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학습제안 시리즈

[학습제안] (23) - <02> 누가 보수고, 누가 진보냐.

작성자카페지기|작성시간11.05.21|조회수3,780 목록 댓글 81

[학습제안] (23) 보수와 진보를 뛰어넘는 한국형 이즘을 찾아라.<02> 누가 보수고, 누가 진보냐

 

(본 글은 시리즈로 연재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필자는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께서 1장부터 계속 읽어오신 것을 전제로 하여 글을 씁니다.)

 

 

제 2 장

누가 보수고, 누가 진보냐

 

1.

위선을 강요하는 역사관歷史觀

 

보수든 진보든 성공적으로 정치권력을 확보하여 자신의 소신으로 사회의 발전에 이바지하려면 누구나 공감하고 인정할 수 있는 확실한 미래를 제시해야 한다. 미래를 이야기 할 때 과거보다 더 정확한 스승은 없다.

 

역사적으로 확인되는 보수 전략의 성공사례와 실패사례, 진보 전략의 성공과 실패사례를 정직하게 돌아보고 대안을 모색하는 것이 보수/진보 양 측의 현재 위기를 타개하는 최선의 방법이고, 미래 성공의 열쇠다. 엘빈 토플러, 아서 하킨스 등의 미래학도 대개 과거의 분석으로부터 출발한다. 이는 우리가 역사를 배우고 되새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사관史觀은 역사를 보는 눈視覺이다. 예컨대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어떻게 볼 것이고, 한국의 안중근 의사는 어떻게 볼 것이냐.... 물론 우리가 볼 때는 당연히 일본제국주의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는 때려죽여 마땅한 놈이고, 안중근 의사는 대한의용군 참모중장의 자격으로 민족의 적이자 동양평화의 교란자인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형에 처한 영웅이자 의인이고 의사義士다.

 

일본인의 입장에서 볼 때는 어떨까? 우리의 영웅 안중근 의사를 일본인들은 ‘테러리스트 안’이라 부르는 반면, 1963년 천엔권의 지폐에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을 새겨 넣을 정도를 이토를 추앙했다. 이것이 사관史觀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역사를 대하는 눈은 이렇게 다르다.

 

원래 중세부터 내려오던 서양의 정통적 사관史觀은 신학의 범주 내에 속해있었다. 뭐든지 기독교을 위한 신학적 사관이나 법학적 시각에서 역사를 보고 정리했다. 특히 역사를 종교적으로 해석할 때는 도덕이나 종교윤리 같은 관념에 얽매이게 되는데, 이런 것들을 묶어 관념사관이라 한다. 이 관념사관에 대항하여 랑케라는 사람이 ‘일체의 관념을 배제하고, 뭐든지 (유물이나 기록 등 역사적 증거 등에 의해서) 있는 그대로 보자.’ - 고 주창했고, 이것이 실증사관이다.

 

랑케와 동시대 사람으로 그 유명한 마르크스가 있다. 마르크스의 ‘유물사관’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인간의 정신이 모든 것의 중심에 있다는 유심론에 반反하여 마르크스는 물질이 인간사회의 중심에 있다는 유물론을 주창했다. 그렇다고 해서 유물사관이 신학神學사관과 달라질 것은 없었다. 물질이나 자본이라는 개념도 결국 관념적이기 때문에 마르크스의 유물사관 역시 관념사관의 편린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유물사관은 전 세계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짜릿한 복음으로 통했다.

 

이걸 '대인민 사기극'의 달인인 김일성이 그냥 둘 리 없다. 살짝 비틀어서 유리한 쪽으로 그림을 그렸다. 그것이 황장엽이 만든 북한의 주체사관이다. 역사의 주체는 물질도 신학도 아닌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 많은 인간 중에서도 유독 김일성만이 주체사관의 주체가 되었고 이를 김일성사관이라고도 불렀다.

 

386 진보좌파가 유물사관이나 김일성사관(주체사관)을 남한에 그대로 가져다 쓰면 공안기관도 공안기관이지만, 그들이 입버릇처럼 말하는 민중(대중)에게 뼈도 못 추릴 것이 불을 보듯 명확한 사관이니, 또 살짝 비틀 필요가 생겼다. 그래서 생겨난 역사관이 민중사관이다. 역사의 주인공으로 노동자, 농민 대신 민중을 내세운 것이다.

 

그런데 ‘이것만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뭔가 섹시한 것 없나....’하고 둘러보다 찾은 것이 발음까지도 비슷한 민족사관이다. 원래 마르크스는 민족사관을 배척했지만 레닌, 스탈린, 모택동, 김일성 같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원조元祖 마르크스의 충고는 영양가 없는 공염불에 지나지 않았다.

 

일제강점기 일본은 우리의 위대했던 고대사를 폄훼하기 위하여 이병도라는 식민사관 학자를 지원했는데, 이 때 이병도가 착안한 것이 랑케의 실증사관이고, 랑케의 실증주의를 핑계대면서 우리의 고대사를 일제의 입에 맞게 해석하기 시작했다.

 

이에 맞선 시각이 단재 신채호 선생의 민족주의 사관이다. '역사란 我와 非我의 투쟁이다.'로 대표되는 그의 역사관은 지금도 계승되고 있는데, 파스퇴르 유업의 최명재 회장이 설립한 민족사관학교(민사고)의 설립이념이 "민족정신으로 무장한 세계적 지도자 양성"이고, 충무공 이순신과 다산 정약용 선생을 사표로 삼는데서 신채호 선생의 흔적을 읽을 수 있다.

이 민족사관은 정말이지 주체사관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었지만 그들은 이 민족사관을 김일성사관(주체사관)과 결합시켜 민중 속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보수우파가 역사 해석과 교육을 수 십 년 동안 독점한 데에 대한 반동으로 진보좌파는 그들 스스로 민중사관을 학습하고 전수했다. 마침내 그들이 정권을 차지하게 되자 ‘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멋진 타이틀을 내 걸고 이를 공개적으로 담론화 하였으며 특히 금성출판사 등 검인정 교과서를 앞세운 자학적 민중사관의 교육에 몰두했다.

 

미래세대를 좌파화 시키는데 (미래의 표를 긁어모으는데) 이보다 더 좋은 무기는 없었다. 이 때 전교조는 민중사관의 확산에 큰 힘이 되어주었다. 사람을 굶겨 죽이는 김일성-김정일의 세습 군사독재에는 눈 딱 감으면서 민족을 5천년 가난의 질곡으로부터 건져 낸 박정희 시대와 조국근대화는 민중을 착취하는 뱀파이어처럼 묘사했다.

 

건국과정부터 지금까지 대한민국을 지탱해 온 반공은 시대에 뒤쳐진 낡은 이데올로기인양 소름 돋는 알러지 반응을 보이면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부자손父子孫 독재 세습의 자금줄이 되어버린 햇볕정책은 민족통일을 위한 성스러운 투자인양 찬양하고 지지했다.

 

그 돈이 우리의 머리 위에 핵폭탄이 매달려 있는 상황을 연출하고, 연평도의 포탄이 되어 날아오기 전까지만 해도 민중사관은 그들이 노렸던 목적을 달성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 뿐인가. 대학시절 민중사관의 이론에 가랑비 옷 젖듯 세뇌된 자들이 현존하는 보수세계의 중심에 등극하여 민중사관의 확산에 무의식적으로 동조하고 있는 사람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들의 뇌리 속에는 실증사관보다 관념에 치우친 민중사관이 진리처럼 자리 잡고 있다.

