에 없었다. 少貳景資의 화살을 맞아 부상한 左부원수 劉復亨도 이미 戰意를 잃고 있었다.

더욱이 일본 무사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용맹했다. 일본군의 저항은 의외로 강경했고, 병력도 만만치 않았다. 패전을 거듭하면서도 굴복하지 않는 敵은 원래 무서운 법이다.

가마쿠라 武士들의 一所懸命 一所懸命(잇쇼켄메이: 한 곳을 목숨을 걸고 지킴)은 가마쿠라 武士들에 있어선 최고의 德目이었다. 전장에서 비겁했던 무사는 幕府에 의해 領地가 삭감되든지 몰수당해 가난을 代물림할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 일본 사회의 시스템이었다. 그렇다면 一家를 위해서는 자기 한 목숨이 오히려 가벼울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데서 연유한 一所懸命이 현대에 와서는 一生懸命(잇쇼켄메이: 평생 목숨을 걸고 일함)으로 바뀌었다. 一生懸命은 세계적 經濟大國을 이룩한 현대 日本의 밑천이라고 할 수 있다. 바로 이런 점에서 「元寇」는 일본의 국민의식 형성에 깊게 작용하고 있는 셈이다.

한편 지휘부의 견해가 엇갈린 상황에서 歸艦(귀함)한 麗蒙연합군은 10월20일 심야로부터 21일 새벽에 이르는 사이에 하카타灣으로 몰아닥친 大폭풍우로 궤멸적 타격을 입고 말았다.

高麗史에는 『때마침 밤중에 폭풍우가 일어나서 戰艦들이 바위와 언덕에 부딪쳐 많이 파손·침몰하였고, 金銑(김선)은 물에 빠져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람에 날려 바다로 떨어져 익사한 金銑은 고려군의 左軍副使였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하룻밤 사이에 900여 척의 연합군 함대 중 200여 척이 침몰했다. 연합군은 서둘러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10월21일 아침, 戰禍로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하카타灣에는 연합군의 전함은 한 척도 없었다. 이것은 일본의 神들이 진노해 神風을 일으켰던 것도, 龍神의 逆鱗(역린)을 건드려서 파도를 일으킨 것도 아니라 최고지휘관의 판단 잘못으로 自招(자초)한 결과였다. 만약, 연합군이 10월20일 중에 하카타 해안에 교두보를 설치, 이후 공격에 대비한 병력·물자를 상륙시켜 놓고 宿營(숙영)했더라면 그후 전개된 역사의 向方은 사뭇 달라졌을 터이다.

결국, 일본군의 승리였다. 비록 그들이 10월20일의 전투에서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연합군에게 가마쿠라 무사의 용맹성을 과시한 것은 사실이다. 그들에겐 조국방위전쟁이었던 만큼 사기도 높았다. 「元史」 日本傳에서도 『겨울 10월 其國(일본)에 들어가 패했다. 官軍도 정비되지 못했고, 화살도 다했다』고 敗戰을 인정하고 있다.

高麗史에는 『이번 전쟁에서 돌아오지 못한 자의 총수가 무려 1만3500여 명이나 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나머지 병력은 꼭 한 달 후인 11월20일 合浦로 귀항했다. (계속)●

출처;월간조선/2004년01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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