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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모 남양주지부

왜 21세기에 朴正熙인가?(!) -조갑제닷컴 글발췌 올림

작성자alice40|작성시간16.11.08|조회수75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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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교재] 왜 21세기에 朴正熙인가?(!)
교사·군인·혁명가·경영자의 네 얼굴을 연기한 ‘눈물 많은 超人’
趙甲濟 조회 : 2771 [2016/11/05, 08:29]

조갑제닷컴 글발췌 올림

 

왜 21세기에 朴正熙인가?(!) 교사·군인·혁명가·경영자의 네 얼굴을 연기한 ‘눈물 많은 超人’ 趙甲濟

월간조선 주최 강연: 2016년 11월8일(火) 오후 2시 서울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 강사: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趙甲濟(조갑제닷컴 대표)

교사·군인·혁명가·경영자

 

朴正熙(1917~1979)는 20세기의 大인물이다. 식민지와 큰 전쟁을 겪은 나라를 18년간 이끌면서 최단시간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고의 성장을 이룩하여 선진 민주 복지국가로 가는 발판을 만들었다.

그는 교사, 군인, 혁명가, 경영자였다. 네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 國力을 조직화하고 능률을 극대화하였다. 그는 思考와 행동이 주체적이었다. 김일성式 닫힌 자주가 아니라 깊은 교양에 기초한 열린 자주였다. 위선적 명분론을 경멸하면서 오로지 實事求是, 즉 사실과 현실에 기초하여 옳은 방향과 방법을 찾는 동양적 실용주의 사상가였다. 위대한 생산성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그는 기원 전 7세기의 管仲과 가장 닮은 사람이다.

업적의 규모와 질에 있어서 그는 李承晩과 함께 20세기 10~15대 인물에 들어갈 만하다.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영국의 처칠, 프랑스의 드골, 중국의 鄧小平, 인도의 네루, 독일의 아데나워, 일본의 요시다, 터키의 아타 투르크, 남아공의 만델라, 러시아의 고르바초프에 못지않다. 박정희는 李光耀와 비슷한 점이 많지만 더 어려운 조건에서 더 큰 나라를 통치하였다.

2000년 민족사에서는 어떨까? 李承晩·朴正熙는 통일신라 이후 처음으로 당대의 一流국가, 그 기초를 놓은 점에서 韓民族의 범위와 공간을 확정한 삼국통일의 세 영웅 金春秋·金庾信·金法敏, 고려의 王建, 조선의 李成桂, 그리고 세종대왕과 李舜臣과 같은 班列일 것이다.

朴正熙는 “민주주의 건설자인가, 파괴자인가”라는 좁은 논쟁의 협곡에 가두어 놓기는 너무 크고 너무 아까운 존재이다. 그는 ‘큰일을 어떻게 조직하고 추진해야 하는가’란 물음에 助言을 줄 수 있는 최고의 참고서이다. 시대가 다르므로 정답이 있는 교과서가 될 순 없지만 ‘일은 이렇게 하면 되는구나’하는 靈感을 준다. 그의 일하는 방법은 균형감각과 주체성과 통찰력에 기초하여 수단과 자원을 넓게 구하고 전략을 짜니 아름답기까지 하다. 최고의 생산성을 만들어내는 지도력의 옹달샘 같은 존재로서 박정희를 연구할 것을 제안한다.

 

교사의 소양

 

교사, 군인, 혁명가, 경영자의 네 가지 역할을 동시에 수행함에 있어서 기초가 된 것은 ‘교사적 소양’이었다. 우수한 지도자와 위대한 지도자를 가르는 것은 교사적 소양의 有無일 것이다.

