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습제안] (21) '젊음'에 고함 - 5.16....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뼈 빠지게 벌었더니, 배 부른 본국 정부는 세금 강탈할 궁리만 하고 있어.", "도저히 본국 정부 하라는 대로는 못하겠다. 뒤집어 엎자. 모조리 엎어버리자".... 본국 정부는 기존의 세제정책을 일부 폐기하는 등, 그들의 요구를 들어 주었지만 한 번 시작한 그들은 멈출 수 없었다. "내친 걸음이다. 뒤집어 엎자. 군대.... 무력으로 뒤집어 엎어 버리고 우리끼리 새로 출발하자."
그들은 치밀하게 음모를 꾸몄다. 군대를 동원하여 정부군을 물리치고 무력으로 정권을 쟁취했다. 그리고 그들만의 나라를 세웠다. .... 이것이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국민의 지지 없이 정통성 있는 정부를 뒤집고 정권을 쟁취하는 행위를 쿠데타라고 한다. 군대를 동원하면 군부 쿠데타라고 한다. 그렇다면 위의 경우는 누가 보아도 군부 쿠데타라고 할 것이다. 그럴까?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미국의 독립혁명은 진짜 저렇게 시작되었고, 그들은 그들의 정통성 있는 조국, 영국을 버리고 독립했다. 그것도 군대를 동원하여..... 군대를 동원했다고 모두 군사 쿠데타라면 미국은 분명히 군사 쿠데타로 세워진 나라다.
당시 영국은 그들을 반역자 또는 반란자라 불렀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대對영국 반란을 지지한 미국인이 얼마나 되었을까. 과반에도 못 미치는 고작 <3분의 1>이었다. 3분의 1은 무관심, 나머지 3분의 1은 조국을 배신할 수 없다며 끝까지 영국을 지지했다. 과반수 지지도 받지 못했으니 분명한 쿠데타다.
끝까지 영국의 신민臣民이고자 했던 수 많은 사람들이 영국 본토, 캐나다 또는 서인도제도로 달아났다. (아직도 캐나다의 상징적 국가원수는 영국 여왕이다. 영국 여왕은 20달러 짜리 캐나다 지폐에도 나온다.) 그리고 그들의 재산은 몰수, 승자들에게 재분배되었다. 분명한 쿠데타군의 강탈이다.
당시 반란군(혁명군) 사령관은 죠지 워싱턴이었다. 그는 혁명에 성공하자 미국 대통령에 취임했다. 혁명 동지였던 조지 애덤스는 그 다음 대통령이 되고, 토마스 제퍼슨은 3대, 제임스 메디슨은 4대.... 이 혁명동지들은 사람을 바꾸어가면서 무려 28년간이나 미국을 통치했다.
혁명이란 무엇인가. 굶주린 국민이 나서서 빵을 달라 외쳤지만, 돌아온 것은 "그럼 과자를 먹이세요.'Qu' ils mangent de la brioche!'" 였다. 분노한 군중은 정부군을 궤멸시키고 그들만의 새로운 정부를 세웠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혁명이다. 그렇다. 이것은 프랑스 혁명을 단 두 줄로 비약시켜 놓은 것이다.
혁명과 쿠데타를 구분하는 기준은 국민의 지지다. 국민의 지지가 없다면 군대를 동원하건, 군중 데모로 뒤집어 엎어버리건 이것은 쿠데타다. 반면 국민의 지지가 있다면, 또는 국민이 원하는 것이라면 이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혁명이다.
위의 기준으로 보자.
5.16은 국민의 지지를 받은 혁명이었나, 국민의 지지와는 무관한 군사 쿠데타였나.
5월 17일. 주한미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미 합참의장 렘니처 대장에게 긴급 전문을 보냈다. <배후세력은 아직 불분명하지만 그 세력은 증강되고 있는 것 같다. 미군 CIC가 조사한 바 10명 중 4명 꼴로 쿠데타를 지지하고 있고, 2명은 지지는 하지만 시기가 빨랐다고 하며, 나머지 4명은 반대하고 있다.>
거사 다음 날 즉시 보고한 내용이다. 5월 17일. 군사정권이 자리도 제대로 잡기 전이다. 대국민 홍보 같은 것은 할 시간도 없었고 그런 홍보가 먹혀 들 시간도 없었다. 그렇다면 당시 우리 국민은 무언가 혁명적인 변화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말이 된다.
