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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특파원의 눈에 비친 박정희 대통령

작성자숫골사랑|작성시간13.02.15|조회수98 목록 댓글 0

편집자 주 : 돈 오버도퍼(Don Oberdorfer) 기자는 워싱턴포스트에서 25년간 일했다. 그는 아시아 특파원 시절 한국 현대사의 주요 고비를 취재한 자료를 토대로 <두 개의 코리아>(The Two Koreas)를 저술했다. 이 책은 미 외교정책의 관점에서 남북한의 태동과 그 이후의 한반도 상황을 분석한 점에서 매우 특이하고 예리하다. 다음은 그의 저서 중 박 대통령 관련 부분을 발췌, 요약한 것이다.
2009-04-08 Don Oberdorfer(언론인)ㆍ조홍래(언론인)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획기적 지도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은 많은 면에서 북한의 김일성과는 대조를 이룬 인물이었다. 김일성이 항일 게릴라 전사였던데 비해 박정희는 일본 육사를 다녔고 강요에 의해서였지만 잠시 다카끼 마사오란 일본 이름을 사용한 점에서도 두 사람의 차이는 극명했다. 김일성이 ‘거물’의 이미지와 개인적 권위로 북한을 지배한 데 비해 박정희는 체구가 작고 강건한 성격에 자제력이 강했고 소탈했다.
1975년 6월 기자와 단독 인터뷰를 할 때 강력한 정치 지도자라는 명성과는 달리 그는 과묵하고 수줍었다. 알려진 것보다는 매우 작은 인물로 보였다. 청와대 집무실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조그만 치와와 애견을 무릎에 안고 얘기를 했다. 그는 기자의 눈을 거의 바라보지 않았다.
 
1961년 군사 쿠데타에서 1979년 암살에 이르기까지 18년의 통치 기간을 통해 그는 한국 현대사에 어떤 지도자보다 거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는 1917년 9월 30일 대구 부근의 마을에서 소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20세에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만주군에 지원하기까지 3년간 초등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만주 군관학교에서의 성적이 우수해 일본 육사에 입학하고 졸업 후에는 만주군 중위로 임관되었다. 교사시절에 체득한 일사불란한 정신수양과 군사훈련을 통해 얻은 조직 관리 및 권력 행사 능력은 그의 일생을 지배했다.
 
사범학교와 군사교육 통해 강인한 정신력 함양
 
1945년 일본이 항복하고 조국이 분단되었을 때 그는 새로 개교한 육사에 입학했다. 1948년 여수 반란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그는 체포되었다. 이 사건은 그의 인생에서 가장 논란이 많은 에피소드가 되었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언도받은 그는 몇몇 한국군 장교와 그를 ‘최고의 군인’으로 알고 있던 미군 고문관 제임스 하우스만의 권유에 따라 이승만에 의해 감형되었다. 육군 소장이던 1961년 그가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워싱턴은 그의 공산주의 연루 전력 때문에 매우 당혹했다. 하우스만은 즉각 워싱턴으로 날아가 박정희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므로 그의 전력(前歷)에 대해 염려할 일이 전혀 없다고 고위 관리들에게 설명했다. 주한 미 대사관도 국무부에 전문을 보내 박정희가 비밀 공산당원일 가능성을 일축했다. 주된 이유는 공산주의자들이 권력을 장악했을 때 박을 희생물 1호로 사용하기 위해 그를 공산주의자로 위장했기 때문이라는 판단에서였다.
 
5.16은 미국의 케네디 행정부와 많은 마찰을 빚었다. 전전의 일본 교육, 유교적 사상 그리고 군인으로서의 배경을 감안해보면 5.16 이전 박 대통령의 인생에서 민주주의는 불편하고 비생산적인 미국식 제도로 인식되었다. 케네디 행정부는 민정 회복을 박 대통령에게 설득했다. 1963년과 1967년 박 대통령은 그렇게 했다. 그러나 1971년 박 대통령의 3선출마를 허용하는 헌법개정을 단행하고 1972년에는 대통령 직선제를 폐지하는 개헌을 했다. 야당 지도자 김대중이 극렬히 반발했다.
 