그는 대구사범을 졸업하고 문경에서 3년간 교사로 일했다. 진정으로 어린이와 弱者를 사랑한 따뜻한 선생이었다. 이런 자세를 평생 유지하였다. 군인으로서도 교사였고 혁명가로서도 교사, 경영자로서도 교사였다. 1961년 5월16일 새벽 남산 KBS를 점거한 혁명군이 박종세 아나운서를 끌어내오자 朴 소장은 그 유명한 혁명공약을 건네주면서 그에게 혁명의 당위성을 설명하였다. 중화학공업의 세계적 성공은 고급 기능인력 양성 교육기관의 뒷받침으로 가능하였다. 이 기능인력이 지금까지 한국 경제의 하부 구조의 핵심임을 놓치는 경우가 많다. 새마을운동의 성공도 사례중심의 체험적 새마을 교육 덕분이었다. 그는 연설을 통하여 국민들을 공개적으로 질책, 비판, 계도한 마지막 대통령이다. 책상을 꽝 꽝 치면서 학생들을 훈계하고, 행사 참석자들이 애국가를 제대로 부르지 않았다고 다시 시키는가 하면 아래서 올라온 연설문 초고를 편집장처럼 꼼꼼하게 고쳐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교사로서 성공하려면 언어감각이 좋아야 한다. 朴正熙(또는 박정희 정부)는 造語의 천재였다. ‘조국 근대화’ ‘민족중흥’ ‘한국적 민주주의’ ‘새마을 운동’ ‘잘 살아 보세’ ‘성실한 사람이 잘 사는 사회’ ‘올해는 일하는 해’ ‘올해는 더 일하는 해’ ‘수출 100억 불 소득 1000불’ ‘소득증대’ ‘국력의 조직화, 능률의 극대화’ ‘自助, 協同, 勤勉’ 등등. 이들 구호는 구호로 그치지 않고 실천으로 연결되어 역사를 만들고 움직였다.

그는 18년 동안 지속적으로 ‘自助-自立-自主’의 3단계 정신 교육을 이어갔다. 스스로 돕는 사람을 정부가 도와준다. 그래야 우리는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다. 자립 경제를 기반으로 자주국방을 할 수 있어야 진정한 독립국가 행세를 할 수 있다. 그의 교육이 가장 강조하는 것은 포퓰리즘 배격이었다. 최단시간 내에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의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포퓰리즘으로 인한 비용 지출을 최소화한 덕분이다. 낭비적 정치를 억압함으로써만 된 것이 아니다. 국민교육으로 시대적 분위기를 만들었기에 생산성 높은 실용적 정책 추진이 가능하였다.

“애국가 봉창 다시!”

 

1963년 5월20일 박정희 의장은 강원도 黃池(지금의 태백시)에서 황지본선 개통식에 참석했다. 혁명정부의 의욕이 담긴 이 철로 준공식에 참석한 박 의장은 致辭를 하기 위해서 단상에 오른 뒤 壇下에 정렬한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마치 조회시간에 학생들을 야단치는 교장처럼 말했다.

“본인이 치사문을 말씀드리기 전에 오늘 여기 식장에서 보고 느낀 몇 가지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이런 행사에서는 반드시 애국가 奉唱, 국기에 대한 경례가 있습니다. 아까 보니 뒤에 와 있는 인사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할 때도 남의 일 보듯이 하고 있었고 애국가를 부를 때도 따라 부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지방에 계신 분들은 이런 행사를 잘 몰라서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앞으로 이런 행사를 할 때는 사회를 맡은 분이 ‘지금부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합시다. 모든 분들은 저 뒤에 있는 국기를 향해서 전부 오른손을 왼 가슴 위에 얹어 가지고 국기에 대한 경의를 표합시다’ 이렇게 하십시오. 오늘 이 식이 끝난 다음 마지막 순서 다음에 사회자는 다시 한 번 국기에 대한 경례와 애국가 봉창을 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꼴찌 학생

 

박정희가 다닌 대구사범 5년간의 성적표는 대구사범의 후신인 경북대학교 사범대학에서 공개를 금지시켜 왔기 때문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었다. 박정희의 집권시절에 나온 傳記類에서는 1등만 한 구미보통학교의 성적표는 소개하면서도 사범학교 시절의 성적은 그냥 ‘우수한 편’, ‘중간 정도’식으로 넘어갔었다.

나는 작고한 李洛善(상공부 장관 역임)이 남긴 메모와 자료들을 1991년에 열람했었다. 그가 육군 소령으로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로 있을 때인 1962년에 모아 두었던 ‘박정희 파일’ 중에서 사범학교 성적표를 발견했다.

