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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너무 조이거나 느슨하게 하지 말라

작성자미미엔바비|작성시간14.02.10|조회수22 목록 댓글 0

 

 

 

너무 조이거나 느슨하게 하지 말라


부처님이 라자가하의 죽림정사(竹林精舍)에 계실 때였다.
소오나 비구는 영축산에서 쉬지 않고
선정(禪定)을 닦다가 이렇게 생각했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정진하는 성문(聲聞)중에 나도 들어간다.
그런데 나는 아직도 번뇌를 다하지 못했다.

애를 써도 이루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집에 돌아가
보시를 행하면서 복을 짓는 것이 낫지 않을까? '
부처님은 소오나의 마음을 살펴 아시고 한 비구를시켜
그를 불러 오도록 하셨다.

부처님은 소오나에게 말씀하셨다.
"소오나, 너는 세속에 있을 때에 거문고를 잘 탔었다지? "
"네, 그랬습니다."
"네가 거문고를 탈 때 만약 그 줄을 너무 조이면 어떻드냐?"
"소리가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었을 때는 어떻드냐?"
"그때도 잘 나지 않습니다. 줄을 너무 늦추거나
조이지 않고 알맞게 잘 고루어야만 맑고 미묘한 소리가납니다."

부처님은 소오나를 기특하게 여기면서 말씀하셨다.

"그렇다, 너의 공부도 그와 같다. 정진을 할 때
너무 조급히 하면 들뜨게 되고 너무 느리면 게으르게 된다.

그러므로 알맞게 하여 집착하지도 말고 방일하지도 말아라.
" 소오나는 이때부터 항상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거문고를 타는 비유를 생각하면서 정진하였다.

그는 오래지 않아번뇌가 다하고 마음의 해탈을 얻어
아라한(阿羅漢)이 되엇다.

소오나는 아라한이 되어 마음으로 해탈한 기쁨을 지니고
부처님을 찾아가 뵈었다.

"부처님, 저는 부처님의 법 안에서 아라한이 되었습니다.
모든 번뇌는 다하고 할 일을 이미 마쳤으며
무거운 짐을 벗어 버렸습니다.

또 바른 지혜로써 욕심을 떠난 해탈, 성냄을 떠난
해탈, 멀리 벗어난 해탈, 애욕이 다한 해탈, 모든
취(取)로부터의 해탈, 늘 생각하여 잊지 않는 해탈 등
여섯 가지 해탈을 얻었습니다.

부처님, 만약 조그마한 신심으로 욕심을 떠나
해탈했다고 한다면 그것은 옳지 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욕심을 떠난 해탈이라고합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사소한 계율을 지키는 것으로써 자기는
성냄에서 해탈했다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성냄을 떠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양(利養)을 멀리 벗어나려고 닦아
익힌 것으로써 멀리 벗어난해탈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옳지 못합니다.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참으로
멀리 벗어난 해탈이라고 합니다.

이와 같이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이 다한 것을
가리켜 애욕이 다한 해탈, 모든 취(取)로 부터의 해탈,
생각하여 지 않는 해탈이라고 합니다.

" 존자 소오나가 이 법을 말하였을 때 부처님은 기뻐하셨고
수행자들도 한결같이 환희에 젖었다.

소오나가그곳을 떠나자 부처님은 비구들에게 말씀하셨다.

"마음이 잘 해탈한 사람은 마땅히 그와 같이 말해야한다.
소오나는 지혜로써 말하였다.

