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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 여사의 추억♣

작성자定久|작성시간12.01.15|조회수72 목록 댓글 3

                             ♣육영수 여사의 추억♣

 

 

▲박 대통령의 한걸음 뒤에서 다소곳 자세를 낮

 육 여사의 미소. 1971년 4월 25일 장충단공원.

 

♣육영수 여사의 추억♣

굳이 신화로 채색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따뜻하고 정감 어린 인간 이었다.

박정희에겐 침을 뱉던 사람들도

육영수(陸英修)에겐 그럴 수 없었다.

 

▲영남대학생들과 담소하는 육 여사

(1972년 4월 12일). ⓒ 국가기록원

한국적 퍼스트레이디의 원형이 돼버린

육영수란 이름은 그녀를 기억하는 사람들

마음과 뇌리 속에 여전히 깊숙이 박혀 있다.

그런 그녀가 살아 있다면 내일 84회 생일을 맞는다.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꼿꼿이 앉아

총탄을 맞은 그녀는 그날 오후 7시쯤 세상을 떴다.

비보가 전해지던 그 순간 오후 내내 내리던 비가 걷히면서

어두컴컴하던 하늘이 주황색을 띠었다.

 

단순한 저녁노을이 아닌 듯싶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옥상에 올라가

그 묘한 하늘빛을 신기해하며 바라봤다.

특히 서울대병원 쪽 하늘은 유난히 붉었다.

 

나는 지금도 그 하늘 빛깔을 잊을 수 없다.

생전에 박정희는 먼저 간 아내

육영수를 그리며 시 한 수를 지었다.

 

 

‘추억의 흰 목련―유방천추(遺芳千秋)’란 시인데

거기 이런 구절이 있다.

“흰 목련이 말없이 / 소리 없이 지고 가 버리니

/ 꽃은 져도 향기만은 / 남아 있 도다 //

 

…기약도 없이 한번 가면 / 다시 못 오는 불귀의 객이 되었으니

/ 아 이것이 천정(天定)의 섭리란 말인가 /

아 그대여, 어느 때 어느 곳에서 다시 만나리.”

 

 

이 시를 짓고 나서 5년 후 박정희는 육영수의 곁으로 갔다.

박정희와 육영수가 처음 만난 것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부산 피란 시절이었다.

 

육영수는 박정희의 대구사범 1년 후배이자 부관이었던

송재천의 중매로 부산 영도다리 옆

작은 식당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육영수는 그 자리에서 박정희를 마음에 심었다.

그만큼 육영수는 단호함과 분명함이 박정희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그 후 두 사람은 50년 12월 12일

대구 계산동 성당에서 혼례를 올렸다.

결혼 당시 갓 중령 계급장을 단 박정희는

34세로 재혼이었고 배화여고를 나와

옥천여학교 선생을 하던 육영수는 26세의 초혼이었다.

 

 

그 두 사람의 결혼은 조촐했다.

하지만 이내 그것은 대한민국의 역사가 됐다.

육영수는 49세에 세상을 떴다.

같은 옥천 출신이고 죽향 초교 대선배이기도 한 천재 시인

정지용 또한 49세에 세상과 하직했다.

 

그의 시 ‘향수’엔 이런 구절이 있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 옛이야기 지줄 대는 실개천이 회 돌아 나가고 /

얼룩백이 황소가 /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

아무렇지도 않고 여쁠 것도 없는 / 사철 발 벗은 안 해가 /

따가운 got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

그 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 리야 // …”

 

 

딸 박근혜에게 육영수란 정말이지 ‘꿈엔들 잊힐 리야’

하는 존재다. 그녀는 박정희의 딸이기 전에 육영수의 분신이었다.

그래서 23세 앳된 나이에 죽은 엄마를 대신해

일국의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감당했다.

 

남들이 길게 풀어헤친 머리에 청바지를 입고 활보할 때

그녀는 머리를 틀어 올리고 한복을 차려 입은 채

아버지의 텅 빈 한 켠을 채워야 했다.

그 일을 5년씩이나 했다.

 

요즘 같으면 한 임기를 채운 셈이다.

박정희가 칼이었다면 육영수는 칼집이었다.

그 칼집이 사라지자 칼이 난무(亂舞)할 수밖에 없었다.

칼집이 없으면 칼은 쓸 데 안 쓸 데를 가리지 못하는 법이다.

 

 

육영수는 38세에 청와대에 들어가 12년 동안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단단히 해냈다.

역대 퍼스트레이디들이 선망과 시기를 동시에 느낄 만큼,

어쩌면 결코 넘어설 수 없는 신화를 만들었다.

 

하지만 육영수는 굳이 신화로 채색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 따뜻하고 정감 어린 인간이었다.

정치적 이해로 그녀가 달리 채색되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젠 그녀를 정치적 이해를 떠나 기억해줬으면 좋겠다.

박정희의 아내, 박근혜의 어머니로서만이 아니라

‘인간 육영수’ 그 자체로 말이다.

 

2009-11-28 / 정진홍 논설위원

 

[글, 옮김, 編: 定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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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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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고동소라 | 작성시간 12.01.16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定久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1.17 고맙습니다. 즐겁고 행운 가득한 좋은 날 되세요. 감사합니다.
  • 답댓글 작성자고동소라 | 작성시간 12.01.17 편한 밤 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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