 

그들은 보수우파의 당연한 여러 얼굴인 ‘따뜻한 보수’, ‘깨끗한 보수’, ‘중도적 보수’, ‘열린 보수’, ‘국민통합적 보수’, ‘사회통합적 보수’, ‘합리적 보수‘ 등, 붙일 수 있는 온갖 수식어를 다 가져다 붙이면서 보수우파 세계에 기생하고 있다. 이 괴상한 현실은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나. 이런 상황에서 보수우파가 지향해야 할 바는 어디인가.

 

민중사관주의자들은 또한 그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모든 지도자는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모조리 책임전가, 민족반역, 수구꼴통(극우보수)으로 몰았다. 보수우파는 대응 논리조차 개발하지 못한 상황에서 힘 없이 당했다. 그들은 ‘역사 바로 세우기’를 논하면서 역사를 ‘거꾸로’ 세워버렸지만 보수주의자들은 이에 대한 비판능력조차 발휘하지 못하고 끌려 다녔다.

 

실증사학자인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전 국사편찬위원장)는 “교과서에서 근대 이전 부분은 여전히 식민사관이 지배적이고, 근·현대는 이념편향에 치우쳐 있다”고 말했다. 이건 분명한 모순이다. 어떻게 보면 민중사관주의자들은 진짜 수정해야할 근대 이전 부분의 식민사관은 팽개쳐 두고, 오로지 현대 보수우파 사회의 정신적 지주를 깔아뭉개는 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단기 전술적인 면에서 볼 때, 민중사관주의자들은 성공한 것처럼 보였다.

 

보수우파는 그들이 말하는 부끄러운 우리 현대사가 진짜 부끄러운 현대사인지, 그들이 추종하는 민중사관의 시각이 진짜 제대로 된 민족적 시각인지, 누가 진짜 민중의 해방자인지 살펴보아야 했지만 그런 시도조차 빈약했다. 민중사관이 이렇게 득세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의 역사교육은 오로지 반공과 경제개발을 국시로 한 경직된 국민사관에만 매달려 있었다. 한 쪽의 지나친 극단이 다른 쪽의 극단을 부른 셈이다. 누가 나서든 이제 중심을 잡아야 한다.

 

진보좌파가 국민사관을 비판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민중사관으로 무장하여 정통 국민사관을 무장 해제시키고 지나친 자학사관으로 우리 미래세대의 국가 의식을 무력하게 만드는 빌미를 준 것에 (어찌 보면) 보수우파의 경직과 협량과 융통성의 부족에 그 원인이 있었다. 이것도 따져보자. 어느 것이 진짜 실증적으로 증명되는 역사며, 누가 진짜 정통보수(또는 정통진보)며, 누가 진짜 우파보수주의(또는 진짜 진보좌파주의자)를 자처할 수 있는지. 진짜 보수주의나 진짜 진보좌파가 갈 길은 어디인지. 어떻게 해야 보수우파나 진보좌파가 제대로 길을 찾아 성공할 수 있는지.

 

2.

이승만은 보수주의자였나?

 

2-1.

보수주의자의 극좌적 진보 정책

 

역사적 사실을 두고 질문 하나. - “지주地主가 독점하고 있는 농지를 모두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시오. 만 가지 어려움이 있더라도 (만난萬難이 있더라도) 반드시 해야 하오.” 관계 법령이 제정, 정비되기도 전에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여버렸다. 이게 어느 나라에서 일어난 일일까? 남한? 북한? .... 다른 방향에서 드리는 다른 질문. 위 개혁은 우파 보수주의자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일까? 좌파 진보주의자에 의해서 일어난 일일까?

 

이것은 대한민국 초대대통령인 이승만의 ‘농지개혁’이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보수주의자일까, 진보주의자일까? 적어도 현재의 보수층 지식인들이 건국의 아버지, 건국 대통령으로 떠받들고 있는 상황을 보면 이승만 대통령은 보수주의자처럼 보일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급진적으로 밀어붙인 이승만의 농지개혁이 보수주의적 정책이라고 말할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진보적 정책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회주의를 넘어 스탈린주의 정책에 가깝다.

 

최근 진보적 사고와 정책으로 국가 경제를 회생시킨 사람으로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을 들 수 있다. 2004년 중앙일보 기자가 룰라 대통령에게 "브라질처럼 풍부한 자원을 가진 나라에 어째서 5,000만명이 넘는 절대빈곤층이 존재하는 겁니까?"라고 묻자, 룰라 대통령은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은 과거 50년대에 농지개혁을 했지만 브라질은 그러지 못했고, 아직도 그것이 풀어야 할 숙제입니다. 브라질의 경제는 사회개혁 없이 심각한 불균형 성장을 해왔던 것이 문제지요." <'변화하는 남미'(1)-룰라 브라질 대통령 인터뷰, 8월16일>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했던 지구 반대편의 룰라 대통령이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모르지만, 그의 지적은 정확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농지개혁의 대강은 이러했다. - "농지 소출의 30%를 5년간으로 계산해서 나중에 (후불로) 갚아라. 소출의 70%는 소작농민들의 것이다. 소작농민들의 몫은 누구도, 어떤 일이 있어도 건드리지 마라." .... "소출의 30%를 5년만 내면 영원히 그 땅은 소작농민들의 것이 된다. 대신 정부에서는 지가증권地價證券을 발행하여 소작농민을 대신하여 지주들에게 주겠다. 지주들은 이 지가증권을 받고 농지를 소작농민들에게 그대들이 보유하고 있는 땅을 소작인들에게 무조건 넘겨라."

 

그동안 소출의 절반(50%)을 죽을 때까지 바쳐도 내 땅을 가질 수 없었던 농민은 환호했다. 50%를 30%로 깎아 주고도 5년만 내면 내 땅이 되다니, 그것도 땅은 미리 받고 나중에 후불로 갚으라니.... 그들은 감격했다. (이게 우파 보수주의자가 할 짓 같은가?) 그리고 6.25 전쟁이 터졌다. 전쟁 인플레는 상상을 초월했다. 갚아야 할 돈의 가치는 떨어졌고, 소작농민들은 가벼운 부담으로 드디어 꿈에 그리던 자작농이 되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전체 농지의 92.4%가 자경지가 되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일이었다.

 

이에 반하여 김일성의 토지개혁의 대강은 이러했다. - “토지를 모조리 몰수하라. ('몰수'니 당연히 대가는 없다.) 그리고 나누어 줄 때도 무상으로, 공짜로 나누어 주어라. 그 대신 소출의 50%를 국가에 귀속시켜라.”

 

결과적으로 북한 김일성의 토지개혁으로 북한의 모든 농민은 세세영영토록 국가의 소작농이 되어버렸다. 토지를 공짜로 받을 때는 이 토지가 내 것이 되는 것 같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기껏 지주의 손을 벗어났는데, 국가라는 거대 권력이 지주를 대신하여 수탈을 시작한 것이다. 나중에는 소출 50% 조건도 바뀌었다. 90%를 모조리 국가가 가져가는 것으로....

 

공동생산-공동배급으로 어차피 땀 흘려 농사지어봤자 남의 것. 고생해서 농사지을 맛이 나겠는가. 땅이야 강탈하여 나누면 되지만 살아있는 소(農牛)는 나눌 길이 없었다. 소(農牛) 역시 국가의 재산으로 빼앗기느니 잡아 먹는 편이 나았다. 그래서 모조리 잡아 먹어 버렸다. 이러니 농사지을 소가 당장 부족했다. 그 뿐인가. 모든 것을 나누고 나니 모든 것이 부족했다. 그 결과 북한의 농업생산성은 바닥을 기게 되고, 이것은 북한의 기근과 대량아사로 이어졌다. 지금도 북한은 외부의 지원이 없으면 전 인민이 굶어 죽을 지경에 처해있다.