오늘날 박정희는 워싱턴과 갈등을 빚고 일련의 정치적 탄압을 자행한 지도자로서보다는 괄목한 경제발전을 이룩한 ‘성장의 아버지’로서 더 많이 기억된다. 1995년 3월 서울의 한 일간신문이 실시한 여론조사에 의하면 한국인의 3분의 2 이상은 박 대통령을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꼽았다. 그 어떤 대통령보다도 5배나 높은 지지였다. 가장 압도적인 이유는 눈부신 경제발전과 국가의 안정이었다.
 
개인적 부를 축적하지 않은, 부패하지 않은 지도자
 
박 대통령 치하에서 한국의 경제 성장은 밑바닥에서 시작되었다. 집권 10년 후 5.16을 회상하며 박 대통령은 이런 글을 썼다.
“마치 도둑이 든 가정 혹은 부도난 회사 경영을 맡은 느낌이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고질적 가난의 악순환과 경제침체를 영원히 끝내야 했다. 경제구조의 개혁만이 삶의 기준을 높이는 길이었다.”
박 대통령에게 있어 급속한 경제성장은 번영의 원천으로서 그리고 다른 두 가지 목적을 위해 필수적이었다. 보다 고차원의 이 목표는 첫째 국가안보를 튼튼히 하고 쿠데타로 탄생한 권력에 합법성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특히 국가안보는 북한의 위협으로부터 한국을 지키려는 미국의 의지가 쇠퇴하는 시기여서 더욱 절실했다.
 
그는 집권 한 달 후 경제기획위원회를 설치했고 이는 뒤에 경제기획원이 되었다. 이 기구는 국가경제를 총 지휘하는 사령탑이었다. 곧 이어 작성된 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통해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경제 시스템은 계도적 자본주의(guided capitalism) 형태가 될 것이다. 이 시스템에서 자유기업의 원칙과 이니셔티브는 존중될 것이다. 정부는 기초 산업과 여타 주요 분야에서 직접, 간접의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것이다.”
 
박 대통령이 제시한 경제 모델은 전후 일본의 경제 모델을 따른 것이다. 1965년 박 대통령은 개인적으로 인기를 얻지 못했으나 한국경제에는 강력한 활력을 준 대일수교를 단행했다. 식민시대의 반일감정에 근거한 국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울과 도쿄 관계 정상화―워싱턴도 이를 강력히 지지했다―는 8억 달러의 지원금을 일본으로부터 도입하게 했고 그밖에도 수백만 달러에 이르는 일본의 대한 투자를 유발했다. 1960년 중반 박은 또 다른 획기적 조치로 한국군 2개 사단을 월남에 파병, 미군과 어께를 나란히 하여 싸우게 했다. 이로 인해 박은 미국으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들었고 한국회사들은 월남에서 전쟁물자 생산 및 계약에서 큰 몫을 차지할 수 있었다. 1966년 월남 파병으로 벌어들인 수입은 당시 한국 외화수입의 40%를 차지했다. 그래서 월남은 한국의 최대 수익원이 되었다.
 
박은 경제를 직접 챙겼다. 전문 이코노미스트들을 많이 모았는데 이중 다수는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는 청와대 집무실 바로 옆에 경제상황실을 설치하고 경제개발계획을 체크했으며 수시로 경제관료와 기업인들을 만났다. 박은 그러나 경제 전문가들에게 끌려다니는 것을 거부했다. 미국과 세계은행 전문가들이 “한국은 종합제철공장을 건설하여 운영할 수 없다”며 재정차관을 거부해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철강은 국력”이라고 천명하면서 일본에서 차관을 들여와 포항제철 건설을 밀어붙였다. 포항제철은 현재 세계 최대의 제철회사가 되었고 한국 중공업의 초석이 되었다. 서울-부산 고속도로 역시 비현실적이라는 전문가들의 비판을 무시하고 앞장서서 추진했다. 비서실장이었던 김정렴 씨의 회고에 의하면 “박 대통령은 정부와 민간 할 것 없이 모든 경제 프로젝트들을 모니터하고 당근과 채찍으로 기업인들을 독려했다”라고 했다. 실적이 좋은 기업에는 대규모 정부 공사를 맡기고 나쁜 기업에는 대출을 거부했다. 경제성장은 이른바 ‘재벌’이라는 이름의 기업집단이 주도했다. 이는 전전(戰前) 일본의 ‘자이바쓰’ 혹은 전후의 ‘자이카이’를 모델로 한 것이다. 이런 방식은 1970년대에 경제를 크게 발전시켰으나 정부와 기업의 밀착관계는 후일 후임 대통령들에게 부패의 소지를 만들기도 했다.
 