박정희는 입학시험에서는 100명 중 51등으로 합격했으나 1학년 석차는 97명 중 60등으로 내려갔다. 2학년 때는 83명 중 47등으로 약간 올라갔다가 3학년 때는 74명 중 67등, 4학년 때는 73명 중 73등, 5학년 때는 70명 중 69등을 했음이 밝혀졌다. 이 성적표가 그의 시대에 공개되지 않았던 것도 ‘꼴찌 출신 대통령’이란 구설수를 차단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박정희의 행동 평가도 나빴다. 품행을 의미하는 ‘操行’ 평가는 5년간 ‘양, 양, 양, 가, 양’이었다. 2학년 담임은 그를 ‘음울하고 빈곤한 듯함’ 이라 적었다. 3학년 때는 ‘빈곤, 활발하지 않음, 다소 불성실’이라 되어 있고 4학년 때는 ‘불활발, 불평 있고, 불성실’이라고 적혀 있다.

志操는 ‘堅實’, 습관은 ‘寡言’, 사상은 ‘穩正’, 학습태도는 ‘보통’으로 평가됐다. 더 놀라운 것은 장기 결석이다. 2학년 때 10일, 3학년 때 41일, 4학년 때 48일, 5학년 때 41일이다. 기숙사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향에 가서 돈이 마련될 때까지 눌러 앉았기 때문이다.

 

문인적 武人

李承晩이 ‘武人的 文人’이라면 朴正熙는 ‘文人的 武人’이었다. 武人과 文人의 자질을 겸하지 않으면 대전략이 나오지 않는다. 인문적 교양이 깔려 있어야 세상을 넓게, 역사를 깊게, 미래를 멀리 보면서 계획을 세운다. 박정희는 독서가였다.

朴正熙 대통령 시절, 대사-청와대 安保특보-국방장관-油公사장을 지낸 劉載興 장군이 쓴 회고록 《激動의 歲月》(을유문화사)에는 청와대에서 본 박정희의 모습이 흥미롭게 그려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직원들이 근무시간 외에 자리에 붙어 있는 것을 몹시 싫어하였다. 특별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日課 시간 외에는 부르지 않았으며, 대신에 日課 시간 내는 반드시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분은 오후 5시가 되면 반드시 일기를 썼다. 나는 여러 번 “각하, 무엇을 그렇게 쓰십니까?” 하고 물으면 “기록이라도 남겨두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대답하곤 하였다.

朴 대통령은 대단한 독서가였다. 책상 위에는 정치, 경제, 문화, 군사에 관한 책이 늘 놓여 있었으며, 이 책들은 자신이 광고를 보고 구입한 것도 있었지만 보좌관이나 장관들이 보고 대통령에게 드린 것이 대부분이었다. 일단 본 책은 빨갛게 밑줄을 그은 채 아랫사람에게 주었다. 가끔 나와 단 둘이 대좌한 자리에서 일본 군벌의 패망사, 제1·2차 세계대전, 한국전쟁, 옛날과 현대의 전략의 비교 등을 논리정연하게 풀어가는 데는 그의 박식함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분은 내가 軍 출신이었으니까 군사 분야에 대해서만 강론을 펼쳤으며, 다른 분야의 특보에게는 그 분야의 강론을 펼치곤 하였으니 늘 공부하는 대통령이었다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대통령 집무실 한쪽에 대형 한국 全圖를 붙여 놓고 틈만 생기면 地形을 응시하곤 하였다. 어떻게 하면 물품 수송을 신속하게 할 수 있을지, 도로, 항만의 시설은 제대로 되었는지, 신설 확장할 곳은… 하고 지도를 응시하고 있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朴 대통령은 냉정하면서도 모든 면에서 인간미가 흘렀다. 일과가 끝나면 으레 청와대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서 반드시라고 할 만큼 막걸리를 반주로 들었는데, 그가 술에 취하여 비틀거리거나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다.>

한국인의 운명을 바꾼 두 대통령-李承晩과 朴正熙는 독서인이고 교양인이었다. 두 분은 당대 최고의 문장가였다. 독서로 다져진 知性과 哲學에서 전략과 정책이 나온 것이다. 책을 가장 많이 읽은 두 사람이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이 되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는 한국인의 축복이었다. 미군 파병을 결단, 한국을 살린 미국 대통령 트루먼은 이렇게 말했다.