 

친북좌파들의 시각으로 ‘무상몰수 무상분배’와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비교해 보면 ‘유상몰수, 유상분배’는 실패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실시했던 (구)소련과 동유럽, 그리고 중국과 북한의 결과를 보디시피 모조리 실패했다. (구)소련과 동구권은 패망했고 중국은 아예 자본주의로 돌아서 버렸다. 역사는 이승만의 자본주의적 극진보정책이 결국 옳았음을 증명하고 있다.

 

이렇게 실증적으로 증명된 사실을 가지고도 민중사관주의자들이 지배했던 중고교 교과서를 보면 실패한 북한의 토지개혁은 성공적인 것처럼 자세히 다루면서 이승만의 성공적인 농지개혁은 깎아 내리거나 구렁이 담 넘어가듯 다루고 있다. 이런 ‘허위의 사실’들이 교과서에까지 실리도록 방치한 보수우파로서는 반성해야 할 대목이 하나 둘이 아니다. 제 코 앞만 쳐다보다 보니까 먼 곳은 보이지 않았다. 이제 겨우 게을렀던 보수는 역사 인식의 중요성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을 뿐이다. 

 

그렇다면 진보좌파는 승리한 것일까? 모든 정보가 인터넷에 널린 지금 검색어 몇 마디면 누구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 더구나 세계적으로 공산주의가 모조리 패망하여 사라지고, 북한마저 맑스-레닌을 버리고 주체사상으로 변질된 판에 진보주의자들의 농지개혁 비판 논리는 초라하다. 진보는 그들이 조성해 놓은 역사 인식의 장에 관한 한, 한 때 승리한 기득권을 놓지 않으려 발버둥을 치고 있는 것으로 비칠 것을 경계해야 한다. 이승만의 농지개혁을 보수적이라거나 실패한 정책이라고 몰아 세우는 것은 민중사관의 입장에서 봐도 무식하며 비논리적이고 (아무리 양보해도) 기본적으로 인식착오적이기 때문이다. 

 

 

2-2.

김일성은 진보주의자였나?

 

“우리들의 투쟁은 그전 자본주의 국가의 낡은 국회식 민주주의가 아니고 새로운 조선의 진정한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이며 광범한 인민대중의 민주주의이며 진보적 민주주의이다.” 이게 무슨 말일까? 

“서구의 민주주의는 이미 시대에 뒤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만일 우리가 그것을 채용한다면 조선은 다시 외래 제국주의의 식민지로 떨어진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여기까지만 읽어보면 도대체 김일성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 궁금해진다. 그러나 아래 구절을 읽어보면 답이 나온다.

 

1945년 11월 신의주 학생 사건이 터지고 많은 학생들이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죽고 다치자, 김일성은 현지로 찾아가 유감을 표시하면서,

“우리 노동당이라는 것은 다른 게 아니라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요. 우리가 민주주의를 하자는 거지, 공산주의를 하자는 것이 아니요.”

 

이 정도면 완벽한 대인민사기극이다. 그 뒤 북한의 독재체제가 완성되자 김일성은 만족스럽게 회고하고 있다.

“우리가 사회주의의 구호를 걸었다면, 인민들은 우리를 무서워했을 것이며, 곁에도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계간 시대정신 : 이승만 시기의 보수세력과 민주제도, 이주영 2010 여름호)

 

이러한 김일성의 발언은 어느 모로 뜯어보아도 인민을 철저하게 속이고 등을 쳐서 집권에 성공했다는 말이다. 김일성은 스탈린 식의 공산독재를 민주주의라고 표현했다. 여기서 실종된 것은 민주주의 국가의 주인인 인민이며, 인민의 의사를 반영하는 최소한의 선거제도마저 부인되는 철저한 인민의 소외였고 왕조독재체제였다. 이것이 진보인가.

 

현대의 서구 진보주의자들 중, 누구도 북한 김일성 식의 왕조독재를 진보라고 말하지 않는다. 진보가 발달한 유럽에 가서 물어 보라. 결국 김일성은 전통적 맑스와 엥겔스 그리고 레닌주의까지 모조리 부인하고 자기만의 주체사상으로 북한 인민들을 세뇌하고 있다. 주체사상은 진보적 사상인가. 사민주의가 발달한 유럽에 가서 북한의 주체사상을 진보라고 말하다가는 맞아죽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좌파, 일부의 자칭 진보주의자들만은 예외다.

 

김일성은 공산혁명을 완수하면서 단 한 번도 인민의 뜻을 물어보지 않았다. 자유선거는 없었고, 흑백함黑白含을 두고 하는 찬반투표가 전부였다. 그것도 좌파단체 연합이라는 민주주의민족전선에서 추천한 단일후보에 대한 투표였다. 그 좌파단체 연합이라는 기구의 구성원조차 누구에 의해서도 선출되지 않았다. 민주주의적 절차는 하나도 없었다. 그러면서도 김일성은 자신의 행위를 ‘민주적 개혁’이라고 말했다. 공산주의 혁명이라고 솔직히, 자신 있게 말하지 못한 이유는 스스로 밝힌 바와 같다.

 

인민의 승인은 고사하고 인민의 의사가 철저히 배제된 체제는 왕국 밖에 없다. 결국 김일성 체제는 3대 세습을 앞두고 있다. 김일성 부자손父子孫은 자신들의 체제가 김씨왕조 임을 만천하에 공표한 것이다. 이것은 진보인가.

 

원래 고전적인 보수와 진보의 개념, 즉 우파와 좌파의 개념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프랑스 혁명 후 소집된 국민회의에서 의장석의 오른쪽에는 국왕을 지지하는 왕당파가 앉았고, 좌측에는 공화정을 지지하는 공화파가 앉았다. 두 말할 것도 없이 왕당파는 기존의 왕정王政을 지지하여 보수적인 입장을 견지했고, 공화파는 급진적인 (진보적인) 입장을 고수했다.

 

위 사례를 조금 비약하여 역설적으로 해석하면, 북한 ‘김일성-김정일-김정은 부-자-손父子孫’ 세습 왕조체제는 보수 중에서도 맨 오른쪽에 있는, 수구꼴통에 해당하는 극우보수적인 체제다. 21세기에는 전 세계적으로 찾아볼 수 없는 희귀한 수구꼴통 보수의 나라가 북한이고, 지구상의 유일무이한.... 과거형 극우 보수를 추구하는 나라가 북한이다. ‘극우 보수’의 왕조국가에서 ‘대代를 이어 충성하자.’는 구호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들린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우리나라 내부의 진보좌파 세력 중 친북좌파, 종북좌파에 해당하는 자들은 어떤 이유로도 '진보' 또는 ‘좌파’라는 단어를 쓸 수 없어야 한다. 프랑스 대혁명 때나 볼 수 있었던 왕당파적 극우파가 ‘진보’, ‘좌파’라는 단어를 차용하는 것은 김일성이 공산주의를 차용한 왕조회귀王朝回歸를 ‘민주적 개혁’으로 포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민족 앞에 어려운 단어 써가면서 현학적인 복잡한 말로 사기쳐서는 안 된다. 진보는 고사하고 퇴보를 이룬 북녘 땅에 ‘쟈스민 향기’와 함께 서유럽 식의 선진 사민주의라도 스며들면 그게 진짜 북한의 진보다.

 

 

2-3.

