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도주 역사

작성자강 산|작성시간14.11.21|조회수84 목록 댓글 0

<포도주 역사>

 

알렉위라는 이가 쓴 『포도주』에 보면 맛좋기로 소문난 포도주의 산지는 토지가 빈약하고 지력이 메마른 데 예외가 없다

     했다.  이를테면, 명포도주의 산지인 지론드 지방의 토질은 회색인데다가 돌무더기의 건조한 땅이요.  가장 유명하다는 클라레트

     의 포도산지는 가장 생활력이 강하다는 잡초마져도 자라지 못하는 각박한 땅이라 한다.

          이스라엘의 땅도 주어 있는 박토다.  박토이기에 적어도 이스라엘의 포도는 25m 깊이까지 파고들어야 지하수에 도달할 수 있

     다.  그렇게 파고드는 데 10년이 걸린다 하니 이스라엘에서 포도 한 송이를 열리게 한다는 것은 피나는 고행이 아닐 수 없다.  이

     고행 끝에 찾아내는 25m 지하수는 적어도 100년 이상 암반을 통해 침투해든 특수한 성분의 물이다.

          이 물 아닌 물로 기른 포도의 술은 당분이나 알콜성분이 약하고 수분이 많은데다가 빨리 시어버린다 한다.  구약, 신약성서에

     포도와 포도주에 관한 기록만도 500군데나 나온다.

          우리나라에도 포도주의 역사는 짧지 않다.  고려 충렬왕 때 원나라 임금이 포도주를 보내왔다는 기록이 있고 『근재집(謹齊

     集)』에 보면 한 은자가 빚어 보낸 포도주를 받고, 읊은 시가 실려 있다.

          미사 때 쓰는 성체로써의 포도주는 한말 프랑스 선교사들이 밀입국할 때 갖고 들어온 것이 처음이다.  밀입국하여 잡힌 몸이

     된 리델주교의 『조선유수기(朝鮮幽囚記)』에 체포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포졸들이 내가 가진 시계와 포도주를 욕심

     내기에 이를 주고 좋아라 하는 사이에 천주의 존상과 성기(聖器)를 치울 수가 있었다."  그리고 그후에도 포졸들이 숨겨놓은 미사

     용 포도주를 수색해 옥중까지 갖고 왔길래 포졸들과 취하도록 나누어 마셨다고 적고 있다.

 

     ※   옮겨온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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