박은 막강한 경제적 권한을 행사했으나 스스로 부자가 되지는 않았으며 개인적으로 부패하지 않았다. 점심은 국수를 좋아했고 쌀을 절약하기 위해 보리를 섞은 밥을 먹었다. 물을 절약하기 위해 청와대 변기에 벽돌을 넣었다. 여름에는 넥타이를 매지 않은 셔츠를 즐겨 입고 공무원들에게도 그렇게 하도록 권유했다.
 
경제에 대한 집념은 중화학 추진에서 단적으로 나타났다. 중화학은 철강, 조선, 화학, 전자, 비철금속, 기계 등 6개 분야를 집중 육성하기 위한 프로젝트였다. 1971년에 구상하여 1973년에 발표된 중화학 계획은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강화하고 북한의 군비증강에 대비하기 위한 게 동기가 되었다. 당시 소련과 중국의존에서 상당 수준 벗어난 북한은 군비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월남에서 철수한 미국이 아시아 여타지역에 대한 개입을 축소하는 움직임도 영향을 주었다.
 
중화학은 일부 반대도 있었으나 1961년부터 1979년까지 박 대통령이 이룩한 업적은 눈이 부실 정도였다. 세계은행에 의하면 인플레를 감안한 한국의 GNP는 박 대통령 집권 이후 매 10년마다 3배씩 증가하여 30년 만에 100년의 성장을 이룩했다. 가난도 크게 줄었다. 1965년 절대빈곤 선 이하에서 살던 가구는 40%였던 것이 1980년 10%로 낮아졌다. 1인당 소득은 집권 당시의 1백 달러에서 그의 사망 당시 1천 달러로 늘었고, 2000년 초에는 1만 달러로 껑충 뛰었다. 그의 치적은 조그만 경이로 간주된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이 그를 전대미문의 위대한 지도자로 기억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유신을 둘러싼 워싱턴과 서울의 갈등
 
1972년 10월 16일 오후 6시, 김종필 총리는 필립 하비브 주한 미 대사에게 한국 정치 체제에 중대한 변화가 있을 것임을 통고하고 공식발표가 있을 25시간 후까지 극비에 부쳐줄 것을 요청했다. 하비브에게 전달된 유신 발표문은 계엄령을 선포하고 헌법을 정지시키며 국회를 해산하고 대통령을 간선제로 선출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야당의 반대를 침묵시키기 위해 원로 정치인 다수를 체포했다. 그의 대변인은 ‘개혁의 재점화’(revitalizing reforms) 로 불리는 유신의 목적이 북한의 위협증대에 따른 대북 안보태세 강화와 급변하는 국제환경에서 국가를 보위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강대국 간 긴장완화 때문에 제3국 혹은 약소국들의 이익이 희생될 수 있다”는 점도 유신의 배경으로 강조되었다.
 
외부의 위협 때문이라는 한국정부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하비브 대사는 유신의 진정한 배경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비브는 유신 발표 몇 시간 후 워싱턴에 전문을 보냈다. “박 대통령이 최소한 12년 더 집권하고 야당과 반체제 인사들의 비판을 최소화하며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라는 내용이었다. 워싱턴은 지금까지 한국에 행사해온 영향력에 비추어 유신조치에 대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를 놓고 고심했다. 베테랑 외교관인 하비브는 유신에 대해 사전 정보를 입수하지 못한 것을 두고 내심 낭패감을 금할 수 없었다. 유신의 타이밍도 계산된 것처럼 보였다. 당시 닉슨-키신저 백악관은 월남전에 몰두하느라 한국문제에 신경을 겨를이 없었다고 아시아 문제 전문가인 마셜 그린 국무차관보는 분석했다. 하비브는 그러나 “미국이 유신 이전 상태로 되돌리는 조치를 취하는 건 적절치 못하며 한국의 내정에 미국은 어떤 형태로든 간여하지 않는 게 좋다”는 건의를 국무성에 보냈다. 워싱턴은 하비브의 건의를 수용, 박 대통령의 조치에 반대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워싱턴은 그러나 유신과 같은 극적인 조치를 미국과 사전 상의 없이 취하는 것은 지금까지의 양국 관계를 고려할 때 매우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박 대통령에게 통고하라는 지시를 하비브에게 내렸다. 그러면서도 박 대통령의 결정을 변경하는 어떤 조치도 지시하지 않았다. 하비브는 최종적으로 유신을 취소시키는 것도 “비현실적”이고, 그렇다고 묵시적으로 지지하는 것도 적절치 않으므로 미국은 이 조치에 대해 “사전 협의를 받은 바도 없고 간여한 바도 없는 한국의 내정문제로서 미국과는 ‘무관하다’는 선에서 이 문제를 마무리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국무부에 보고했다. 유신에 대해 북한은 남한도 자신들과 비슷한 체제로 가는 것으로 판단하고 이것이 남북협상을 위해서는 오히려 유리한 조건을 형성한 것으로 판단한 듯했다. 이 때문인지 그해 10월 21일 이후락 정보부장이 평양을 방문, 김일성을 만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남북대화를 가속화시킨 유신
 
