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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제목없음.

작성자영경|작성시간19.11.07|조회수72 목록 댓글 0

🗣朴正熙大統領과 金昞熙博士
박정희 대통령이 병희야 !

고속도로를 만들자는 사람은 너 뿐이구나!
삶아도, 구워도 먹을 수 없는 사나이라고 한 김병희박사님은 누구일까?

모든 사람들이 안된다고 반대를 하던 경부 고속도로를 만들자고 했으며

장관을 시키려 해도 싫다고 하고 재물도 달갑게 생각 않던 김병희 박사님을

청렴결백한 박 대통령이 '삶아도,구워도 먹을 수 없는 사나이'라고 했으니,
과연 그는 누구일까?

수산대 교수, 해사, 육사 교수, 한국 과학기술 초대 이사장을 비롯해 한양대 교수, 인하대 총장 등, 반 세기에 걸친 교단 생활을 하셨고, 5,16혁명 당시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자문위원이셨던 아흔 줄의 연세로,

박정희 대통령과 대구사범 동기로 대한민국 격동의 시대를 중심에서 살아오신 이학 박사이십니다.
김병희 박사님이 필자가 쓴 박정희 대통령의 글을 보시고 손수 집필하신 2권의 회고록을 친필로 싸인까지 하여 보내 주신 2권의 책을 받아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그 연세에 이렇게 방대한 자료와 엄청난 물량의 글을 쓸 수가 있을까?
더욱이 홈페이지를 누구의 도움도 없이 직접 만드시고 직접 수록한 수학적 기억력에 놀라움에 감탄과 경탄을 금치 못하겠습니다.

회고록의 글 중 박정희 대통령에 관한 일부를 올립니다.

아랫글은 조갑제씨가 보낸 기자가 김병희 박사님과 인터뷰한 기사로서
회고록에 있는 것을 보고 전재합니다.

<최고회의 자문위원이셨던 김박사를 어느 날 박의장이 불렀다. 박의장은 김교수가 집무실로 들어오자 대뜸 한다는 말이 "이 자식아,
한 건물 안에 있으면서 왜 안 왔지?" 였다.

김교수는 "야, 지금 여기 들어오는 데 두 시간이나 걸렸어.
별로 할 말도 없는데 시간이 아까워서도 자주 올 수야 없지."라고 했다. 박의장은 부관을 부르더니 "김병희 교수만은 무상출입 시켜라." 라고 지시하는 것이었다.

<내가 의장실에 들어갔을 때의 첫 인상은 그 방이 어쩌면 그렇게도 초라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마치 야전 사령관이 있는 천막 속을 방불케 했다.
특히 그가 앉은 의자는 길가에서 구두 닦는 아이들 앞에 놓인 나무의자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피우는 담배는 국산 "아리랑"이었다.
당시에 내가 피우던 담배는 국산으로는 최고급품인 "청자"였고 때로는 선물로 받은 양담배였다.
하루는 그 방에 들어갔더니 마침 점심을 먹고 있는데
10원짜리 냄비국수 한 사발과 노랑 무 서너 조각이 전부였다.

나는 10원짜리 우동을 50그릇이나 살 수 있는 500원짜리 고급식사를 마치고 온 터라 몹시 양심의 가책을 받았다.> 이글은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 책에도 수록되어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지성인이시며 거의 1세기를 살아오신 김병희 박사님은 현 정치권을 어떻게 보고 계실까?

김병희 박사님을 생각하며 이 글을 올립니다.
이 글을 보시는 분은 아래 박사님의 홈페이지 주소로 가 보시면 많은 것을
알 수가 있다고 봅니다. 홈페이지 오른쪽 맨 위에 동아, 조선, 중앙, 블로그에 '안부게시판' 에 메모를 남겨주시면 아무리 간단한 글이라도 꼭 댓글로 답해 주시는 김박사님의 홈페이지를 소개합니다.
http://home.megapass.co.kr/~gimbyngh/
작성자 : 홍순재 김병희 박사가 본 인간(人間) 박정희(朴正熙)! 그는 이미 하늘나라로 가버렸으니, 어찌 나의 이 추모의 정을 알리오?

오늘에 와서 그를 비방하는 일부 인사들도 있지만, 진정 그를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는 그 당시 그를 가까이 모시면서 만사에 청렴결백했던 그를 보았지만, 아무리 맑게 한다 해도 후일의 가족을 위해 어느 구석진, 이를테면 MBC 재단 같은 곳에 그들의 생활비 정도는 나올 무엇인가는 마련해 두었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런데 오늘에 와서 보니 그것도 아니었으니,
이 세상에 그처럼 결백한 집권자가 또 어디 있었을까?

