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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太敏(최태민)이란 골칫거리-조갑제닷컴 발췌글올림

작성자alice40|작성시간16.11.08|조회수151 목록 댓글 0
 
崔太敏(최태민)이란 골칫거리
http://naver.me/x1ptpRAZ

조갑제닷컴 발췌글올림

 

 

崔太敏이란 골칫거리

('朴正熙 傳記' 11권에서 발췌)

1975년부터 金正濂 비서실장의 골칫거리가 하나 생겼다.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던 朴槿惠 씨가 구국봉사단 총재 崔太敏(최태민)에 대한 지원을 金 실장에게 부탁하는 것이었다. 朴 씨가 모 건설업자에게 융자를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해 알아보면 崔太敏과 관련 있는 업자였다. 金 실장은 박승규 민정수석에게 “큰영애에 대해서 오점이 생기면 안 되니 주의 깊게 관찰하라”고 시킨 뒤 朴 대통령에게 건의했다고 한다.

“큰영애가 필요한 돈이 있다고 하면 각하께서 저한테 이야기해 주십시오. 소리 안 나게 돈을 만들어 각하께 드리겠습니다.”

朴 대통령도 그렇게 하겠다고 했으나 崔 씨에 대한 정보 보고가 끊이질 않았다. 수석비서관 회의에서도 자주 거론되었다. 崔 씨는 구국봉사단을 이끌고 새마을사업의 하나로서 새마음갖기 운동을 한다고 했기 때문에 새마을 담당 장관이던 金致烈 장관도 崔 씨를 지원했다.

崔太敏이란 이름이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75년 12월 31일자 <조선일보>이다. 1975년 送年(송년)소감을 밝히는 난에 그는 대한구국선교단 총재로서 이런 글을 썼다.

<印支사태를 계기로 더욱 절실해진 국방력 강화를 위해 우리 기독교인들이 생명을 바칠 각오로 구국십자군을 창설한 것, 이와 더불어 기독교인들이 더욱 단합하게 된 것, 그리고 가난한 이들을 위한 봉사의 한 방법으로 야간무료진료센터를 개설한 것들이 뜻 깊은 일이다>

1976년 9월 22일 朴槿惠 씨는 구국여성봉사단의 수원·화성지부 결성대회에 참석하여 격려사를 했다. 수원시민회관에서 열린 이 대회에는 趙炳奎 경기도지사 등 지방유지와 봉사단원 2,500명이 참석했다. 대통령 영애의 지원을 받는 이 단체가 準관변단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그때 崔太敏 씨를 조사했던 한 경찰고위 간부는 朴槿惠·崔太敏 두 사람의 인연을 이렇게 설명했다.

<崔太敏은 1975년 1월쯤 朴槿惠 씨 앞으로 편지를 썼다.

‘어젯밤 꿈에 국모님을 뵈었습니다. 국모님 말씀이 내 딸을 보살펴 달라고 부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槿惠 양의 비서실에서 이 편지를 넣어 주었다. 朴槿惠는 편지를 다 읽고는 崔 씨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때 나이 칠십을 바라보던 崔太敏은 늙은 아내와 장성한 여러 자녀를 두고 있었는 데도 얼굴의 피부가 팽팽한 童顔(동안)이었다. 몸집은 작으면서도 다부져 보였다. 朴槿惠 씨가 최초의 사회활동(구국여성봉사단)을 하게 된 계기는 崔太敏의 권고에 의해서였다.

1975년 2월 朴槿惠 씨는 나에게 崔太敏에 대해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내가 崔太敏을 만나러 갔더니, 崔 씨는 당황한 모습이었다. 내가 槿惠 양의 부탁으로 왔다고 했더니 崔 씨는 갑자기 거만해졌다. 나는 뒷조사를 시켰다. 崔 씨가 자유당 시절에 경찰관을 지냈다는 것, 정규과정을 밟은 목사가 아니라는 사실 등이 드러났다. 나는 직접 朴正熙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朴 대통령은 이 정보를 槿惠 양에게 알려 주고, 주의를 주었다.

朴 대통령은 으레 그러듯 ‘누가 그러더라’는 식으로 정보의 소스를 밝혔다. 朴槿惠 씨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그럴 수가 있느냐”고 섭섭해했다. 나는 그 뒤로 대통령과 槿惠를 만날 수 없게 되었다>

崔太敏과 朴槿惠씨의 관계가 세상에 알려진 것은 10·26 이후였다. 朴 대통령을 죽인 金載圭가 재판과 수사과정에서 朴 대통령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면서였다. 그 요지는 이러했다.