그는 스스로를 추켜세우지도 않고 남을 낮추지도 않고
그 이치를 바로말하였다"


- 雜阿含 二十億耳經(잡아함 이십억이경) -

 

방하착(放下着)이야말로
무아(無我)의 진리...
연기(緣起)의 진리...
삼법인(三法印)의 진리...
사성제(四聖諦)의 진리...
중도(中道)의 진리...
공(空)의 진리...
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이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이 모든 교리에 대한 충실한 실천수행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一切, 森羅萬象)
다만 인연따라 잠시 왔다가 잠시 가는 것입니다.
수많은 인연 인연들이 서로 연(緣)하여 일어나고(起)
인연이 다하면 사라지고 그런 것입니다.[연기법]

인연이 만나 생(生)함이 있는 것과 같이
인연이 다하면 반드시 멸(滅)함이 있게 마련입니다.
이 세상 어는 한 물건도 멸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제행무상]

그러나 이렇듯 연기의 진리대로
인연따라 잠시 왔다 가는 것을
어리석은 중생들은 '내 것'이라 집착하여 붙잡으려 합니다.
잠시 내게 온 돈을 '내 돈'이라 하고
'내 명예' '내 권력' '내 지식' '내 가족' '내 사랑'...
이렇게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려고 합니다.[아상]

그러나 본래 내 것이란 어디에도 없습니다.[제법무아]
'나'라는 존재 또한 잠시 인연따라, 전생 업식따라 왔다 가는 존재일진대
'내 것이다' '내가 옳다' 하는 마음이야 말 할 것도 없습니다.

'나'라는데에 집착하니 '상대'가 생겨납니다.[인상]
내가 있고 상대가 있다는 분별심이 생겨납니다.
그 최초의 분별심은 이윽고
수많은 지엽적인 분별심을 몰고 옵니다.[중생상, 수자상]

그런 수많은 분별심들은 어느 한 쪽을 고정짓고 대상화 하여
생사(生死), 미추(美醜), 장단(長短), 귀천(貴賤), 증감(增減)...
이라는 수많은 극단의 분별상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본래로 인연따라 길고 짧음이 있으며
아름답고 추함이 있고
귀하고 천함이 있는 것이지
혼자서 일어나지 않는 법입니다.

예를 들어 '나무젓가락은 길다.'와 같은 명제 또한
인연따라 전봇대 옆에 서면 짧아지고
이쑤시게 옆에 서면 길어지는 것이지
본래 길고 짧음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름답고 추함 또한
고정되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세계에는 아름다움의 기준이 천차만별입니다.

뚱뚱한 여인이 아름다운 나라,
목이 길어야 아름다운 나라,
아랫 입술을 뚫어 길게 늘어질수록 아름다운 나라,
우리처럼 가늘고 눈코입 배치가 잘 되어야 아름다운 나라....
그러나 이 또한 우리의 기준으로 잘 배치된 아름다움이겠지요.

이렇듯 세상 모든 극단적인 분별들은 고정됨이 없이 돌아갑니다.
인연따라 장단, 귀추, 생사, 거래, 시종, 고저, 대소 등이
일어나는 것이지 절대 홀로 일어나지 않습니다.

다시말해 어느 것을 보고 길다 짧다 할 수도 없으며
잘났다 못났다 할 수도 없고
아름답다 추하다 할 것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본래로 극단은 존재하지 않아 모두가 중도(中道)입니다.

중도의 중(中)은 '가운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팔정도의 정(正)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르다는 것은 연기법, 삼법인, 무아를 이와 같이 바로 볼 수 있는
옳고 밝은 지혜를 의미합니다.

이렇듯 어느 한 쪽으로 고정지을 수 없기에 중도이며
그렇게 되면 길다고 할 수도 짧다고 할 수도 없고,
깨끗하다 더럽다도 있을 수 없으며
있다 없다도 논할 수 없게 됩니다.
그렇기에 공(空)이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하나 고정된 실체가 있지 않고
인연따라 연기하여 만들어진 것이기에 공이고
무아이며, 중도인 것입니다.

금강경에서는 이 세상 어느 한 물건이라도
이렇듯 연기이며 무아이고 중도, 공이기 때문에
꿈과 같고 환영과 같고 그림자 같고
물거품과 같고 번개와 같다고 했습니다.
모든 상은 공한 것이니
상이 상이 아님을 바로 보면 여래를 볼 것이라 했습니다.