60%의 지지율.... 미국 독립혁명 당시 국민 지지율의 딱 두 배다. 이것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혁명이다. 이것이 세계 최초로 현대민주주의를 창조한 나라, 미국이 가장 빠르게 한국의 군사정권을 추인한 까닭이다.
역사는 냉정하다. 혁명 당시에는 국민의 지지를 받았다가, 나중에라도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거나 원성만 듣게 된다면 그것은 혁명이 아니라 쿠데타다.
따져 보자. 그가 가고 난 지금, 수 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지지율은 80%에 가깝다. 그렇다면 지금도 5.16은 쿠데타가 아니라 진정한 혁명이다. 그 때도 국민과 함께 한 혁명이었고, 지금도 국민이 기억하는 한 혁명이다. 그것도 찬란하게 성공한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의 혁명이다.
당시의 상황을 모르는 20대, 30대 젊은 세대는 이런 상황을 이해하지 못 할 것이다. 그저.... 비록 쿠데타로 집권했지만 박정희 대통령이 경제 기적을 이루었으니 됐습니다....정도일 것이다. 그러나 진실에 눈 감고, 바른 소리에 귀 막는다면 이는 올바른 젊음의 태도가 아니다. 아무리 미워도 말馬을 가리켜 사슴이라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누가 뭐래도 사슴은 사슴이다.
이제 지나친 비약은 하지 않겠다.
지금부터 있는 그대로의 역사를 솔직히 이야기하자.
이 시대 '젊음'에게 묻노니, 솔직히 말하자.
당시 실업률이 30%대 였다면 믿겠는가. 올해(2011년) 3월의 실업률이 4.3%라고 하니 비교해 보라. 4.3%만 해도 눈알이 튀어나올 지경인데, 30%대의 실업률이라면 상상이 가겠는가? 그것도 전 국민의 대부분이 농사를 짓던 나라에서.... 굶어 죽는 농민도 직업이라고 그건 빼고도 30%대의 실업률....
당시 최고의 직업이라는 공무원들은 뭘 하고 있었는지 아는가? 펜대를 굴리면서 하루 고작 서너장의 문서를 만들고, 그 알량한 문서 하나 만들어주면서 뒷돈은 얼마나 챙겼는지 아는가. 높은 사람들은 제 먹을 것 다 챙기면서 보릿고개만 되면 길 가에 굶어 죽은 아이들의 시체가 있었다. 그건 아는가.
관공서에는 ‘기아 퇴치’, ‘절량농가 근절’이라는 국정지표를 써붙인 현수막이 내걸렸다, 이게 무슨 뜻인지는 아는가. 당시 국회의원들은 돈 보따리를 풀면서 시골에서 상경한 선거운동원들에게 몇 푼 집어주는 것이 보이지 않는 일과였다. 유권자들은 고무신 한 컬레에 표를 팔았는데, 그 고무신조차 보리 한 줌으로 바꿔 먹어야 했다는 것은 아는가.
그래도 미국은 세계에서 두 번째로 못 사는 우리가 불쌍하다고 약간의 돈과 밀가루를 원조해 주었다. 그것조차 다 누구의 뱃속으로 들어갔는지는 말하지 않겠다. 문제는 너도나도 다 해쳐먹으니 비밀이 지켜지지 않는다는 것.
이런 상황에서 그대 같으면 분노하지 않겠는가.
썩을 대로 다 썩은 나라를 보고도 그대 젊음이 침묵할 수 있겠는가.
지극히 당연히 날이면 날마다 데모였다.
대학생 뿐만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수의 실업자들도 달리 갈 데도 없으니.... 당시 거리에는 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까지 외쳤다는데, 이에 동조한 말 못할 이유 중의 하나가 '북한이 우리 남한보다 더 잘 살았기 때문'이라는 어느 이름없는 늙은세대의 증언은 들어 본 적이 있는가.
그 판에도 당시 집권 민주당은 신파, 구파로 나뉘어 날만 새면 정쟁이었다. 미래 비전은 고사하고, 어떻게 하면 내가 정권을 잡느냐... 그것이 당시 정치가들이었다. 부정, 부패는 그들의 자금줄이었고....
만약 5.16이 쿠데타였다면 4.19혁명을 일으킨 우리 국민이 이에 침묵할 리는 없었다. 그러나 어떤 국민적 저항도 비판도 없었다. 오히려 지지를 보냈다. 총칼이 두려워서?
천만에....
불과 1년 전에 (4.19 혁명) 총칼에 맞서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국민이 바로 우리 국민인데 그건 말이 안 된다.
