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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부처님과 세 보살

작성자미미엔바비|작성시간13.08.16|조회수13 목록 댓글 0

 

 

 

부처님과 세 보살

눈으로 사물을 보되 사물의 근원을 반조 할줄알면 문수요.
귀로소리를 듣고서 그뜻을 반조 할수 있으면 관음이며
마음을 살피되 그 본 바탕을 반조 할줄 알면 보현이다.

문수는 부처님의 깊이 관찰하는 지혜요.
관음은 부처님의 조건없이 펼치는 사랑이며 보현은
부처님의 깊고 진실한 행동이다.

세보살은 부처님의 작용이요.부처님은 세보살의 본체이다.
- 경덕 전등록 -님과


 

 

             실천 생활수행 5원칙

 

모든 괴로움의 원인은 집착에 있다.
집착이란
항상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항상하기를 바라고,
머물러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다.
세상은 그 어느 것도 머물러 있지 않는다.
이 세상의 유일한 진리는
항상하지 않고 변화한다는 것이다.
오직 변화한다는 그 진리만이 변화하지 않을 뿐이다.

제행무상.
변화하는 것이 진리라면
그대로 변화하게 내버려 둬야 한다.
어리석은 우리가 진리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
거스를 수 없다면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대로 산다는 말은
변화하는 대로 변화를 받아들이며 산다는 말이다.
변화를 받아들인다는 말은
다시 말하면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모든 수행자의 삶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이 세상은 반드시 변화한다.
내 마음도 변화하고,
상대방의 마음도 변화하고,
나의 사랑도 변화하며,
나의 소유물들도 다 변화하고,
내 몸뚱이 조차 변화하여 공으로 돌아간다.

이 세상의 모든 이치는 그렇게 변화할 뿐이다.
그러한 변화를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모든 수행의 시작이며 끝이다.
온전히 받아들이며
그 변화에 내 삶을 내맡기는 것 그것이 수행이다.

내 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존재며 경계
그 모든 것은 변화라는 진리의 한 모습이며
그것은 그대로 진리의 나툼이고 부처의 나툼인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렇게 수행자의 첫 번째수행은
변화하는대로 변화할 수 있도록
어느 것 하나 붙잡아두지 말고, 거부하지 말고
받아들이는 ‘섭수’의 수행이다.
‘수(受)’, ‘받아들임’
그것이 진리대로 사는 첫 번째 길이자 궁극의 길이다.

그러면 변화하는데 어떻게 변화하는가.
무슨 근거로 변화하는가.
그것이 바로 인연법.
이 세상은 그대로 인연따라 나툰다.
원인을 지으면 받드시 그에 따른 결과가 따라온다.

이 세상 그 어떤곳에 숨어도
인연과보라는 법칙을 피할 곳은 없다.
인연과보는 죽음이후에도 반드시 따라오는 법.
지금 내 삶이 진행되어 가는 모습은
내가 과거로부터 지어 온 업장이 현실화되는 과정인 것이다.

내가 짓지 않은 것은 결코 현실화될 수 없다.
지금 일어나는 현실은
분명 내가 지은 일이고 과거의 결과인 것이다.
쉽게 말해 누가 나를 욕하더라도
그것은 내 과거의 과보를 받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니 당장에 욕 얻어 먹는 것은 괴롭지만
그것은 과거의 악업의 결과를 받음으로써 녹여가는 과정인 것이다.

그러니 괴로운 일도 크게 보면 좋은 일이다.
다 부처님의 일이고 진리의 일이다.
괴로운 일은 과거세 악업의 과보를 받는 일이고,
그럼으로써 내 업장은 그만큼 깨끗해 지는 일인 것이다.

