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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사모 미주본부

눈물어린 아내의 눈매가 빛나기 시작했다. "탈출합시다!"

작성자sunnyoung|작성시간14.04.04|조회수96 목록 댓글 0
입력 : 2014.04.03 21:25 | 수정 : 2014.04.04 09:37  
                     

평양에서 날아온 공포의 소환장

태국 방콕주재 북한대사관에서 과학기술참사를 지내다 목숨을 걸고 탈출한 홍순경(76)씨가 13년여만에 극적인 탈출 스토리를 상세히 공개했다. 3일 출판된 그의 자서전 ‘만사일생(萬死一生)’엔 탈출 뒤 북한 보위부원들에게 다시 체포돼 3번이나 자살을 기도했던 필사의 탈출 과정이 상세히 소개돼있다.
홍씨는 책이 늦게 나온 이유에 대해 ‘2000년 한국으로 입국한 직후엔 북한정권과의 관계 악화를 꺼리는 우리 정부의 압박으로 상세한 이야기를 공개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만사일생은 홍씨가 태국 난민수용소에 있을 때 한국 망명을 권유하는 고(故) 황장엽 선생의 편지글에 나오는 표현으로, 구사일생보다 더한 험난한 탈출과정을 표현한 말이다. 홍씨의 탈출기를 5차례에 나누어 소개한다./편집자 주


평양에서 날아온 소환장

“평양에서 긴급한 암전(暗電·암호전문)이 왔으니, 어서 대사관으로 오시라요.”
1999년 2월 17일, 대사관 행정참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북한의 최대 명절인 김정일 생일 다음 날이어서, 나는 압록강기술개발회사 기술자 가족들과 함께 방콕에서 제일 크다는 놀이공원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참이었다. 전화를 받으면서 짜증섞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전보야 내일 출근해서 보면 되는거지, 왜 오라 말라 하는거요?”
“급한 일이니, 당장 나와서 보시라요.”

더는 고집할 수 없어서, 일행들에게 이해를 구하고 대사관으로 갔다. 기다리고 있던 행정참사가 내게 전보를 건넸다. 평양의 국가보위부에서 보낸 전보였다.

“과학기술 참사 홍순경과 그 아들 및 기술자 네 명 등 6인은 2월 19일 방콕을 출발하는 조선민항기로 귀국할 것. 들어올 때 재정문건 일체를 지참할 것.”

청천벽력같은 내용이었다. 내게는 ‘감옥에 보내겠다’는 뜻으로 읽혀졌다. 이렇게 느닷없이, 더구나 국가보위부에서 날아드는 소환장은 ‘감옥행’을 뜻하는 협박장이나 다름없었다. 순간 뇌리를 스치며 6개월 전 기억이 떠올랐다.

1998년 8월, 사회안전부 이종환 안전기술국장이 체포되었다. 이 국장은 1997년 초에 북한으로 소환되려던 나를 스카우트해서 태국지사장을 맡긴, 내게는 은인이나 다름없던 인물이다. 10월 초에는 그 산하 기관인 압록강기술개발회사의 베이징지사장과 직원들 모두가 소환되어 처벌받았다. 사실을 파악해보니, 이 국장에게 엉뚱한 불만을 품은 국가보위부원의 모략에 의해, 이 국장과 관련자들 모두 지문 기술을 해외에 팔아먹으려 했다는 죄목으로 하루아침에 숙청당한 것이다.

사회적 연좌제가 적용되는 북한의 풍토를 생각하면, 잔인한 숙청의 칼바람이 나에게까지 불어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연말까지 아무런 추가 조치없이 해를 넘기고, 최고 명절인 김정일 생일까지 넘기게 되자, 나는 안도하고 있던 참이었다.
홍순경씨(왼쪽)와 이종환 사회안전부 국장. 이 국장은 홍씨를 태국주재 북한대사관 과학기술 참사로 스카우트해준 은인이었다.
홍순경씨(왼쪽)와 이종환 사회안전부 국장. 이 국장은 홍씨를 태국주재 북한대사관 과학기술 참사로 스카우트해준 은인이었다.
그러던 때, 평양에서 불호령이 떨어진 것이다. 당장 들어와서 처벌 받으라고. ‘기어코, 올 것이 왔구나!’
순간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충격과 함께, 다리에 힘이 풀려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를 악물고 버텨야 했다.