이렇듯 어느 하나 집착할 대상이라곤 없습니다.[무집착, 무소득]
그렇기에 '집착을 놓아라' '마음을 비워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방하착(放下着)'을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방하착이야말로
이렇듯 모든 불교 교리에서 이끌어 낸 최고의 수행법입니다.

그럼 불교 교리의 집성인 사성제(四聖諦)를 통해
다시한번 방하착의 교리를 체계지워 설명코자 합니다.
사성제를 일컬어
경전에서는 코끼리의 발자국이
모든 짐승의 발자국을 포섭하는 것과 같이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을 포섭하고 있는 가르침이라고 합니다.

사성제의 가르침에 의거하여 전체적으로 종합 정리를 해 보면
연기법(緣起法)에 의해 일체는 잠시 나고 사라지는 것이며
그렇기에 무아(無我)이고 무상(無常)하여 일체는 '고(苦)'인 것입니다.

이러한 연기는 다른 말로 공(空)을 의미하며
그렇기에 세상을 중도(中道)의 바른 시각으로 바라보아
지혜(智慧, 明)를 증득해야 합니다.
이러한 연기와 삼법인, 공, 중도의 시각으로 일체을 정견(正見)해 보니
세상은 괴로움[고성제(苦聖諦)] 아님이 없습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보니
모두가 집착(執着)에서옵니다.

연기, 삼법인[무아, 무상, 고], 공, 중도를 바로 정견하여
일체에 집착할 것이 없는 허망(虛妄)한 것임을 바로 보아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공하고 허무한 것에 집착을 하니
온갖 분별망상이 일어나 신구의(身口意)로 업(業)을 짓게 되고
집착에 의해 끊임없이 윤회(輪廻)의 수레바퀴에서 허덕이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원인은 바로 '집착'에서 온다는 것이
바로 집성제(集聖諦)인 것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을 살펴보고 나니
괴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괴로움 소멸이란 지혜의 확신이 생겨납니다.
모든 일은 문제와 문제의 원인을 바로 알고 나면 풀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고)와 문제의 원인(집)을
지혜의 견해(연기, 삼법인, 중도, 공)로써 올바로 알고 나니
우리가 추구해야 할 문제의 해답이 열리는 것이니
그것이 바로 멸성제(滅聖諦)입니다.

괴로움과 괴로움의 원인
그리고 괴로움 소멸에 대한 확신을 얻고 나니
이제 괴로움의 원인을 소멸하는 길을 따라 정진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그 올바른 괴로움 소멸의 길이 바로 도성제(道聖諦)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도성제를
여덟가지 길로 나누어 팔정도라는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나 도성제를 가장 쉽게 풀어 이야기 한다면
방하착(放下着)이 됩니다.
괴로움의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바로
괴로움의 소멸이기 때문입니다.
방하착이 바로
집착(着)을 놓아버려라, 비워버려라,
소멸시켜 버려야 한다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불교 수행이라는 것은
괴로움의 원인을 바로 알아 그 원인을 소멸시키는 행위를 말합니다.
말 그대로 괴로움의 원인인 집착을 소멸시키는 방하착인 것입니다.
남방불교에서는 모든 수행의 핵심을 '무집착(無執着)'이라 이야기 합니다.
집착이 없어야 한다, 다시말해 집착을 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간 수행을 너무 어렵게 생각한 감이 있습니다.
이렇게 쉬운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둘러 가는 길이 아닌
곧장 올곧은 길로 가는 최고의 수행이 바로 방하착입니다.

일체(몸과 마음, 나와 너, 주관과 객관)
모든 경계의 근본 원인이 바로 '집착'이란 놈입니다.
그것을 놓고 가는 길이
참 수행자의 밝은 정도인 것입니다.
방하착인 것입니다.

 

 

18<IMG카페 / 一寸  18<IM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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