이승만과 김구

 

일부 보수주의자들은 이승만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김구를 폄훼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있는 그대로를 보고 뜨겁지도 냉정하지도 않게 평가하면 될 것을 한 때 잠시 득세하던 진보좌파의 논리에 지나치게 흥분하다 빚어진 과잉방어였다. 백범 김구를 폄하한 반작용으로 이승만은 더욱 수구적 인물로 떠밀려버렸다. 김구를 오사마 빈라덴에 비교한다던지, 테러리스트로 평가한 극소수의 자괴적인 논란 야기는 보수사회 전체에 엄청난 손실을 끼쳤다.

 

백범 김구 선생이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폭력이나 전쟁을 기획한 것은 역사적으로 민족적으로 정당했다. 민족이 착취당하는 식민지 상태에서 폭압적인 제국주의에 맞서 폭력과 전쟁을 기획하지 않을 수 있는가. 이는 정당방위다. 미국을 비롯한 전세계의 수많은 국가들도 전쟁을 통하여 독립을 쟁취했다. 우리 헌법에도 3.1 운동과 상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명시되어 있다. 이승만과 김구의 독립운동은 우리 민족사의 자존심이자 자랑스러운 역사다. 이승만이든 김구든 그분들의 독립운동을 폄훼하는 것은 우리 헌법을 폄훼하는 것과 같다. 아무리 수구적 극우라 해도 저런 낯 뜨거운 실수는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백주 대낮에 백범을 살해한 안두희는 결국 민족사의 의문을 밝히기 위하여 평생을 추적하던 박기서 씨에게 살해당했다. 박기서 씨는 일생을 걸고 안두희를 추적했다. 그의 직업은 안두희의 배후를 추적하기 위한 자금조달 수단이었다. 박기서 말고도 안두희를 쫒던 추적자로 권중희라는 사람도 있었다.

 

1987년, 1991년 .... 그는 마침내 1992년 9월 23일 안두희를 경기도 가평의 한 농장으로 데려가 범행 일부를 자백받았다. 당시 군 고위층의 배후설이 안두희의 입을 통하여 흘러나왔다. 자백을 한 다음날 안두희는 자신의 발언이 권중희의 폭력에 의한 자백으로, 강압에 의한 허위의 사실이라고 강변했다. 권중희는 이 일로 다시 폭력행위 위반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1년 6월을 선고 받고 70일 만에 풀려났다.

 

박기서 씨는 버스기사에서 택시기사를 전전하며 기회를 노렸다. 그는 안두희가 늙어 천수를 누리고 자연사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1996년 10월23일. 그는 미리 준비해 간 <정의봉>으로 안두희를 응징했다. 그리고 성당에서 자수했다. 법원은 그에게 3년 형을 언도했고, 그는 형기의 절반을 마치고 3.1절 특사로 석방되었다. 암살범은 천수를 누리지 못하고 최후를 마쳤다.

 

권중희, 박기서... 이들은 직업적인 혁명가도 아니고, 북에서 남파한 간첩도 아니며, 좌파 운동권 출신도 아니다. 그들은 우리 근, 현대사에서 드러난 자존심을 사랑하는 대한민국 국민이다. 이들로 인하여 우리는 잠시나마 '근, 현대사'에 대하여 숙고하게 되었고 이에는 역사적인 의미가 있다. 이는 민족사적으로 볼 때 작은 소득이 아니다. 이런 분들이야 말로 정통보수주의자들로 보수사회가 함께 사랑해야 할 분들이다. 만약 이 표현에 이상 반응을 느낀다면 그대는 정통보수주의자가 아니라 지나치게 한 쪽으로만 경도된 수구다. 나는 역사적, 민족적 의문 해소에 온 몸을 던진 그들을 존경한다.

 

초대 대통령 후보 이승만, 김구, 안재홍의 득표율

 

아까도 말했지만 역사는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그것이 사관史觀이다. 실증사관의 입장에서 접근하자.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이승만과 김구의 지지율은 어떠했을까? 1948년 5월 31일 제헌의회는 헌법을 통과시켰다. 그리고 5월 20일 제 1대 대통령 선거가 열렸다. 해방 당시의 분위기로 볼 때, 전설적인 독립운동가가 아니면 출마도 못 할 분위기였다.

 

제헌 헌법에 의한 당시의 선거 방식은 재적의원 2/3 이상 출석에 출석의원 2/3 이상의 표를 얻어야 되는 간접선거였다. 후보는 항일 독립운동으로 평생을 바쳤던 세 분... 이승만,  김구, 안재홍 등 3명이었다. 선거 결과는 재적의원 198명 중 197명이 출석하여 이승만이 180표, 김구는 13표, 안재홍은 2표를 얻었으며, 기권이 2표였다. 국민 지지율에 있어서도 김구는 이승만의 비교대상이 아니었다. 제헌의회는 국민의 대의기관으로 국민적 지지를 외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승만의 이 압도적인 국민적 지지는 김구의 암살로 역전되기 시작했다. 암살로 성공한 정권이나 가치는 드물다. 과잉충성에 의한 누군가의 지령이든, 당시 한민당의 분위기가 그랬던 아니든, 김구의 암살에 이승만이 직접 연루되지는 않았다고 본다. (이승만은 그렇게 수數가 낮은 사람이 아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김구는 국부로까지 추앙되었다. 이승만은 3선 개헌과 독재로 국민적 저항을 불렀고, 4.19가 점화되었다. 이승만을 추종했거나 아니면 집단의 이익을 위한 누군가의 과잉 충성이 김구를 암살했고, 이어 그 무리들은 이승만을 앞 세워 무리한 3선 개헌과 부정선거를 자행했다. 이 부분은 누구에 의해서건 억지로 미화되어서는 안 된다. 더구나 암살과 부정, 부패는 정통 보수주의가 추구해야 할 가치가 아니다.

 

암살 같은 지저분한 행위는 극좌파나 공산주의자들이 즐겨 쓰던 방식이었다. 독립운동 당시 공산주의자들이 자행한 암살 건수는 한 두건이 아니다. 1930년 1월 24일, 백야 김좌진 장군을 암살한 박상실(다른 이름 공도진)은 고려공산청년회의 일원이며 재중 한인청년동맹원이었다. 고려공산청년회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 산하다. 친북/종북 좌파들이나 민중사관주의자들은 안두희 사건에는 거품을 물면서 백야 김좌진 장군 암살 사건에는 침묵하거나 변명한다. 

 

이승만은 친일파인가.

 

친북/좌파에 세뇌된 진보좌파나 민중사관주의자들은 친일파 숙청을 하지 않았다 하여 독립운동가 이승만을 친일파라 한다. 사실 확인을 위하여 우선 대한민국의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김일성 정권부터 비교해 보자.