또한 좋은 결과만 받겠다고
일도 열심히 안 하고 좋은 일이 있기만을 바랄 것도 없다.
내 삶에 대박이 터지고, 행운만이 있길 바랄 것도 없다.
인과법에 대박이란 없다.
내가 과거세에 지은 복을 지금 받는 것일 뿐이다.
그러니 좋은 일만 자꾸 일어나는 것은
그만큼 내 안의 복을 자꾸 까먹는 일이고,
선업의 업장을 다 써버리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다시말해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내 악업이 녹아내리느라고 그러는것이고,
좋은 일이 생기는 것은
과거에 지은 복, 선업을 받느라고 그러는 것이다.

그러니 나쁜 일이라고 거부할 것도 없고,
좋은 일이라고 더 받고자 애쓸 것도 없다.
이 세상에서는 그저 꼭 필요한 일이
인연따라 필요할 때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싫다고 거부할 것도,
좋다고 애착할 것도 없이
그저 시비 분별을 다 놓아버리고
있는 그대로 다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다 받아들이는 것이
인연법을 실천하는 일이고,
우리의 업을 맑히는 일인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삶의 방식은
좋은 것은 더 얻지 못해 애쓰고 집착하며,
싫은 것은 버리지 못해 애쓰고 괴로워한다.
변화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지 않고
항상하기를 바라며 붙잡아두려 한다.

붙잡아두었을 때,
그래서 ‘내 것’이란 소유물들이 많아질 때,
좀 더 많이 소유하고
집착하는 대상을 붙잡아 두었을 때
행복하다고 착각하며 살고 있다.

그렇게 죽을 때 까지 집착하고 집착하고
그 집착의 대상을 끊임없이 소유하고자 하는 연장이 우리의 삶이다.
집착하는 대상을 얻었을 때 행복하고,
집착하는 대상을 잃었을 때 괴로움은 찾아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 항상하는 것은 어디에도 없기 때문에
집착할만한 것은 어디에도 없다.
변화한다는 진리 앞에서
집착은 괴로움을 동반할 뿐이다.

말 그대로 집착이라는 것은
그 어떤 대상에 대해 영원하기를 바라는 것이며,
변화를 거부하려는 것이고,
내 마음이 그 대상에 들러붙어 있는 것을 말한다.

제행무상의 이치,
변화라는 진리는 거스를 수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것을 거부하여
모든 것을 집착하려 든다.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지독한아집.
그것이 모든 괴로움의 시작이란 말이다.

그렇게 스스로 만들어낸 집착과
집착으로 인한 괴로움 때문에 허우적 거리는 중생을 위해
부처님께서는 세삼스럽지만 집착을 놓도록 이끌어 주고 계신다.

변화 그 자체를 받아들이는
‘수’의 수행을 통해서 우리는 진리답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이지 않고
잡아두려 애쓰고, 집착하려 애쓴다.
행복하기 위해 집착을 부여잡는 어리석음을 감행한다.

그래서 또다른 수행을 이름붙이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방하착이라는 말도 할 것 없지만
수많은 사람들이 집착을 하고 사니
어쩔 수 없이 ‘집착을 놓아라’ 하고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수행자에게 당부하는
두 번째 수행법 ‘방하착(放下着)’ 이다.
이러한 ‘방(放)’의 수행은
분명 첫 번째 ‘받아들임’의 수행과 별개의 것이 아니다.
받아들이지 못하고 집착을 하니까
그 집착을 놓아버리라고 말하는 것일 뿐.

방하착
가지고 있는 집착을 놓았을 때
모든 괴로움은 소멸되고,
변화라는 진리를 받아들일 수 있게 되고,
진리와 하나되어 흐를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
이렇게 방하착하라고,
가지고 있는 모든 집착을 놓으라고 말하니까
많은 사람들은 집착을 놓으려고 애쓰고
집착을 놓지 못해서 괴로워한다.
방하착이 또다른 괴로움을 불러일으킨다.
수행이 또다른 괴로움을 몰고온다.
수행 잘 하고 싶은데수행이 잘 안되서 괴로운 문제가 생겨난다.

