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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명반 100選 /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제 11번 F장조 KV 413 / 머레이 페라이어 Pf & Cond, 잉글리쉬 챔버 Orch.

작성자고양이|작성시간12.10.12|조회수19 목록 댓글 0

 

 

 

 

 

 
 
 
 

Mozart

Piano Concerto No.11

in F Major KV 413 

 

작곡 장소: 빈
 
출판/판본: 자필악보는 베를린 국립도서관 소장.
초판: 1785년 빈의 알타리아(출판번호 42),
      전집: 구 모차르트 전집 16편,
      신 모차르트 전집 5편 - 15작품군 - 3권.
 
헌정, 계기: 1781년 잘츠부르크 대주교와 결별하고 빈으로 옮겨감. 
      1782년 3곡의 세트를 완성하고
      1784년에서 1786년까지 많은 피아노 협주곡을 작곡함.
      이 곡은 빈 계열 피아노 협주곡의 기초에 해당함.
 

초연 연도: 1783년 1월 11일
 
초연 장소: 시립 집회장(아우프데어 멜구르베), 빈
 
초연자: 작곡자


독주 피아노(클라비어),
오보에 2, 파곳 2,
호른 2, 바이올린 2부,
비올라, 콘트라베이스
 
악장 구성

1악장
Allegro, F장조, 3/4박자, 협주풍 소나타 형식.
제1 주제는 투티로 시작됨.
이어서 비올라와 제1 바이올린이 연주되며 대위법적으로 진행됨.
제2 주제는 C장조로 시작해서 F장조로 되돌아 가면서 반복됨.
제3 주제는 변주적으로 진행됨.
발전부는 피아노가 새로운 주제를 연주함.
재현부는 제2 주제가 으뜸조로 반복됨.
카덴차 이후에 코다로 이어지면서 끝남.


2악장
Larghetto, B flat장조, 4/4박자,
서주를 포함한 2부 형식.
콘트라베이스의 6박자 아르페지오 반주 위에 4박자의 주제가 진행됨.
관현악 서주에 이어서 독주 피아노의 주부,
삽입구가 2회 반복된 뒤 코다로 마치는 구조임.


3악장
Tempo di menuetto, F장조, 3/4박자, 론도 형식.
론도 주제는 관현악으로 연주되는 32마디의 악구로,
각각 8마디씩 A-A-B-A 구조로 이루어는 미뉴에트 주제임.
형식적으로 당시의 론도 형식과는 달리
주제와 경과구를 세분해서 유기적으로 배치시킴.
전체적으로 간결한 구조지만 다양한 변화를 통해서
작곡가의 창의력을 잘 발휘한 곡임.

 

Mozart

 

 

모차르트(오스트리아)는 로마 교황 임명의

대사교가 통치하는 카톨릭 세력이 강한
로마풍의 잘츠부르크(Salzburg)에서 1월 27일에 태어났다.
아버지 레오폴트(Leopold Mozart, 1719~1787)는 바이올리니스트였으며,
누나와 동생에게 어려서부터 음악 교육을 시켰는데,
특히 볼프강(오스트리아)은 비상한 음악적 재능을 나타내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신동의 연주 여행

1762년 아버지는 6세인 볼프강(오스트리아)과 11세의 누나
나네를(Nannerl)데리고 뮌헨으로 연주 여행을 시도했다.
이것을 필두로 거의 10년간의 소년 시절은 주로 각지를
연주 여행하는 데 소비되었으며 특히 1763년부터는
파리·런던·암스테르담으로 3년 동안의 대여행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의 연주회는 각지에서 호평을 받고
그 신동다움을 나타내는 일화는 수없이 남아 있지만
결국은 곡예의 구경거리 같은 흥미가 중심이었던 것 같다.
그 위에 볼프강(오스트리아)은 자주 병에 걸려
육체의 성장도 방해를 받았으며 아버지의 만족은 어떻든간에
소년 모차르트(오스트리아)에게는 고난의 여행이었다.

그러나 각지에서 얻은 음악 체험과 서로 교제한 음악가들의 활동은
그의 장래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었다.


특히 1772년(16세)부터 행한 세 번째 이탈리아 여행은
바로 청년기를 향하는 정신적인 성장기와도 겹쳐
모차르트(오스트리아)의 음악관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알렐루야」를 포함하는 유명한 모테트

엑슐타테 유빌라테」(성악곡)는 이 여행의 산물이었다.