“모든 독서가(Reader)가 지도자(Leader)가 되는 것은 아니지만 모든 지도자는 독서가이다.”

 

공산주의 전술의 본질을 간파한 메모

事物의 본질을 透視하는 ‘문인적 武人’으로서 박정희의 정신 역량이 對北전략과 정책에 나타난 사례를 소개한다.

1972년 8월 남북적십자 본회담이 평양에서 열렸다. 朴正熙 대통령은 돌아온 남측 대표 李範錫 씨 일행을 격려하는 자리에서 북한 당국을 상대할 때의 지침을 내렸다.

<남북적십자 본회담時 지침

1. 평양에서 있었던 일은 공식·비공식을 막론하고 모두 보고해야 한다.

2. 공산주의자들과 접촉할 때는 사전에 전략을 세워놓고 해야 한다.

3. 북한 위정자들과 우리가 핏줄이 같다고 생각하는 것은 誤算이다.

4. 우리 적십자사는 인도적 사업이라고 보나 북한은 정치적 사업으로 본다.

5. 북한 요인들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는 모두 정치적이다.

6. 우리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는 신념이 있어야 한다.

7. 술을 마실 때도 상대방이 공산당이란 사실을 잊지 마라.

8. 북한 사람들과는 어떤 자리에서도 감상적으로 흐르지 마라.

9. 북한이 남한 언론을 비판하면 자문위원들은 즉각 반박하라.

10. 대표단과 자문위원 사이는 긴밀한 협의를 하되 매일 저녁 결산토록 하라.>

1979년 1월29일, 朴正熙 대통령이 남북조절위 예비회담 대표에게 써준 메모는 이렇다.

<北傀의 陷井

1. 南韓 政府 不認: 北傀外廓團體와 同一格下

2. 調節委 技能無力化

3. ‘大民族會義’로써 統一戰線戰略試圖

*外軍撤收論議

*連邦制지지논의

4. 我側戰力增强計劃中斷, 現狀凍結, 裝備導入禁止

5. DMZ 內 工事中止: 南侵땅굴 防害 없이 工事해 내려오자는 것

6. 平和攻勢로 美軍撤收促進

7. 앞으로 中斷時 責任轉稼>

이 메모를 읽어보면 朴正熙 대통령은 북한 김일성의 노림수를 정확히 읽고 있었고 이를 한 장의 메모지에 더도 덜도 없이 깔끔하게 요약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메모를 해설하면 이런 이야기가 된다.

‘북한은 이번 회담에 이런 함정을 파놓고 이런 전략으로 나올 것이다. 첫째 그들은 한국 정부를 인정하지 않는다. 한국 정부를 그들 외곽단체의 하나쯤으로 취급하려고 한다. 둘째, 그들은 조절위원회의 기능을 無力化시키려고 획책할 것이다. 셋째, 그들은 남북 간의 모든 단체가 참여하는 大民族회의를 열자고 주장하여 통일戰線전략을 밀고 나올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회의에서 외군철수 및 연방제 지지를 논의하자고 덤빌 것이다. 넷째, 그들은 한국군의 전략增强계획을 중단하고 현 상태로 동결하도록 요구하고 장비 도입도 하지 말라고 억지를 부릴 것이다. 다섯째, 비무장지대 안에서 공사를 하지 말도록 요구함으로써 그 안에서 자신들이 남침용 땅굴을 파는 것을 방해받지 않으려 할 것이다. 여섯째, 평화공세로 주한미군 철수 분위기를 띄울 것이다. 일곱째, 회담이 중단될 때 그 책임을 우리 쪽에 전가하기 위한 함정을 팔 것이다.’

이상의 북한 측 對南전략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민족사적 정통성의 싸움”

1976년 1월24일 朴正熙 대통령은 국방부를 연두 순시하는 자리에서 이런 말을 했다. 준비된 원고 없이 담담하게 이야기한 것을 녹음테이프에서 풀어보면 이런 내용이다.