<1978년 무렵 金載圭 정보부장은 구국여성봉사단을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崔太敏의 비행을 검사 출신인 白光鉉 수사국장에게 조사시켰다. 朴升圭 민정수석 비서관이 여러 차례 비행보고를 朴 대통령에게 올렸는 데도 먹혀들지 않아 그가 나섰다는 것이다. 崔 씨가, 여러 재벌 총수들이 구국봉사단에 기탁한 수십억 원을 변칙적으로 관리한 사실, 여성 관련 스캔들이 드러났다.

金 부장이 조사결과를 보고하자 朴 대통령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확인작업을 벌였다. 옛 임금의 親鞠(친국)을 연상시키는 방식이었다. 朴 대통령은 한쪽에 金 부장·白 국장, 그 반대편에 朴槿惠를 앉히고 신문하기 시작했다. 딸은 울면서 “그런 일이 없다”고 했다. 판단이 서지 않았는지 朴 대통령은 검찰에 또 수사를 지시했다. 검찰의 조사결과도 金 부장의 그것과 같았다. 그러나 崔太敏은 구국봉사단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그는 명예총재로 뒤로 물러난 것 같았지만 총재가 된 朴槿惠에게 계속 영향을 끼쳤다>

10·26 사건 뒤 金載圭는 姜信玉 변호사에게 朴 대통령에게 말한 내용을 털어놓았다.

“각하, 일본도 보십시오. 큰영애는 적십자사 같은 데나 관여하도록 해야지 이런 데서는 손을 떼게 해야 합니다.”

朴槿惠 씨는 金 부장에게 “왜 남의 프라이버시 문제까지 조사하느냐”고 항의했다는 것이다. 金 부장은 공정하게 조사했고, “돈이 필요하면 내가 주겠다”면서 제발 손을 떼도록 부탁했다고 한다. 金載圭는, 명예총재로 물러나서도 구국여성봉사단에 대해 계속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崔太敏에게 집요한 관심을 두었다.

1979년 5월에 “崔 목사가 계속해서 대통령 큰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그자는 백해무익한 놈이다. 교통사고라도 나서 죽어 없어져야 할 놈이다”고 화를 냈다고 한다. 5·17 직후 계엄사에서는 崔 씨를 붙들어 가 부정사실과 축재사실을 확인했으나, 朴 대통령의 가족과 관련된 사안이라 덮었다는 것이다.

金載圭의 범행 동기를 수사한 한 관계자는 “金 부장은 이 사건 처리로 대통령에 대해 실망했고, 존경심이 약해지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시해 동기의 하나다”라고 했다.

朴槿惠 씨는 지금까지 일관되게 崔 씨를 전폭적으로 변호하면서 그에 대한 부정적인 정보는 음해라고 말하고 있다. 이제부터는 증거를 찾아나서야 한다.

鮮于煉 당시 공보비서관은 자신의 업무가 아닌 데도 朴槿惠 씨의 일을 돕고 있었다. 그가 생전에 남긴 비망록에 이런 구절이 보인다.

<1977년 9월 20일.

지난 9월 12일 밤, 대통령은 槿惠 양과 金載圭 중앙정보부장 및 白光鉉 정보부 7국장을 배석시킨 가운데 구국봉사단 崔太敏의 부정부패와 뇌물수수 혐의에 대해 親鞫을 했다. 朴 대통령은 오늘 나에게 큰영애인 槿惠 양과 관련해 물의를 일으켰던 崔太敏 구국봉사단 총재를 거세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朴 대통령이 나에게 지시한 내용은 세 가지였다.

“崔太敏을 거세하고, 향후 槿惠와 청와대 주변에 얼씬도 못 하게 하라. 구국봉사단 관련 단체는 모두 해체하고.”

朴 대통령의 지시를 받은 나는 곧 槿惠 양에게 가서 이 사실을 알렸다. 槿惠 양은 얼굴이 하얘지더니 낙담한 표정으로 눈물을 지었다.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제가 각하께 다시 보고드릴 테니 기다려 봐요.”

며칠 뒤 다시 朴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槿惠 양 문제를 여쭈었다.