그러나 애쓰는 것은 수행이 아니다.
수행하려고 애쓰고, 부처가 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지금 이대로 우리의 존재도 삶도 완전하기 때문이다.
애쓴다는 것은 이미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하지 못하고
무엇인가를 찾아 갈구한다는 말이며
지금 이 순간 만족하지 못했을 때
행복은 깨어지고 괴로움은 시작된다.

집착을 없애기 위해 애쓰지 말라.
어떤 노력도 하지 말고,
어떤 분별도 하지 말고,
어떤 판단이나 평가도 하지 말고,
다만 집착하고 있음을 물셀틈 없이 바라보기(觀)만 하면 된다.

있는 그대로
아무런 분별 없이 바라보기만 하면 된다.
다만 바라보기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받아들이는 것이고,
그랬을 때 진리와 하나되어 살아갈 수 있다.

다 같은 말이다.
받아들이라는 말이나
집착을 놓으라는 말이나
바라보라는 말이나 다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고
방편일 뿐이다.

그래서 세 번째 수행으로
‘관(觀)’, 알아차리기, 바라보기를 말하는 것이다.
관한다는 말은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한다는 말이다.

과거도 미래도 다 놓아버리고
오직 지금 이 순간에 존재할 때
존재는 완전하고 완벽하게 깨어있게 된다.
그 때 존재 본연의 깨달음과 함께하는 것이다.

깨어있음과 함께 하지 않는 그 어떤 행동들도
모두가 업, 카르마가 되고 말지만,
관과 함께 하게 되면 업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다.
지금 이 순간 깨어있음의 힘은
그대로 부처가 되고,
이 세상이 본래불이라는
본래부터 완벽하다는 법신불을 일깨우는 수행이 된다.

이 세상은 본래가 부처인 것이다.
이 우주법계 삼라만상 그 어느것도 부처 아닌 것이 없다.
그 어떤 것도 완전하지 않은 것은 없다.
나도 세상도 모두가 완전한 참성품의 나툼이다.
존재도 행위도 모두가 부처의 나툼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존재도 부처요
내가 행하는 모든 일들 또한 부처의 행이며
완전한 행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은 물론
앞에서 말했던
‘수(받아들임)’과 ‘방(놓아버림)’ ‘관(알아차림)’의 함이 없는 수행이
뒷받침 되었을 때의 일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중생으로써 사는 것이 아니라
부처로써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부처로 사는 것이다.


본래 부처라고 말해도
아직은 부처가 아니니 괴롭다고 말하겠지만
괴롭다는 것도 우리들 착각이란 말이다.
꿈 속에서 아무리 괴로운 일을 당하더라도
꿈 깨고 보면 그 일은 괴로움이 아님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마찬가지로 우리들 삶 속에서
우리가 괴롭다고 느끼고 살지만
본래 괴로운 것은 하나도 없다.
다만 우리 스스로 만들어 낸 허상일 뿐.

밧줄을 보고 뱀이라고 놀라 도망쳐 놓고
그 다음날 밝은 가운데 밧줄이었음을 알게 되면
놀람도 괴로움도 공연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느끼는 괴로움이 그런 것이다.

그러니 괴로움을 없애려고 애쓸 것 없다.
괴로움의 대상을 제거하려고 애쓸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공연히 스스로 만들어 낸
괴롭다는 느낌만 놓아버리면 그 뿐.

이와같이 괴로움도 다 허상일 뿐이다.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이며, 존재, 또 경계들은
그대로 완전한 부처님의 나툼인 것이다.
이 세상은 어느 하나 빼놓을 것도 없이 법신불 그대로다.

우리가 어리석기 때문에 모르고 있을 뿐,
어둡기 때문에 밧줄을 뱀으로 착각하는 것일 뿐,
본래 이 세상은 완전한 일이 항상 완전하게 일어나고 있을 뿐이다.