<박 의장의 애국심은 지나치다고 보여질 때도 가끔 있었다. 그는 당시 장충단공원에 있던 의장공관을 쓰고 있었는데, 어느 눈비 내리는 겨울 아침에 국민학교 6학년인 장녀 근혜양을 운전병이 지프차로 등교시켜 준 일이 있었다.
그날 저녁에 그 사실을 알게 된 박의장은 근혜 양을 불러다 꿇어 앉혀놓고,
"그 차가 니 차냐, 그 차가 아버지 차냐?" 하고 힐책했다. 아무 말도 못하고 울고만 있는 딸에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 차는 나라 차야, 나라 차를 니가 감히 등교용으로 쓸 수 있는가 말이다!"

아득한 옛날, 대구사범 1학년 때 생각이 떠오른다.

박물 시간에 어느 식물 꽃 단면을 확대경을 보아가며 크고 세밀하게 그리는 작업을 한 일이 있었는데, 여러 급우들이 그린 것들 중에서 최고 평점인 'G'를 박 군이 차지했었다. 그는 일찍 경북 선산군 구미 보통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여, 그와 같은 수석들만이 응시했던 대구사범의 9 : 1이라는 입시경쟁을 돌파한 엘리트였고 그 엘리트들 중에서도 'G' 라는 평점을 받을 만큼 그의 두뇌는 비상했던 것이다.
그랬기에 천군만마를 질타하는 작전계획이라면 저 미국 육사 출신의 엘리트들조차 우리 박장군을 따를 수 없다고 하지 않았겠는가?
그랬기에 쓰러져 가는 이 나라의 구출을 위한 한강 도강작전에도 성공하지 않았던가?

정희야! 너와 나는 대구사범에 입학해서 본관 2층이었던 1년 2조 교실에서 처음으로 만났지!
이름 글자로는 드물던 '희(熙)'를 우리 둘은 공유했기에, 나는 너에게 비록 성(姓)은 달랐어도 형제와도 같은 친근감을 느꼈었다.
내가 보던 너는 항상 모든 일에 총명했다.
게다가 너는 또 의분을 느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드는 용감한 사나이였다.
어느 날은 박물 교실의 뒤뜰에서 대구출신 S 군과 약골이었던 주재정군이 싸웠는데, 깡패와 같았던 S는 주군을 단숨에 때려눕혀 놓고,
그래도 모자라서 맥주병을 깨어 머리를 쳤는지라 유혈이 낭자했다.
모두가 겁을 먹고 도망쳤는데, 오직 우리 박군만이 뛰어들어 그를 때려눕히고 주군을 구출했었다.
그 용기와 그 지모와 그 애국심 등이 박 군의 그날 5.16혁명을 있게 했건만, 그에게 넘겨진 대한민국에는 GNP 83불의 헐벗은 백성들이 사월남풍에 대맥(大麥, 보리)이 누렇게 익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이른바, 우리 겨레의 비운이었던 보릿고개를 알았기에 그는 10원짜리 냄비우동으로 점심을 때우면서도 그런 것조차도 못 먹는 불쌍한 동포들의 굶주림을 걱정했을 것이다.

또, 체인스모커(chain smoker)인 그가 담배 없이는 아무 일도 손에 안 잡히니 피우기는 해야겠는데, 그 옛날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궐련은 커녕 한 봉지의 장수연이나 희연(囍煙) 조차도 손쉽게 못 얻어 피우시던 일을 회상하면, 그 '아리랑'을 피우기조차 송구스럽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金昞熙>

박대통령의 비리를 찾아보려고 26년간 뒤지고, 까고, 파고, 훑어봐도 찾을 수가 없으니 화풀이라도 하려는 듯 그가 쓴 광화문, 화령전, 운한각, 현판도 뜯어내려 하고 그 시절에 심어졌다 해서 나무까지 뽑아낸 좌파들!!,
장관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제 자식 취직자리부터 챙기는 썩어빠진 것들이 박대통령을 매도하려 발버둥친다.

친북좌파놈들아!! 똑바로 알라!!
당신들 제아무리 폄훼하려 발광해도 박정희 대통령의 이름은 대한민국 중흥의 시조로써 역사에 길이길이 남을 것임을….
박정희는 비록 비명에 갔지만 그는 죽어서 진정 그 가치를 세월이 흘러가면 갈수록 높이 평가받게 될 것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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