‘불만을 내비치면 안돼!’
내 안의 생존 본능이 나를 제어했다. 겨우 대사관을 나와서 운전대를 잡았지만, 정신이 혼미하여 운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밀물처럼 몰려오는 상념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것으로 내 인생은 끝인가. 그리 되면, 내 가족은 어떻게 되는가?’

보위부의 소환장은 ‘숙청 통보서’

무엇보다 우선 억울했다. 북으로 돌아가면, 나를 소환한 국가보위부에 의해, 어떤 누명을 쓰고서라도 처벌될 것이 뻔했다. 북한에서는 그 누구라도, 아무 잘못이 없어도, 보위부에서 죄를 만들어 씌우면, 거기에서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외화벌이 일꾼으로 10여 년 넘도록 열심히 일한 내게 돌아오는 결과가 고작 ‘숙청’이라는 현실을 나는 인정할 수 없었다. 더욱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내 가족의 운명이었다. 북한사회에서는 가족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숙청당하게 되면, 그 집안은 몰락하게 마련이었다. 내가 숙청당하면, 내 가족의 운명도 끝장나는 것이다.

‘내 아내와 아들은 또 무슨 죄란 말인가?’
가까스로 차에 올라 가족들이 있는 놀이공원으로 돌아가려고 운전대를 잡았지만 차가 자꾸 옆으로 왔다 갔다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놀이공원에 도착했지만, 나를 바라보는 아내와 아들 그리고 기술자들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침묵 속에 한두 시간을 보내고 직원들과 헤어지고 나서 집으로 돌아왔다.

저녁 식사 후 나는 평양에서 소환장이 왔다는 사실을 아내에게 이야기했다. 국가보위부에서 보낸 전보 내용과 그 안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음모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아내는 이미 베이징에서 일어난 일과 이종환 안전기술국장이 체포된 일 등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와 우리 가족에 닥칠 불행에 대해 단박에 이해했다. 나즈막히 아내에게 물었다.

“일이 이리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소?”
“그 전보는 숙청통보서나 마찬가지군요. 만일 당신이 평양에 들어가면 즉시 보위부에 체포될 것이고, 온갖 모략을 씌워서 감옥으로 보낼 것이 뻔해요. 그렇게 되면 아들 둘 다 앞날이 막히게 되고, 우리 집과 친인척 모두가 망하고 말텐데….”

한숨을 내쉬며 말문을 연 아내가 격앙된 감정을 토로하다, 갑자기 눈물을 펑펑 쏟아냈다.

“큰아들에게는 정말 죄스러운 일이지만, 아들 하나라도 살립시다! 안 그래요?”
눈물 탓인지, 결사 의지 때문인지, 눈물로 그렁한 아내의 눈매가 빛나기 시작했다. 아내 뜻이 그렇다면, 나도 결단할 수밖에 없었다.

“탈출합시다!”

막내 아들 하나라도 살리자

내겐 아들이 셋 있었다. 태국 대사관에 데리고 나온 아들은 막내다. 북에 남아있던 첫째는 생이별한 셈이 되었고, 둘째는 7살 때 평양에서 어처구니없는 물놀이 사고로 떠나 보냈다.