 

<이승만 초대 내각 중 항일 독립운동가 출신>
대통령 이승만   - 상해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부통령 이시영    - 상해임시정부 재무총장

국회의장 신익희 - 임시정부의 내무총장

대법원장 김병로 - 항일변호사

국무총리 이범석 - 광복군 참모장

외무장관 장택상 -일제시대 청구구락부 사건으로 투옥된 경험

내무장관 윤치영 -일제시대 때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투옥

재무장관 김도연 -3.1운동에 앞선 2·8독립선언을 주도하여 투옥

법부장관 이   인 - 항일변호사

국방장관 이범석 - 겸임

농림장관 조봉암 - 공산주의자에서 민족주의자로 전향

사회장관 전진한 - 일제시대에도 노동운동을 했던 사람

체신장관 윤석구 - 교육 사회운동가

무임소장관 이청천 - 광복군 총사령관

무임소장관 이윤영 - 북한에서 항일 기독교 목사로 일했고 조만식 선생의 제자

국회부의장 김동원 -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투옥되었던 독립운동가 출신

국회부의장 김약수 -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김일성 정권에 등용된 북한의 친일 인사들>
김일성 - 소련군 장교

김영주 - 북한 부주석, 북한내 당시 서열 2위, 김일성 동생 (일제 헌병 보조원)

장헌근 - 북한 임시 인민위원회 사법부장, 당시 서열 10위 (일제 중추원 참의)

강양욱 - 북한 인민위원회 상임위원장, 당시 서열 11위 ! (일제하 도의원)

이승엽 - 남조선 로동당 서열 2위 (친일단체 "대화숙" 가입, 일제 식량수탈기관인 "식량영단" 이사)

정국은 - 북한 문화선전성 부부상 (아사히 서울지국 기자, 친일밀정)

김정제 - 북한 보위성 부상 (일제하 양주군수)

일명 - 북한 문화선전성 부상 (친일단체 "대화숙" 출신, 학도병 지원유세 주도)

홍명희 - 북한 부수상 (일제 임전대책협의회 가입 활동)

이   활 - 북한 인민군 초대공군 사령관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허민국 - 북한 인민군 9사단장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강치우 - 북한 인민군 기술 부사단장 (일제 일본군 나고야 항공학교 정예 출신)

최승희 - (일제하 친일단체 예술인 총연맹 회원)

김달삼 - 조선로동당 4.3사건 주동자 (일제 소위)

박팔양 - 북한 노동신문 창간발기인, 노동신문 편집부장 (친일기관지 만선일보 편집부장, 문화부장)
한낙규 - 북한 김일성대 교수 (일제하 검찰총장)

정준택 - 북한 행정10국 산업국장 (일제하 광산지배인! 출신, 일본군 복무)
한희진 - 북한 임시인민위원회 교통국장 (일제 함흥철도 국장)

                                                     (............. 이상, 뉴데일리 2010.11.19 )

 

친일파 김일성(?)

 

이승만의 초대 내각이 지나치게 항일 독립운동가 위주의 내각이라면 김일성 정권은 지나칠 정도로 친일파 일색이었다. 그러나 일반에 알려진 바로는 (특히 자라나는 학생들에게 알려진 바로는) 사실과 정반대다. 만약 이승만이 친일파를 적기에 처단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친일파라 한다면 (위에서 보다시피) 아예 정권 차원에서 친일파를 대거 기용한 북한의 김일성은 친일파 정권 그 자체였다.

그동안 보수우파가 얼마나 무관심하고 무책임했으며 그동안 친북/종북 좌파나 민중사관주의자들이 얼마나 집요하게 우리나라 교육계를 침투했는지, 얼마나 경도된 시각으로 우리 어린 학생들을 세뇌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민중사관과 실증사관의 사관史觀 차이가 얼마나 극명한지도 알 수 있다. 어느 사관史觀이든 팩트(사실) 그 자체를 왜곡해서는 안 될 일이고 목적을 가지고 역사를 조작해서는 더욱 안 될 일이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고 거짓이 사실로 굳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심각하다. 역사 인식에 대한 보수사회의 무관심에 대한 자각과 진보사회의 진지한 반성이 필요한 부분이다.

 

사실 (해방 당시 사회분위기도 그러했지만) 이승만은 자신이 독립운동가였고 일제 치하에서 사실상 독립운동을 지휘하던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자신있게 독립운동가 출신을 과감하게 기용할 수 있었지만,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 출신으로 (공산주의 계열로 보면 박헌영 등 기라성 같은 선배가 미리 자리를 굳히고 있었다.) 독립운동을 하던 투사들에 비하여 서열상으로 밟힐 존재였다. <굴러 온 돌이 박힌 돌을 빼기> 위해서는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모조리 친일파를 등용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일제 헌병 보조원이었던 자신의 친동생을 부주석이라는 거창한 직책에 앉힌 것으로 볼 때 당시 김일성의 위기감을 엿볼 수 있다.  

 

공산주의자로는 김일성보다 훨씬 위에 박헌영이 있었다.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서 미제국주의자의 간첩으로 몰려 죽었다. 박헌영 하나 뿐인가. 북으로 올라갔던 남조선 로동단 대부분 김일성 일인독재를 위하여 숙청당했고 죽었다. 김일성의 일인독재 체제에 가장 걸림돌이 되는 것은 남쪽에 있는 이승만이 아니라 자기 조직 내부의 공산주의자였다. 김일성은 같은 사상으로 무장한 동지들을 대부분 죽여 없앴다.

 

아무리 김일성의 명령이지만 박헌영이라는 거물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었다. 차마 자신을 죽이지 못하고 산 속으로 질질 끌고 다니던 방학세에게 박헌영은 말했다. "어차피 나 오늘 죽을 거 아니까, 더 올라가지 말고 간단하게 처리하자." 그리고 마지막 말을 남겼다. "가족들을 외국으로 보내 주겠다는 약속을 지켜달라고 김일성 주석에게 전해달라." 그러나 김일성은 그의 아내와 큰 딸, 아들 세르게이를 외국으로 보내주지 않았다. 마지막 약속까지 어긴 것이다.

 

김일성은 친일파는 중용할 수 있어도 사상적으로 자기보다 윗 선인 정통 공산주의자들은 용인할 수 없었다. 김일성은 프랑스의 경우처럼 친일파를 대거 숙청한 사실이 없었다. 전혀 없었다. 경쟁 관계에 있는 공산주의자들에게 뒤집어 쒸울 올가미나 지주 등 걸리적거리는 계급을 숙청할 때 친일파라는 손 쉬운 단어를 차용했을 뿐이다.

 

조만식 선생은  이승만, 김구 만큼이나 북에서는 명망이 있는 민족지도자였다. 월남 이상재 선생과 함께 각종 항일운동을 전개하신 분인데 이런 분과 그 추종자들을 옥사시킬 때 김일성이 들이댄 죄명이 바로 "친일 반민족주의자"였다.

 

일제에 저항하던 사회주의자 현준혁, 남강 이승훈 선생이  "일본 놈을 앞지르라. 그래서 독립을 쟁취하라."고 가르쳤던 오산학교 출신의 민족주의자들, 도산 안창호 선생이 설립한 대성학교 출신의 민족주의자들, 남로당 이강국, 임화.... 모스크바 유학파 허가이 및 그 추종자, "당이 인민을 위해 한 것이 무엇인가?"고 대든 북한의 경공업상 윤공흠 일파, 중국 8로군 포병 사령관이었던 무정, .... 김일성은 자기보다 이론적으로 유식한 공산주의자나 민중으로부터 존경받는 민족주의자들을 모조리 처형하였는데, 이 때 이들에게 뒤집어 쒸운 죄목이 <친일파>라는 것이었다.

 

북한 로동당 선전부에게 당신들이 척결한 친일파 명단을 내놓이시오...라고 요구하면 아무 것도 내놓지 못 한다. 그냥 "몇명 처형했다"는 식인데, 그들이 척결했다는 사람들은 거의 대부분 진짜 친일파가 아니라, 사실은 좌파 항일 독립운동가였지만 김일성을 정치적으로 위협하는 비중있는 인물들이라 <친일파>로 때려잡은 것일 뿐이다. 친북/종북 좌파들이나 민중사관주의자들은 여기에 대해서도 침묵하거나 변명한다. 이 역시 지독하게 경도된 시각이고, 비겁하다. 