잘츠부르크의 청년 음악가

아버지는 볼프강을 빈의 궁정악단에 취직시키려 했다가 실패하여
고향의 궁정 음악가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그 결과 1773년(17세)부터의 약 7년간은
고향에서 활약하는 이른바 잘츠부르크 시대가 찾아온다.
이 시기는 음악가로서의 개성을 단련하기 위한 귀중한 기간으로
특히 하이든(오스트리아) 형제의 새로운 작품은 커다란 자극이 되어
빈 고전파의 한 사람으로서의 소지가 만들어져 갔다.

 

1777년(21세)부터는 어머니와 함께 만하임, 파리로 여행을 떠났으며,
특히 만하임의 뛰어난 관현악단으로부터는 커다란 수확을 얻었다.
베버(독일)(Weber) 가의 알로이지아(Aloysia)에게
연심을 품은 것도 이 고장이었으며 이어서 찾아간 파리는
이미 이전의 신동과는 인연이 없는 차가운 도시로 변했다.
더군다나 어머니 마리아의 타향에서의 죽음과
알로이지아에 대한 구애의 실패는
인간 모차르트(오스트리아)에게 커다란 고뇌를 주는 사건이었다.


1781년(25세) 몰이해한 대사교와 충돌한 그는
잘츠부르크를 떠날 결심을 굳히고 이후 빈에 정주하게 된다.
이 시기의 주요 작품으로는 「바이올린 협주곡 제5번」(1775),
교향곡 제31번 「파리」(교향곡)(1778),
G장조와 D장조의 2개의 「플루트 협주곡」(1778),
「바이올린 소나타」 제28번 K.304(1778),
「대관식 미사 Krönungsmesse」(1779) 등을 들 수 있다.


빈에서의 자유로운 활동

자유롭고 활기에 찬 빈에 거처를 정한 1781년 이후는
불멸의 명작을 잇달아 써 갔다.
1782년(26세)에 오페라 「후궁으로부터의 도주」가 완성되고,
같은 해에는 알로이지아 베버(독일)의 동생 콘스탄체(Constanze)와 결혼한다.
「피아노 협주곡 d단조」(1785)에 이어
오페라 「피가로의 결혼」(오페라)(1786)을 완성,
그 초연은 대성공을 거두었다.
같은 해 프라하에서의 상연도 열광적인 성공으로
이것이 인연이 되어 프라하를 방문, 시민들에게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이어 완성된 대작 「돈 조반니」(1787)는 프라하에서 초연되어
「피가로의 결혼」(오페라)에 못지 않는 성공을 거두었다.

그러나 이들 대성공이 반드시 경제적인 성공을 의미하지는 않아서
생활은 오히려 곤궁을 더해 갔다.
콘스탄체는 살림을 알뜰히 꾸려 가는 능력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이미 장남을 잃은 그는 다시 3남과 아버지 레오폴트의 죽음으로
잇달아 슬픔에 젖었으며 자기도 중병에 빠지고 있었다.
애수에 찬 「현악 5중주곡 g단조」(1787)는 바로 이런 시기에 작곡되었다.
그리고 세속적인 성공과는 반대인
습하고 암울한 생활 속에 최후의 4년간을 맞이한다.


궁핍의 만년과 레퀴엠

1788년(32세) 모차르트(오스트리아)의 창작 활동은 그래도 끊임없이 계속되어
6월부터 기적의 2개월간에 고전 교향곡의 극치를 보여 주는
마지막 3대 교향곡이 완성되어 갔다.
그러나 당시의 빈의 청중이 고도로 완성된
그의 만년의 예술을 이해할 리가 없었다.
궁정 음악가의 칭호도 적은 액수의 연봉을 보증할 따름이었으며
연주 여행을 비롯한 돈 마련을 위한 시도는 어느 것 하나 성공하지 못했다.

 

최후의 해인 1791년 7월, 오페라 「마적」의 완성을 가까이 앞둔
모차르트(오스트리아)는 검은 옷을 입은 낯선 남자의 방문을 받고
「레퀴엠」의 작곡을 의뢰받았다.
그 무렵 그는 이미 요독증으로 머리가 혼란해져 있었는데,
이 기묘한 주문이 그에게 죽음이 가까움을 확신시켰다고 한다.
「마적」의 초연은 성공이었으나, 최후의 생명력을 불사른 「레퀴엠」을
미완인 채 놓아 두고 이 세상을 떠난 것은 35세의 12월 5일의 일이었다.