“특히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논리를 이론적으로 여러 가지로 제시할 수 있겠지만,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우리는 공산주의를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 왜냐. 우리의 민족사적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용납해선 안 된다. 공산당은 우리의 긴 역사와 문화, 전통을 부정하고 달려드는 집단이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 대한민국만이 우리 민족사의 역사적 정통성을 계승하여 지켜가는 국가이다, 하는 점에 대해서 우리가 반공교육을 강화해야 하겠습니다.

공산당이 지난 30년간 민족에 저지른 반역적인 행위는 우리가 절대로 용납할 수 없을 겁니다. 후세 역사도 절대로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우리가 정말 참을 수 없는 것을 참아온 것은 전쟁만은 피해야겠다는 일념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언젠가는 이 분단 상태를 통일을 해야겠는데 무력을 쓰면 통일도 되지 않을 뿐 아니라 한 번 더 붙어서 피를 흘리고 나면 감정이 격화되어 몇 십년간 통일이 늦어진다, 그러니 통일은 좀 늦어지더라도 평화적으로 해야 한다고 우리가 참을 수 없는 그 모든 것을 참아온 겁니다. 우리의 이런 방침에 추호의 변화가 없습니다.

그러나 공산당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그들이 무력으로 접어들 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기독교의 성경책이나 불경책에서는 살생을 싫어하지만 어떤 불법적이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침범할 때는 그것을 쳐부수는 것을 정의라고 보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에서는 누가 내 볼을 때리면 이쪽 따귀를 내주고는 때려 라고 하면서 적을 사랑하라고 가르치지만 선량한 양떼를 잡아먹으러 들어가는 이리떼는 이것을 두드려 잡아 죽이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도 우리 동족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가 먼저 무력으로 쳐올라갈 리야 없지만 그들이 또 다시 6·25와 같은 반역적 침략을 해올 때에 대비하고 있다가 그때는 결판을 내야 합니다. 통일은 언젠가는 아마도 남북한이 실력을 가지고 결판이 날 겁니다. 대외적으로는 내어놓고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미·소·중·일 4대 강국이 어떻고 하는데 밤낮 그런 소리 해보았자 소용없는 이야기입니다. 어떤 객관적 여건이 조성되었을 때 남북한이 실력으로 결판을 낼 겁니다.”

朴正熙 대통령은 남북대결의 外樣은 이념 및 武力 대결이지만 본질은 민족사적 정통성을 놓고 다투는 역사전쟁이라고 정확하게 인식하였다. 북한정권을 민족사의 이단으로 규정, 이 집단을 절대로 국가로 인정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기회 있을 때마다 강조했다. 1966년 12월17일 기자회견에서 그는 “두 개의 한국이라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인정할 수 없고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며, 또 아무리 통일이 된다 하더라도 공산주의식 통일은 절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역설했다. 그는 남북한 간의 대결은 민족사의 흐름 속에서 누가 민족사의 정통성을 쟁취하는가의 싸움이며, 그 정통성을 확보한 쪽만이 1민족 1국가의 월계관을 써야 한다는 역사관에 투철했다. 朴正熙 대통령은 1967년 4월23일 대구 유세(대통령 선거)에서는 이렇게 강조했다.

“통일을 안 했으면 안 했지, 우리는 공산式으로 통일은 못한다. 민주통일을 해야겠다. 통일이 된 연후에 북한 땅에다가 자유민주주의의 씨를 심을 수 있는 민주적인 통일을 하자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그렇게 하자니까 시간이 걸리고 우리의 노력이 필요하고, 우리의 실력의 배양이 필요한 것이다.”

그는 ‘자유의 파도’란 말을 만들기도 했다.

“혹자는 대한민국을 가리켜 자유의 방파제라고도 한다. 그러나 이런 비유를 받아들일 수 없다. 어찌해서 우리가 파도에 시달리면서도 그저 가만히 있어야만 하는 그러한 존재란 말인가. 우리는 전진하고 있다. 우리야말로 자유의 파도다. 이 자유의 파도는 멀지 않아 평양까지 휩쓸게 될 것을 나는 확신한다.”(1966년 2월15일 대만 방문時 장개석 총통 주최 만찬회 인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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