초기의 남북대화가 속도를 내다가 뒤에 시들해진 배경을 두고 해석이 분분하다. 그러나 역사적 관점에서 볼 때 남북 지도자들은 대결보다는 대화를 하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하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결과적으로 유신 이후 활성화된 남북대화는 박 정권에 국제적인 관점에서 이익을 주었다. 앞서 주한대사를 역임한 윌리엄 포터가 그토록 오랫동안 추진한 남북대화가 유신 덕분에 동력을 얻었기 때문이다. 또한 국내적으로도 남북대화는 이산가족들에게 재회의 희망을 주고 통일의 열망을 점화함으로써 박 대통령의 인기는 올라갔다. 북한의 김일성도 남북대화를 통해 고립에서 벗어나는 외교적 실리를 얻었다. 1970년 말 당시 북한은 35개국과 수교했고 그것도 대부분 사회주의 국가였다. 이때 한국의 수교국은 81개국이었다. 남북대화 개시 직후 평양은 5개 서유럽국가와 다수의 중립국으로부터 외교적 승인을 얻었다. 남북대화 4년 후 북한의 수교국은 93개국으로 급증하여 한국의 수교국 96개국과 거의 대등해졌다. 북한은 또한 세계보건기구(WHO)에 처음으로 가입하고 유엔과 제네바에도 최초의 상주대사를 파견하게 되었다.
 
유신 덕분에 북한은 처음으로 미국과 접촉하는 길도 열렸다. 처음에는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 기자를 평양에 초청하여 인터뷰를 했다. 이어 1973년 4월에는 북한의 의회 격인 최고인민회의가 미 의회에 서한을 보내 한반도 문제에 대한 협의 의사를 밝히면서 월남에서 미군을 철수했듯이 주한미군도 철수하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미 의회는 이에 응답하지 않았으나 이 서한은 북한과 워싱턴의 직간접 대화의 장을 마련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박정희와 김일성은 남북대화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통일로 이어지리라고 믿지는 않았다. 이유는 서로의 체제를 양보할 의사가 애당초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1970년대 초의 남북대화가 한반도의 냉전에 전환점을 가져온 건 부인할 수 없다. 남북 협력과 그리고 궁극적으로 평화적 통일의 가능성도 처음으로 열었다. 남북 국민들 간에 무한한 희망도 안겨주었다. 앞으로 많은 시련이 따르겠지만 이 열망은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사이공 함락의 파장
 
박 대통령은 월남의 패망에 깊은 충격을 받았다. 분단된 베트남의 절반이었던 월남이 공산화되는 현실은 역시 분단된 한반도의 상황과 무관할 수 없었다. 당시 한국은 미국의 간청으로 2개 사단 병력을 월남에 파병했으며 이 병력은 1973년까지 그곳에 주둔했다. 그때 미군은 거의 철수를 완료한 상태였다. 한국군의 파병은 장병들의 급료와 전쟁물자 조달 참가 등 한국외화 수입의 40%를 차지할 정도로 경제적 혜택을 주긴 했으나 박 대통령은 미군이 한국전에서 한국을 수호한 데 대한 보은으로서 파병을 간주했다. 그런 인식을 가진 박 대통령에게 미군의 월남철수는 ‘한국이 계속해서 미국에 의존해도 될까’ 하는 의문을 제기했다. 월남이 패망하자 리처드 스나이더 주한 미 대사는 워싱턴 당국에 미국에 대한 한국의 신뢰 감소와 그리고 미국과 한국의 방어태세를 시험하기 위한 북한의 도발 위험을 긴급히 검토할 것을 요청했다. 한국전을 깊이 연구한 바 있는 스나이더는 국무부에 보낸 비밀 전문에서 여러 위기를 거치면서 한국전이 재발하지 않고 잘 버텨왔으나 이번에는 재발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각종 신뢰구축조치를 그는 건의했다. 그 가운데는 한국에 대한 무기 및 경제원조의 증대, 북한의 공격에 대비한 미 해공군 특수부대의 한국배치 등이 포함되었다.
 