내가 하는 일도
모두가 완전하고 온전한 부처님의 일이다.
나라는 존재 또한 그대로 부처인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 느끼는 이유는
‘나’라는 아상이 자꾸만 개입되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라 부처라고 하는데
애써 ‘나’라고 자꾸만 고집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본래 ‘나’란 없다.
무아(無我)가 모든 존재의 본래 모습이다.
제법무아
그것이야말로 모든 존재에 대한 진리의 표현이다.
제법무아를 실천하며 산다는 것,
진리대로 산다는 것은
다시말해 ‘나’로 살지 않고 ‘부처’로 사는 것을 의미한다.

‘나’로 살아선 안된다.
내가 산다고 착각해서는 안된다.
‘나’라는 아상을 가지고
내 것을 늘려나가려는 ‘아집’에 얽매여 살면 안된다.
‘나’라는 상
내가 살고 있다는 상,
그것이 모든 괴로움의 시작이 된다.

‘나’가 없다면
괴로울 주체가 없기 때문에 괴로울 것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상만 버리면 그대로 부처라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나’가 없다.
오직 온전한 ‘부처’만이 있을 뿐이다.

그렇기에
이 세상 모든 일은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일 수 밖에 없다.

내 일로 부여잡지 말고,
내 것으로, 나로 붙잡아 두려 하지 말고,
나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서
오직 부처 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 이 세상 모든 일은
‘내 일’이 아닌 ‘부처님 일’로 돌려 놓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아상으로 살지 않고
전체아, 대아, 진아, 참나로 사는 것이다.

불(佛), 자성불(自性佛)
이 것이 바로 네 번째 수행인의 자세이다.
이렇게 네 가지 수행만 삶 속에서 지키고 살 수 있다면
그 어떤 괴로움도 있을 수 없다.

수, 섭수, 받아들임
좋다고 잡지도 않고 싫다고 버리지도 않고
다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면,
그렇게 대 긍정으로 살면 괴로움울 일이 없다.
변하는 것을 변하도록 내버려 두고 인정해 줄 수 있다면
그 어떤 것도 집착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다 받아들였을 때 업을 녹일 수 있고,
인과응보라는 육도윤회의 사슬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방, 방하착, 놓아버림
변한다는 이치를 받아들이면 집착할 게 없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한 치라도 집착이 있다면 놓아버려야 한다.
모든 집착을 놓는 자리가 바로 부처의 자리인 것이다.
다 놓아버리고 나면 그저 텅 비어 충만하다.
놓아버렸는데 공연히 무슨 괴로움을 붙잡을 것인가.
놓아버림이 바로 깨달음이다.

관, 관조, 알아차림
집착을 놓으려면 다만 바라보면 된다.
집착하고 있을 때 집착하고 있다고 알아차리면 된다.
판단하지 말고, 분별하지 말고 다만 알아차리면 된다.
알아차리는 순간 집착은 사라진다.
관은 ‘지금 여기’에서 온전한 만족을 가져온다.
지금 이 순간이 온전한 부처님 숨결임을 일깨워준다.

불(佛), 자성불, 부처님 일
온 우주 법계 삼라만상은 모두가 부처님의 나툼이다.
나도, 존재도, 경계도, 일도,
모든 것이 온전한 부처님의 숨결이다.
‘나’는 무아이고 불완전의 시작이며 괴로움의 주체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내 일’이 아니라 ‘부처님 일’로 돌려 놓아야 한다.
그러면 괴로울 것이 없다.
내가 괴로운 것이 아니라 부처님이 괴로운 것이고,
즐거움도 내가 즐거운 게 아니라 부처님이 즐거운 것이니,
좋고 싫음에 걸림 없이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네 가지 수행의 자세를
수행자는 항상 삶 속에서 견지해야 한다.
그랬을 때 참된 부처님의 지혜를 찾게 된다.
‘나’로써 어리석게 사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으로써 지혜로운 삶을 살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제행무상을 받아들이고,
제법무아를 받아들이고,
인연과보의 법칙을 받아들이고,
다만 지금 이 순간에 깨어있을 때,
그러한 깨달음의 순간 순간을 삶 속에서 연습할 때
우리는 조금씩 부처님으로 살 수 있게 되고
부처님의 반야 지혜를 체득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지혜를 증득하기 위해서
내 마음만 밝혀서 끝나는 문제는 아니다.
아주 중요한 하나가 더 남아 있다.
그것은 바로 앞서 말했던
‘지혜’와 함께 ‘복덕’을 증장시키는 일이다.