지긋지긋했던 것이다. 가난과 무능과 부정, 부패가 정말 지긋지긋해서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리고, 그래도 오히려 더 나락으로 떨어지는 그 지긋지긋한 가난과 무능과 부정, 부패를 일소해 줄 그 무엇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국민들만 그랬을까?
혁명 소식을 들은 당시 윤보선 대통령의 첫 마디가 "올 것이 왔다. 군사혁명은 불가피한 것이다." 였다.
그 증언을 그대로 옮긴다. .... 윤보선 대통령은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자 "올 것이 왔다. 군사혁명은 불가피한 것이다. 사태를 잘 수습해 달라. 장면 총리의 행방을 알 수 없으니, 계엄령도 내가 먼저 승인해 주지" 라고 말했다고 혁명 당시 현석호 국방장관이 1961년 11월 7일 장도영 등에 대한 반혁명사건 6회 공판에서 증언했다. 현석호 국방장관은 장도영을 위한 증인이었다.(1961.11.07 경향신문)
혁명 주체세력들도 이 가난과 무능과 부정, 부패가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30대 40대의 젊은 혁명 주체세력.... 이들은 대부분 찢어지게 가난한 농촌 출신이었다. 박정희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이 지긋지긋한 가난만은 물리치고 싶었다.
그들이 밀어 낸 구정치인들이 바로 양반 가문에 50대 60대의 지주였고, 배 부른 일제 관료 출신들이었다. 조선조의 게으른 오백년 지배체제가 5.16에 의해서 비로소 끝났다. 이것은 단순한 세대교체가 아니라 계급혁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무식한 워커였냐고?
1950년대에 외국 유학을 경험했던 장교들이 약 1만명, 공무원과 학자 등 이 기간에 외국 유학을 경험한 사람은 5천명.... 당시 그들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유능한 집단이었다. 당시 관공서에서 펜으로 한 자, 한자 필사할 때, 그들은 타자기가 무엇인지 보고, 경험했고, 터득한 사람들이었다.
미군의 도움으로 유학을 했지만, 당시 세계 최강의 선진국이 미국이었으니까 보고, 배우고, 느낀 것은 너무 많았고, 고국에 돌아와 부딪히는 현실은 비참했다.
일본인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깜짝 놀라는 것이 있다. 우리나라의 도로가 왜 이리 넓으냐는 것이다. 왕복 8차선, 10차선, 12차선.... 2차선 도로를 가지고 차츰 늘린 것이 아니다. 차츰 늘리자면 땅 값이 올라 엄두도 못 낼 일이다.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했다. 그들이 경험한 넗은 미국을 벤치마킹한 것이다. 지나고 보니 그들은 유능했다.
국민 모두가 혁명에 동참했다. 그리고 그 지긋지긋한 것들을 물리쳤다. 누구도 하지 못 할 일들을 해냈다. 오천년 굶주림을 극복했다. 세계가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기적이 있었다. 찬란한 기적이 혁명처럼 일어났다.
미국은 워싱턴의 혁명으로 세계 최강의 국가가 되었고, 한국은 박정희의 혁명으로 세계 10위권에 진입했다.
그리고 박정희는 자신과 가족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남기지 않았다.
그의 공적을 시기하는 무리들이 말을 지어 스위스를 다 뒤져도 아무 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의 사후에 남은 텅 빈 청와대 금고....
전두환 무리의 쿠데타와 혼돈하지 말라.
나도 그들은 밉다.
그들은 조국을 위한 혁명을 한 것이 아니라 그들만을 위한 쿠데타를 한 것이므로.
<칼의 노래> 작가 김훈의 말을 들어보자. “5천년의 역사를 바꾼 게 박정희야. 가난에서 가난이 아닌 것으로 바꾼 건 단군 할아버지와 맞먹는 힘이야. 우리나라에 차가 돌아 다니고, 고층빌딩이 서고, 지금 고기를 먹고 있는 것도 그의 덕이야. 그건 사실이고 리얼리즘이야.” (한국일보 2004.12.29)
참으로 많은 말을 하고 싶다.
특히 혁명 이후 그 찬란한 기적들을.
이 나라 오천년 가난을 물리치고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이 되는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것을.
그러나 예서 다 줄이고 젊은 그대에게 다시 묻노니, 이제 답 하라.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5.16....
혁명인가, 쿠데타인가.
2011.05
대한민국 박사모
회장 정광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