소환장을 받고 고심한 부분은 사실 아들에 대한 걱정이었다. 북한사회는 진실이 통하는 사회가 아니다. 이유를 막론하고, 내가 북한사회의 숙청과 탄압 시스템에 걸려든 이상, 빠져나오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내도 내 뒤를 따라 고통스런 인생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다. 평양으로부터의 추방과 수용소 생활 등이 운명처럼 도사리고 있는 것이다.
홍순경씨가 태국 북한대사관에서 근무했던 1998년 12월,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한 생일 축하파티 장면. 탈출 전 북한식으로 치른 마지막 생일잔치였다.
홍순경씨가 태국 북한대사관에서 근무했던 1998년 12월, 대사관 직원들과 함께 한 생일 축하파티 장면. 탈출 전 북한식으로 치른 마지막 생일잔치였다.
그런 숙명을 다 감수한다 해도, 문제는 자식들이다. 북한사회는 연좌제가 철저하게 적용되는 사회다. 부모가 처벌받으면 잘 나가던 자식들의 앞날이 다 막히게 작동하는 사회다. 농업상 딸과 결혼한 맏아들은 사실상 강제로 이혼당할 것이며, 막내의 운명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난의 가시밭길로 들어설 것이다.

자식의 운명과 앞길을 망치게 되었다는 생각에 이르면 그 비통한 심정은 절규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어느 부모가 안 그렇겠는가.

더우기 막내는 북한에 소환되면 크게 처벌받을 일을 이미 저질러 놓았었다. 북한은 외교관 자녀라 해도 현지 대학에서 공부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다. 막내는 그 규정을 어기고, 태국에서 <에백> 상업대학을 다니고 있었다. 당시 14살이던 아들은 여권 나이를 17살로 늘여서 대학 입학시험을 쳤고, 합격해서 정식으로 대학에 입학하여 공부한 것이다. 덕분에 막내는 유창한 태국어와 영어 실력을 갖추게 되었다.

긴급 소환장에는 나와 막내아들이 함께 평양으로 들어오도록 적시되어 있었다. 나와 아들을 먼저 소환해서 처리하고, 방콕에 남은 아내는 뒷처리를 하도록 한 뒤 귀국시켜 조치할 계획인 것이다. 이대로 강제 소환되면 막내의 현지 대학진학 소식이 평양에 알려지는 것은 시간 문제였고, 그리 되면 막내 아들은 북한에 들어가는 순간 반동분자로 전락하고 영영 매장될 것이 분명했다.

만약 막내 아들을 평양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처벌받도록 한다면, 그것은 내가 아들에게 죄를 저지르는 셈이다.

“그래, 우리 자식마저 비참한 가시밭길로 데리고 들어갈 수는 없소.”

북에 남은 큰아들은 인질

북한에서 해외 외교관들에게는 한 자녀만 동반하도록 강제되었고, 평양에 남은 가족들은 사실상 인질이었다. 큰아들도 인질로서 평양에 붙잡혀 있기 때문에, 해외로 빼내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긴급소환장이라는 협박 전보를 받고 나서야 우리 부부는 확고한 결심을 했다. 죽음의 문턱 앞에서, 죽음을 각오하고 결단하고 결행한 것이다. 아들 하나만이라도 바깥 세상에 남겨 놓으려는 간절한 소망이 가장 커다란 동인이었다.

결심하고 나서도, 밤새 아내는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냈다. 큰아들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아비인 내 마음도 몹시 고통스러웠지만, 어미된 아내 마음은 그야말로 찢어지는 심경이었을 것이다. 가까스로 스스로를 진정시키고 아내를 달래 보았지만, 도저히 진정되지 않았고, 뜬눈으로 밤을 새다시피 했다.

사실 아들 하나만이라도 살리자는 심정은 부모 입장에서는 말도 안되는 가슴아픈 발상이고 선택이었다. 열 손가락 깨물어서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없는데, 어떤 부모가 아들 하나 살리려고 사지에 남겨둔 아들을 외면하는 결정을 내린단 말 인가. 이것은 북한사회의 잔인한 특성에서 초래되는 비극이다. 한 자식만이라도 무사한 인생을 살 수 있다면, 제 몸뚱아리를 다 바칠 수도 있는 것이 부모 아닌가. 그러나 북한정권은 그런 인륜마저 거꾸로 이용하고 내팽개치는 잔인한 권력이고, 그런 폭력에 의해 권력을 유지하는 사회인 것이다.<계속>



[출처] 본 기사는 프리미엄조선에서 작성된 기사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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