서민적인 천재

장례일은 악천후인 탓도 있어 참석자가 매우 적었다고 전해지며,
게다가 착오 때문인지 이 대음악가가 묻힌 장소는
오늘날까지 불분명한 채로 있다.
그의 천재적인 성품을 나타내는 일화는 많지만
그 영웅다움, 위인다움을 나타내는 이야기는 적은데,
그 오페라의 주인공들의 천진 난만한 인간성은
모차르트(오스트리아)가 서민의 영웅이며 천재임을 잘 말해주고 있다.

 

모차르트(오스트리아)의 참다운 위대성은 봉건 사회에서
시민 사회로의 과도기에 있어서 서민적인 생활 태도로 일관하고
다가 오는 시대를 앞서 간 점에 있으며,
그의 천분은 이 역사적인 과정을 거의 무의식중에 음으로
예리하게 포착한 점에 있다고 하겠다.
이 정신은 이윽고 베토벤(독일)의 전투적인 시민 정신으로
계승되어 폭발적으로 연소한다.

 

 

Murray Perahia

 

30여 년 이상을 무대 위 연주자로서 살아 온 머레이 페라이어는

우리 시대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의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전세계 주요 콘서트 홀을 무대로, 또한 정상급 오케스트라와 연주해왔다.

그는 현재 아카데미 오브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의 상임 객원 지휘자로 활동하고 있으며

지휘와 협연을 맡아 그간 미국과 유럽, 일본, 동아시아에서 연주회를 가졌다.

최근에 그는 그의 야심찬 프로젝트인 헨레 원전 악보를 사용하여

베토벤 소나타 전곡 편집을 착수하였다.

2003/04 시즌에 그의 연주 일정으로는 북아메리카와 유럽에서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와 함께 연주할 것이고,

또한 카메라타 잘츠부르크, 그리고 유럽 챔버 오케스트라와

유럽 순회 연주가 포함되어 있다.

페라이어는 아주 폭넓고 다양한 디스코그래피를 자랑한다.

가장 최근에 그는 프란츠 슈베르트의 만년 작품,

"소나타 D.958, 959, 960"을 녹음하였다.

그의 쇼팽 "에튜드 Op.10"과 "Op.25 전집" 은 2003년

그래미상 베스트 솔로 기악상을 수상하였다.

그의 바흐 작품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연구의 결과로

그는 최근 바흐의 건반 협주곡 집을 세인트 마틴 인 더 필즈와 함께 발매하였다.

그의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은 두번이나 그래미상에 노미네이트 되었으며

2001년 그라모폰 상의 "베스트 기악 음반상"을 수상하였다.

이 음반은 15주 동안이나 빌보드 클래식 부분 TOP10에 랭크 되기도 하였다.

1999년에 그는 그의 음반 바흐의 영국 모음곡집으로 그래미상을 수상하였고,

1995년과 1997년에는 쇼팽 발라드와 헨델과 스카를라티 음반으로

그라모폰지의 음반상을 수상하였다.

1998년에는 그가 전속으로 있는 소니 음반사에서 25년 전속을 기념하는

4장짜리 기념 음반을 발매하기도 하였다.

뉴욕에서 태어난 페라이어는 그의 나의 4세 때 처음 피아노를 시작하여

후에 매네스 음대에서 작곡과 지휘를 전공하였다.

그 시절 그는 루돌프 서킨과 파블로 카잘스,

그리고 부다페스트 현악 사중주단과 교류하며 대부분의 여름을 말보로에서 보냈다.

 

또한 그는 미에치슬라프 호르초프스키를 사사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에게 지대한 음악적 영감을 안겨 준 블라디미르 호로비츠와

깊은 친분을 쌓으며 그의 음악적 역량을 키워나갔다.

1972년 리즈 국제 피아노 콩쿠르에서 우승한 페라이어는

1973년 알데버그 페스티벌에서 그의 첫 연주를 시작하였고

이곳에서 벤자민 브리튼과 테너 피터 피어스와 함께 작업하였다.

그 인연으로 1981년부터 1989년에 걸쳐 여러 차례

피어스의 가곡 리사이틀 때 함께 하였으며,

알데버그 페스티벌의 공동 예술감독을 지냈다.

머레이 페라이어는 왕립 음악학교와 왕립 아카데미 오브 뮤직의 명예회원이며,

최근에는 리즈 대학으로부터 명예박사학위를 수여 받았다.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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