부처님은
지혜와 복덕이 두루 원만하신 분이다.
지혜와 복덕은
‘귀의불 양족존’에서 보듯이
부처님의 두 가지 모습이다.

앞의 네 가지 수행이
지혜를 증장하는 수행이라면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다섯 번째
생활 속의 수행이 바로 복덕을 증장하는 실천수행이다.

바로 ‘보시바라밀’의 수행이다.
이타적인 베품의 수행이다.
그것은 복덕을 증장시키는 수행이며, 자비의 수행이다.
베품이없는 지혜나 지혜가 없는 베품은
모두가 절름발이에 불과하다.

수레의 양 바퀴가 고루 균형 잡혀야지만
법륜의 바퀴를 잘 굴릴 수 있듯이
복과 지혜를 고루 실천해야만 참된 수행자라 할 수 있다.

깨달음을 얻으신 부처님께서
그 깨달음을 일체중생에게 회향하지 않으셨다면
다만 한 사람의 이름모를 사람으로 잊혀졌을 것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이라는
보살의 서원처럼 상구보리가 중요한 만큼
똑같이 하화중생의 대 서원이 꼭 필요한 것이다.

지혜롭기만 하고 자비롭지 않다면
그 지혜는 잘못된 쪽으로 사용될 수 있다.
지혜와 자비는 사실 같은 진리의 다른 표현이다.
온 우주 법계가 둘이 아니라는
나와 너가 둘이 아니라는 절실한 자각이 지혜라면
그러한 실천이 자비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에게 공양을 베풀 때
자비를 베푼다고 말하지 않는 것 처럼,
온 우주 법계 모든 존재가 그대로 나와 둘이 아니기 때문에
내가 배고플 때 밥을 먹는 것처럼
남이 배고플 때 똑같이 내가 배고픈 것처럼 밥을 주는 것이고,
물론 그러한 베품은 베품이라고 이름할 수 조차 없다.
내가 나에게 밥을 주고 베풀었다고 하지 않는 것처럼
나와 남이 둘이 아닐 때
아무런 상 없이 베푸는 참된 무주상보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수, 방, 관, 불, 시
섭수, 방하착, 관조, 자성불, 보시
받아들이고,
놓아버리고,
알아차리고,
‘부처님 일’로 돌려 놓고,
늘상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이
모든 수행자의 일상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다섯 가지의 생활실천법 안에
연기법의 실천,
인과응보의 실천,
삼법인의 실천,
무아법의 실천,
공성의 실천,
사성제의 실천,
사념처의 실천,
금강경에서 말하는 아상을 녹이는 실천,
무분별, 무집착, 무소득, 무소유의 실천을 비롯한
일체 모든 부처님 가르침의 실천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물론 이 다섯 가지는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다 같은 말의 다른 표현일 뿐이고,
다른 방편일 뿐이다.

생활 속에서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 것인지,
당장 괴로운 경계를 맞아 어떻게 마음을 돌려야 할지,
어떻게 수행해 나가야 할지,
어떻게 삶을 살아나가야 할지에 대한
작은 도움이 될까 하여
다만 다섯가지로 크게 분류하여 놓았을 뿐인 것이다.

18<IMG카페 / 一寸  18<IMG

첨부파일 나무대비관세음.w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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