스나이더의 건의와 한국의 우려를 고려해 1975년 8월 방한한 제임스 슐레징거 미 국방장관은 박 대통령에게 5년 내에 주한미군의 현상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을 것임을 약속했다. 그러나 미 국가안보회의는 뒤에 슐레징거의 다짐이 행정부의 정책 수준을 넘어선 것으로 판단, 그의 의견을 거부했다. 사실 슐레징거의 다짐은 불과 1년 후에 있을 미 대통령 선거에서 주한미군의 전면철수를 선거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는 지미 카터의 등장을 고려하지 않은 측면이 있었다. 포드 행정부가 선거와 민주당의 반대를 의식해 스나이더의 건의를 묵살하자 미국에 대한 박 대통령의 의심은 깊어갔다. 1975년 중반 박 대통령은 국가를 전시태세로 전환하는 3개 법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핵심은 안보를 강화하기 위한 긴급조치 9호였다. 이 법은 정부에 대한 모든 비판을 금지하고 17세에서 50세까지의 모든 남성을 예비군에 편성하는 한편 방위세를 신설했다.
 
한국정부는 1976년에 국방예산을 배가했으나 그 후 3년간 국방비는 계속 증액되었다. 1979년에는 다시 두 배 증액되어 1975년의 4배로 늘었다. 한국은 GDP의 적은 부분을 국방비로 책정했으나 절대 액수에서는 1970년대 중반부터 북한의 국방비를 능가하기 시작했다. 국제전략문제연구소(IISS)에 의하면 남북의 방위비가 동시에 증액되고 있었으나 70년대 말 한국의 국방비는 북한보다 두 배 많았다.
 
사이공 함락 이후 박 대통령은 중화학에 최우선적 비중을 두었다. 이 계획은 당초 군사력 강화를 위해 시작된 것이다. 1975년부터 1980년 사이 모든 제조업 투자의 75%는 중화학을 위한 것이었다. 이 자원을 가지고 박 대통령은 1개 기계화사단과 기동력을 요하는 전투에 대비한 5개 특수여단을 창설했다. 해군전력도 두 배 늘리고 미국에서 함정과 미사일을 구매하는 한편 미국의 최신예 전투기와 미사일로 공군을 현대화했다.
 
북한은 한국의 국방력 증강을 도저히 따라 잡을 수 없었다. 군사 기술상의 우위도 무너졌다. 한편 북한은 점점 많은 병력을 DMZ와 서울 근접지역으로 이동했다. 갈수록 팽창하는 한국 수도 서울은 북한의 포대와 로켓으로부터 불과 30마일 안에 들어왔다. 이 때문에 한반도의 긴장은 점점 고조되었다. 미군사령부의 정보에 의하면 1974년까지 북한군은 40만 8천 명으로 증강되어 세계 공산국가 중 4위가 되었다. 23개 보병 사단 중 4개 사단은 DMZ에 근접 배치됐다. 중국과 소련으로부터 최신예 전투기들을 도입, 공군도 급속도로 현대화했다.
1973년 중반 미국은 2차 대전과 베트남 전 경험이 있는 가장 노련한 전략가 제임스 홀링스워스 중장을 한국에 파견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요청으로 전방 초소를 시찰했다. “장군, 여기서 베트남의 패배를 되풀이할 생각이오?” 박 대통령이 그렇게 묻자 “각하의 나라를 위해 죽기로 작정하고 싸울 것이오. 바로 그 때문에 여기 왔소” 라고 장군은 대답했다. ◎

출처 :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보 제1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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