 

진짜 친일파들은 김일성이 대거 등용하여 (그들의 능력을 차용하여) 초기 북한을 꾸려 나갔다. 일제 때 행정을 경험한 친일파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북한은 존재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당시만 해도, 그리고 6.25가 끝난 이후에도 북한 경제는 남한의 그것보다 나았다.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부흥기인 70년대에 들어서기 전까지만 해도 북한은 남한보다 잘 살았다. 남한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회를 전반적으로 개혁할 때, 북한의 친일파 고위 관료들은 은퇴하기 시작했다. 지나친 억측이고 역사에서 금기시하는 가정이지만, 천만의 인민이 굶주리는 김일성 주체사상보다는 차라리 친일파 때의 북한이 더 잘 살았다는 것이 팩트(사실)에 가깝다. 물론 이렇게 해석하면 기분은 더럽고 나쁘지만. (뒤에 나오지만 남한에서는 오히려 만주군 장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 때 잔존해오던 친일파들이 대부분 제거되었다. 흔치 않은 역사의 아이러니다.)

 

미 군정軍政

 

항일 독립운동가 이승만이 졸지에 친일파라는 덤테기를 뒤집어 쓰게 된 원인으로 미 군정軍政이 있었다. 북한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다. 해방과 동시에 북에 진주한 소련군도, 남한에 진주한 미군도 관할 지역의 상황을 꿰뚫고 있는 일제 시절의 행정 조직을 이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남한의 경우 (3년에 걸친 미 군정이 끝나고) 정부 수립과 동시에 각료 등 고위직에 독립운동가들이 자리 잡았지만, 북한 김일성의 경우 친일행정 조직과 경험을 이용하기 위하여 각료 모두를 친일 경력자로 채워버렸다. 이것이 팩트(사실)다. 그러나 보수사회의 중심 인물들조차 민중사관주의자들의 논리에 동조하고 있다. 그동안 보수사회마저 얼마나 친북좌파들의 민중사관에 지배당해 왔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다.

 

새로운 정부가 출범했지만 미 군정에 자리 잡은 공무원들까지 모조리 한꺼번에 바꿀 재간이 없었다. 자칫하면 새로운 국정의 마비는 물론 전국적 행정조직 가동 자체가 의문시 되었다. 물론 많은 수의 독립군 출신 인사들도 공무원에 기용되었지만, 그들도 일제 시절의 행정 조직과 공무원들에게서 업무를 배울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나온 것이 이승만의 <선통일 후숙청>론論이었다. 통일부터 하고, 친일파 숙청은 잠시 뒤로 미루자는 것이다. 북한의 경우도 최고위직인 내각부터 어쩔 수 없었던 사안이지만, 결국 이 논리는 민중사관주의자들에게 친일파를 살려 준 대통령이라는 공격의 명분을 제공했다. 그러나 그들은 김일성의 친일파 기용에 대해서는 입을 꽉 다문다. 이것은 올바른 사관史觀이 아니다.

 

반공주의자 백범 김구.

 

백범 김구의 통일관은 어떠한가. 백범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자. - "나는 우리나라가 독재의 나라가 되기를 원치 아니한다. 독재의 나라에서는 정권에 참여하는 계급 하나를 제외하고는 다른 국민은 노예가 되고 마는 것이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중략)"

 

"시방 공산당이 주장하는 소련식 민주주의란 것은 이러한 독재정치 중에도 가장 철저한 것이어서 독재정치의 모든 특징을 극단으로 발휘하고 있다. 즉 헤겔에게서 받은 변증법, 포이에르바하의 유물론 이 두 가지와, 아담 스미드의 노동가치론을 가미한 마르크스의 학설을 최후의 것으로 믿어, 공산당과 소련의 법률과 군대와 경찰의 힘을 한데 모아서 마르크스의 학설에 일점일획(一点一劃)이라도 반대는 고사하고 비판만 하는 것도 엄금하여 이에 위반하는 자는 죽음의 숙청으로써 대하니, 이는 옛날에 조선의 사문난적에 대한 것 이상이다." (백범 어록) 

 

'반공 = 수구꼴통'으로 치부함는 친북/종북 좌파들의 시각으로는 백범을 영웅시하면 안 될 일이겠지만 이승만을 폄하하기 위한 수단으로 김구를 철저히 이용했다. 그들은 애써 김구가 철저한 반공주의자라는 사실을 감추고 있다. 진실은 은폐한다고 해서 은폐되는 것이 아니다. 

 

백범의 순수와 6.25 동란

 

백범은 이승만을 능가하는 반공주의자였다. 반공이 진보일까? 백범의 사상을 지금의 친북/종북 좌파적 시각으로보면 극우나 수구꼴통에 가깝다. 반공주의자는 무조건 깎아 내리는 민중사관주의자들은 마르크스식 독재를 혐오하는 백범을 사랑하거나 존경할 수 없다. 그러나 이승만을 폄훼하기 위하여 백범은 그들에게 가장 좋은 선전도구가 되었다.

 

그런 백범이 왜 <선통일 후건국>을 주장했는가. 민족주의자로써 백범은 민족이라는 관념에 관한 한 이상론자였다. 그의 높은 이상은 다음 글에서 확인할 수 있다. - "담판을 해보아서 안되면 차라리 38선을 베개삼아 베고 죽더라도 가는 것이 마땅하다” (자유신문) - 그러나 영혼이 맑은 그는 그 맑은 영혼처럼 지나치게 순수했다.

 

민중사관주의자들은 이승만 대통령이 1946년 6월 4일 전북 정읍에서 "통일정부가 여의치 않으면 남쪽만이라도 임시정부를 조직해야 한다"고 한 남한 단독정부론을 들어 마치 한국 분단이 그로부터 영구화 된 것처럼 역사를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조작에 버금가는 논리다. 왜냐하면 이승만의 이 발언이 나오기 4개월 전에 (1946년 2월) 김일성은 이미 북쪽 단독정부인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조직한 사실을 누락시키거나 애매하게 덮어버리고 있기 때문이다.

 

순진한 지도자는 파국을 부른다.

 

순진해서 속는 것은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나 지도자가 속으면 그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의 몫으로 돌아온다. 백범이 평양에서 열린 남북회담에 참석한 것은 그로부터 2년이나 지난 1948년 4월 19일이었다. 어쨌든 백범은 김규식과 함께 북한에 들어가 김일성과 회담하고 (1948년 4월 30일) '남북 정당사회 단체 지도자협의회의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서는  ‘소련이 제의한 바와 같이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즉시 철거’할 것을 요구했다. 사실 소련군의 철수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북한과 소련, 중국은 국경이 붙어 있기 때문에 언제라도 발길만 되돌리면 되기 때문. 반면 미군은 만약의 사태 발생 시 가까워도 바다 건너 일본에서 발진해야 하고, 본진은 태평양을 건너와야 했다. (6.25 전쟁 당시 김일성의 목표가 미군이 참전하기 전까지 '속전속결'이었음은 전술적으로 이런 이유가 있었다.)

 

김구는 철저한 반공, 반독재주의자였지만 민족주의적 순수함으로 김일성의 논리에 철저하게 말려 들어갔다. 김구가 서명한 성명서에는 '남북 정당사회 단체 지도자들은 우리 강토에서 외국군대가 철퇴한 후에 내전內戰이 발생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한다.'라고도 했다. 민족 지도자 백범이 새파란 애송이 김일성에게 '눈 뜨고 코 베인' 것이다. 