“각하, 큰영애가 영부인이 돌아가신 뒤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대리하고 있는데, 하고 있던 단체를 모두 해체하면 영애의 체면이 깎입니다. 구국여성봉사단만은 계속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朴 대통령은 한참 동안 생각에 잠겨 침묵을 지키더니 무겁게 입을 열었다.

“자네, 崔太敏을 가까이 안 하게 할 수 있나? 崔와 槿惠를 접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을 붙여서 자네에게 허락할 테니, 그건 따로 의논해서 계속 일하도록 하게. 사실 지난번에 내가 특명을 내리고 나서도 槿惠가 엄마도 없는데 일까지 중단시켜서 가엾기도 하고, 나도 마음이 아팠어.

자네가 구국여성봉사단만은 허락해 달라고 하니 나로서도 괴롭지만, 어떤 의미로는 내 마음이 편안해지네. 내 뜻을 알아서 정말 잘해주기 바라네. 이제는 절대 잡음이 나지 않겠지. 내가 그간 새마음봉사단에 관해 崔太敏과 관련한 보고가 올라올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듯 아팠네. 늘그막에 애들이라도 잘 돼야 내가 마음이라도 편안하지 않겠는가. 나를 좀 도와주게.”>

<조선일보> 1977년 12월 8일자 사회면에는 ‘대통령 영애 朴槿惠 양이 사단법인 구국여성봉사단의 총재로 취임했다’는 1단짜리 기사가 실렸다.

救國여성봉사단과 救國봉사단은 그동안 임의단체로 활동해왔는데 이번에 구국봉사단은 해체하고 구국여성봉사단은 문공부 장관의 설립인가를 받은 사단법인체로 발족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 봉사단은 앞으로 忠孝(충효)에 바탕을 둔 새마음갖기 운동과 사회봉사활동 및 문화사업을 추진하게 된다고 했다.

鮮于煉 씨는 또 이런 후일담을 비망록에 남겼다.

<朴 대통령이 돌아가시고 國葬(국장)이 끝난 직후에 槿惠 양 등이 신당동 집으로 옮기기 위해 집수리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신당동 집에 갔다가 全斗煥 합동수사본부장을 만났다. 그는 신당동 집수리를 직접 감독하고 있었다.

“全 장군, 내가 부탁할 것이 있소. 3년 전에 朴 대통령이 나에게 崔太敏을 거세하라는 지시를 내렸었는데, 그게 몇 달 못 가서 흐지부지되고 말았소. 崔太敏이 다시 영애를 따라다니는 것을 朴 대통령에게 보고해서 깨끗하게 처단해야 했었는데, 영애가 부탁하는 통에 내 마음이 아파 보고를 못 하고 오늘에 이르렀소. 그게 이제는 朴 대통령의 언명이 아니라 유언이 되고 말았소. 합수본부장이니 그 힘으로 崔太敏을 영애에게 접근 못 하도록 해주시오. 방법은 全 장군이 알아서 해주시고.”

그런 부탁을 하고 난 이틀 뒤에 나는 다시 全 장군을 만났다.

“鮮于 의원, 崔太敏 문제는 나도 해결하지 못하겠습니다. 鮮于 의원 얘기를 듣고 영애에게 崔太敏 처리의 양해를 구하기 위해 말씀을 드렸더니, 영애가 ‘崔太敏은 내가 처리할 테니 나한테 맡겨 달라’고 부탁하더군요. 각하도 계시지 않은데 내가 어떻게 영애의 부탁을 거역하겠습니까.”

“여보, 영애가 崔太敏에게 현혹돼 그를 거세하라는 건데 그걸 영애에게 말하는 사람이 어디 있소!”

全 장군의 말을 들은 나는 어이가 없어서 면박을 주었다. 몇 달 뒤 확인해 보니 全 장군은 결국 崔를 강원도 산골로 쫓아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鮮于煉 씨의 비망록을 읽어 보면 朴 대통령이 金載圭 주장대로 무턱대고 딸을 감싼 것은 아니란 사실을 알 수 있다. 어머니를 잃고서 퍼스트 레이디 역할에 재미를 붙인 딸에게 매정하게 대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이 비망록의 정확성을 알아보기 위하여 대통령의 親鞠이 있었다는 1977년 9월 12일자 대통령 면담록을 찾아내 확인했다.

