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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7월 14,15일 (토,일요일) 트위트리안 출석부입니다.

작성자덕보체육관|작성시간12.07.14|조회수55 목록 댓글 1

 

                                                                                                                                           박정희>대통령

새마을운동 제창(1970년04월22일)
  우리 나라의 새마을운동은 1970년 4월22일 전국지방장관회의 유시를 통해 박정희 대통령은 「농민과 관계기관 및 지역사회 지도자간의 협조를 전제로  하는 농어촌 자조노력의 진작방안을 강구하라」는 당부가 있었던 것인데,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에서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게 된 발화점이 된 것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발상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갑자기 구성된 것은 아니다.

 

5·16혁명 직후의 <재건국민운동> 1960년대 후반에 시작된 <제 2 경제>·<생활합리화운동> 등은 우리 모두 새마을운동과 맥락을 같이한다.  한국 민족은 오래 전부터 자발적인 협동체를 운영해 왔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의 저서에서도 우리의 전승해야 할 빛나는 유산 가운데의 하나로서 지방자치의 발생으로 볼 수 있는 <향약> 과 <계>를 들었다.

 

즉, 「조선초기부터 발달한 우리나라 지방자치의 싹인 <향약>은 그리 찬란하게 꽃피지는 못했으나 다시 살펴야 할 유산이다. 재건국민운동이 성공하려면 국사상의 지방자치의 범형인 <향약>으로부터 역사적 근거를 다시 얻어야 할 것이며 그럼으로써만이 민중 속에 뿌리박은 범국민운동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원래 <향약>은  조선유교주의의 허구한 폐해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안되는 장점중의 하나이다.

 

향약이란 이른바 향리·향촌의 계약에 해당하는 것으로 그 지방의 자치조직을 말한다. 향약은 본래 중국송대남전려씨 일문에서 된 것으로 그 4대강목은 ①덕업상근(덕업을 서로 권장하자) ② 과실상규(잘못을 서로 바로잡자) ③ 예속상교(예속을 서로 나누자)④ 환난상휼(환난을 서로 돕자)하는 것으로서 이는 향촌의  자치규약이다」라고 하여 향약의 유래와 사회적 기능 그리고 그 공적에 대하여 소상하게 밝힌 바 있다.


 따라서 <계>·<두레>·<품앗이> 등에 대한 역사적 고증과 함께 이러한 유풍들은 우리 사회에서 다시 권장할 만하다고 하여 우리나라에 있어서의  사회개혁운동은 민족의 자발적인 협동체 운영조직에서 그 뿌리를 찾아 이를 현대적인 의미로 계승 발전시켜 가야 한다고 밝혔다.


 한국 민족은 자고로 협동하는 생활을 통하여 마을사람들의 자립을 도모해 왔으며, 자신들을 지켜가는 방위수단으로 협동체적 단합의 필요성을 깨닫고 그것을 실천해 왔다. 이러한 민간협동체는 조선시대에 이르러 자치·교육·산업·경제 및 그 밖의 사외 여러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보급되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민간협동체는 우리 조상들이 생활의 수단으로서 오랜 세월을 두고 사회생활의 기반으로 삼아온 생리화된 조직체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역사회의 협동체가 일제 식민지 시대를 거치는 동안 일제의 수탈정책에 의하여 한국농촌이 피폐해지고 8·15조국광복과 함께 찾아온 사상적 갈등, 6·25전쟁, 4·19 혁명의 정치사회적 혼란, 5·16혁명을 거치는 동안에 시대 상황의 다면적 변화는 한국사회의 전래적인 미풍양속을 여지없이 허물어뜨리고 말았다.


 특히 서구민주주의의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로 착각하여 모든 것을 이기적으로만 생각하게 되고 산업주의를 물질주의로만 생각한 나머지 황금만능과  불신풍조가 이 때문에 미연하게 되었다.


따라서 그것은 온갖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국민적  분열을 조장하게 했던 것이므로 지역사회의 협동체를 구성하여 서로 돕고 살아온 옛 조상들의 얼과 슬기에서 우리는 현대적 위기의 극복을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박정희 대통령은 어린시절부터 농촌의 농민들이 따가운 햇볕아래 구슬땀을 흘리며 <품앗이> 혹은 <두레>로 김매기하는 공동작업을 보아왔던 것이며, 마을 부녀자들이 <두레삼>을 삼는 광경도 보았다.

 

그는 가난한 한국농촌에서 <보릿고개>·<춘궁기>를 체험하면서 자라왔기 때문에 한국 농촌의 실상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헐벗은 산, 게딱지 같은 초가지붕, 다 허물어진 돌담, 마을에 들어서면 어디가 길이고 어디가 논두렁인지 분간할수 없는 좁은길, 수천년 동안 한결같이 원시적인 영농을 해오면서도 어느것 하나 고쳐볼 엄두도 못내는 농민들을 볼 때마다 가난과 무지의 악순환이 되풀이되고 있는 한국 농촌사회의 실상에 대해 안타까운 마음을 억누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5·16혁명 직후에 맨먼저 관심을 쏟았던 것이 바로 중농정책이다. 국가재건최고회의의장 당시 전남지방을 순시하던 중 곡산에서 농협 창고를 점검해 보았을떄 농민들 손에가 있어야 할 농기구와 비료·농약 등이 그대로 쌓여 있음을 보고 크게 노한 적도 있었다.


 이처럼 한국의 <새마을 운동>은 1970년대에 들어와서 불쑥 튀어나온 운동이 아니고 농어촌 근대화를 위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일관된 의지가 농축되어 오다가 마침내 한국의 사회개혁운동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에 이어 그 이듬해 전국지방장관회의를 주재라는 자리에서도 「작년 가을부터 전국에서는 새마을운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나는 이 사업의 목표를 경제적인 측면보다도 주민들의 정신계발이라는 측면에 두고 이를 더욱 중요시한다. 한마디로 이 사업을 통하여 전국민의 협동정신과 단결심, 그리고 자조정신을 북돋우자는 것이다.」라고 하여  새마을 운동은 근대화를 위한 한국적산업혁명인 동시에 의식혁명이라는점을밝혔던 것이다.

 

 그것은 우리 민족 고유의 미풍양속인 향약·계·두레·품앗이 등에서 협동과 단결, 근면과 자조의 정신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야 함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대 새마을 운동이  본격화되기 이전부터 국민에 대한 정신혁명운동으로서 <자조협동>·<협동>이라는 휘호를 내린 바 있으며,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신년 휘호에서 더욱 강렬한 의지를 표명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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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덕보체육관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7.14 북부회원님들 모두 건강 하시지요. 많은 출석 바람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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