 

이어 남조선 로동당과 국회 프락치 사건의 주범들의 미군철수 주장이 노골화되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국회는 자주국방을 완료하기 전까지만이라도 미군이 주둔해야 한다고 결의했고,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트루먼 미국 대통령에게 전화하면서 미군 철수를 완강하게 반대했지만 미국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당시 미군철수를 주장하던 남로당도 한국 국민, (미군의 입장에서 볼 때) 욕까지 먹으며 주둔할 이유도 없었다. 그들에게 신생 대한민국은 골치만 아픈 존재였다. 주한미군은 1948년 9월 15일부터 철수를 시작하여 이듬해인 1949년 6월 29일 군사고문단 500명만 잔류시키고 철수를 완료했다.

 

같은 민족을 향한 저주, 더러운 남침

 

당시 미군이 한국군에게 남긴 무기는 일제 구구식 장총을 포함한 소총 10만정과 약간의 탄약, 그리고 차량 몇 대와 낡은 박격포 몇 문이 전부였다. 북한의 김일성은 당시 최첨단 무기인 소련제 탱크로 무장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점에 비하면 힘의 불균형 정도가 아니라 힘의 공백에 가까운 조치였다. 드디어 한반도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는 것.... 기다리던 김일성이 빠르게 결단했다. 그리고 6.25 전쟁이 터졌다.

 

뼈 아픈 역사다. 300만 명의 사상자와 1000만명의 이산가족이 생겼다. 한민족으로써는 치유하기 힘든 상처가 생겼다. 나는 인간 김구, 민족주의자 백범 김구를 존경한다. 하지만 지나치게 순진한 이상주의자가 정치 지도자가 되는 것까지는 동의하지는 않는다. 정치 지도자를 선택하는 행위에는 수천만 생령의 목숨까지 걸린 일이기 때문이다. 

 

6.25는 결정적으로 가난한 보수우파를 대량 생산했다. 동족상잔 전쟁은 가난한 보수우파가 굶어 죽어도 친북/종북을 앞세운 진보좌파가 될 수 없는 이유가 되었다. 비록 노령화와 사망으로 인하여 숫자가 줄었다고는 하나 가난한(연로한) 보수가 친북/종북주의자에게 표를 주지 않는 이유고, 우리나라 진보좌파가 친북/종북을 버려야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런 주장을 하면 일견 수구꼴통처럼 보일지 몰라도 이것이 진짜 팩트다. 그러나 진실은 21세기가 되어서야 밝혀졌다.

 

민중사관주의자들은 팩트(진실)를 집요하게 숨겼다. 한 때는 노골적으로 6.25 북침설을 주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논리는 (구)소련이 소련 비밀문서를 비밀해제하면서 박살났다. <소련 비밀 문서, 6·25에 대한 좌파 환상을 깨다.(중앙일보)>류의 기사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밀 해제된 소련의 비밀문서에 따르면, (1) 김일성은 항일투쟁을 하지 않았으며, 소련의 붉은 군대의 중위로 NKVD(KGB 전신)요원이었다는 것과 (2) '성공이 전면적으로 보장되는 조건에서 귀하의 남침 제의에 동의한다.'는 스탈린의 전문과 소련의 대북한 지원계획 등이 공개되었는데, 이렇게 팩트(진실)가 밝혀지자 민중사관주의자들의 논리는 절망적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구)소련이 해체되면서 비밀해제, 공개된 팩트 중 백미 .... '6.25전쟁은 스탈린의 지시로 발생된 것이 아니라, 김일성이 기획하여 남침 준비를 마치고 스탈린에게 전쟁을 허가해 달라는 전보를 48번이나 보낸 후에 스탈린의 허가를 받은 것. .... 이로써 민중사관주의자들의 억지 주장은 종결되었다. 그러나 아직도 역사를 잘 모르는 학생을 유혹하기 위한 민중사관주의자들의 발호.... 적어도 우리가 쉽게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는 현대사에 있어서라도 실증적 접근은 참으로 중요하다. 이런 과거 분석 위에서 미래는 준비되어야 한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 이승만을 제거하라.

 

당시 진짜 친미주의자는 장면(후일 충리)이었다. 이것은 당시 CIA의 기록에도 나온다. 그렇다면 이승만은? 이승만은 철저한 반일反日, 용미用美주의자였다. 어떤 학자는 이승만을 철저한 반미反美주의자라 말하기도 한다. 일본에 대한 이승만의 복수심 내지는 증오는 치열했다. 위에서 아래로 독도 바깥으로 이승만 라인을 긋고 그 선을 침범하는 일본 선박은 모조리 나포했다. 나포에 반항하는 일본인은 사살했다. 일본은 미국의 힘을 빌려 항의했지만 이승만은 눈썹도 까딱하지 않았다. 

 

6.25가 터지자 맥아더를 설득하여 미군을 참전 시킨 후, 침략자를 응징하고 영토를 수호하기 위하여 이승만은 미군을 철저하게 이용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한미연합군과 UN군의 힘을 확인 한 그는 북진통일을 주장하기 시작했다. 그는 이 기회에 통일을 이루지 못하면 영원히 통일의 기회는 오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 상황을 볼 때, 그의 예지력은 정확했고 그의 침략자 응징론은 국제법상 전쟁을 일으킨 전쟁범죄자(전범)의 처리의 예를 볼 때, 한시라도 빨리 휴전으로 전쟁을 끝내려는 미국의 논리보다 설득력이 있었다.

 

압록강까지 올라갔던 연합군이 중공군의 참전으로 다시 밀리자 미국은 막대한 전비戰費와 젊은 미국민의 희생을 막기 위하여 노골적으로 휴전을 시도했다. 이 휴전에 가장 반대한 사람이 이승만 대통령이었다. 심지어는 한국군 단독으로 북진을 시도하기도 했다. 일이 이렇게 돌아가자 미국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을 제거하기로 했다. ‘에버레디 오퍼레이션(Ever ready operation)’을 비롯한 작전들이 세워졌지만 이승만의 카리스마와 한국군 지휘관들의 충성심에 포기해야 했다. 거기에 더하여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흔히 <포로수용소> 하면 적국의 포로를 정식 전범재판을 거쳐 형이 확정될 때까지 수용하는 시설을 말한다. 그러나 인도주의적인 미군의 경우는 달랐다. 북한은 포로를 거의 만들지 않은 반면에 (거듭되는 후퇴로 수용시설 부족, 대부분 현장 사살) 미군과 UN군 그리고 미군의 지휘를 받은 한국군은 십만이 넘는 엄청난 포로를 확보하고 있었다. 

 

또한 북한군 포로는 크게 두 부류로 나뉘어져 있었다. 공산포로와 반공포로. 이 중 반공포로는 인민군의 징집에 의해서 억지로 전쟁에 끌려나온 자들로 공산주의 이념이 약했다. 사실 반공포로들은 북으로 송환되면 죽을 것이라는 공포에 시달렸고 자유를 찾아 남쪽에 남고 싶은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포로수용소에서는 공산포로에 의한 인민재판이 수시로 열렸다. 밤이면 수많은 반공포로들이 포로수용소 안에서 살해당했다. 포로수용소는 말이 포로수용소지, 사실은 그들만의 '해방구'였던 것이다.

 

그러나 미군은 이 포로들은 전혀 구분하지 않고 휴전협정의 미끼로 생각했다. 휴전협정이 조인되면 모두 북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수 많은 생목숨이 위기에 처한 셈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과의 격한 마찰을 (만약의 경우, 총격전까지) 각오하고 이들을 모조리 탈출시키는 형식을 빌어 석방시켜버렸다. 휴전을 앞둔 미군으로서는 졸도(?)할 일이었다. 이 사건으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라고 명령했다 .미군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북한군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으로 휴전협정이 또 다시 연기될 심각한 위기에 처한 것이다. 미국의 입장에서야 당연히 반공포로의 생명보다 그들의 이익이 우선이었다. 