이날 오전 10시 20분부터 11시 25분까지 金載圭 정보부장, 白光鉉 수사국장이 서재에서 朴 대통령에게 보고를 올린 것으로 되어 있다. 아마 이 자리에 朴槿惠 씨가 불려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면담록에 따르면 오전 11시 25분부터 10분간 金載圭 정보부장이 따로 朴 대통령에게 보고했고, 이날 오후 5시 35분부터 20분간 또 朴 대통령을 만나고 갔다. 이 문서는 문제의 親鞠을 확인해 주는 유일한 증거물일 것이다.

全斗煥 당시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측근이었던 許和平 씨는 5공화국 초기에 새마음봉사단을 해체하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그는 朴槿惠 씨를 찾아가 “우리는 朴 대통령의 명예를 지켜 드려야 하는데 새마음봉사단이 대통령의 명예에 累(누)가 되었다. 그러니 이를 해체시키는 것을 양해해 달라”는 취지로 통보했다고 한다.

朴 대통령 시절 정보기관에 몸담았던 사람들은 朴 대통령이 정보부의 보고를 왕조시대의 친국式으로 처리한 데 대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평한다.

朴槿惠 씨는 崔 씨에 대한 어떤 비판에 대해서도 음해론이라며 그를 철저하게 옹호하는데, 이는 다른 객관적인 증언들과 부합되지 않는다.

우선, 당시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하고 있던 朴槿惠 씨에 대해서 음해할 만한 세력이 없었다. 정보부도 비서실도 대통령과 딸을 아끼는 마음에서 直言(직언)을 했다고 봐야 한다. 다만, 崔 씨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 사이에 갈등이 빚어져 상당히 과장된 정보가 올라갔을 가능성은 있다.

朴槿惠 씨는 崔太敏 씨가 하려던 게 모두 좋은 일뿐이니 ‘다소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떠들 일은 아니다’라는 식으로 매우 주관적 판단을 했을지 모른다. 구국여성봉사단에 돈을 가져다 주는 기업 쪽에서도 압력을 받아 마지못해 낸다고 했을 리는 없고, “제발 받아 달라”는 식으로 자진 기부 방식을 취했을 것이다.

朴槿惠 씨처럼 정상적 생활인과는 다른 체험에 익숙해 바닥 民心(민심)을 잘 모르는 권력의 심장부 사람으로서는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했을 수도 있다. 권력의 한복판에 있는 사람은 의외로 그 권력이 보통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를 잘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위한다면서 惡役을 맡겠다고 달려드는 사람을 멀리 하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한나라당의 전 대표인 朴槿惠 씨에게 崔太敏 건이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崔 씨에 대한 그때의 誤判(오판)이 金正日에 대한 침묵과 어떤 관련성이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이다. 2002년 당시 한나라당을 탈당한 朴 의원은 金正日이 내준 특별기를 타고 가서 그를 만났으며, 판문점을 통해 돌아왔다. 파격적인 특별대우였다. 이후 지금까지 朴 대표는 金正日에 대한 비판을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다. 책임자인 金正日을 비판하지 않고서는 북한 정권의 非行도, 盧 정권의 굴욕적인 對北 정책도 견제할 수 없다.

국민행동본부는 광고를 통해서 ‘어머니를 죽인 원수와 만나 오누이처럼 사진을 찍고 와서는 한나라당까지 끌고 들어가서 金正日에 대해 침묵하도록 하고 盧 정권의 對北정책 비판도 포기했다’고 비판한다.

金正日은 朴 의원을 만난 자리에서 朴 대통령을 칭찬했고 “국립묘지에 가서 묘소에 참배하고 싶다”는 말까지 했다고 전한다. 崔太敏과 金正日에 대한 朴 대표의 납득하기 힘든 태도는 20代 처녀의 몸으로 퍼스트 레이디役을 했던 사람의 ‘인간 본성과 세상 물정에 대한 순진한 오판’ 때문인가?

崔 씨에 대한 오판이 朴 대통령의 운명에 다소간의 영향을 끼쳤다고 하더라도 국가적인 사안은 아니었다. 체제수호 정당을 자임하는 巨大야당의 유력자인 朴씨의 현재진행 중인 金正日에 대한 오판과 침묵은 국가적 문제이다. 대한민국 수호세력의 챔피언이 되어야 할 자리에 있는 사람이 민족반역자에게 침묵함으로써 救國운동이 결정적 장애를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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