 

 

다음은 백선엽 장군의 증언 - 1953년 7월 18일 새벽 2시가 좀 지나서였다. 대구 육군참모총장 관사에서 잠든 내 방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전국에 분산된 포로수용소를 관장하는 KCOMZ(미군 병참관구사령부) 사령관 헤렌 소장이었다.
“총장님, 각 지방 포로수용소 경비병들이 직무를 이탈해 포로들이 다 도망쳤습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그는 다급한 목소리로 빨리 도망친 포로들을 재수용하도록 도와 달라고 요청했다. 올 것이 왔다고 직감했다. 그의 전화가 끝나기 무섭게 또 전화벨이 울렸다. 테일러 미8군사령관이었다. 전화를 건 이유는 똑같았다. 그 많은 포로가 일제히 도망쳤으니 이게 무슨 사태냐고 묻는 전화였다. 도쿄에서 보고를 받은 클라크 유엔군사령관도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그는 어찌 된 일이냐고 물었다. 전화를 끊었다가 또 걸어왔다.

 

“도대체 누구 지시로 일어난 일이냐?”고 거듭 다그쳤다. KMAG 단장 로저스 소장 전화도 왔다. 나는 더 이상 얼버무릴 수가 없어 경무대로 전화를 걸었다. 한밤중에 대통령을 깨우는 것이 도리가 아닌 줄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전화를 받은 비서관은 안 된다고 했다. 나는 “국가비상사태이니 지금 당장 보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잠시 기다리라는 응답이 있고 나서 한참 만에 대통령이 전화를 받았다.
“각하, 지금 클라크 장군과 테일러 장군한테서 불티나게 전화가 걸려오고 난리가 났습니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요?”

“응, 그래? 그러면 내가 했다고 하게.” 의외로 차분한 대통령의 대답에 나는 깜짝 놀랐다.

내가 머뭇거리자 대통령은 “내일 내가 프레스 릴리스(press release)를 한다고 하면 돼!” 하고 전화를 끊었다.나는 곧 도쿄 클라크 장군에게 전화를 걸어 “내일 아침 대통령의 발표가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테일러 장군과 로저스·헤렌 장군에게도 전화를 걸어 같은 말을 해주었다.

반공포로 석방은 1953년 7월 18일 새벽 2시를 기해 거제도·논산·영천·광주 등지의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던 반공포로 2만8000여 명이 일제히 탈출한 사건이다. 경비업무를 맡았던 우리 헌병들이 일제히 임무수행을 중단한 사이 헌병총사령부 요원들이 조명등을 다 끄고 철조망을 끊어 포로들의 탈출을 유도한 것이다. 포로수용소 관리는 KCOMZ 관할업무지만 경비는 한국군이 서고 있었다. 헌병총사령부 예하 헌병대가 경비병들에게 미리 임무를 포기하도록 사전에 조치하고, 행정관서와 경찰까지 포로들의 탈출을 도와 역사적인 반공포로 석방이 이뤄졌다.

미군에서는 달아난 포로들을 붙잡아 다시 수용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정부 방침에 따라 각 도와 시장·군수들이 그들에게 갈아입을 민간복장을 제공하고, 민가에서도 그들을 숨겨 줘 재수용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날이 밝자 클라크 장군이 도쿄에서 날아와 이승만 대통령에게 불만을 털어놓았다.


“중요한 일은 본관과 협의해서 결정하겠다고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왜 이번 일을 저에게 알려주시지 않았습니까?”

“클라크 장군, 이번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내가 만일 미리 알려주었다면 장군의 입장이 어떻게 되었겠소?”

지금 와서 생각해 봐도 그때 이 대통령의 대답은 명답이었다. <백선엽 예비역 육군대장·정리=문창재 언론인 / 국방일보>

 

철저하게 대한민국의 편에서 국익을 위하여 미국의 힘을 이용했던 용미주의자, 미국 대통령이 CIA를 동원하여 제거하고자 했던 이승만 대통령을 친북 민중사관주의자들은 친미주의자라 한다. 이것은 고양이를 가리켜 강아지라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진보냐, 보수냐....

 

이승만의 여러 선택은 건국의 아버지라 불러도 좋을 만큼 현명하고 미래지향적이었다. 게다가 이승만은 (개인적으로는) 청렴했다. 이승만의 사후 프란체스카 여사는 끼니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가난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 자본주의를 선택한 그는 옳았다. 그러나 사사오입 개헌과 부정선거는 그의 공로를 상쇄시키고 말았다. - 이것이 좌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을 가장 정확한 건국의 아버지에 대한 평가다.

 

경제 정책상 그리고 국익에 관한 한, 누가 보아도 극좌적인(급진적인) 진보 정책의 주인공인 이승만은 현재 수구보수주의자로 낙인 찍혀 있다. 참으로 무서운 민중사관주의자들의 공작이다. 픽션(허구)으로 꾸민 이야기를 가지고 역사라 우길 수는 없다. 이런 진보라면 정권창출을 이야기 할 수 없다. 누가 사기꾼에게 정권을 주겠는가. 역사는 반드시 팩트에 기반해야 한다. 독재자라서 보수라고? 그럼 김일성 부자손父子孫은? 독재자와 보수주의자는 같은 뜻이 될 수 없다. 세계적으로 진보적 독재, 사회주의적 독재, 공산주의 독재가 훨씬 더 많았다. 오히려 3대를 이어 세습 독재를 꿈꾸는 북한을 머리 위에 두고도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이승만은 과학적, 경제학적, 미래지향적인 진보주의자였다. 이 점이 친북이나 종북좌파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여겨질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승만의 독재만을 부각시킨다. 누구도 이승만의 독재를 최선이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필자 역시 마찬가지다. 이승만의 독재는 이승만의 모든 것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여기에서 기억해야 할 것은 한국의 보수는 태동부터 <진보적 보수>였다는 점이다. 여기서 <진보적>이라는 개념은 농지개혁 등으로 극좌에 가까운 평등을 추구했다는 점에서 이미 설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보수>는 ‘책임’, ‘절제’, ‘희생’에 기반한 안정적 국가운영을 뜻한다. 즉, 국가의 안보와 안정을 추구하면서 진보적 정책으로 평등까지 동시에 추구했다는 것이다. 이보다 더 나은 방향이 있는가.

 

지금 만약 <보수적 진보>를 이야기 하면 진보좌파는 이게 무슨 소리인지 어리둥절 할 것이고, <진보적 보수>를 말하면 보수우파 사회에서는 배신자처럼 여길 것이다. 이렇게 갑갑한 마인드로는 보수든 진보든 미래가 없다. 그러나 보수사회에서 건국의 아버지라는 이승만은 이들처럼 꽉 막힌 보수주의자가 아니었다. 우리나라 보수는 첫 출발부터 <진보적 보수>였던 것은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

 

 

2011.05.21

 

대한민국 박사모

회장 정광용

 

 

<본 칼럼은 계속해서 연재됩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공유하기
  • 신고하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유연희 | 작성시간 14.07.03 수고 대단하십니다..
  • 작성자유연희 | 작성시간 14.07.03 수고 대단하십니다..
  • 작성자유연희 | 작성시간 14.07.03 수고 대단하십니다..
  • 작성자正道 | 작성시간 15.06.02 춛성!
  • 작성자슈퍼탱크 | 작성시간 15.10.17 존경합니다회장님 그리고요 항상 감 ~ 사 합니다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